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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25:1-3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 칼빈
본 시편에는 묵상과 기도가 섞여 있습니다.
다윗은 자기 원수들의 잔인성 때문에 무례한 대우와 심각한 고통을 받고 있었기에 하나님으로부터 도움을 받기 위해 먼저 하나님이 이것을 자신의 죄악으로 인해 채찍질하고 처벌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점을 시인합니다.
이에 따라서 먼저 다윗은 자신이 당장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확신을 누리며 구원을 얻도록 그 죄악을 용서해 줄 것을 기도합니다.
다음으로 다윗은 성령의 도움을 간청합니다. 이는 그 도움에 의지해서 무수한 시험 가운데서라도 계속 하나님을 두려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으로 여러 곳에서 다윗은 묵상으로서 이 묵상을 통해서 자신을 격려하여 하나님께 대한 확신을 더욱 증가시키며 자신의 생각을 세상의 유혹으로부터 철수시킵니다.
1. 본문 1절은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 보나이다" 입니다.
시편기자는 맨 처음에 자신이 악한 자들처럼 이리저리 밀려다니지 않고 모든 욕망과 기도를 하나님께만 지향하고 있다는 점을 선언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참되고 진지한 기도에 있어서 이방인들처럼 세상으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얻으려고 방황하며 그와 동시에 하나님을 버리는 것, 직접 하나님의 수호와 보호에 호소하지 않는 것처럼 모순된 것도 없습니다.
다윗이 여기서 선언한 것은 그가 전적으로 하나님께 헌신하되 마치 자신을 제물로 바친 것이나 다름없이 전적으로 헌신했다고 상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본문 맥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보다 다윗은 자신의 구하는 바를 얻을 것이라는 소망을 강화하는 뜻에서 기도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을 선언합니다. 곧 다윗이 자신의 소망을 하나님께 고정시켰으며 세상의 유혹에 사로잡히지 않고 아무런 장애 없이 그의 영혼을 진심으로 온전히 하나님께 들어올려 하나님을 우러러 봤다는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바로 기도하려면 우리는 이 원칙을 따라 여러 가지 불확실한 소망 때문에 우리 마음을 산란하게 하거나 세상적인 도움에 의존하지 말고 진지하고 성실한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만 향하도록 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 나오는 동사는 원래 '내가 우러러 볼 것이다'이지만 우리는 이것을 과거 시제로 바꾸는 주석가를 따라 '내가 우러러 보았다' 라고도 하겠습니다.
하지만 미래 시제를 통해서 다윗은 계속적인 행동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시편 25 편
2. 본문 2절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로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로 나를 이기어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입니다.
이 구절을 통해서 우리가 배우게 되는 것은 다윗이 인간들을 상대로 싸우지 않으면 안되었지만 다윗은 그의 원수들이 마치 하나님의 채찍과 같다는 점을 확신하고 있었기 에 그들이 너무 오만불손하고 계속 모든 한계를 벗어나는 일이 없도록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으로 그들을 제지해 주실 것을 간청하고 있는데 이것이 당연하다는 점입니다.
'의지' 라는 단어를 통해서 다윗은 방금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들어올리는 문제에 대해서 말한 것을 확증하고 있습니다.
이 용어는 신실한 자들의 영혼이 들어올려지는 방법을 묘사하는데 사용되고 있거나 믿음과 소망이 그러한 결과, 곧 영혼을 들어올리는 결과에 대한 원인으로 덧붙여지는 방법을 묘사하는데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마음의 모든 욕망이 하나님을 향하는데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마음의 모든 욕망이 하나님을 향하게 된 것은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면서 거기서 확실한 구원을 소망했기 때문입니다.
"나로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라고 요구할 때 다윗은 성경의 일상적인 가르침, 곧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들은 결코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가르침에서 배우게 되는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자신을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간청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윗이 원수들의 조롱에 내맡겨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인데 이 원수들은 그 교만으로 경건한 자들의 감정을 상하게 한다기보다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3. 본문 3절은 "주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무고히 속이는 자는 수치를 당하리이다" 입니다.
이 구절을 소원으로 설명하여 다윗이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들은 아무도 수치를 당치 않게 하소서' 라고 말한 것으로 본다면 다윗은 자신의 기도를 계속하는 중 이 구절에 와서 자신에 대해서만 말하던 것을 모든 신자들에게 공통적으로 확대한 셈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구절을 다른 의미로 이해하고 싶습니다.
곧 여기서 다윗이 하나님의 구원에서 나오는 그의 은혜의 열매를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옳습니다' 에는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칼빈 사역은 3절 맨 앞에 Yea 가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는 점과 자신의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소문이 널리 퍼져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시편 25 편
그러므로 다윗이 한 말은 자신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본으로 널리 퍼질 것이라는 뜻입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의 사기를 높여주고 생동하게 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악인들의 오만을 땅에 내던지게 되는 결과가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구절은 또 다른 의미로 다윗이 자신의 신앙을 보강하는 뜻에서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에서 자주 언급하는 약속을 자신앞에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석한 의미가 더 적합한 것으로 보입니다.
"무고히 속이는 자" 라는 말은 특별히 다윗의 원수들임에 틀림없습니다.
따라서 자신이 구원받게 될 때 혼자서만 그 혜택을 누릴 것이 아니라 그 열매가 모든 참 신자들에게 확대될 것이라는 점을 밝혀줍니다.
반대로 다윗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을 경우에는 많은 사람들의 신앙이 흔들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다윗이 첫 소절과 대조적으로 놓고 있는 이 구절의 마지막 소절에서 다윗은 악인들이 수치를 당하며 드러눕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그들이 번영을 즐기며 교만하게 하나님을 공공연하게 조롱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심판에도 불구하고 더욱더 담대하게 악을 실천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밝힙니다.
'무고히' 라는 말 속에는 이 악의 흉측성이 들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부당한 행위를 당하지 않고도 스스로 무고하고 죄 없는 자들에게 해를 끼치는데 자발적으로 자신들을 내어줄 때 이 사악성은 가장 참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속성이며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묵상하고 기도함으로 하나님 그분 자신과 그분의 모든 것을 세상이 줄 수 없는 분복으로 누리게 될 것입니다.
시편 25 편
시25:4-7 여호와여 주의 도를
이 시편의 저작자는 하나님에게 세 가지를 청구하였습니다.
곧 보호하여 주심과 주님의 길을 가르쳐 주심과 죄를 용서하여 주심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 세 가지를 청구할 만한 근거로서 자기의 신앙을 내세웁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무엇을 받으려면 무엇보다 먼저 믿음이 있어야 됩니다(약1:6-8).
1. 다윗은 보호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2, 3).
본문에 "나로 부끄럽지 않게"( - 알 에보솨)함은 곧 실패하지 않게 하여 주심이니 이는 보호하여 주심입니다.
그는 이와 같은 보호를 하나님에게 청구할 만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는 원수들로 말미암아 무고히 속히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극도로 억울함을 당한 자를 하나님께서는 돌아보아 주시는 법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점에 있어서 한가지 기억할 것은 이 시인이 자기를 억울하게 한 자들을 자기 힘으로 이겨 보려고 어떤 복수행동을 취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다운 태도입니다.
2. 다윗은 주의 "도"( - 데렉)를 가르쳐 주시기 원합니다(4, 5).
필요에 의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보호를 청구하는 것이 가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만한 길을 가야 함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 길은 진리의 길입니다.
진리의 길은 의(義)를 따라가는 것이며 또한 범죄자로서 진실되이 회개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데 필요한 것으로서 주의 길을 가르쳐 주시기 원한 것은 매우 합당합니다.
3. 다윗은 죄를 사해 주시기 원합니다(6, 7).
이 시인은 하나님께서 그의 긍휼에 의하여 사죄해 주시기를 원하였으니 그것은 앞의 두 가지(보호하여 주시기 원함과 주의 도를 가르쳐 주시기 원함)보다 더욱 중요한 것을 구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죄악의 문제를 해결 받지 못한 자는 모든 불행의 뿌리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사죄를 구하되 "소시(少時)의 죄"를 사해 주시기 원하였습니다(7).
다윗은 이렇게 오래 전에 지은 죄도 해결 받기를 원하였습니다(시51:5).
시편 25 편
1. 본문 4-5절은 "(4)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5)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바라나이다" 입니다.
다윗은 때로 "주의 도"라는 표현으로 행복하고 번창한 일의 결과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거룩하고 의로운 생활 원칙을 지칭함에서 이 표현을 더 자주 사용합니다.
바로 다음 구절에 '진리' 라는 단어가 곧 나오는 것을 보더라도 다윗이 여기서 드리고 있는 기도의 내용은 '여호와여 주의 종으로 하여금 주의 약속을 굳게 확신하게 하시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입니다.
우리 마음이 이처럼 침착하게 인내하는 자세를 갖추게 될 때에 우리는 무엇이든 무모하거나 부적당한 방법으로 시도하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에 전적으로 의지하게 됩니다.
여기서 다윗은 자신이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도록 하나님의 영의 지도를 받기를 바랄 뿐 아니라, 또한 말씀의 약속 안에서 하나님의 진실성과 신실함을 자신에게 뚜렷하게 제시해 보여주시기를 바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평화롭게 살며 모든 초조감에서 해방되려는 뜻에서였습니다.
혹 이 구절을 일반적인 의미로 여겨 다윗이 온전히 자신을 하나님께 맡겨 하나님의 지배를 받기를 원한다는 뜻으로 본다 해도 우리는 거기에 반대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윗이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도(道)와 길을 다음 구절에서는 '진리'라는 명칭 아래 설명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하기에 우리는 주저하지 않고 이 기도를 다음과 같은 의미, 곧 다윗이 불안한 감정이나 복수심, 또는 다른 과격하고 불법적인 충동에 굴복하는 것이 두려운 나머지 하나님의 약속이 자신의 마음에 감동을 주고 또한 깊이 새겨지게 되기를 요청하고 있다는 뜻으로 보는 바입니다.
앞에서 우리가 지적했듯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살피신다는 사상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한다는 사실이야말로 여러 시험을 물리치는데 더없이 훌륭하고 강력한 수단입니다.
하지만 '주의 도와 길' 을 하나님의 가르침으로 이해하려는 사람이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시편 기자의 이 말에는 우리가 역경에 시달릴 때 마음에 일어나는 갑작스럽고 불안한 감정, 곧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정복되거나 달래지기 전에는 우리로 하여금 꾸불꾸불하고 기만적인 오솔길로 빠져들게 하는 그러한 감정에 대한 비유가 있다는 점을 우리는 기정사실로 보고자 합니다.
따라서 그 의미는 '여호와여 무슨 일이 벌어지든지 제가 주의 도에서 벗어나거나 주의 권위에 대한 고의적인 불순종이나 다른 어떤 죄악스런 욕망에 휩쓸리는 것을 허용치 마시고 주의 진리로 하여금 저를 평온한 안식과 평화 속에 지켜 보호하게 하시고 그 진리에 겸손히 굴복하게 하소서' 입니다.
시편 25 편
뿐만 아니라 비록 다윗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의 도를 알게 하고 그 속에서 자신을 가르치며 주의 진리 가운데 자기를 인도해 달라는 똑같은 내용을 자주 요청한다고 해서 이러한 형식의 표현이 결코 장황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당하는 여러 역경은 때때로 우리의 눈을 어둡게 하는 안개와 같으며 모든 사람은 각자의 체험을 통해서 이 흑암의 구름이 지속되는 한 우리가 마땅히 걸어야 할 길을 구별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하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처럼 탁월한 선지자이며 많은 지혜를 부여받은 다윗이 하나님의 가르침을 필요로 했다면 우리가 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빛을 바라보지 못하게 가로막는 흑암의 구름을 물리쳐 주시지 않을 경우 우리는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므로 어떤 시험이 우리를 공격할 때마다 항상 하나님의 진리의 빛으로 하여금 우리를 비취게 하여 우리가 죄악스런 책략에 의지하는 가운데 곁길로 가거나 꾸불꾸불한 길이나 금지된 오솔길로 쓸리는 일이 없도록 해주시기를 기도해야 옳습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다윗이 여기서 자신의 기도를 강력하게 하기 위해 사용하는 논법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내 구원의 하나님"(5절) 으로 부른 것은 이미 하나님에게서 받은 복을 곰곰이 생각하는 중에 장차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소망을 보강하려는 뜻에서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확신을 거듭 증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다윗의 논법의 첫부분은 하나님 자신의 성품과 그에게 속하는 의무에서 취해지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동일한 호의를 그들에게 끝까지 보여주실 것이라는 근거에서 경건한 자들의 행복을 유지하시고 그들이 곤경을 당할 때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확신은 마땅히 하나님의 크신 선하심과 일치해야 할 필요가 있는 만큼 다윗은 자신의 견인불굴의 인내에 대한 선언과 아울러 동시에 이 선하심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종일' 또는 '날마다' 라는 표현에는 다윗이 지칠 줄 모르는 확고부동한 자세로 하나님만 의지했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제아무리 감당하기 어려운 환경에서라도 하나님을 항상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약속하신 도우심을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것이 신앙의 특성임에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의 복에 대한 회상이 우리에게 소망을 북돋아주고 지탱하도록 하려면 다윗이 한 대로 다윗이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이 구원의 주라는 점을 발견했다는 이 사실을 다윗의 확신의 근거로 삼았듯이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선하심을 회고하는 법을 배우도록 해야 합니다.
시편 25 편
2. 본문 6절은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을 기억하옵소서" 입니다.
여기서 먼저 드러나는 점은 다윗이 얼마나 혹심하게 고통을 받고 시련을 받았던지 하나님의 자비심에 대한 모든 의식을 상실할 정도였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은총을 망각하신 것처럼 말하면서 하나님을 향해 자기에 대한 그의 은총을 기억하실 것을 간청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극도로 번민한 나머지 비애에 압도된 사람의 하소연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비록 하나님이 당분간 우리에게서 그의 선하심에 대한 모든 표증을 철회하시며, 언뜻 보기에는 우리를 괴롭히는 불행과 관계없이 마치 우리가 이방인이요 그분의 백성이 아니라는 듯이 우리를 내버려둔다 하더라도 우리는 마침내 이 시험에서 벗어나 정중하게 여기에 기록된 기도를 올리며 하나님께 구함으로 그가 이전에 대하셨던 방법으로 우리에게 향하신 그 선하심을 다시 보여주시고 더 은혜로운 방법으로 대우하기를 다시 시작하실 때까지 용감하게 싸워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형식의 기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그의 얼굴을 감추시며 조금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일 경우가 아니고서는 온당하게 사용할 수 없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은 하나님의 자비, 또는 연민과 선하심에 호소함으로서 자신의 공로를 결코 어떠한 소망의 근거로 신뢰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자비의 원천에서만 모든 것을 구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보상할 만한 무엇을 아무것도 자신 속에서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체험한 자비의 중단은 그로 하여금 자유롭게 하나님께 접근하는 것을 가로막는 장애물이었던 만큼 비록 그 성품에서 자비하신 하나님이 스스로 물러나시며 당분간 그의 능력을 나타내시는 것을 중단하더라도 하나님은 자신을 부정할 수 없다는 이 생각으로 이 장애물을 딛고 일어서고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최선의 대책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속성인 자비로운 감정을 벗어버릴 수가 없으신 것은 그가 영원히 존재하심을 중단할 수 없음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아예 처음부터 자비로우셨다는 점을 확신하는 가운데 설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혹하게 행동하시며 우리의 기도를 배척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그 자신의 참 모습에 위반된 행동을 하신다거나 자신의 의도를 바꾸신 것으로 상상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세대에 걸쳐서 그의 종들을 자애로운 눈으로 대하셨으며 자비를 베푸셨다는 점을 성경이 자주 일러주고 있는 의도가 무엇인가를 배웁니다.
비록 하나님의 선하심이 때로는 숨겨지고 마치 우리 시야에서 감추어진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것이 결코 말살될 수 없다는 이 점을 확고부동한 사실로 여겨야겠습니다.
시편 25 편
3. 본문 7절은 "여호와여 내 소시의 죄와 허물을 기억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을 인하여 하옵소서" 입니다.
우리의 죄악이란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담과 같은 것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듣거나, 또는 우리를 돕기 위해 손길을 뻗치는 것을 방해하기에 다윗은 여기서 이 장애물을 제거하고 있습니다. 사실 인간들이 자신들의 죄악에 대한 용서를 빌지 않으면서 기도한다는 것은 잘못되고 헛된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화해하시지 않는 한 그분으로부터 무슨 호의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한 노릇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값없이 우리를 그에게 화해시키지 않고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올바르고 적합한 기도의 순서는 우리가 지적한 대로 맨 처음에 하나님께 우리의 죄를 사면해 주실 것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여기서 자신의 죄악이 말소되기 전에는 결코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자가 될 수 없다는 점을 명백한 용어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자비를 유념하시도록 함에는 그가 우리의 죄악을 잊으실 필요가 있는데 이는 곧 죄의 모습만 보아도 그의 호의를 거둬버리기 때문입니다.
그와 동시에 시편 기자는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이미 지적한 점, 곧 악인들이 자신을 상대로 잔인하게 행동했으며 부당하게 핍박했지만 그래도 다윗은 자신이 당한 모든 불행의 원인을 자신의 죄악으로 돌리고 있다는 점을 더욱더 뚜렷하게 확증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자비에 호소하면서 자신의 죄악을 용서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원수들로부터 받은 모든 잔인한 대우가 자신이 받아 마땅한 벌을 당한 것 뿐이라는 점을 인정하기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다윗이 불행의 참된 해결책을 발견함에 있어서 그 불행의 첫째 원인에 생각을 돌린 것은 현명한 처사였으며 다윗은 이와 같은 자신의 모범을 통해서 어떤 외적인 고통이 우리를 압도하든 하나님께서 그것으로부터 우리를 구해 주실 것을 간청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불쾌하게 건드리고 징계의 매를 자초한 우리의 죄악을 말살해 주실 것을 또한 간청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달리 행동한다면 우리는 질병의 원인을 무시한 채, 통증을 달래며 치료에 대해 단지 우발적인 처방만 쓰려는 미숙한 의사의 본을 따르는 셈이 될 것입니다.
다윗은 무슨 핑계를 찾거나 아니면 자신들의 극악한 죄를 감추려고 단지 일반적이고 겉으로만 자신들의 죄책을 고백하는 버릇이 있는 위선자들처럼 가벼운 실수만 고백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죄악을 유년기까지 추적하면서 얼마나 다양한 면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진노를 스스로 불러일으켰는가 하는 점을 곰곰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시편 25 편
다윗은 자신이 청소년 시절에 범한 죄악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보다 후에 범한 죄악을 기억할 수 없다는 뜻에서가 아니라 자신을 그만큼 더 큰 정죄를 받아 마땅한 존재로 여기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려는 뜻에서입니다.
먼저 다윗이 자신이 최근에 와서야 범죄하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장기간에 걸쳐서 죄악에 죄악을 산적했다는 점을 곰곰이 생각함으로서, 산적된 죄악에 눌려 자신이 일어서지 못하고 있으며 다음으로 만약에 하나님이 엄격한 율법에 따라서 대우하신다면 어제나 며칠전의 죄악이 자기를 심판으로 몰아넣게 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유아기로부터 범한 모든 죄가 이제 정당하게 자신을 억누를 것이라는 점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심판과 진노의 상징을 통해서 우리를 무섭게 할 때마다 최근에 저지른 죄악뿐 아니라 과거의 모든 범죄가 우리에게 새로운 수치와 새로운 비탄의 근거를 입증할 것이라는 점을 명심하도록 합시다.
그뿐 아니라 자신이 무상의 사면을 간청하고 있다는 점을 더욱 더 자세하게 표현하는 뜻으로 하나님 앞에서 오직 그의 선한 뜻에 입각해서 간구하고 있으며 그러기에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서 나를 기억하소서" 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잊으실 때 비로소 하나님은 우리를 아버지로서의 시선으로 바라보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이 아버지로서의 관심을 설명함에 있어서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점 이외의 다른 원인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곧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를 하나님의 은총 안으로 받아들이게 함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선한 뜻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없다는 결론이 따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인자하심에 따라서 우리를 기억하시는 것으로 말해질 때 서로 전혀 상반되는 두 가지 기억 방법이 있다는 점을 우리는 은연중에 이해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진노 가운데서 죄인들을 초청하실 때 사용하는 방법이 그 하나요, 다른 하나는 그가 당분간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처럼 여기던 자들에게 자신의 호의를 다시 보이실 때 사용하는 방법이 그것입니다.
시편 25 편
시25:8-11 여호와는 선하시고
본문은 하나님의 인도와 사죄를 받는 복에 대해서입니다.
1. 본문 8절은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 도로 죄인을 교훈하시리로다" 입니다.
다윗은 기도를 잠시 중단하고 새로운 열정으로 기도에 임하려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묵상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생각을 돌리고 있습니다.
신자들은 그들이 새로운 자극에 의해서 스스로 부단히 기도하려는 마음을 북돋지 않을 경우, 자신들의 마음이 곧 식어버리는 것을 느낍니다.
이 의무를 지치지 않고 한결같이 지속한다는 것은 드문 일이며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고 불이 계속 타려면 자주 연료를 공급받아야 하는 것처럼 기도라는 단련 역시 식어져 마침내 완전히 말살되어 버리지 않으려면 그러한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자신에게 견인불발의 정신을 북돋우려는 욕망에서 자문자답하며 하나님께서 '선하시고 정직하시다' 는 점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이 진리에 대해 묵상함으로서 새 힘을 얻고 더욱더 민첩하게 기도에 임하려는 뜻에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땅히 주목해야 하는 결과는 하나님께서 선하시고 정직하시기에 '죄인들' 에게 자상한 손을 뻗쳐 "그 도" 로 다시 안내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직하시다 고 말하면서 오직 자격이 있고 공적이 있는 자들에게만 그것을 베푸시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의 성품을 잘못 보는 것이며 죄인들에게는 아무 혜택이 없게 되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흔히 하나님께서는 오직 그런 의미에서만 선하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백에 하나도 하나님의 자비를 자신에게 적용하지 못하는 것은 인간들이 자비를 받을 자격이 있는 자들에게 그것을 국한시키기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그 반대로 여기서는 하나님이 죄인들에게 길을 보여주심으로서 하나님의 정직성에 대해 증거하시는 것으로 말해지는 것은 그들을 불러 회개하도록 하는 것과 그들을 가르쳐 정직하게 살도록 하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요합니다.
참으로 만일 하나님의 선하심이 지옥에까지라도 파고들지 않는다면 아무도 그 선하심에 참여자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시편 25 편
교황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생각해 낸 마음의 준비를 두고 자랑하지만 우리는 만약에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그의 은혜로 미연에 막아주시지 않을 경우 인간들은 전멸하고 말 것이라는 점을 확고부동한 가르침으로 여기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여기서 흔히 말하는 보호적 은혜(preventing grace)를 찬송하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중생의 영을 통해서 타락한 본성을 새롭게 하시거나 우리가 죄악으로 그에게서 멀어졌을 때 우리를 다시 올바른 길로 인도하심에 나타나는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제자들로 받아들이는 자들까지도 여기서 죄인들로 불리우고 있는 만큼 그들을 자신의 성령으로 새롭게 하는 것은 그들이 유순하고 순종적인 자들이 되게 하려는 뜻에서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2. 본문 9절은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 도를 가르치시리로다" 입니다.
시편 기자는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베푸신 두 번째 은혜를 열거하고 있는데 이 은혜는 하나님의 능력에 굴복되어 자신의 지배 하에 들어와 자발적으로 그 멍에를 지고 그의 통치에 스스로 복종하는 자들에게 베푸시는 은혜입니다.
그러나 천성적으로 교만에 가득 차서 의기양양 하는 마음이 먼저 겸손하게 되고 굴복되기 전에는 어떠한 사람에게서도 이 온순성은 발견할 수 없습니다.
(아나빔)이라는 히브리어는 '가련한 자들'이나 '고통받는 자들'을 지칭하며 비유적으로는 '온유하고 겸손한 자들'을 지칭하는데 사용되고 있는 만큼 추측컨대 다윗은 이 용어 속에 육신의 고집을 억제하고 굴복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고통뿐 아니라 겸손의 은혜까지도 포함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마치 다윗이 하나님께서 먼저 그들을 낮추시고 친절하게 자신의 손을 펴시어 전 생애에 걸쳐서 그들을 인도하고 안내하신다고 말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공의'와 '그 길'이란 말을 의롭고 질서가 잘 잡힌 생활양식으로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것을 하나님의 섭리와 관련시키는데 이것이 더 정확하고 문맥에 더 일치하는 것으로 보이는 이유는 곧이어 "여호와의 모든 길은 인자와 진리로다"라는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의미는 참으로 마음 속에서부터 겸손하게 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얼마나 자기 자녀들을 보살피시며 그들의 필요사항을 어떻게 잘 제공해 주시는가 하는 점을 체험할 것입니다.
시편 25 편
그러므로 '공의'와 '그 길'이란 여기서 하나님의 통치와 같은 의미로 쓰이고 있는데 하나님은 이 통치를 행사하시면서 인자한 아버지처럼 자녀들의 안녕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점을 보여주십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들이 고통을 받고 있을 때는 구제하며 그들이 눌려 있을 때는 일으켜 세워주며 슬퍼할 때는 마음을 북돋아주고 위로하며 압제를 받고 있을 때는 구조를 보내는 방법을 통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떠한 순서에 따라서 우리에 대한 자신의 은혜를 나타내 보여주시는가 하는 점을 알게 됩니다.
먼저 다윗은 우리가 그분에게서 떠나 배회할 때, 우리를 다시 그 길로 이끌어주십니다.
우리가 이미 도망병이 되어 그분으로부터 망명객이 되어 있을 때 우리의 고집을 억제해 주십니다.
우리가 과거에는 고집이 세고 반역적이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의를 순종하게 굴복시켜 주십니다.
둘째로 다윗은 우리를 괴롭히고 시험하신 다음에 우리를 포기하시지 않고 오히려 겸손과 온유의 십자가로 우리의 성격을 형성해서 단련하신 후에 여전히 자신이 전 생애에 걸쳐서 안내하고 지도하는 어질고 사려 깊은 아버지라는 점을 보여 주십니다.
3. 본문 10절은 "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 입니다.
여기서 율법의 가르침이 참되고 달콤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또 율법을 지키는 자들이 정말 그렇다고 느끼는 것으로 이 구절을 해석하는 자들은 마치 이 구절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 고 하신 말씀과 같은 내용인 것처럼 생각하는데 이것은 잘못입니다.
그런 해석은 억지일 뿐 아니라 다른 많은 비슷한 구절에 의해서 쉽게 반박을 받습니다 '여호와의 길' 이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보호하고 소중히 여기는 그들에 대한 아버지의 태도이며 나아가 이 세상의 통치와 지도에 있어서 하나님의 전반적인 행동을 표현함에 있어서 소극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의 의미는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모든 면에 있어서 자비롭고 신실하시다 는 점을 체험하는 방향으로 행동하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전반적인 인류에 대해서 행동하는데 내세우는 성품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분에 대해서 체험하는 성품을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 25 편
이미 제18편 26절에서 보았듯이 하나님께서는 오만하고 반역적인 자들에 대해서 엄격하고 근엄하시며 설령 그들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자비롭게 인내를 보여주심으로 인자하게 행동하신다 하더라도 하나님께로부터 최대한의 기쁨을 누리거나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기는 고사하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떤 역경이 닥칠 경우 그들은 당장 격정적이 되고 투덜대면서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잔인하게 행동하신다며 비난하거나 자신의 기도에 있어서 귀머거리라는 식으로 불평하며 그들이 번영을 누릴 때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소홀히 하며 있는 힘을 다해서 하나님의 존전으로부터 달아나고 맙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의 '인자와 신실성'을 언급함으로서 이것들을 경건한 자들에게 특별한 보화로 묘사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끝까지 인내하는 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속인다고 두려워할 이유가 결코 없다고 말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언약' 과 '증거' 는 인자가 신실성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면 동일한 의미를 지닙니다.
이 말들 속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선민들과 계약을 체결함에 있어서 사용하는 율법의 전반적인 가르침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4. 본문 11절은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증대하오니 주의 이름을 인하여 사하소서"
입니다.
본문에서 '그리고'라는 접속사가 이 구절의 두 소절 사이에 삽입되어 있기에 혹자는 첫째 소절은 불완전한 것으로 보고 여기에 어떤 단어가 보충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하여 이 구절을 '주여 내 죄악을 긍휼히 여기소서' 라는 독립문으로 읽습니다.
그들의 견해에 따르자면 그 의미는 '여호와여 비록 내가 당신의 언약을 충분히 지키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런 이유 때문에 주의 친절을 중단하지 마시고 내 죄악 때문에 주의 선하심이 내게 미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은혜롭게 꼭 그것을 사면하소서' 라는 식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접속사가 다른 곳에 많이 나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의미가 없는 것이요, 전체 구절을 하나의 관련된 문장으로 읽을 수 있다는 견해를 택하고 싶습니다.
동사의 시제로 말하자면 여기에 있어서도 주석가들 가운데 견해가 다양합니다.
혹자는 이것을 '주께서는 지금까지 자비로우셨습니다' 라는 식의 과거 시제로 읽는데 이것은 다윗이 하나님께 자신의 죄악을 용서한 점을 들어 감사를 돌린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보다 더 전반적인 지지를 받는 다른 해석이 가장 정확한데 곧 다윗이 사면을 받기 위해 다시 하나님의 자비를 자신의 유일한 피난처로 호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편 25 편
'그리고' 에 해당하는 (와우)라는 단어에는 종종 히브리어 동사의 시제를 바꾸는 의미가 있으며 그 결과 미래 시제가 종종 기원문의 의미로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 구절을 앞 구절과 연결시킵니다.
곧 이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그를 섬기는 자들에게 인자하고 신실하시다 는 점을 곰곰이 생각한 후 이제 자신의 마음을 살피면서 하나님께서 먼저 자신의 죄악에 대한 용서를 허용하시지 않는 한 그를 섬기는 자들의 숫자에 들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는데 바로 이것 때문에 그는 사면에 대한 기도에 전념하고 있는 것으로 이것은 제19편 12절에서 그가 율법을 지키는 신실한 자들을 위해 마련된 보상을 언급하고 나서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라고 외친 것과 같은 내용입니다.
따라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을 지키는 자들에게 행복한 생활에 속하는 모든 것을 너그럽게 베풀어주실 것으로 약속하고 있다는 점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래도 자신이 이 율법의 완전한 의와 얼마나 거리가 먼 사람인가 하는 점을 곰곰이 생각한 나머지 그것을 고백하는 데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이 죄책을 느끼고 있는 다양한 죄과에 대한 대비책을 찾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종들 가운데 하나로 여기도록 하려면 다윗의 본을 받아 항상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인자하심 가운데 우리의 연약성을 감안해 주실 것을 간청해야겠는데 이것은 우리의 죄악에 대한 값없는 사면이 없이는 우리의 행위에 대한 어떠한 보상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주목할 점은 자신이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를 전적으로 의지한다는 점을 더 뚜렷하게 보여주는 뜻에서 "주의 이름을 인하여"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 백성을 용서해 주실 때마다 하나님의 선하심 이외의 다른 이유가 없다는 말이나 다름없습니다.
이것은 앞에서 다윗이 사용한 "주의 선하심을 인하여"라는 표현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과가 크다는 점을 생각하고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곧 이어서 고백 형식으로 '내 죄악이 중대하다' 또는 '많다' 라는 뜻을 가진 (랍)이라는 단어를 덧붙입니다.
이것은 '나의 죄악이 정말 나를 압도하는 무거운 짐과 같으며 그 결과 그것의 다양성이나 극악성이 사면에 대한 모든 소망을 충분히 박탈하고도 남겠지만 여호와여! 주의 이름의 영원한 영광이 있기에 주께서는 나를 내던지지 않으실 것입니다'라는 말이나 다름없습니다.
시편 25 편
시25:12-15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이 부분(12-14)에 열거된 바 성도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네 가지 복입니다.
곧 ① 택할 길을 보여줌 ② 영혼이 평안함 ③ 그 자손이 땅을 상속함 ④ 여호와께서 언약을 보여 주심입니다.
1. 본문 12절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뇨 그 택할 길을 저에게 가르치시리로다"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종들에게 스스로를 계시할 때 보이시는 특징을 다시 마음에 상기시킴으로서 새로운 힘과 용기를 얻고 있습니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기도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회상에 의해서 지탱되지 않는 한 진지하고 간절한 기도가 해이하게 되는 일만큼 쉬운 일도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은 다윗이 자신을 비난할 뿐 아니라 더 나은 소망을 품음으로서 하나님께 대한 경외를 지속하기 위한 격려를 받고 있다는 점입니다.
먼저 인간들에게 올바른 이해와 건전한 판단이 부족한 것은 그들이 경외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지배를 받으려고 굴복하지 않기 대문이라는 점을 말함으로서 자신의 마음의 흑암 때문에 정욕을 따라 멀리 배회한 것은 자신이 나태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한편으로 만약에 자신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굴복하고 자신이 배울 자세가 되어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만 한다면 성령의 안내와 지도가 따를 것이라는 점을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이 여기서 구사하는 의문문 형식의 문체는 그 의도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이 얼마나 극소수인가 하는 점을 보여주는데 있은 것처럼 보입니다.
모두들 일반적으로 기도하며 어느 정도의 신앙심을 나타낸다 하지만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참으로 진지한 사람이 하나라도 있는가?
그러기는커녕 거의 모든 인간들은 스스로가 졸고 있는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경외는 아주 희박하며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대부분의 세상은 충고와 지혜의 영이 없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혹자는 '택할'이라는 미래 시제 대신에 '택하는'이라고 현재 시제로 해석하는데 곧 이 구절을 '하나님께서는 그가 인정하며 인간들이 걷기를 바라는 길을 제시해 주신다' 는 식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 해석에 대해서 우리가 찬동할 수 없는 것은 '택한다'는 단어가 각 개인과 관련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25 편
우리는 이 구절에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편에서 부족함이 없을 것이요 항상 우리가 지혜의 영에 의해서 올바른 길을 선택하도록 지도하실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고 봅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어떤 특별한 길을 가라는 부름을 받을 때 항상 두 길 사이에 서서 망설이며 어느 길을 가야할는지 모릅니다. 옳습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 길을 제시해 주시지 않는 한 우리는 거의 모든 일에 있어서 망설이고 의심하게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인간들은 무엇이 옳은 것인지, 어느 것을 택해야 하는지 모르지만 신앙적으로 온순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굴복하며 하나님을 따르기로 작정한다면 하나님은 항상 확실하고 신실한 안내자로서 스스로를 나타내실 것이라는 점을 지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대한 경외란 본래 우리 속에 있는 것이 아니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열심히 노력하는 가운데 그의 도움을 얻기 위해 자신의 노력에 의하여 교묘히 하나님의 환심을 살 때에야 비로소 인간들을 보살피기 시작한다고 논증을 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입니다.
다윗은 방금 하나님께서 범죄자들을 가르쳐주신다는 말을 통해서 이 은혜가 직접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점을 선언하였습니다.
이제는 인간들이 한번 굴복되어 온유한 정신으로 주조된 다음에도 그들이 성령의 조명에 의해서 그들의 임무를 깨닫게 될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그들을 자기 책임 하에 두시며 지도하고 안내하신다는 점을 덧붙입니다.
2. 본문 13절은 "저의 영혼은 평안히 거하고 그 자손은 땅을 상속하리로다" 입니다.
인간의 최대 행복이 하나님의 보증과 무관한 일을 결코 시도하거나 수행하지 않는데 있다면 여기서 우리가 결코 곁길로 빠져들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을 우리 인생의 안내자와 지도자로 삼는 것 또한 지극히 귀하고 비교할 수 없는 복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것 외에도 여기에는 지상적인 복이 약속되고 있는데 이 복 속에서 앞에 말한 은혜의 결과가 더욱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이것은 바울이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4:8) 하고 가르치는 그대로입니다.
하나님을 진실로 섬기는 자들은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만 아니라 현재의 생활에 있어서도 복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항상 그들의 소원대로 대해 주시는 것만도 아니며 그들이 바라는 복들이 항상 일정하고 통일된 방법으로 흘러 넘치는 것만도 아닙니다.
반대로 그들은 병마와 고통에 시달리고 악인들은 번영을 누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시편 25 편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으로부터 복을 철회하실 때마다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상태를 깨닫도록 일깨워주며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경외로부터 멀어져 있는가 하는 점을 발견하게 하려는 데 그 의도가 있다는 점을 알아야겠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유익한 범위에서 현재 하나님의 복을 누리며 그 결과 세상적인 사람들과 하나님 멸시자들과 비교할 때 그들이 참으로 행복하고 복된 자들인 것은 그들이 제아무리 빈곤한 상태에서일망정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다는 확신을 결코 잃지 않으며 이 위로의 부축을 받는 가운데 마음의 평화와 평정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참된 사실은 우리가 죄를 범함으로 하나님의 복이 일정한 길을 따라서 우리에게 흘러 넘치지 못하게 하며 이 한가지가 모든 불행의 원천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혼돈한 상태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결코 중단하지 않고 비치고 있으며 그 결과 경건한 자들의 상태는 항상 다른 자들에 비해 훨씬 낫습니다.
그들에게 항상 좋은 것이 배부르게 채워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들은 계속 하나님 아버지의 호의를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이것과 '영혼' 이라는 단어를 관련시키고자 합니다.
경건한 자들은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들임에서 그 선물들의 맛을 음미하지 않고 게걸스럽게 받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실제로 소중히 여기며 그것이 제아무리 적은 몫이라도 풍성한 몫으로 악인들을 만족시키는 것보다 더 그들을 만족시킬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모든 사람이 자신의 상태로 만족하며 인내와 평정의 정신을 소중히 여기게 되기에 그 사람의 영혼이 '평안히 거하는 것' 으로 언급됩니다.
주석가들이 '거한다' 라는 단어를 죽음의 시간에 적용시키는 것은 확고 하다기보다는 교묘한 해석입니다.
이미 지적했듯이 영감을 받은 저자는 현재 생활의 상태를 두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신실한 자들의 후손이 "땅을 상속하리로다" 라고 덧붙입니다.
이 말에서 하나님이 그들에 대한 자신의 호의를 확대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여기서 다시 우리는 하나님의 종들의 죽음이 그들의 완전한 파멸을 의미하지 않으며 그들이 이 세상에서 사라질 때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지속해서 산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 때문에 타인에게까지 유익을 베풀어주시는 그의 종들에게서 생명을 전적으로 박탈하는 것으로 상상한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노릇이 될 것입니다.
성도들의 자손들이 땅을 상속받을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다루어진 바 있으며 어떤 면에서 어떻게 이것이 성취되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제 37편에서 더 상세하게 제시될 것입니다.
시편 25 편
3. 본문 14절은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 입니다.
시편 기자는 그가 앞 구절에서 방금 말한 점, 곧 하나님께서는 모든 경건한 자들에게 교사와 주인으로서의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하실 것이라는 점을 여기서 확증합니다.
통상적인 방법에 따라서 다윗은 동일한 구절에서 같은 견해를 두 번 반복합니다.
"그 언약" 이란 "여호와의 친밀함"(여호와의 비밀 또는 권고)과 같은 말입니다.
'비밀' 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서 다윗은 하나님의 율법에서 나타나 있는 가르침의 탁월성을 극찬하며 찬미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들의 마음의 교만과 오만에 이끌려 제아무리 모세와 선지자들을 무시한다 하더라도 신실한 자들은 그들의 가르침 속에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하늘의 비밀이 계시되고 펼쳐지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에서 교훈을 얻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먼저 거기에 담겨져 가르침을 존중히 여기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구절은 우리가 온유와 겸손의 은혜를 돈독히 할 것을 권면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가 자신의 지혜만 믿거나 총명을 신뢰한 나머지 여기 다윗이 하나님만의 특권이라고 선언하는 신비와 비밀의 지식을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여호와에 대한 경외가 그분의 뜻에 대한 올바른 이해의 시작이며 그곳으로 통하는 길로 언급되어 있는 만큼(시111:10). 누구든지 자신의 신앙에 있어서 성장하기를 바란다면 그만큼 여호와를 경외하는 데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신앙심이 우리 마음을 지배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찾는 우리의 수고가 헛될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언약이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것이라는 점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공연히 자신을 찾으라고 명하고 있는 것이 아닌 만큼 올바른 욕구로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자들은 모두 성령의 가르침에 따라서 그들의 구원을 위해 정해진 하늘의 지혜를 깨닫게 될 것이라는 점에 안심해도 좋습니다.
그와 동시에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에 관심이 있다고 거짓으로 근거 없이 허풍을 떠는 자들을 간접적으로 나무라고 있는데 사실 이들은 단순히 율법의 글자에만 머물러 있을 뿐 하나님의 경외에서 오는 구원의 감동을 갖지 못한 자들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의인들과 악인들 모두에게 자신의 말씀을 전하시지만 그러나 인간들은 그들에게 먼저 진실한 신앙심이 있기 전에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이사야가(29:11) 악인들에게는 율법이 "봉인된 책"과 같다고 한 그대로입니다.
시편 25 편
그러므로 여기서 참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 곧 하나님께서 자신의 비밀을 알려주는 자들과 악인들 또는 위선자들이 구별되고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윗이 이러한 확신을 통해서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가며 남들까지도 인도하는 것을 볼 때 그가 분명히 보여주는 중요한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곧 성경 말씀에 신비가 감추어져 있다는 구실 하에 그 성경 말씀을 평민에게서 빼앗으려는 시도는 사악하고 가증스러운 창안으로 이는 마치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른 점에서 그들의 상태와 조건이 어떠하든지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의 지식에 초래되지 못하기라도 한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4. 본문 15절은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앙망함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 입니다.
다윗은 여기서 자신의 신앙과 그 신앙의 불굴의 인내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자랑으로 떠들어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더욱더 적극적으로 그리고 기꺼이 기도에 전념하기 위하여 그가 바라는 것을 얻을 것이라는 소망에서 용기를 내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모든 자들에게는 자신들의 소망이 좌절되지 않을 것이요, 그들이 결코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종종 이것을 자신들의 방패로 삼기 마련입니다.
그와 동시에 다윗은 자신의 본을 통해서 남들에게 올바른 기도의 방법을 보여주면서 그들의 생각을 하나님께 고정시킬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눈으로 보는 것이 가장 빠르며 그 시력이 전체 구조에 전반적인 영향을 미치므로 '눈'이라는 용어를 통해서 모든 감정이 지칭되고 있습니다.
곧이어 그 이유가 나오는데 이것은 다윗의 마음에 소망과 욕망이 함께 연합되어 있었다는 점을 더욱더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자신이 하나님의 도움에 대해 자신을 갖되 조금도 의심하거나 불확실해 하지 않고 하나님이 자신의 구원자가 되실 것을 확신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라는 대명사가 강조되고 있다는 것입니다(히브리어 본문에 가 강조되어 있음).
이 단어는 다윗이 불확실하기에 스스로 다양한 구출과 구원의 방법을 고안해 내는 사람들처럼 하나님을 찾느라 온 사방을 둘러본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 만으로 만족하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편 25 편
시25:16-22 주여 나는 외롭고
본문은 본 시편의 결론적 기도입니다.
1. 본문 16절은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롭사오니 내게 돌이키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입니다.
육신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돕는데 있어서 그분의 능력을 보여주시지 않을 때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망각해 버리셨다는 점을 살며시 우리에게 집어넣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자연 질서에 따라서 마치 하나님께서 전에 자기를 완전히 소홀히 하셨다는 듯이 하나님이 자기를 보살펴 주실 것을 간청합니다.
이 구절은 '나를 불쌍히 여기시려면 나를 돌아보소서' 라는 식입니다.
먼저 다윗은 당장에 하나님이 돌아보시는 것을 자기 구원의 원인과 원천으로 여깁니다
다음으로 다윗은 하나님께서 돌아보시는 결과를 덧붙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선한 뜻에 따라서 친히 우리를 돌아보실 경우에 하나님 자신의 손 또한 우리를 도울 준비를 갖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동정심을 자극하는 뜻에서 다윗은 자신이 '홀로 있다' '외롭다' 고 분명히 언급함으로서 자신의 불행을 진술한 다음에 자신의 '괴로운'(가련한) 사정을 묘사합니다.
여기서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은 다윗이 이렇게 말함으로서 하나님이 고통과 압제를 받는 자들과 항상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떠올리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그들을 돕고 응원하실 것이라고 선언하신 약속을 암시한다는 점입니다.
2. 본문 17절은 "내 마음의 근심이 많사오니 나를 곤란에서 끌어내소서" 입니다.
본 구절에서 다윗은 자신이 외적인 면에서 자신의 원수들과 그들이 일으키는 고통과 더불어 싸우고 있었다는 사실뿐 아니라 자기가 내적인 면에도 마음의 고통과 번민으로 괴로워하고 있었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여기서 또한 주목할 점은 여기서 구사하고 있는 표현방법인데 여기에는 자신의 시련의 무게와 숫자가 얼마나 산적되었던지 그것들이 마치 홍수가 모든 둑을 터뜨려서 넓고 멀리 온 나라에 퍼지는 것처럼 자신의 온 마음을 채웠다는 내용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다윗의 마음이 때때로 온통 번민으로 가득 차 있었다는 점을 보는 우리로서는 때때로 강렬한 시험이 우리를 압도하더라도 이상히 여길 것이 아니라 다윗과 같이 절망의 위기에 처하는 그 순간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실 것을 간구해야 합니다.
시편 25 편
3. 본문 18절은 "나의 곤고와 환난을 보시고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 입니다.
이 하소연을 여러번 반복함으로서 다윗은 자기가 당한 재난이 가볍고 하찮은 질고가 아니었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 점을 유의함으로 시련과 고통이 동일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경우마다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을 향하게 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앞에 이 본을 제시해 주시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수많은 고통이나 그 무게에 눌려 낙심하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뜻에서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러한 불행을 경감받기 위해 자신의 죄악이 사해지기를 다시 간청하면서 자기가 이미 말한 점, 곧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값없는 용서를 받음으로 하나님께 화해되기 전에는 하나님 은총을 누릴 것을 기대할 수 없다는 점을 회상합니다.
사실 육체적인 고통으로부터의 구원으로 만족한 나머지 자신들의 마음의 악, 곧 그들의 죄악을 탐색하지 않고 오히려 최대한 그것들을 망각 속에 묻어버리려 하는 자들이야말로 정말 무감각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자신의 염려와 고통에 대한 대책을 발견하기 위해서 먼저 자신의 죄악의 용서를 간청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불화하고 있는 한 우리의 만사는 불행한 결말로 끝나고 말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악이 지속되는 한 하나님이 그것을 용서하시기 전에는 언제나 우리를 불쾌하게 여기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주께서 자기 백성을 십자가 밑으로 끌어들이는데는 여러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괴롭히실 때마다 우리 자신의 마음을 살피고 겸손하게 하나님과의 화해를 추구하라는 부름을 받는 셈이라는 원칙을 굳게 지켜야 됩니다.
4. 본문 19-20절은 "(19) 내 원수를 보소서 저희가 많고 나를 심히 미워함이니이다
(20) 내 영혼을 지켜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오니 수치를 당치 말게 하소서"
입니다.
본 구절에서 다윗은 자신의 원수들의 숫자와 잔인성을 하소연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압박을 받을수록 하나님은 그들을 돕고자 하시며 그들이 둘려 싸여져 있는 위험의 크기에 따라서 더욱더 강력하게 그들을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심히 미워함" 은 잔인하고 독살스러운 증오감입니다.
다윗의 원수들의 횡포가 얼마나 컸던지 다윗의 죽음이 아니면 그들을 만족시킬 수 없었기에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 생명의 수호자와 보호자가 되어주실 것을 요청합니다.
우리는 다윗이 이때에 극도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는 점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곧 이어지는 "수치를 당치 말게"라는 구절은 두 가지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시편 25 편
혹자는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미래 시제를 고수하는데 이것은 마치 다윗이 하나님께서 이미 자신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 소망의 보상으로 기도에 대한 은혜로운 응답이 자신에게 약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느꼈다는 말이나 다름없습니다.
우리는 다른 견해를 택하는데 그것은 이 구절을 다윗의 기도의 일부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의 요지는 다윗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기에 다윗은 자기가 품었던 구원의 소망이 좌절되지 않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다는 점을 진지한 마음으로 증거할 수 있다면 바로 그 때보다 기도에 거룩한 열정을 더하는 적절한 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큰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께 우리의 소망이 적을 때 그 소망을 키워주시고 그 소망이 잠들어 있을 때 일깨워 주시고 방황할 때 굳게 하여 주시며 약할 때 힘을 북돋아주시고 그 소망이 전복되었을 때 다시 세워주시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5. 본문 21절은 "내가 주를 바라오니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 입니다.
혹자는 이 구절에서 다윗이 타인에게 무례하게 행한 적이 없으며 모든 기만과 횡포를 삼갔다는 근거에서 자신이 모든 해로움으로부터 보호받기를 기도하는 것으로 봅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 구절에 두 가지 기도의 주제가 담겨있는 것으로 보며 동시에 여기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진지하고 정직한 마음을 베풀어주실 것을 바라는 것이 포함된 것으로 이해하며 그리고 또 이 모든 것은 자신이 복수나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는 다른 불법적인 수단을 갖고 덤벼들지 않으려는 뜻에서인 것으로 이해합니다.
이렇게 되면 그 의미는 '여호와여 내 육신이 나로 하여금 사방에서 구제책을 찾도록 충동하고 내 원수들 역시 극성을 부리며 나에게 강요하지만 그래도 주께서는 내 속에 있는 온갖 죄악스런 감정과 온갖 사악한 욕정을 억제하셔서 내가 항상 내 마음을 전체적으로 깨끗하게 다스리게 하소서.
성실과 정직만이 나를 지켜 보호하는 두 가지 강력한 수단이 되게 하소서' 가 됩니다.
우리가 첫 해석을 택한 이유는 다윗이 이어서 자기 성실성을 입증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온유하고 침착한 정신으로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는 자신의 원수들을 상대로 불의하게 겨루기보다는 차라리 인간들이 가하는 것을 무엇이든 당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인간들 사회에서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정직했던지 그의 원수들의 박해가 전적으로 무근거하고 부당할 정도였다는 점을 단언하고 또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았다는 점을 의식하고 있었기에 하나님을 자신의 무죄함의 보호자로 부릅니다.
그러나 다윗이 이미 여러 곳에서 자신이 고통을 받는 것은 정당하다는 것을 인정한 점을 생각할 때 이제 와서 자신의 성실성을 두고 자랑하는 것이 모순된 것으로 보일는지 모릅니다.
시편 25 편
이 외견상의 모순에 대해서는 이미 다른 곳에서 설명된 바 있는데 거기서 우리는 성도들이 자신들의 입장에서는 항상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나오며 자신의 용서를 간구하지만 그렇다고 이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자신들의 명분의 옳음과 주장의 정당성을 제시할 수 없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밝힌 바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자신이 하나님을 '바라오니' 라고 말함으로서 다윗은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밝힙니다.
우리 자신을 변호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함으로 자신의 보호를 확신하지 않는 한 우리 편에 공의가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려깊고 확신에 찬 사람들이 그들의 명분이 옳은데도 그 명분을 변호하는데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닌데 그 이유는 자신들의 총명을 신뢰하거나 행운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의 무죄함의 보호자와 변호자가 되게 하려면 할 일이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우리 원수들에 대해서 정직하고 순진하게 대하여야 합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합니다.
6. 본문 22절은 "하나님이여 이스라엘을 그 모든 환난에서 구속하소서" 입니다.
이 결론을 통해서 다윗은 자기가 하소연하는 원수들의 성격이 무엇인가를 보여줍니다.
여기서 다윗의 원수인 그들이 집안의 원수들이었다는 점이 드러나게 됩니다.
곧 그 집안의 원수들은 내장에서 극성을 부리는 질병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고통과 번민의 원인이었습니다. 다윗이 사용하는 '구속하다' 라는 말을 통해서 우리는 교회가 당시 심한 노예살이 밑에 압박 당하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 시편에서 다윗이 사울과 그와 함께 독재적인 방법으로 다스리던 자들을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확신합니다.
그와 동시에 다윗은 자신의 혜택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도 속에 전체 교회의 상태를 포함시키고 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성도들간에 뿌리박고 있는 상호간의 교제와 연관은 각자로 하여금 교회가 전반적으로 당하고 있는 공적인 재난을 뼈아프게 느끼면서 다른 모든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 탄식을 올리도록 요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문제에 있어서 다윗 자신이 신자들의 온 몸과 관련되고 있는 것으로 여기므로 그가 당한 모든 고통과 부당 행위가 자신과 그들이 공동으로 당하는 것이라는 점을 곰곰이 생각하게 된 것은 다윗 자신의 신앙을 확증하는데 적잖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각자가 이 원칙에 따라서 자신의 개인적인 불행과 시련을 두고 탄식하되 자신의 희망과 기도를 전체 교회를 위해서까지 확대하는 것을 더없이 중요한 일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