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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15
여리고를 점령한 이스라엘처럼 / 류영모 목사
I. 여리고
시골에서 학교를 다닐 때 개구쟁이 친구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늘 교복을 단정히 입고 다니는데 이 친구는 교복을 싫어합니다. 선생님들이 뭐라고 하면, "선생님 교복은 일제의 잔재입니다"라고 대꾸합니다. 쉬는 시간마다 복도에서 뛰어 다니다 꾸중을 들으면 자신은 신라 화랑도의 패기를 닮아서 그렇답니다. 그러다가 수업시간에 엎드려 잡니다. "넌 맨날 잠만 자냐"고 물으면 "꿈을 갖기 위해서"랍니다. 그러더니 시골에서 여관을 운영하며 지금도 자고 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다 큰 꿈을 꾸어 보지만 내가 그 꿈을 이루기엔 너무나도 부족하다는 절망의 벽에 부딪힐 때가 있습니다. 때론 이 벽, 이 장애물만 넘어서면 나의 비전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은데 결정적인 장애물에 걸려 꼼짝달싹 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대학생 선교회(CCC)를 설립한 빌 브라잇 박사는 "신앙생활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내 힘으로 발버둥쳐서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가나안 땅이 이스라엘의 꿈이었다면 여리고는 그들 앞에 놓인 장애물이요 절망의 벽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인생의 벽에 부딪힐때마다 어떻게 합니까?
① 지난 주간에 만난 김 목사님은 세계 열방에 선교사를 파송하리라는 꿈을 안고 10년전 개척교회를 설립했으나 교인 200명 300명 선을 넘지 못하고 서는가 싶다가 무너지고 부흥하는가 싶다가 침체되어 처절하게 자신의 한계를 느낀다고 토로했습니다.
② 권사님 한 분은 시집온 후 지난 40년동안 남편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고 인내하며 살아왔는데 남편의 마음이 열릴 것 같지가 않습니다. 어쩌다 한번 교회 나왔다간 더욱 마음의 문이 굳게 닫힙니다. 최근엔 어머니와 함께 신앙생활을 잘해주던 자식놈들 마저 신앙을 버렸습니다. 이제는 온가족이 행복하게 신앙생활을 하리라던 꿈마저 아스라이 멀어져 가는 것만 같습니다.
③ 박 집사님은 하나님앞에 물질로 크게 쓰임 받으리라는 꿈이 있습니다. 지난 IMF때 직장에서 나와 조그마한 독립회사를 설립했습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회사가 발전하나 싶더니 최근 다시 회사가 큰 어려움에 부딪혀 정말 내가 회사를 운영할 능력이 있는 사람인가 자신감마져 가물거리고 있습니다.
④ ·직장에서 큰 과제를 맡고 밤을 지세우는 사람들.
·육신의 질병 때문에 이러다 내인생 끝나는 것이 아닌가 낙심하는 사람들.
·이웃 사람들앞에 인정받으며 서로 화목하게 지내고 싶은데 소중한 사람들이 내 곁을 떠나갑니다. 내 성질머리는 왜 이 모양인가 자학하는 사람들.
·행복한 가정생활이 내게는 불가능한 것인가? 남모르게 땅을 치고 우는 사람들.
·성숙하고 차원 높은 신앙생활의 행복을 누리고 싶은데 늘 낙심과 열심 사이를 반복하며 최근엔 자신의 이런 모습이 싫어지는 사람들.
이들 모두 여러고성 앞에선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어떻게 이 성을 정복할 수 있을까요?
스티븐 코비의 주장에 의하면 사람들은 사물과 사건을 볼 때 자신의 시각과 관점, 자신의 믿음과 경험, 자신의 패러다임을 가지고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공하는 사람이 되려면 성공적인 시각과 믿음과 패러다임을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비전과 꿈을 이루어 가도록 하시는가? 그 앞에 놓인 장애물과 문제의 성을 어떻게 정복하도록 도우시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II. 할례
이스라엘은 지금 막 요단강을 기적적으로 건넜습니다. 지금이야 개울물이 되었지만 당시엔 거대한 강이었던 요단강을, 그것도 만수가 되어 뚝까지 넘쳐 흐르는 요단강을 전적인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건넜을 때 이스라엘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습니다. 이런 추세라면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점령하는 것은 시간문제였습니다.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갈 참이었습니다.
한편,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기적적인 방법으로 건넜다는 소식이 가나안 사람들에게 전해졌을 때, 가나안 백성의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5장 1절의 말씀을 보십시다.
"가나안 모든 왕이 여호와께서 요단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네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의 연고로 정신을 잃었더라" - 「마음이 녹았고 정신을 잃었더라」
군사 전략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지금이야말로 가나안 땅의 첫 성인 여리고성을 공격할 적기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수아가 지금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적의 공격에 대비하여 교두보를 확보하거나 아니면 요단 강을 건넌 여세를 몰아 곧바로 진격 명령을 내리는 일일 겁니다.
그러나 여호수아 5장은 전쟁을 했다거나, 혹은 앞으로의 전쟁을 위하여 군사적인 교두보를 확보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고, 반면 가나안 사람들의 사기는 마음이 녹고, 정신을 잃을 정도로 땅에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께서는 여리고 성을 향해 진격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여리고성을 점령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백성이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고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5장 2-3절 말씀입니다.
“그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하시며 여호수아가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할례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하니라.”(2-3절)
"그때에"란 어느 때입니까? 요단강을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기가 하늘을 뒤덮을 때입니다. 반면에 가나안 사람들의 마음이 녹았고, 정신이 혼동스러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넋 나간 때입니다. 지금 출정하면 성공할 수 있을 바로 그때입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바로 그 때를 최대한 활용하여 가나안을 정복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할례를 행하라! 고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황당한 말씀입니까?
"할례"란 남자의 생식기 표피를 잘라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음을 선포하는 의식입니다. 이제 더 이상 육신적 가치나 질서로 살지 아니하고 언약의 백성으로 살겠다는 각오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천신만고 끝에 가나안 땅을 밟았습니다. 주위엔 온통 적들이 포진해 있습니다. 나무를 꺽어 활을 만들고 녹슨 칼을 갈고 바위에 돌창을 문질러 전의를 불태워야 할 시점에서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할례를 행하라! 이는 일종의 자살 행위와 다를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성민으로 살아갈 의식을 행하는 일은 당연한 일이지요. 그러나 문제는 하필 왜 이 시점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러다가 백성들의 사기가 식어지면 어떡합니까?·적들이라도 쳐들어 오면 어떡합니까?
·수술받은 군사들은 속수무책 당할 수 밖에없는 상황입니다.
왜 하필 지금 할례를 받아야 합니까? 왜 하나님은 성공의 문턱에 서 있는 백성들의 엉뚱한 문제를 꺼집어내어 재를 뿌리는 겁니까?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고자 하시는 목적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요단강을 갈라서 기적의 방법으로 건너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기적적으로 가나안 땅을 밟게 하신 목적을 4장 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땅의 모든 백성으로 여호와의 손이 능하심을 알게 하며 너희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토록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가나안 땅에 오게 하신 목적이 여기에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가를 드러내는데 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원토록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는 목적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서 성공하도록 인도하시는 목적이 이것입니다. 성공한 나를 통하여 위대하신 하나님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요, 성공한 내가 더욱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제 결론은 자명해졌습니다. 이땅에서 누가 성공을 해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축복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몫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사는 사람들,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사는 사람들에게 주어져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공 이전에 우리가 성공에 합당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땅히 순종해야만 함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사정에 의해서 순종하지 못하고 잊고 지내고 있는 하나님의 명령이 나에게는 없습니까? 마땅히 짜르고 버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버리지 못하고 짜르지 못하는 무엇은 없습니까? 성공하기 이전에 내가 마땅히 갖추어야 하고 준비해야 할 그 무엇은 없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40년을 고생하면서 이루기를 원했던 꿈이 무엇 때문입니까? 오직 가나안 땅을 정복하겠다는 것이 아닙니까? 이제 요단강을 건너고 사기가 충전하여 여리고 성을 공격하여 점령하기만 하면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거기서 중단시키고 길갈에 머물라고 하셨습니다. 계속하여 앞만 바라보고 전진한다고 하여 성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잠시 머물러 우리의 신앙의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순종하지 못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시하거나 잊고 있었던 나를 향한 하나님의 명령이 없었는지를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고 토요일 밤에 조용히 쉬고 있는데 저희 집 사람이 제게 시비를 걸어왔습니다. 당신은 나하고 결혼한 사람이요 일하고 결혼한 사람이요. 옆에 있던 제 아들이 한 수 더 떴습니다. "아빠는 일하고 결혼만 했어? 일을 낳지. 일을 키우지. 그 일을 결혼시키지. 또 일을 만들지. 일에 파묻혀 사는 사람이야. 아예 포기해."
할례를 행하라!
하나님께서는 할례받지 아니한 백성들에게 약속의 땅을 줄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임을 고백하지 않는 사람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성공을 이루지는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한 인생의 성공보다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임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겠다는 결단을 소중히 여기십니다.
성도 여러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큰 적은 여리고성의 사람이 아니라, 할례받지 아니한 그들 자신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장 먼저 점령해야 할 성은 여리고성이 아니라, 할례받지 아니한 그들 자신의 성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여리고성을 점령하기 전에 먼저 할례받지 아니한 그들 자신을 정복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성공으로 가는 길목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정복해야 할 것은 깨끗하게 죄를 끊지 못하고 흐지부지 하는 내 자신입니다. 나의 성공을 가로막는 주범은 바로 내 자신 앞에 있습니다.
할례를 받으셨습니까? 성령으로 말미암아 부패하고 죄된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으셨습니까?
성경은 말씀합니다.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로마서 2:28-29)
하나님의 사람으로 고백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겠다는 구체적인 결단을 하셨습니까? 하나님은 그 사람을 사용하셔서 성공이라는 여리고성을 점령하게 하십니다.
성도들이여!
앞만 바라보고 전진하는 것을 잠시 멈추어 서서 내 자신의 내면을돌아 보십시다. 앞만 보고 달려가는 것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열심히 일하는 것만이 최선은 아닙니다.
할례받지 아니한 더러운 것들이 내 안에 있어서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를 막고 있지 않은지 살펴보고 먼저 축복의 통로를 막는 자신을 깨끗이 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시간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짜르라! 단절하라! 버려라! 포기해라! 깨끗하라! 거룩하라!
III. 거룩성, 추수성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셀교회의 두 날개는 Holiness and Harvest - 거룩성과 추수성입니다.
교회성도들이 거룩해지는 것이요, 도시를 점령하는 추수성입니다. 거룩함에 대한 열망과 도시를 점령하는 비전이 없이 셀교회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싱가폴의 로랜스 콩 목사님은 셀교회는 성도들의 할례로부터 시작된다고 했습니다.
왜 셀교회가 할례로부터 시작이 되는가?
심상철 목사의 주장으로는 할례가 뭐냐? 너 셀교회 할래 말래? 그래서 할례랍니다.
거룩함에 대한 열망없이 주님이 세우시는 바로 그 교회는 세워지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할례는 비위생적인 부분을 짤라 냄으로 우리안에 있는 못된 본성과 잘못된 가치관을 짤라내어 하나님께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의 교회관을 짤라야 합니다. 이기적인 욕망을 짤라야 합니다. 성공주의 가치관을 짤라야 합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모두 짤라야 합니다. 부정적인 시각과 입술을 짤라야 합니다. 분열주의와 편당주의를 짤라야 합니다.
짜를 것 짜르고 일어설 때 하나님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9절)
여기서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할례를 행했을 때 "애굽의 수치가 굴러갔다"고 하셨을까요? 무할례자의 수치가 벗겨졌다 혹은 광야의 수치가 물러갔다고 하시지 않고 애굽의 수치라고 하셨을까요?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이번 할례를 행하기 전까지는 이스라엘 백성이 진정으로 애굽을 탈출한 것이 아니라고 보신 것 같습니다. 그들은 몸만 애굽을 떠났을 뿐, 마음속에는 늘 애굽의 노예 정신이 살아 있었던 것입니다. 노예 근성을 버리기전까지는 여전히 노예일뿐입니다.
이스라엘이 할례를 행하고 나자, 더러움을 짜르고 나자, 하나님께서는 이제부터 너희는 더 이상 애굽의 노예가 아니라 진정한 나의 아들들이며 진정한 자유인이라고 선포하십니다. 자기 멋대로 할 수 있다고 해서 진정한 자유인인 것은 아닙니다. 자유인이 아니라 오히려 죄의 종입니다. 자유인은 죄를 거절할 수 있는 힘이 있을 때부터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탄의 유혹을 정복할 힘을 기를 때 세상을 정복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을 거절할 능력이 있을 때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비전을 구현할 수 있습니다.
·애굽의 수치가 물러가야 하나님 나라 영광이 찾아옵니다.
IV. 유월절
할례를 행한 다음 그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10절 말씀을 보십시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 진쳤고 그 달 십사 일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고"
유월절이 무엇입니까? 처음 교회 나온 어떤 분은 6월 달에 무슨 행사가 있나보다 했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애굽으로부터 해방받은 해방잔치입니다. 전쟁을 앞두고 잔치를 벌였습니다. 싸우기도 전에 승리의 축제를 벌였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싸움을 위해서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벌써 싸워 이긴 싸움에 그들은 그냥 동참하러 간 것입니다. 그러니까 축제이지 전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승리와 축복을 확인하러 가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확인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우리 신자들에게 있어서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곧 나의 사건임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에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이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에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감격이 믿음입니다. 여호수아는 바로 이러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승리는 이제 내 것이다"하고 그는 싸우지도 않고 축제를 벌였던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다"라는 말씀처럼 안 보고도 벌써 증명을 가진 것입니다.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천국의 승리를 선취하는 역사, 이것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이적과 기사도 복음자체가 아니며 축복에 지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복음입니다. 예수앞에 감격하는 신앙입니다. 병이 나았고 환상을 보았고 방언을 했다는 것만 가지고 복음을 대체하는 것은 원둥치를 짜른 나무와도 같습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그 분을 통해 용서함 받고 구원 받은 사실입니다. 기독교는 앞을 봐도 예수요 뒤를 봐도 예수입니다. 시작도 예수요 마침도 예수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감사와 감격없이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유월절을 지켰다는 것은 애굽으로부터의 해방을 기뻐하는 일이요, 죄로부터의 용서를 축하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깨닫는 일입니다. 곧 예배시간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구원의 사실을 확인하는 것! 이것이 또 하나의 승리의 비결입니다. 이 감격 속에 살 때, 불평과 불만이 있을 수 없고 시기와 질투와 분쟁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감사와 찬송과 넘치는 사랑이 있을 따름입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이전에 유월절을 지키라"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주의 힘으로 가나안을 정복하게 될 것이다"라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가나안의 전쟁은 여호수아의 전쟁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전쟁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전쟁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싸우실 것입니다. 애굽의 바로와 하나님께서 싸우셨듯이 그리고 그 싸움의 절정이 유월절이었듯이 이제 바로와 싸우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가나안과 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을 정복하기 전에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어린양의 피를 발라야 가나안의 전쟁에서 삽니다. 어린양을 먹어야 가나안에서 승리합니다.
유월절이 무엇입니까?
애굽으로부터 우리는 이겼다는 선포식입니다.
유월절 잔치는 무엇입니까?
가나안 왕들로부터 이미 이겼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승리의 보증입니다. 약속입니다. 확인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험한 세상 살아가며 영적전쟁터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성공을 향하여 전진하기 전에 예수님(의 살)을 먹어야 삽니다. 예수님(의 피)을 마셔야 합니다. 주님의 사람은 다른 것 가지고 성공할 수 없습니다. 다른 것 가지고 혹 성공한다고 할지라도 그 성공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찢기신 살과, 주님께서 흘리신 피를 통해서 우리는 성공이라는 여리고를 정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하루 하루 세상으로 나가기 전에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천국의 빵을 먹고 천국의 음료를 마시십시오. 그전에 세상으로 나갈 생각을 마십시오. 세상의 방식으로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방식으로 살겠다고 결심하기 전에 여리고 성으로 나가지 마십시오. 자녀를 둔 성도 여러분, 자녀들에게도 이 사실을 분명히 하시기를 바랍니다. 열심히 공부하는 것만이 인생의 성공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성공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의미가 없습니다.
성공하기 이전에 하나님의 사람인가를 확인하십시오. 여러분의 자녀들이 마음의 할례를 받았습니까? 귀의 할례를 받았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는 구원의 잔치에 참여한 경험이 있습니까? 이것 없이 여리고성에 덤벼들지 마십시오.
V. 군대장관
이스라엘이 할례를 행하므로 거룩함을 회복하고 유월절 잔치를 통해 구원의 감격을 회복하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찾아오셨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할례를 행하고 유월절을 지킨후 아마도 여리고 성을 돌아보고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는 했지만 여리고 같은 난공불락의 성을 어떻게 공격해야 할지 마음이 답답했습니다. 그때 그는 칼을 들고 서 있는 한 장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웠을 때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섰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13절)
여호수아는 칼을 들고 자기를 마주 보고 서 있는 자가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에게 어느 편이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너는 우리 편이냐 아니면 적 편이냐 그때 그는 놀라운 대답을 했습니다.
"그가 가로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장관으로 이제 왔느니라 여호수아가 땅에 엎드려 절하고 가로되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14절)
그는 하나님의 군대 장관으로 천사들의 군대를 지휘하는 장군이었습니다. 그는 "지금" 도착했다고 말씀합니다. 왜 하나님의 군대 장관이 이렇게 늦게 도착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만일 그가 오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격했더라면 이길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군대 장관을 만났으니 이로써 이스라엘의 전쟁은 하나님의 싸움이라는 사실을 여호수아에게 눈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여호와의 군대 장관을 인격적으로 만났듯이 우리 주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이 영적 생활의 승리를 좌우합니다. 때문에 여러분은 이 전에 올 때마다 말씀의 칼을 뽑아 들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에 보면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이제 왔느니라”고 했습니다
.‘이제 왔다’는 말씀은 이전에는 오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이제 왔다는 말씀은 이전에는 하나님의 군대장관되신 예수님이 이스라엘 군사들 가운데 함께 계시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만일에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넌 후 곧 바로 여세를 몰아 여리고 성을 공격하였다면 반드시 실패했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그 가운데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여기서 말씀하는 “이제”란 언제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할례받고 유월절을 지킨 이제입니다. 그러므로 할례와 유월절이 없이 여리고성으로 가면 실패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우리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섰는지라....”(13절)
하나님의 군대장관이 가나안 땅을 공격할 여호수아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으로 가는 우리 모두에게 예수님의 임재하심이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하심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떠난 성공은 성공이 아닙니다. 예수와 함께 하는 실패는 실패일 수가 없습니다.
VI. 맺으며
사랑하는 여러분!
쫓기듯 인생을 달려오지는 않았습니까? 누군가 뒤에서 쫓아오는 것처럼 허둥대고 달려가지는 않았습니까? 나는 저만큼 달려가는데 예수님께서는 저 뒤에 서서 거시 잠시 머물러라. 길갈에 머물러라. 너 자신을 돌아봐라. 네가 달려간 길이 바른 길인지. 네 안에 있는 여리고성을 정복하고 살아가는 것인지. 하나님앞에 순종하라 말씀하실 때에 순복하여 순종하고 있는 것인지, 내면의 성을 진정으로 정복하고 영적인 전쟁으로 달려가고 있는지 바라보라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거룩이 능력이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써 감격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느니라. 영적인 전쟁은 하나님의 손에 붙들릴 때에만 하나님이 너를 대신하여 싸워 줄 때에만 너는 반드시 승리할 수가 있는 게야.
내 힘으로 발부둥치는 승리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거룩한 그릇이 되어지기만 하면 이제부터는 하나님이 하십니다.
하나님이 만지십니다.
나는 하나님의 승리를 확인하기만 하면 됩니다.
기쁨으로 동참하기만 하면 됩니다.
늘 내 앞에 우뚝 서 계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십시오.
그분을 보십시오.
이제부터 당신의 삶은 그분의 것입니다.
기억하십시다.
거룩이 능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