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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교회 담임목사님이 속상해서 이런 푸념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담임목사님이 교인들에게 “함께 통성으로 기도합시다”라며 통성기도를 강조하는데 그 주에 설교를 맡은 부목사님이 “하나님은 귀먹지 않으셨는데 왜 그렇게 소리를 지르며 기도하는 지 모르겠다”는 내용을 설교중간에 했다고 합니다. 또 담임목사님이 어느 주일에 전도를 강조하며 설교를 했는데, 부목사님의 설교중에 “구원받기로 작정된 자는 하나님께서 다 돌아오게 하시고 우리의 의지적인 전도노력으로 구원이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 담임목사님께서 어느 주는 십일조에 대한 설교를 했는데 부목사님은 “십일조를 의무적으로 드리는 형식적인 헌금은 율법주의가 되고 자발적인 연보를 통해 우리의 마음에 자원하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라는 말씀을 했다고 합니다. 드디어 담임목사님이 폭발한 일이 생겼는데 목사님께서 “성도는 모이기에 힘써야 한다”고 하면서 함께 모여서 예배드리는 것을 강조했는데 부목사님은 “삶속에서 성도가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이 예배이지 교회에서 모여 예배했다고 참 예배하는 신앙은 아니다”라고 설교했다고 합니다.
물론 어느 상황속에서, 어느 문맥속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는 지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겠지만 한 교회의 담임목사와 부목사가 이렇게 핀트가 맞지 않을 때는 정말 문제가 큽니다. 전체 목적에 맞게 어떤 분은 미리 준비하고 어떤 분은 그것을 실행하고 어떤 분은 그 일을 정리하는 역할이 분명히 맞아 떨어져야 우리는 사역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부터 우리가 주일에 살펴볼 마가복음 성경의 내용의 처음부분에 들어가면서 우리는 이 마가복음이 세례 요한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공생애 전에 예수님의 사역을 준비하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이미 알고 있습니다. 마치 영화제나 각종 시상식에서 펼쳐놓는 레드카페트처럼 미리 준비되는 일을 맡은 사람인 것입니다.
세례 요한처럼 우리는 주님의 일들을 감당한 사람으로서 우리도 어쩌면 주님을 돋보이게 만들 준비된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도구가 되고 주님의 일의 들러리가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정말 우리는 주님만을 부각시키는 삶을 살아야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세례 요한을 보면서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하는 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오늘 세례요한을 통해 우리의 삶의 의미와 자세, 마음가짐을 깨닫고 정말 주님을 높이는 인생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의 길을 예비한 자 세례 요한은 첫째로, 자신의 할 일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마가복음 1장 4절입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구약성경부터 우리를 구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시기로 작정되신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는 이스라엘백성앞에 오랜 침묵기를 지나 엄청난 메시지를 전하며 수많은 민중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할 때 사람들이 호응하며 따라다니는 인기를 끄는 설교자, 유명한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그가 유명하게 되었을 때 그는 그의 추종자를 만들고 그가 메시야라고 주장해도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단지 메시야를 준비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메시야가 오셔서 하실 일들을 위해 사람들의 마음문을 여는 역할만 하면 되기 때문에 오로지 죄의 문제에 대한 자각과 회개를 촉구하며 오로지 회개의 메시지만을 전하고 회개에 합당한 물세례만을 주며 그의 사역은 오로지 심령을 곧게 만들고 마음밭은 준비하는 역할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할 일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는 이 사명을 깨달았기에 그 사명속에서 할 일만 분명히 했던 것입니다.
미국 침례교회 선교사였던 짐 엘리엇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성경번역선교회(GBT)의 선교사이며 자체언어의 성경이 없어서 복음을 듣지 못하는 민족, 부족에게 찾아가서 언어를 배워서 성경을 만들어주는 사역을 하는 선교단체입니다. 그러다보니 산간오지의 문명화가 되지 못해 언어를 알지 못하는 부족들을 찾아가 그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 이들의 제일 큰 선교사역의 시작점이 되는 것입니다. 이 엘리엇선교사는 1956년 에콰도르에 식인 원주민들이 산다고 소문난 마을로 선교를 나갔다가 순교하신 분입니다.
이 분의 이야기를 영화한 선교영화 ‘창끝’ 의 영상화일이 제게 있기는 한데 한 번 전체가 봐야지 하면서도 보여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너무나 리얼한 묘사로 인해 정말 잔인한 장면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 짐 엘리엇선교사가 중남미 정글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이후 그의 숙소에서 발견된 일기장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결코 놓쳐서는 안되는 일, 그것을 위하여 결국 끝까지 붙들고 있을 수 없는 그것들을 버리는 사람, 그는 결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나의 사명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발자욱을 남기는 것이다.”
이 역사속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발자취를 남기기 위해서, 하나님께 쓰임받는 삶을 살기 위해서 청춘과 부와 명예와 권력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은 결코 어리석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 오래 살기를 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주님을 위해서 내 삶이 불타기를 원합니다” 그는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4절입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모든 인간은 자신의 인생가치관, 즉 사명에 따라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명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자신 스스로 자기 자신이 자신의 사명인 사람일 수 있습니다. 자신의 명예, 부, 권력, 명성등을 위해서 인생을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가족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가족을 부양하는 것을 최고로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런 인생들속에서 오늘 본문의 세례 요한은 자신의 사명은 자신의 뒤에 오시는 메시야께서 행하실 일이 잘 진행되도록 준비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사명을 깨달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이라면 그 어떤 일에도 만족하게 섬기며 살아갑니다.
19세기 말경 청나라 말기 혼란한 중국으로 선교를 나간 앤 월터 펀이라는 여성이 있습니다. 그녀는 젊은 나이의 아름다운 처녀이며 이제 졸업하면 직업도 결혼도 그냥 너무나 잘 될 일만 남았을 정도의 유능한 인재였을 뿐 아니라 외모도 출중했습니다. 그런 그녀가 의과대학을 졸업한 직후 선교사를 자원하여 중국으로 떠났습니다. 그 당시 중국은 혼란스러운 정세로 인해 사람들에게 살아서 돌아오지 못하는 위험한 곳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앤의 어머니는 210달러 값어치의 금을 손에 쥐어주며 중국에서 가서 ‘안전하다(safe)’는 단어 한마디만 수시로 전보를 보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얼마 후에 앤에게서 전보가 왔습니다. 내용은 어머니가 기다리던 ‘안전하다’가 아니라 ‘즐겁다(delighte)’였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고백입니다. 주님께 헌신한 사람은 안전과 편안함을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사명 속에서 즐거움을 찾으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 직무를 수행하면서 즐겁게 감사하게 수행하는 자세가 사명자의 자세입니다.
사도행전 2장 28절입니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셨으니 주 앞에서 내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므로”
즐거움과 기쁨의 근원이신 주님을 내가 알고 그 주님이 내 안에 계시니까 나도 즐거운 것입니다. 우리의 기쁨의 이유는 예수님이십니다. 어떤 일이 다 잘 되어서 오는 기쁨이 아니라, 주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신 것을 아니까 기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사명을 잘 알고 있습니까? 우리가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깨닫고 있습니까? 주님의 길을 따라가며 주님의 사명에 쓰임받는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이 땅에 해야할 일을 알고 그 일만 제대로 감당하면 되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의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를 날마다 기도하며 고민하며 날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해야할 일을 깨닫고 그 일을 잘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의 길을 예비한 자 세례 요한은 둘째로, 자신의 누릴 형편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마가복음 1장 6절입니다.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구약성경부터 우리를 구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시기로 작정되신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는 이스라엘백성앞에 오랜 침묵기를 지나 엄청난 메시지를 전하며 수많은 민중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할 때 사람들이 호응하며 따라다니는 인기를 끄는 설교자, 유명한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그가 유명하게 되었을 때 그는 그의 추종자를 만들고 그가 메시야라고 주장해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자신의 역할을 알았기에 자신의 할 일에 대한 더 이상의 욕심도 없었고 자신의 형편이 더 좋아질 것에 대한 욕심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추종하고 자신을 따르면 자신을 위해서 뭔가 해주려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요즘 젊은 청소년들로 구성된 가수그룹을 아이돌이라고 하죠? 이들의 팬심이 정말 대단합니다. 이들이 팬으로서 자신들이 좋아하는 아이돌을 위해 하는 일들을 보면 저는 마음속으로 ‘정말 그렇게까지 해야하나?’라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떤 팬카페의 회원들은 아이돌그룹의 어느 멤버가 생일이 되면 생일배너를 붙인다고 합니다. 그것도 어디에다 붙이냐? 버스정류장, 지하철역 광고판, 버스외부광고 등 여러 곳에 붙인다고 합니다. 생일잔치를 해주는 것은 기본이고 아예 생일홍보까지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이렇게까지 자기를 위해 섬기는데 얼마나 좋아할까요? 그 아이돌은 기분이 너무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은 자신을 따르는 수천, 수만, 수십만의 사람들을 뒤로하고 낙타털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광야에서 지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이렇게 지내는 것이 오히려 좋다고 생각하며 지냈지만 사실 신앙인이라면 궁핍과 어려운 형편에 상관없이 내가 어떤 일을 해야하는 지에 더 관심을 가지고 인생의 의미를 찾아가는 것이 바로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빌립보서 4장 12절입니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청년 서예가 이정화라는 분이 있습니다. 경기대학교 서예문자예술학과 졸업후 대학원도 서예학과를 나오고 올해 서른 한 살인 굉장히 어린편에 속한 서예가이지요. 그의 이름이나 얼굴은 몰라도 그가 드라마에서 그의 붓글씨는 많이 등장했다고 합니다. 동이, 해를품은 달, 기황후, 뿌리깊은 나무, 아랑사또전, 미스터션샤인, 호텔델루나, 육룡이 나라샤 등등에서 여배우가 붓을 들고 글을 쓸 때 팔만 보이면서 글을 쓴다든지 아니면 그 인물이 썼다고 표현된 붓글씨가 등장하면 그것은 모두 이 이정화라는 서예가가 썼던 글인 것입니다.
이렇게 유명한데 돈벌이가 좀 될 것같은데 사실 역사극 드라마가 계속 나오는 것도 아니고 드라마에 붓글씨장면 수십, 수백번 나오는 것도 아니고 한 장면 촬영할 때마다 일당으로 건당 얼마를 받아가면서 생활하다보니 돈이 될 때도 있지만 월 총수입이 수십만원 정도밖에 안 될 때도 종종 있다고 합니다. 예전에야 서예학원이라고 꽤 인기가 있어 서예학원 강사라도 할텐데 말입니다. 그나마 서예와 비슷한 켈리그라피라는 것이 인기를 끌면서 비슷하게 켈리그라피작업을 하기도 한다고 합니다만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녀가 왜 굳굳히 서예가의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느냐? 그것은 평생 이 일을 하겠다는 목표가 있기 때문입니다. 남다른 내면의 어떤 목표속에서 수입이 들쑥날쑥하고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형편이 놓여도 언젠가는 인정받고 대접받을 일이 있을 것을 기대하며 정통 서예의 명맥을 이어야한다는 생각도 있기 때문에 이 일을 하는 것일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에서도 어느 목표를 위해, 자기가 평생 하고 싶은 어느 직업을 위해 궁핍함이나 형편이 어려운 속에서도 그 직업을 가지고 굳굳히 일을 하는 사람을 종종보게 됩니다.
하물며, 영원한 생명의 가치를 깨닫고 영원한 천국과 영원한 형벌의 지옥을 아는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위해 살아갈 때 이 땅에서의 환난, 이 땅에서의 궁핍을 싫어하며 이 땅에서 잠시 좀 덜 먹고 좀 입고 좀 대접받지 못해도 진정한 삶의 목표, 인생의 가치를 깨닫고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요한계시록 2장 9절입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시편 34편 10절입니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너무나 잘 아십니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형편을 잘 아십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겨우 이 정도냐라고 생각하는 것마저도 하나님보시기에 가장 선한 것으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것이고 이렇게 살아가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은혜로 경험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정말 즐거운 인생, 행복한 인생, 복된 삶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굶주림도 은혜고 부족함을 경험할 때도 은혜입니다. 우리는 정말 은혜속에서 하나님 부어주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경험하며 날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은혜속에서 부족함과 어려움이 있어도 그 속에서의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며 기쁨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의 길을 예비한 자 세례 요한은 마지막 셋째로, 자신의 위치를 분명히 알았습니다.
마가복음 1장 7절입니다.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구약성경부터 우리를 구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시기로 작정되신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는 이스라엘백성앞에 오랜 침묵기를 지나 엄청난 메시지를 전하며 수많은 민중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할 때 사람들이 호응하며 따라다니는 인기를 끄는 설교자, 유명한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그가 유명하게 되었을 때 그는 그의 추종자를 만들고 그가 메시야라고 주장해도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은 자신은 오실 메시야 예수님전에 그 길을 준비하는 사람이요, 자신은 그 분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는 주님앞에서 2인자인 것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삶을 살면서도 자신에게 모든 삶을 맞추지않고 오히려 자신의 삶을 오실 메시야, 예수님에게 맞추며 살았습니다.
요한복음 3장 30절을 보십시오. 함께 일겠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누가복음 3장 16절도 보시겠습니다.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세례 요한은 자신이 대접받고 사람들이 자신을 그리스도로 따르는 것을 극도로 배척했습니다. 왜냐면 그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분명히 알고 자신의 이 땅에서의 역할이 어떤 것인지 분명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는 그는 그리스도의 신발끈을 푸는 종중에서도 가장 비천한 종이 하는 일을 하는 역할보다도 못한 존재라고 낮추며 메시야를 높이는 활동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신발 끈을 묶고 푸는 이 일이 하찮은 일이라고 할지라도 필요없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성경해석이 될 수 있습니다. 그 당시에 신발을 끈을 묶고 푸는 것은 주인이 직접하지 않고 종들이 했습니다. 그런 종이 없다면 주인이 직접 신발 끈을 묶고 푸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고 그로 인해 사회활동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할 정도의 세계였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신발 끈을 묶거나 풀어주는 것은 주인이 일을 하기 위해 외부로 출타를 하거나 외부에서 집으로 귀가를 하여 쉬려고 할 때 이 일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비천하기는 하지만 정말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그의 신발 끈을 풀어주는 것’이 우리가 크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매우 가치있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비록 세례 요한이 자신을 이렇게 낮추며 자신은 별 다른 능력있는 자가 아니라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에 대해 대단한 인물이라고 평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1장 11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그 밑에 마태복음 11장 14절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14절입니다.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분명히 세례 요한은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무런 지지기반도 없고 어떤 특별한 교육을 받았던 기록도 존재하지 않지만 갑자기 등장하여 사람들에게 회개의 메시지를 선포할 때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통해 전국적으로 소문이 나게 되고 지역의 본봉왕도 세례 요한을 두려워할 정도의 세력을 가진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그런 명성과 인기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명성으로 얻게 될 수 있는 재력도 별로 신경쓰지 않았던 것을 우리는 앞에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의 사역을 준비하는 역할인 것을 분명히 깨달았고 예수님의 신발끈을 푸는 종들중의 최하의 종의 위치에도 감당할 수 없을 만한 존재라고 자신을 정말 끝없이 낮췄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앞에서 정말 낮추고 낮춰야 합니다. 낮아지고 낮아져야 합니다. 내 위치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앞에서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겸손함이 있어야 합니다. 요즘 이 세상, 내가 누구인데, 내가 어떤 사람인데 날 몰라보고 날 이렇게 대접하냐 등등의 말이 우리 입에서 기본적으로 나오는 시대입니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뭐가 있는 사람일까 정말 내세울 것이 없어 저런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정말 우리는 우리 예수님을 우리의 인생의 깃발로 내세우고 우리 주님만 높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을 높이고 우리는 낮추면 우리 주님은 우리를 귀하게 쓰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마태복음 23장 11,12절입니다.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의 신발끈 풀기에 합당한 자라도 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지를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온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죽어주신 우리 예수님,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에게 날마다 은혜를 깨닫게 하시는 성령님의 그 사역에 신발끈을 푸는 존재가 얼마가 귀한 것인지를 깨달을 때 우리는 주님앞에 크게 쓰임받게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께서 어떻게든 쓸모있는 존재로 쓰시기를 기대하며 하루하루 우리의 존재와 위치를 깨닫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을까합니다.
우리는 이제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며 다시 오실 메시야의 재림을 준비하기 위해 고난받을 각오도 하면서 세례 요한이 초림 예수님을 준비하며 회개를 선포했던 것처럼 우리는 재림 예수님, 인류의 심판의 날을 준비하며 바른 인생, 죄악에 대해 회개하는 삶을 알리며 살아야 합니다. 이런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가 해야할 일을 매일매일깨닫고 우리의 부귀영화보다 이웃을 사랑하며 섬김과 봉사로 살아야가야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나의 존재가치는 우리 예수님에게 있고 예수님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가장 복된 일인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살았으며 낙타털 옷같은 거친 옷을 입고 살았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많이 따르는데도 가난한 삶을 살면서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저와 여러분, 혹시 저와 여러분은 뭔가 얻을 것이 있어야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예수 믿는 것으로 부자가 되고 명예를 얻고 좋은 형편을 얻으려고 예수님을 이용하는 듯한 신앙생활을 하지는 않습니까? 물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를 채워주시며 은혜가운데 살도록 도움을 주시기는 하지만 우리가 앞뒤가 바뀌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인생의 목표와 인생의 가치를 존재목적을 분명히 알고 주님을 위해 나의 모든 것을 드리며 살아갈 때 은혜의 채우심이 있는 것입니다. 정말 세례 요한의 인생을 보며 우리의 삶에서의 우선순위가 어디 있는 지를 다시 돌아보고 정말 하나님을 높이는 인생, 주님의 임재를 보여주는 인생 되시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