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의 다리를 놓는 사람들
인류 역사는 형제간의 갈등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창세기 전체는 그런 갈등과 화해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에덴 이후에 태어난 첫 사람 가인은 형제 살해자가 되었습니다. 이삭과 이스마엘은 적자嫡子와 서자庶子 사이의 갈등 때문에 갈라서야 했습니다. 야곱과 에서는 장자권을 둘러싼 경쟁으로 서로를 적대시했고, 요셉과 형제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했고 급기야 형제를 종으로 팔아버리는 악행까지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갈등 이야기만 전하지 않고 화해 이야기도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삭과 이스마엘은 아버지의 장례를 함께 치르며 화해했고, 에서와 야곱도 브니엘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울면서 서로를 형제로 받아들였습니다. 요셉과 형제들도 생의 시련을 거치면서 오랜 갈등을 끝내고 서로를 용납했습니다.
화해는 예수님의 가르침에서도 핵심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의 저자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엡2:14)라면서 주님의 사역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엡2:16). 화해야말로 예수님의 으뜸가는 관심이었다는 말입니다. 화해의 반대말은 불화일 겁니다. 그것은 상대방을 인정하거나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마음입니다. 마음의 담을 쌓는 것입니다. 그 마음의 바탕에는 상대방에 대한 분노와 멸시가 있습니다.
주님은 형제나 자매를 보고 성내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께서 금하신 분노는 ‘습관이 된 분노’ 혹은 ‘악의’입니다.
마음으로 남을 무시하는 사람은 말로도 남을 모욕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얼간이라고 말하는 사람”, “바보라고 말하는 사람”은 지옥 불에 던져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웃에게 가하는 모욕은 이웃과의 친교는 물론이고 하나님과의 친교도 가로막습니다.
예수님은 성내지 말고, 형제를 모욕하지 말 것을 당부한 후에 하나님 앞에 제물을 바치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네가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고 하다가, 네 형제나 자매가 네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나거든,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23-24)
살다보면 갈등이 없을 수 없지만, 그 갈등은 속히 풀어야 합니다. 시간을 끌수록 관계는 버름해지게 마련입니다. 그 마음에는 하나님이 깃드실 수가 없습니다.
누가 화해자(화평케 하는 사람)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까? 자기를 찢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몸을 찢어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자기를 찢는 사람만이 화해자가 될 수 있습니다. 네가 먼저 변해야 화해가 가능하다고 말한다면 화해는 불가능합니다. 미움과 질투와 멸시의 마음은 목에 걸린 가시와 같아서 우리 영혼을 황폐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신앙 공동체 안에 머무는 까닭은 적대감이 넘치는 세상에서 서로를 환대하는 삶이 가능함을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한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24) 말은 간단하지만 실천하기는 쉽지 않은 요구입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 애쓸 때 우리 영혼은 커집니다.
‘불화’의 세상을 ‘화’의 세상으로 바꾸는 것, 이것이 예수를 따르는 이들의 거룩한 소명입니다. 우리가 진정 화해와 공존을 모색한다면, 불화의 뿌리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낯을 찌푸리게 만드는 일들은 어두운 마음이 빚어낸 우리의 분신들일 뿐입니다. 유학자들의 가르침 가운데 ‘자송自訟’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자기에게서 잘못된 것을 보면 자기 안에 법정을 차려 놓고 자기와 송사를 벌이라는 것입니다. 자송하는 마음이 없을 때 우리는 타송他訟을 하게 됩니다. 모든 문제의 근원을 남에게서 찾는다는 말입니다. 혼신의 힘을 다하여 나의 작음을 알고, 나의 어둠을 알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때 우리는 비로소 ‘다리를 놓는 사람’이라는 칭호를 얻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