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살아간다는 것,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 또 누군가를 보내야만 한다는 것에 생각해본다. 살아가면서 수많은 인연을 맺거나 평생을 사랑할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가을 하늘처럼 눈부시도록 맑고 푸른 사랑이었다가도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처럼 그렇게 사람의 마음을 두드리기도 한다. 가끔 가슴 시리도록 아픈 이별을 경험하거나 혹독한 슬픔을 이겨내는 동안에도 인생에 대해 진지한 물음을 던지기도 한다. 삶과 죽음에 관한 생각에 몰입하고 있을 때, 세상을 향해 물음표를 던지던 날에 최승환의 <사십구재 시사회>라는 책을 만났다.
주인공 서준이가 다은에게 들려준 녹색꽃 정원 이야기는 그들에게 다가올 운명을 암시한다. 녹색꽃은 잎과 줄기와 같은 색으로 태어난 게 슬퍼서 깊은 사랑을 하는 사람에게만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마음이 깊은 사람은 세상을 떠날 때 녹색꽃들만 가득한 정원을 볼 수 있다. 녹색꽃의 정원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다음 생애에서 사랑했던 사람과 인연을 이어갈 수 있다. 꽃들은 세상을 떠나면서 사람들의 영혼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사랑이 식으면 꽃으로 피어나지도 못하고 죽어버린다. 하지만 영원히 사랑을 간직하는 사람에게는 세상에서 귀한 보석보다 더 보기 힘든 녹색의 꽃들만 가득한 정원을 보여준다. 영혼의 세계에서만 볼 수 있는 아름다운 녹색의 꽃! 죽은 다음 진실하게 사랑했던 사람들만이 볼 수 있는 꽃이 바로 녹색꽃이다. 서준은 다은에게 녹색의 꽃만이 가득한 정원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을 하고 싶다고 고백한다. 그랬다. 그들에게는 이미 녹색꽃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고 그들의 운명은 영원한 사랑을 꿈꾸었던 녹색정원에서 만날 수 있었다.
강아지는 6주를 키우면 주인을 알아보고 6개월을 키우면 주인 발걸음 소리를 알아듣고 6년을 키우면 자기 집에 온 귀신을 알아본다고 한다. 그녀는 자신이 왜 죽었는지 모른다. 현실이라고 믿었던 현실에서 그녀는 서준을 만나기 위해 많은 날을 보낸다. 서준의 영화 시사회에서 그녀는 비로소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서준이가 주는 흰 국화 다발을 받고 자기가 어떻게 죽었는지 환영으로 본다. 그것도 모른 체 그녀는 48일 동안 자기를 도와주었던 사람들의 꿈속으로 찾아갔던 것이다.
사십구재 마지막 밤. 그녀는 서준을 만나기 위해 둘만이 아는 장소인 헬스장 창문에 도착한다. 둥근 창문 앞에 선 다은! 과연 서준에게 다가갈 수 있을까. 숨 쉬고 있는 창문! 사랑으로 만들어진 창문! 서준에게 가게 해달라고 애원하지만 닫힌 둥근 창문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어찌해야만 하나. 다은의 목에 걸린, 서준이가 직접 만들어준 둥근 창문이 새겨진 목걸이에 슬픈 눈물이 떨어진다. 마침내 둥근 창을 통해 녹색꽃들이 핀 정원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녀는 녹색 꽃잎마다 수려하게 맺혀있는 이슬을 먹지 않고 고통을 감수하면서 서준을 만나러 간다. 곁에 있지만, 다은을 알아보지 못하는 서준, 그런 서준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다은! 멍돌이가 짖는 것을 듣고서야 서준은 그녀가 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볼 수도, 느낄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상황이다. 시간은 자꾸만 자정으로 향하고, 저들을 어떻게 해야 하나? 서준은 다은을 보기 위해 매니저인 한승우 차에 뛰어든다.
다은의 영혼이 사라지기 몇 분 전, 가까스로 서준이는 다은을 만난다. 영혼이 되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 그들. 하지만 사십구일이 지나야 그들은 다시 만날 수 있다. 영혼의 세상에서는 알아볼 수 없다면서 목걸이를 건네주는 다은. 유리 벽 저 너머로 사라지는 다은과 홀로 남겨진 서준, 과연 그들의 만남이 이루어질까?
슬픔은 아픔을 보듬고 아픈 이별은 또 다른 아픔의 눈물을 쏟아내게 한다. 그래서 그들의 사랑은 아프고, 슬프고 가슴 저리지만 사랑이라는 씨앗을 품을 수밖에 없다. 사십구일이 지나면 그녀 곁에 가겠다는 서준의 마지막 슬픈 이별식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으로 처리된다.
소설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또 다른 반전이 등장한다. 지금까지 이야기는 영화 시사회의 내용이다. 주인공 이름은 실존 인물이며 그녀는 감독 표서준의 여자 친구다. 여자 친구가 쓴 소설을 바탕으로 영화가 제작되었으며 여자 친구는 현재 식물인간으로 살아가고 있다. 조각 시계탑, 그녀가 살았던 집은 현재 사고로 자식과 손녀를 잃고 할머니가 홀로 살고 있다. 사연을 알게 된 할머니는 당신이 저세상으로 가시는 날, 그녀에게 둥근 모양의 장식 반지를 끼워주며 눈물을 흘린다. 눈물은 다은의 얼굴 위로 그리고 그녀 손에 끼워진 반지에도 눈물이 와닿는다. 할머니의 마음을 알았을까, 아니면 둥근 모양의 장식 반지가 효력을 발생한 것일까. 할머니가 죽어가는 동안 그녀는 서서히 깨어난다.
별이 빛나는 이유는 캄캄한 어둠이 친구가 되어 주기 때문에 밤에만 빛난다. 사랑도 이별이 있어서 슬프지만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나이가 들어갈수록 이별의 경험을 참 많이도 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한 명씩 떠나보낼 때의 심정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눈이 퉁퉁 붓도록 울어도 멈추지 않고, 목구멍으로 물 한 모금조차 넘기지 못하고, 바람 한 줄기에도 쓰러질 것 같은 시간…. 그리고 환영을 보기도 한다.
언제부턴가 죽음에 대한 철학이 생기게 된다. 신화학적으로 생명을 뜻하는 달은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기도 하고 생명을 앗아가 또 다른 세계로 인도한다. 달은 죽음의 신이다. 사람이 죽으면 사람의 영혼은 달세계로 올라가 그곳에서 산다. 달은 사람들을 어둠과 재앙으로부터 지켜주기도 하지만 새로운 세계로 인도하는 인도자이다. 빛을 먹고 자라는 초승달이 보름달이 되고, 그 보름달이 지상에 빛으로 남기고 떠나면 그믐달이 찾아온다. 그러면 또다시 한 개의 빛으로 다시 초승달이 떠오른다.
어두운 하늘은 달과 별이 있어 아름답다. 또한 인생이 그래도 살아갈 만한 것은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녹색꽃 정원의 이야기처럼 인생에서 그런 사랑을 한 번 꿈꾸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사랑이 때론 아픔을 주기도 하지만 살아가는 시간을 견딜 수 있는 버팀목이 되기도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