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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20일 보현사 주차장에서 올려다본 대관령 고속도로 교각... (09:49)
보광리 普光里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에 속하는 법정리.
동쪽으로는 관음리와 위촌리 및 사천면 사기막리, 서쪽으로는 도암면 횡계리와 사천면 사기막리,
남쪽으로는 어흘리, 북쪽으로는 사천면 사기막리에 접해 있다.
[명칭 유래]
신라 때에 낭원 대사가 세운 보현사(普賢寺)의 ‘보’ 자를 따고
마을이 빛을 내는 곳이란 뜻에서 ‘보광’이란 마을 이름이 생겼다.
[형성 및 변천]
보광리(普光里)는 본래 강릉군 성산면 지역에 속하였는데 보현촌, 보광동, 보갱이라 하다가
1916년 무일동, 삼왕동, 무시골을 합해 보광리라 했다.
1955년 9월 1일 명주군에 속하였다가, 1995년 1월 1일 도농 통합으로 강릉시에 편입되었다.
예로부터 전해지는 보광리 내의 주요 지명으로는 무시골, 절골, 보겡이, 삼왕동, 송명동, 백양동 등이 있다.
무시골은 보현사 앞과 보현들 사이에 있는 지역으로 안무시골과 바깥무시골로 나누어진다.
옛날 문수보살이 살던 터가 있어 무시 터라고도 하며,
또한 무시를 무쇠 또는 물쇠라 하여 수철동(水鐵洞)이라고도 한다.
절골은 폐교된 보광 초등학교에서 보현사까지의 깊은 계곡으로 보현사가 있어서 생긴 이름이다.
보겡이는 보광 초등학교에서 삼왕(三王) 사이에 있는 내 서쪽 마을이다.
삼왕동(三王洞)은 명주군왕릉 앞에 있는 마을로 명주군왕(溟州郡王) 김주원(金周元)이
죽은 다음 아들 둘이 이곳에 머물러서 ‘삼왕(三王)’이라 했다고 한다.
송명동은 삼왕동에서 내 건너 서쪽에 있는 골로 골 안에 기도원이 있으며,
옛날 이곳에 송명암(誦明庵)이란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백양동은 보광 초등학교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현황]
보광리는 강릉 지역 내의 주요 송이버섯 생산지의 하나로 보광 1리와 보광 2리의 2개의 행정리로 이루어져 있다.
보광리 일대는 주요 문화재들이 많이 보존되어 있는 지역으로 유명하다.
우선 보광 1리 마을 뒤 선자령 낙맥 아늑한 곳에 보현사가 있으며,
여기에는 보물 제191호인 낭원대사오진탑, 보물 제192호인
낭원 대사 오진탑비 등을 비롯한 많은 문화재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또한 보현평에는 가마터가 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권 153 강릉 대도호부에 ‘자기 소일재부 보현촌’이란 기록이 있는데
이 가마터가 보광 2리에 있는 사기점으로 추정된다.
보광 2리 마을 뒤에는 명주의 옛 왕인 명주군왕릉[강원도 기념물 제12호]이 있다.
명주군왕릉 입구에는 삼왕사와 생육신의 일인인 매월당 김시습의 영정을 모신 청간사가 있다.
그 외에도 마을 맨 안쪽에는 강원도 기념물 제28호인 강릉 대공산성이 있다.
보광리는 전형적인 농·산촌 마을로 논농사보다는 밭농사가 발달해 있는 지역이며,
최근 보광리에서는 힐링과 농·산촌 체험을 위한 프로그램들이 운영되고 있으며,
또 전망 좋은 곳곳에는 펜션들이 지어져 관갱객들이 내방하는 농촌관광의 명소로 발전하고 있다
원추천인국
어명정 구간지기..인디언캡님 & 하비님
국장님 인사말
사무국 실땅님과 하비님 ..(아 ~ 배경이 하필 화장실...)
좌로부터 키키,솜솜,미수기,신시아,산두꺼비님.....
사무국 요정(?)들과 버프와 팔토시 이후.... 오늘은 손수건을 선물하고 있는 산타 국장님
구간지기님들 인사...
습하고 무척 더울 줄 알고 각오를 하고 참석했는데..... 간간이 불어 주는 바람이 너무 고마웠다.
수정님
어명정길 출발을 한다..... 보현사와 어명정길 갈림길에서....(10:11)
보현사 普賢寺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보광리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 월정사 소속 사찰.
건립초기에는 보현산사 지장선원(普賢山寺 地藏禪院)이다.
일반적으로 산명을 사명으로 쓰면서 또 다른 사명을 쓰기도 한다.
즉, 산의 이름이 보현산이므로 보현산사라하고 사명은 지장선원이라 하였다.
[건립경위]
굴산문의 개산조인 범일국사(梵日國師)의 법(法)을 이은 낭원대사(朗圓大師)에 의해 개산 된 사찰이다.
굴산산문의 개산조이고 낭원대사의 스승인 범일국사가 889년에 입적하자
부도와 비석을 세우고는 민규 알천의 지원 아래 보현사에 주석하게 되었다.
보현사의 창건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적어도
범일국사가 입적하는 889년에서 924년 사이에는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형태]
보현사의 가람배치는 중정식 산지가람배치를 따르고 있다.
신축한 천왕문을 중문으로 삼고 정면에는 대웅전을 배치하였으며, 동-서로 요사를 두었다.
대웅전의 서측으로 영산전과 삼성각을 각기 배치하였다.
현재의 가람배치는 동-서로 이어지는 자연지형에 남-북축선으로
누각-중정-[석등]-[석탑]-대웅전으로 이루어진 중심축을 두고 있다.
창건초기의 가람배치도 현재와 같이 대웅전을 축으로 하는 남-북축선을 하고,
사격이 커지면서 동-서를 축으로 하는 가람배치가 추가된 것으로 보인다. 산의 능선에 암자터가 남아 있다.
[현황]
경내에는 지정문화재로 낭원대사 오진탑(보물 제191호)과 낭원대사 오진탑비(보물 제192호),
대웅전(강원도문화재자료 제37호)이 있다.
이외에 법당 안에는 조선 후기에 조성된 목조삼존불이 봉안되어 있고,
법당 앞에는 3층 석탑재, 석등 부재, 사자석 등이 있다.
보현사의 법맥에 대하여 낭원대사 이후에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나 강릉시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미타계좌목(彌陀契座目)』에 의하면
승속·남녀·반상이 모두 동참할 수 있는 보현사의 향도조직(香徒組織)이 결성되었음을 볼 수 있다.
죄목은 조선 숙종 7년(1681)과 45년(1719), 순조 19년(1819)과 28년(1828),
헌종 13년(1847)에 각기 서문과 계칙 등이 작성되고 있다.
이는 보현사가 1681년 이후에 계속하여 지역주민과 함께하는 사격을 보여주고 있는 면에서
조선후기 사찰의 사상적 계보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관음사에는 ‘건륭오십구년갑인(乾隆五十九年甲寅)
/ 팔월일강릉보현사(八月日江陵普賢寺)
/ 대종기(大鐘記)’ 라 주조된 범종이 있는데,
건륭 59년은 1794년(정조 18)으로 『미타계좌목』에서도 보이듯이
보현사의 법등이 계속되고 있음을 유물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2005년 강원문화재연구소에서 사찰 동측의 식당선원 예정부지를 발굴조사한 결과
10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해무리굽 청자 편과 금동풍탁 11점,
그리고 조선시대의 분청사기와 백자편들이 다수 출토되었다. 사찰 입구에는 조선 후기에 건립된 부도 20기가 있다.
[의의와 평가]
보현사는 강릉 지역에 현존하는 최고의 사찰로서 굴산산문의 법맥을 잇는 사찰이다.
어명정길은 초장부터 된비알이다.... 무더운 날씨에 오르기가 제법 버겁다...(10:12)
무더위와 싸우면서 오르고 또 오른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첫 번째 쉼터에서.....(10:30)
레아님 걸어오는 모습이 힘들었는지... 인생 다 산 표정이다..ㅎ
혼수상태 교주의 설교를 잠시 들으면서.... 혼수상태에 빠지고 있는 신도들....
임도를 걷다 보니 어명정이 시야에 흐릿하게 들어온다...(11:34)
산에서 어명을 받은 소나무들
▲ 국보 1호 숭례문 복원에 사용할 소나무를 벌채하기에 앞서 대목수가
소나무 밑동을 도끼로 내려치며 ‘어명이요’를 세 번 외치고 있다.
광화문의 강릉 소나무
강릉의 둘레길인 ‘바우길’ 구간 중에 ‘어명을 받은 소나무길’이라는 별난 이름을 가진 코스가 있다.
대관령 아래 성산면 보광리에서 명주군왕릉까지 12.5㎞ 산길이다.
이 길이 특별한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광화문 복원과 관계가 깊다.
지난 2007년 광화문 복원 때 기둥으로 쓸 소나무를 여기서 벌채했다.
길 중간에 있는 ‘어명정(御命亭)’은 그 사실을 알려주는 상징적 시설이다.
아름드리 금강소나무를 베어내면서 옛 예법에 따라 ‘어명을 받아 벌채한다’는 것을 알리는
고유제를 지내고, 베어낸 그루터기에 정자를 세워 벌채의 뜻을 기렸다.
한국인에게 소나무는 인생목(木)이면서 민족의 나무이다.
태어나면 소나무 가지로 금줄을 쳐 액운을 막고, 소나무 집에서 살다가 죽으면
소나무로 만든 관에 육신을 담아 솔숲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희로애락, 생로병사를 함께해 온 소나무 이야기로 말하자면 강릉은 화수분 같은 곳이다.
해풍과 왜적의 침입을 막아 줬다는 바닷가 송정의 울창한 해송림에서부터
신라 화랑들이 심고 가꿨다는 한송정 송림, 오죽헌의 율곡송(松) 등등.
소나무 이야기는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도처에 즐비하다.
오대산 자락 첩첩산중, 부연동 마을에는 호랑이 전설을 간직한 ‘제왕솔’이 위용을 뽐내고,
100년 전에 뿌린 씨가 400㏊ 국내 대표 소나무 군락지를 이룬 대관령 솔숲은
산림청에서 아예 ‘문화재 복원용 목재 생산림’으로 지정해놓고 있을 정도다.
율곡은 동시대 강릉 향리의 어른이었던 임경당(臨鏡堂) 당주 김열(金說)이
집 주변에 선친이 심고 가꾼 솔숲이 후대에 모두 베어 지지 않을까 걱정하자
“선대에 손수 심은 소나무에 잠깐만 눈길이 스쳐도 어버이 생각이 불현듯 솟구칠 텐데, 어찌 함부로 범하겠냐”며
저 유명한 호송설(護松說)을 남겼다.
그런 강릉 소나무가 지난 주말에 새롭게 개장한 서울 광화문 광장 산책로에 조경수로 심어졌다.
산책로 사이로 광화문과 북악이 한눈에 들어오는 절묘한 배치다.
광화문 기둥에 먼저 사용된 어명정 소나무와 짝을 이뤄 대한민국 심장에서
다시 천년을 살 강릉 소나무가 더없이 귀하고 자랑스럽다.
/ 강원도민일보.
어명정 도착...(11:35)
강릉 성산면 ‘어명정(御命亭)’ 등산로는 ‘어명을 받은 소나무길’
▲ 강릉시 성산면의 바우길 구간인 ‘어명을 받은 소나무길’에 있는
‘어명정’ 정자. 광화문 복원용 소나무가 벌채된 자리에 정자를 세웠다.
삼척과 강릉, 양양, 경북 울진 등 동해안은 금강송 산지로 유명하다.
송진이 가득 차 비를 맞아도 썩지 않고, 단단하기가 비할 데 없어 절대 부러지지 않는 최고의 목재다.
조선시대에는 누런 속살을 창자에 비유해 ‘황장목(黃腸木)’이라 불렀고,
금 표(禁標)를 세워 함부로 베는 것을 막았다.
금강소나무의 고장인 이 지역의 산을 등산하다 보면 이렇게
‘어명(御命)’에 의해 잘려나간 큰 소나무 흔적을 가끔 발견하게 된다.
이 고장이 예전에는 궁궐에서 사용할 목재를 얻기 위해 입산과 벌채를 금하는
‘황장금표(黃腸禁標)’가 많았던 곳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강릉의 ‘대공산성’ 등산 코스를 한 바퀴 돌면서 만나게 되는
성산면의 ‘어명정(御命亭)’은 이름 자체에 ‘어명’이 들어있어 더욱 이채롭다.
어명정은 지난 2007년에 광화문 복원에 사용할 금강송을 베어낸 자리에 세운 정자인데,
바닥을 유리로 만들어 당시 잘려나간 거대한 금강송 그루터기를 확인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도 이채롭다.
▲ 어명정 정자 한가운데는 유리 바닥으로 이뤄져 벌채한 소나무 그루터기를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아름드리 금강송 3그루를 벤 2007년 당시 어명정의 벌목 행사 또한 임금의 명에 의해 벌목한다는 교지를 전하고,
산림청장과 문화재청장이 직접 제례를 올린 뒤에 “어명이요”를 세 번 외치고 이뤄졌다.
강릉이 자랑하는 걷기 길 명소인 이 구간 등산로는 이후 ‘어명을 받은 소나무길’로 이름 지어졌다.
소나무를 베어 낸 주변에는 어린 소나무를 심었다고 하니,
예나 지금이나 소나무는 우리 산에 없어서는 안 될 각별하고도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할 수 있다.
봄철 건조기만 되면 전국 각지에서 산불이 끊이지 않는 지금, 금강송의 최대 적은 산불이다.
죽어서도 전통 건축물의 핵심 목재로 천년을 다시 사는 금강송이 부디 고이 보존되기를 기원한다.
/ 강원도민일보.
구간지기님이 점심 식사 장소와 식사 후 만 날 곳을 설명해 주고 있다...(11:38)
대공산성과 술잔바위 갈림길에서...(12:00)
강릉대공산성 江陵大公山城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보광리와 사천면 사기막리에 걸쳐 있는 고대 산성.
[명칭유래]
백제의 시조 온조왕(溫祚王)이 도읍지로 정하고 군사를 훈련시키기 위하여 축조하였다는 전설과
발해의 대씨(大氏)가 쌓았다 하여 대공산성(大公山城)이라 불린다는 전설이 있다.
또한 가까운 곳에 보현사가 있어 보현산성(普賢山城)으로도 불린다.
전설로 전해 오는 백제의 온조왕이나 발해의 대씨가 쌓았다는 설은 민간에 전하는 이야기 거나 오류인 것으로 보인다.
5세기 이전에 이 지역은 고구려 영역이었고 백제는 이곳까지 힘이 미칠 수 없었으며,
5세기부터 시작된 신라와 말갈의 접경 지역은 니 하성(泥河城)으로 판단하는 견해도 있으나
발해의 대씨가 축조한 성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9세기 말엽까지 신라와 말갈이 대치한 곳이 니하였을 것이라는
견해를 인정한다고 해도 이 성과 발해 대씨와의 관계는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조선시대 지리지들이 보여 주는 보현사의 존재와 관련한 명칭으로 보현산성이 더 타당성 있어 보인다.
한편, 산성에 대한 옛 기록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처음 보이며 ‘파암산석성(把巖山石城)’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 후의 지리지 기록에서는 모두 ‘보현산성(普賢山城)’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문화유적총람(文化遺蹟總覽)』에서는 ‘대공산성(大公山城)’으로 기록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문화유적총람(文化遺蹟總覽)』에서 이 성을 ‘대공산성(大公山城)’으로 칭한 것은 오류라고 생각된다.
이를 인정하고 비판 없이 문화재지정 명칭으로 삼은 것도 잘못이며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보현사(普賢寺)가 신라 말 굴산사의 말사로 개창된 후 본 산성이 위치한 산의 명칭이 보현산으로 불렸으며,
이에 따라 모든 지리지들이 ‘보현산성’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보현사와 깊은 관련이 있는 성곽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렇게 부르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판단된다.
[위치]
대공산성(大公山城)은 강릉시에서 서쪽으로 약 20㎞ 지점에 위치한 높이 2m, 둘레 3㎞ 정도의 석성(石城)이다.
보현사에서 서북 방향 약 2㎞지점, 해발 1,131m의 곤신봉(坤申峰)에서 동북 방향으로 약 1.5㎞ 지점에 위치해 있다.
노인봉에서 곤신봉, 능경봉으로 이어지는 태백산맥에서 동쪽으로 돌출된 944m의 보현산에 타원형으로 축조되어 있다.
이 성은 남쪽의 제왕산성, 동남 방향의 칠봉산성, 명주성 등에 둘러싸인 고대산성의 거점 성으로 판단된다.
[형태]
전체적으로 동북에서 서남 방향으로 길쭉한 타원형의 평면 모양을 하고 있으며,
성벽은 두께 40 ×50 ×20㎝ 정도의 돌로 쌓았다. 높이 1.5~2.5m, 상부 폭 1.5m, 하부 폭 7m 정도로 축조하였다.
성 전체 모양은 남서에서 북동으로 길고, 북서에서 남동이 좁은 형태이다.
북동의 동문지로 보이는 곳은 성안의 물이 흘러내리는 수구(水口)이며 성내(城內)의 가장 낮은 지역이다.
바깥쪽은 석벽(石壁)이고, 안쪽은 두께 약 5~7m 정도의 토벽(土壁)으로 쌓은 구조이다.
동문지(東門址)의 안쪽은 성벽과 나란하게 방공호 모양(內隍)을 두고 그곳으로 물을 흐르게 하여 성벽을 보호하고 있다.
산성은 남서쪽 끝 남문지(南門址)가 있는 정상 부근과 북쪽 끝이 돌출되어 치성(雉城)처럼 되어 있다.
남문지 근처에 망루대지가 있으며 남동쪽으로 폭 약 5m, 길이 79~97m의 치성 끝에도
망루대지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산성의 방어 정면이 남쪽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대공산성은 남고북저형의 지형에 축조되었으며, 현재 성벽도 동남 방향으로 잘 남아 있으며 북벽은 붕괴되었다.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 이 산성은 신라와 고구려와의 무력 충돌이 빈번했던 5세기경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생활민속적 관련사항]
성의 중심에서 북쪽지역 저지로 내려간 곳에 우물 2곳이 있고,
남쪽의 우물물이 북서쪽으로 흘러내리고 그 위 북쪽에 건물지로 추정되는 곳이 있다.
성의 정문으로 생각되는 동문 근처에 석원(石垣)을 갖춘 우물이 있으며,
성안의 수원은 풍부하며 우물 근처에 일부 늪지대가 있다.
동문 입구에 2m 간격으로 주초석이 앞쪽에 있는데 95 ×104㎝의 장방형 석재이다.
석재는 성문 안쪽에서 22㎝ 정도에 2개의 둥근 문추공(門樞孔)이 있는데 지름 25㎝, 깊이 3~5㎝이며
바깥쪽으로 가로 17㎝, 세로 9㎝, 깊이 3㎝의 네모진 구멍이 2개씩 있어 성문 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 안에는 건물지로 보이는 평탄지가 곳곳에 있으며,
평탄지에서는 고려~조선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많은 양의 토기 편과 와편, 백자 편, 그리고 청자편도 일부 산재해 있다.
[현황]
을미의병(乙未義兵) 때 민용호(閔龍鎬) 부대는
1896년 1월 13일 원주에서 일어난 이후 약 10개월간 대일항전을 하였다.
민용호 부대는 원주에서 강릉으로 동진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보현산성에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민용호는 정부군이나 일본군과 평지에서 맞서기보다는
산악 지대인 관동 지방의 지리적 이점을 최대한 활용하였던 것이다.
민용호 부대는 1896년 1월 17일 원주를 떠나 1월 29일 대관령을 넘어 강릉성 밖의 구산까지 행군하였으며,
2월 1일 강릉에 입성하였다. 그 후 원산으로 진출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4월 초순에 강릉으로 귀환하였다.
관군의 공격으로 5월 24일 강릉에서 물러나 동해안을 따라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현산성이 을미의병 때 사용되기는 하였으나
격전을 치러 낼 정도로 의병의 근거 성(城)으로서는 활용되지 못하였던 것 같다.
[의의와 평가]
자세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하여 고대사 속에서 이 성곽의 비밀을 완전히 알 수는 없지만,
강릉 지역의 가장 오랜 산성이며 영동과 영서를 잇는 대관령 지역에 축조되었던 고대 산성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1979년 5월 30일 강원도 기념물 제28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강원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갈림길 어느 모퉁이에서 식사를 한다...(12:10)
술잔바위 위에서 주니정님......
술잔 바위를 통째로 구입해 버린 키키 님....
외로운 술잔 바위 분위기에 취 해 버린 여성 동지들....
술잔 바위와 캡님....
아름답기 그지없는 소나무 숲.....
오후 발걸음을 시작한다....(12:55)
무언가를 닮은 것 같은 야릇한 나무...
자연이 만들어 낸 요상한 바위...
애기도라지꽃
산불 감시 초소 공터에 도착..잠시 휴식을....(13:30)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잠시 망중한을.....(동그라미홍님.... 순간 포착이 절묘...ㅎ)
동상이몽 (同床異夢)
어명정 길 종착지..... 명주군왕릉으로...
부채를 흔들면서 요염하게 서 있는 주니정님...
어명정길 종착지에 도착해서 스탬프를 찍으면서...(14:42)
명주군왕릉 (溟州郡王陵 김주원 무덤)
명주군왕릉(溟州郡王陵)은 조선 중기에 김주원(金周元)의 후손이 강릉의 지방관으로 파견되어 조성하였다.
김주원이 강릉에서 사망하여 묻혔을 가능성이 크지만,
현재의 명주군왕릉이 원래의 무덤 자리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무덤의 주인으로 알려진 김주원은 신라 중대 말~하대 초에 활약한 인물이다.
선덕왕(宣德王)이 후사를 남기지 않고 죽자, 왕위를 차지하기 위한 권력 투쟁이 벌어졌다.
김주원은 무열왕의 직계 후손이었으나, 내물왕계인 김경신에게 패배하여 명주, 지금의 강원도 강릉으로 퇴거하였다.
강릉은 옛 하슬라주로서 신라 중고기 이래 영동 지역을 통제하는 거점이었다.
원성왕으로 즉위한 김경신은 김주원을 제거하지 않고,
오히려 명주군왕으로 책봉하고 동해안의 여러 지역을 식읍(食邑)으로 지정해 주는 등 우대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하여 김주원의 후손들이 대대로 강릉 지역에서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따라서 김주원의 무덤이 강릉에 있었음은 분명 하나,
원래 무덤의 위치는 기록이 없고 고고학 조사도 이루어진 바 없다.
형태와 특징
묘역은 계단식으로 조성되었는데, 무덤 두 기가 위아래로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두 무덤 모두 평면이 장방형이고 둘레는 다듬은 판석으로 감쌌다.
아래쪽 무덤 앞에 상석, 장명등, 망주석, 동자석 등 석물을 배치하였다.
금석문
아래쪽 무덤 앞에 ‘명주군왕(溟州郡王) 김주원지묘(金周元之墓)’를 새긴 묘비가 있다.
무덤 오른편으로 팔작지붕 모양의 머리를 올린 다른 비석이 있는데, 전면에 ‘명주군왕지묘(溟州郡王之墓)’라고 새겨졌다.
삼왕동 三王洞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보광리에 있는 자연 마을.
[명칭유래]
명주군왕(溟州郡王)인 김주원(金周元)과 그의 아들 두 분이 이곳에 있어 ‘삼왕(三王)’이라 한 데서 유래되었다.
삼왕동 사람들은 보광리[보겡이] 삼왕이라 하지 않고 삼왕보겡이라 하는데
이 마을은 보광리에서 제일 크고 예부터 반촌(班村)이라서 득세하여 이렇게 부른다.
[형성]
신라 37대 선덕왕(宣德王)이 세상을 떠나자 대를 이를 왕세자가 없어
대신회의에서 김주원(金周元)을 왕으로 모시기로 했다.
강릉김 씨의 시조 명주군왕 휘(諱) 주원(周元)은 김알지의 21 세손으로 신라 29대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6 세손이다.
그러나 서라벌 북쪽 20리 지점에 살던 김주원은 큰 비로 알천(閼川)이 범람하여 서라벌로 올 수 없었다.
신하들은 하늘의 뜻이라 하여 상대등인 김경신(金敬信)을 왕으로 삼았다.
왕위에 오르지 못한 김주원은 외가인 명주로 왔는데 786년(원성왕 2)에
김주원(金周元) 공을 ‘명주군왕(溟州郡王)’으로 봉하고 오늘날의 강릉, 양양, 삼척, 평해, 울진을 식읍으로 주었다.
명주군왕(溟州郡王)이 돌아가시자 아들 두 분이 이곳에 묘를 쓰고 머물렀다.
후에 이들 후손이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김주원은 명주[9군 25현]를 다스리며 후손들이 세거 하게 되면서 강릉을 관향(貫鄕)으로 하였다.
[자연환경]
삼왕동은 산과 계곡을 따라 형성된 마을로 마을 중심부로는 보광천이 흐르고 있다.
[현황]
삼왕동에는 명주군왕릉, 1960년 이승만 대통령이 비문을 지은 명주군왕김주원신도비,
재실 숭의재, 명주군왕의 5대 조인 신라 29대 태종무열왕의 위패를 봉안한 전각인 숭열전[1979년 창건],
생육신이었던 매월당 김시습을 모신 사당인 청간사 등이 있다.
보광천 상류에는 보광리 분청자요지가 있으며,
삼왕길로 이어지는 산 위쪽으로는 사기막리 등으로 통하는 임도가 개설되어 있어
산악자전거를 즐기는 사람들이 자주 찾기도 한다.
삼왕동 일대는 영동고속도로 다리인 보광 1교가 관통하고 있으며,
또 가까이에는 영동고속도로 강릉대관령 상·하행선 휴게소가 자리하고 있다.
주요 교통로는 성산면 보광리 입구부터 이어지는 삼왕길이 있다.
무덥고 습했던 어명정 길....
그래도 간간이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고마워하면서
웃으면서 함께 한 바우님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외로운 술잔 -배철수 그대가 내게 남긴 건 차디찬 술잔과 눈물 이대로 아무 말 없이 아픔을 갖자 누구도 채울 수 없는 마음은 빈 잔과 같이 허공을 맴돌고 있네 사랑을 비워둔 채로 너는 내게 말했지 샘물이 되어 달라고 너는 작은 돌이 되어 영원히 잠겨 있겠다고 그러나 덧없는 사랑 이별의 아쉬움만이 씁쓸한 술잔에 담겨 나를 울게 하네요 너는 내게 말했지 샘물이 되어 달라고 너는 작은 돌이 되어 영원히 잠겨 있겠다고 그러나 덧없는 사랑 이별의 아쉬움만이 씁쓸한 술잔에 담겨 나를 울게 하네요 나를 울게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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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걷자님
댓글 1번입니다.
그리고 다이어트 자극 지대로 인 사진 정말로 감사합니다.
내몸에 튜브가 몇게인지 확실하게 보여준 사진 안 퍼가죠,
ㅎ ㅎ ㅎ
감사합니다.
에고 이사진 보았으면 저녁쫌 적당히 먹을 걸 후회가 500만년입니다.
사진에 보여진 씰데(?)없는 본인의 모습 무 신경 하시고...
그냥 웃으면서 즐겁게 보시면 만사형통(萬事亨通)입니다.
마구 마구 퍼 가세요?..ㅎ
@걷자(서울/강릉) 일찍감치 사진 퍼 간 건 안 비밀 입니다.ㅋ~~~~~~
걷자님의 수고 덕분에
이렇게 바우님들을
반갑게 만납니다
지난번 3구간 정비할 때
혹시나 누가 꺾어갈 까 조심스레
숨겨놓은 도라지꽃이
무사히 잘 있어서 다행입니다 ^^
습하고 무더운 날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걷자님
^^ 👍👍👍
무척 더울 껄 각오하고 참석하였는데...
간간이 불어 오는 미풍이 상당히 고마웠습니다.
청초하게 홀로 피어 있는 애기 도라지 꽃이 상당히 아름다웠습니다.
덥고 습한 날씨에도 바우님들 표정이 참 밝네요.
BGM으로 배철수의 "외로운 술잔"이 나오길래, 잠시 의아해했는데... 술잔바위
걷자님의 센스에 감탄합니다. ㅋㅋㅋ
솔직히 이번엔 배경 음악 선정이 무척 힘들었습니다.
어명정 길이라....우리 가락을 올릴까 고민도 해 보고...
문득, 술잔 바위가 생각 나....ㅎ
걷자님이 계실거라는 믿음에
게으름?을 피운 토요일이였네요~ㅋ
(고것은 아니구,일이 있었던 ~)
고맙고 기특한 바람~
바우님들 더워서 힘드시지않으실까
생각했는데
바람에 칭찬주고
걷자님께는 곱배기로 칭찬드립니다~^^
아침에 참석하니...'어~ 테라가 안 보이네...'
아쉬움과 슬픔을 가득 안고 무작정 걸었습니다..ㅎ
암튼,무더운 여름날과 장마철....연약한 몸 잘 챙기시길 ...
쓰러지면 큰일 납니다....^^
함께하지 못한 아쉬움을 이글로 달래봅니다.
감사합니다.
명주님이 안 보이셔서 아쉬웠습니다.
자주 뵐 수 있기를 바래 봅니다.
걷자님 무더운날씨에 바우님들 위해서 사진찰영 하느라고 수고많으셨습니다.
멋진사진 과 좋은글 잘보고갑니다~^^
무덥고 습한 날씨에 지기님 역활....대단히 수고 많으셨습니다.
적절한 시간 분배와 리딩...덕분에 바우님들 발 걸음이 더 즐거웠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