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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츠제럴드의 단편을 먼저 읽고 영화를 본다. 소설과 영화는 ‘벤자민의 시간이 거꾸로 간다’는 기본적인 설정을 두고 있지만, 각각의 시점으로 그려진다. 소설이 벤자민의 전체적인 삶을 건드렸다면 영화는 벤자민과 데이지의 로맨스에 초점을 맞추었다. 뉴욕타임즈는 “피츠제럴드보다는 오히려 보르헤스에게 빚지고 있는 영화다”라는 표현을 썼다. 보르헤스의 환상성이 돋보이는 영화라는 해석이다. 영화는 구체적 사실에서 출발하되 창조적 상상을 통해 점차 환상의 수준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환상적 혹은 마술적 성격의 새로운 현실이 창조되며, 이 새로운 미학적 현실은 자연법칙이나 논리에서 벗어난 것이 되기도 한다.
환상적인 것은 실제적인 것의 원류에 다가가기 위한 길이다.
“사랑의 기쁨은 한순간이지만, 사랑의 슬픔은 영원하다”
-Jean P. de Florian
사랑의 기쁨은 진정 한순간인가? 기쁨은 영원을 지향하고, 고통은 기억된다. 기쁨은 현재이고, 고통은 몸으로 경험한 과거이다. 영원은 ‘절대적 지금’ (absolutes Jetzt; the absolute now)이기에 과거에 집착하거나 미래를 욕망할 필요가 없다.
시간의 본질은 정지를 거부하는 데 있다. 시간은 단 한순간도 머무르지 않고 흘러간다. 우리의 이러한 시간적 경험 안에서 영원도 도래한다. 오늘은 어제와 내일로 연속되는 오늘이 아니다. 시간의 본질이 변이인 데 반해 영원은 불변이요, 따라서 과거와 미래 없이 언제까지나 현재로만 있는 것이다. 영원은 시간에 의해 측정되지도 않고 파괴되지도 않으며, 시간에 둘러싸이지도 않고 시간에 의해 침범되지도 않는 것이다. 거기에는 시간적 술어를 붙일 수 없다. 영원은 시간을 완전히 벗어나 있는 것이다.
벤자민과 데이지에게는 엇갈린 시간을 함께 한 70여년의 시간 중에 50여년이라는 서로 사랑의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지만, 정작 그들이 사랑했던 시간은 8년이 채 못 된다. 10여년은 벤자민이 아내인 데이지와 첫돌을 갓 넘긴 딸 캐롤라인을 떠나 세상을 떠돌 수밖에 없던 시간이었고, 그 다음 10여년은 치매에 걸려 어린아이의 몸으로 돌아온 벤자민을 노년의 데이지가 돌보면서 일방적인 사랑을 쏟는 시간이다. 서로 사랑의 교감을 나눌 수 있었던 50여년의 시간 속에서는 영혼의 나이와 신체의 나이가 거꾸로 가는 벤자민과 현실의 시간적 흐름을 따르는 데이지의 시간이 반복하여 엇갈리게 된다. 그 엇갈림의 시간이 정확히 포개지도록 한 것 또한 한 치의 엇갈림만 있었더라도 일어나지 않았을 운명이 개입된다. 그로 인해 8년간의 시간이 그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벤자민의 시간이 거꾸로 가지 않았다면 그들이 나눌 사랑의 시간은 최소 50여년은 주어졌겠지만, 막상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80평생 중 8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사랑이 무한대로 뻗어나갈 수 있도록 하는 조건은 무엇이었을까? 엇갈림을 통한 안타까움과 사랑/욕망은 다름 아닌 변화를 통해서 강화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자연스러운 사랑에도 사랑할 시간이 온전히 주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서로가 대면하게 될 일상적 지겨움(boredom)으로 인해 어느 순간 정지할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영혼 부분을 몸속에 불어넣음으로써 삶을 영위한다. 인간은 그 내면에 영혼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그 영혼의 운동은 몸을 통해서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즉 인간의 몸 그 자체가 영혼이라기보다는 영혼의 이미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영혼의 살아있는 이미지가 곧 몸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벤자민의 경우 그의 피부에 나타나는 모습이 영혼과 상응하지 않아 더할 수 없이 고통스럽다.
감독은 벤자민에게 새로운 삶을 살게 해준 예인선 선장을 통해서 벌새이야기를 들려준다. 벌새는 1초에 80회나 날갯짓을 하는데 그 모습은 숫자 8과 비슷하다고 한다. 그리고 선장은 묻는다. 이 숫자 8이 무엇을 뜻하느냐고. 말없이 듣기만 하던 벤자민이 대답한다. “∞” 즉 무한대라고! 한없이 큰 무한대는 결국 데이지에 대한 벤자민의 사랑, 그리고 벤자민에 대한 데이지의 사랑으로 상징된다. 물리적으로 오랜 시간 함께 할 수 없다고 해서 그들의 사랑이 순간적, 혹은 유한하다고 할 수 없다. 그들은 서로 다른 시간의 흐름을 살고 있었기에 함께 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또 다른 사랑이 되어 서로를 단단하게 결속시켰다. 세상을 떠돌다 청년의 모습으로 돌아온 벤자민을 맞는 데이지의 떨리는 눈빛과 이제는 다른 사람의 아내와 딸이 된 데이지와 캐롤라인을 바라보는 벤자민의 안타까운 눈빛이 교차하는 순간만큼 함께했더라도 그들의 사랑은 무한대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피츠제럴드의 원작을 새로이 각색한 에릭 로스가 그의 작업실 벽에 붙여놓은, 수학적으로 아주 정교한 벤자민과 데이지의 ‘인생 시계’를 찬찬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에릭 로스는 그들만의 ‘인생 시계’를 통해 보편적인 공감을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1918년 11월 11일 벤자민은 주름투성이 얼굴에 팔다리가 굳어 잘 움직여지지도 않는,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 노인의 몸으로 태어난다. 아버지 토마스는 1차대전 승리의 기쁨에 넘쳐나는 인파를 뚫고 가까스로 집에 도착했지만 아내의 죽음과 맞바꾸어서 태어난 아들의 흉측한 모습을 보고는 아버지로서 차마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저지르고 만다. 18달러와 함께 양로원 계단에 버려진 벤자민은 그의 남다른 인생을 기꺼이 떠맡기로 결심하는 데 조금의 주저도 없었던 어머니 퀴니의 보살핌 속에서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고 죽음 또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그곳에서의 삶을 이어가게 된다.
7살이 된 벤자민은 70대 후반 노인의 모습으로 첫 걸음마를 뗀 것을 시작으로 현실의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조금씩 몸의 변화를 느낀다. 1930년 어느 일요일 벤자민은 할머니를 만나러 온 9살짜리 여자아이 데이지의 푸른 눈동자에 빠져버린다. 9살짜리 꼬마가 훌쩍 자라 사춘기 소녀가 되고, 20대 초반이지만 60대 노인의 모습을 한 벤자민은 스스로 예술가라 칭하는 예인선 선장을 따라 세상을 항해하기위해 고향을 떠난다. 벤자민은 어디에 가든 꼭 연락하라는 데이지에게 변함없이 엽서를 쓰지만 러시아에서 엘리자베스라는 영국 귀부인을 만나 사랑을 나눈다. 20대의 영혼과 60대의 몸이 된 벤자민은 40대의 원숙한 여인과 늦은 밤 호텔로비에서 만나 차를 마시며 얘기를 나누다가 자연스럽게 서로를 욕망하게 된다. 벤자민의 엽서를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된 데이지는 마음의 상처를 입는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짧은 편지만 남기고 남편을 따라 떠나버리고 벤자민은 1941년 일본의 진주만 습격을 받아 해군으로 차출되어 전쟁을 겪게 된다. 독일잠수함의 공격을 받아 마이크 선장을 비롯한 동료들의 죽음을 보게 되면서 죽음을 자연스럽게 맞아들였던 양로원에서의 죽음과는 또 다른 방식의 죽음, 즉 사고와 같은 갑작스러운 죽음의 형태와 맞닥뜨리게 된다.
26살이 된 벤자민은 50대 후반의 훨씬 젊어진 모습으로 집에 돌아오고, 드디어 23살의 풋풋한 처녀가 된 데이지를 만난다. 발레리나가 된 데이지는 벤자민과 전혀 다른 세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벤자민은 사랑에 대해, 세상에 대해 두려움이라고는 없는 처녀 데이지의 춤추는 모습에 매료되지만 그녀의 대담한 제안에는 머뭇거린다. 데이지의 뉴욕공연장을 찾은 벤자민은 다른 댄서와 사랑에 빠진 그녀를 멀찌감치 떨어져 바라보면서 자신과 데이지의 삶이 분리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려한다. 데이지 또한 자신과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듯한 벤자민과의 간극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들의 만남이 안타깝게 끝나는 듯 했지만 운명에 얽힌 시간을 거꾸로 되돌릴 수는 없는 법, 조금의 엇갈림만 있었더라도 일어나지 않았을 엄청난 사건으로 인해 데이지는 결국 벤자민의 곁으로 돌아온다.
비로소 41살이라는 신체적 나이가 정확히 일치하는 시점에서 벤자민과 데이지는 그들 인생의 정점에 이르러 뒤늦게 열정적인 사랑을 나눈다. 데이지가 20대의 엇갈림에 오히려 감사라도 하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사랑의 기쁨을 만끽하지만 아이를 가진 것을 행복해하는 데이지와는 달리 벤자민은 깊은 고민에 빠진다.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젊어지다 못해 언젠가는 어린아이가 될 자신의 운명 앞에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만삭이 된 데이지와 함께 갔던 식당에서 68세라는 최고령의 나이로 도보 해협을 횡단한 엘리자베스의 뉴스를 접한 벤자민은 젊은 날, 용기가 없어 다시 도전하지 못했지만 결국엔 자신의 꿈을 이룬 그녀를 보며 일말의 희망이라도 가져보고 싶었으리라.
1968년 데이지는 벤자민이 자신의 운명을 닮을까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건강한 딸을 낳고 벤자민은 자신을 낳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캐롤라인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그때 벤자민은 50살이지만 비춰지는 신체적 나이는 30초반으로 한 아이의 아빠가 되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보였다. 그러나 벤자민은 자신이 캐롤라인의 아빠가 되어줄 수도, 데이지의 든든한 남편이 될 수도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캐롤라인의 첫돌을 맞은 벤자민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버튼공장 등을 팔아 가족의 살길을 마련해주고 나서 자신은 올드 바이크를 타고 정처 없이 떠난다. 무엇보다 벤자민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것이 두려웠을 것이다. 그는 데이지 혼자 캐롤라인을 키우게 될 것은 물론이고 종국에는 어린아이가 될 자신까지 떠맡게 될 미래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딸보다 어린 아빠가 딸에게 그리고 아내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라는 생각으로 괴로워하던 벤자민은 홀연히 떠나는 것으로 그들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다. 벤자민은 조금은 더 사랑하는 가족 곁에서 머무르고 싶었겠지만 그때 데이지가 40대 후반이었으므로 그녀에게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기회를 주기 위해 지체하지 않고 떠났을 것이다.
1980년 벤자민은 10여년의 시간을 떠돌다 데이지를 만나러 온다. 캐롤라인은 12살 사춘기 소녀가 되었고 데이지는 로버트라는 자상한 남편을 만나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었다. 벤자민은 온전한 가족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데이지를 보자 안심이 되었지만 자신을 몰라보는 캐롤라인을 안타깝게 바라본다. 그날 밤, 데이지는 벤자민이 묵고 있는 호텔로 찾아온다. 50대 후반의 데이지와 60대이지만 신체적 나이는 20대 초반인 벤자민이 마지막으로 안타까운 사랑을 나눈다. 자신의 늘어진 살과 주름을 보여주기 싫어 뒤돌아서서 옷을 입는 데이지를 바라보는 벤자민의 시선은 자연스럽다. 그는 자신의 신체적 나이를 결정하는 시간이 거꾸로 가기에 자연의 순리를 그 누구보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으리라.
우리에게, 아니 벤자민에게 시간은 무슨 의미일까? 시간은 어떤 변화를 이해하고자 하는 개념장치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은 변하지 않는 그 무엇을 향하는 변화를 지향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시간을 ‘순리’라 부른다. 하지만 벤자민이 경험하는 시간은 그 자체만으로도 ‘고통’이다. 사실 이 영화에서 벤자민과 데이지의 필연적인 사랑이 중심이 되고 있지만, 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엇갈리는 그들 삶에 있어서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은 아니었을까? 영화는 그들이 당면하게 되는 고통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한다.
데이지는 점점 나이가 들어가는 자신에 비해 청년이 돼가는 벤자민을 보며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린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늙어갈 수 없음을 슬퍼한 것인지, 자신이 젊음을 잃어가는 것을 슬퍼한 것인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그녀가 흐르는 시간을 안타까워한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벤자민은 데이지의 늘어가는 주름도, 사라져가는 젊음도 모두 사랑한다. 그는 자신의 남다른 삶의 역정을 통해서 데이지의 영혼을 사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데이지 또한 벤자민이 캐롤라인과 자신에게 좋은 가족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짐이 될 것이라며 떠나려하자 모든 것은 사랑으로 극복 가능하다며 그를 다독인다. 벤자민은 데이지와 캐롤라인과 함께 늙어갈, 즉 시간의 흐름을 같이할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그는 자신이 해줄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벤자민의 몸과 영혼은 서로 교차하기에 주름투성이 노인의 얼굴에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함이 있었고, 여드름투성이 소년의 얼굴에 치매 걸린 노인의 무의미한 반복이 있다.
벤자민은 딸에게 배달되지 않은 한 엽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가치 있는 것을 하는 데 있어서 늦었다는 건 없단다. 근데, 내 경우엔 네가 원하는 누군가가 되기엔, 내가 너무 어리구나!”
벤자민은 자신의 정신이 온전할 때 일기형식으로 된 노트를 남겼다. 그리고 자신이 어딜 가 있든 사랑하는 딸, 캐롤라인에게 그녀의 생일 때마다 엽서를 썼다. ‘부재의 부성’으로 엽서를 썼던 것이다. 그가 처음 집을 떠났을 때 데이지에게 엽서를 보냈듯이, 그들 사랑의 결정체인 캐롤라인을 향한 애틋한 사랑을 엽서에 담았다. 그것은 함께하고 싶어도 함께할 수 없었던 벤자민의 또 하나의 『고백록』이었다. 캐롤라인은 죽음을 눈앞에 둔 엄마의 부탁으로 그녀가 일생동안 사랑했던 한 남자가 남긴 노트를 읽는다. 그리고 바로 그 남자가 자신의 친부임을 알고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병실을 뛰쳐나간다.
데이지의 기억으로 재생되는 벤자민의 노년이 또 다른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몸은 아이인데 영혼은 치매로 인해 세상의 기억을 다 지워버린 노인으로 살아가야하는 벤자민의 삶이 시간의 흐름과는 무관한 듯 언제나 그 자리에 존재하는 양로원에서 다시 이어지는 것에서 마치 시작과 끝이 없는 뫼비우스의 띠가 연상된다. 벤자민의 삶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안과 밖, 시작과 끝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데이지가 어린아이의 모습이 된 벤자민의 손을 잡고 숲속을 걷는 장면은 뭉클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2002년 가또(gateau)의 시계가 내려지고 2003년 봄, 벤자민은 85세의 일기로 죽음을 맞는다. 젖먹이 어린아이가 된 벤자민이 데이지의 눈동자를 깊게 응시하다가 마지막 눈을 감는 장면에서는 남들과 다른 시간의 흐름을 살아냈지만 일생동안 사랑한 데이지가 있고 또한 그 사랑의 결정체인 캐롤라인이 있었기에 자신은 결코 남들과 다르지 않은 시간을 살아냈다는 안도감이 묻어난다. 데이지는 벤자민의 깊은 응시를 통해서 그가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기억했음이 틀림없다고 믿게 된다.
벤자민은 9살 여자아이였던 데이지의 푸른 눈을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하기 시작해서 치매로 정신을 놓는 순간까지 그녀를 잊어본 적이 없다. 데이지 또한 벤자민의 특별한 삶 그대로를 받아들임으로써 마음의 문을 열 수 있었다.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자신과 나란히 앉아 할머니에게 동화책을 읽어달라고 응석을 부리는 어린아이였던 벤자민을 친구로 인정했기에 그에 대한 사랑이 서서히 싹틀 수 있었다.
데이지가 벤자민을 사랑하게 된 시점은 언제일까? 벤자민이 항해를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시점일까? 23살의 처녀인 데이지는 신체적 나이가 50대 후반인 벤자민에게 함께 밤을 보낼 것을 제안한다. 그러나 벤자민이 자신의 적극적인 태도에 짐짓 당황해하자 서운한 마음을 감추지 않는다. 벤자민이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데이지였기에 또 한번 마음의 상처를 입는다. 그러나 데이지의 이 상처는 그녀가 벤자민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데이지는 벤자민이 60대의 신체적 나이로 40대 귀부인 엘리자베스와 사랑을 나누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이미 마음의 상처를 크게 받았었다. 이렇게 시작된 벤자민을 향한 데이지의 사랑은 벤자민이 어린아이의 몸이 되고 누군가의 진정한 보살핌이 필요하게 됐을 때 유감없이 발휘된다.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찾아오고 데이지는 캐롤라인이 읽어주는 벤자민의 기록을 듣다가 조용히 눈을 감는다. 마이크 선장과 동료들이 죽었을 때 나타났던 벌새가 허리케인을 뚫고 찾아와 병실 창문에 붙어 날갯짓을 한다. 이 벌새는 벤자민을 다시 볼 수 있으리라는 데이지의 소망이 이루어진다는 의미로 다가온다.
Plaisir d'amour Fritz Wunderlich(1930~1966) ten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