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4장]
1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2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3 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4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5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6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7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8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9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설교]
앞선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솔로몬의 행각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때 선포된 복음은 매우 강력한 능력으로 역사했습니다. 복음을 들은 사람 중 믿는 자의 수가 많았다고 했는데, 본문 4절은 그 숫자가 무려 5천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남자만 계수했을 때 5천이었으니, 혹 여인이나 아이가 있었다면 훨씬 더 많은 숫자였겠지요. 단 한 차례 복음을 전했을 뿐인데 이 정도까지 열매를 맺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한 학자에 따르면, 그 당시 예루살렘의 인구는 약 25,000명 정도로 추정됩니다. 그중에 5천명이나 복음을 듣고 믿었니?! 인구 대비 거의 20%가 복음을 듣고 믿은 셈입니다. 놀라운 일이지요?!
그러나 이처럼 복음을 듣고 믿는 자들과는 달리,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무척이나 싫어했던 무리가 등장합니다. 본문 1~2절을 보십시오.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여기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첫째는 제사장들입니다. 당시 유대를 대표했던 종교지도자들입니다. 둘째는 성전 맡은 자입니다. 성전 경비를 담당하는 총 책임자로서, 당시 대제사장 다음으로 서열 2위에 속했던 사람입니다. 셋째는 사두개인들입니다. 사두개인들은 전통적으로 죽은 자의 부활을 믿지 않던 정파입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바꿔 말해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을 가능성이 현저히 낮다는 뜻이지요. 부활을 믿지 않으니 어떻게 사도들을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들 세 부류의 사람들은 결국 한데 모여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전했던 사도들을 붙잡아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리고 옥에 갇힌 지 이튿날이 되었습니다. 날이 밝자 예루살렘에는 전날보다 더 많은 종교지도자들이 한데 모였습니다. 특히 본문 6절을 보면 당시 네 명의 대제사장, 안나스, 가야바, 요한, 알렉산더가 모두 모였다고 말씀합니다. 안나스는 지금으로부터 약 15년 전에 로마로부터 면직 처분을 받은 대제사장입니다. 현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전임이라고 볼 수 있지요. 요한과 알렉산더는 후에 가야바를 이을 대제사장들로서, 이미 대제사장의 반열에 들어간 자들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이들 네 사람은 모두 당시 유대를 주름잡던 최고의 권력가들이었습니다. 당시 종교의 위상을 생각하자면, 이 사람들은 그야말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권세를 가진 사람들이었죠.
이런 사람들 앞에서 이제 베드로와 요한이 심문을 받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본문 7절을 보면 이 사람들이 묻습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질문의 요지가 무엇일까요? 앞선 사도행전 3장에서 사도들은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때 사도들은 이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울 때, 이렇게 말했지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어라!” 그리고 이 일이 있은 뒤, 사도들은 계속해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관하여 전하였습니다. 모든 것은 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일이었지요. 때문에 지금 이 사람들은 묻는 것입니다. ‘도대체 너희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냐? 그의 이름에는 대체 어떤 권세가 있느냐?’ 초점은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불과 얼마 전까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 당한 한 사람이 어떻게 이러한 권세를 떨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했을 때, 베드로는 이제 성령에 충만하여 말하기 시작합니다. 말을 하되, 범죄자처럼 심문받는 게 아니라, 오히려 유대인들의 죄를 고발하는 선지자처럼 복음을 전합니다. 어떻게 복음을 전할까요? 본문 10절,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본문 11절입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여기서 베드로는 일종의 고발인이 되어 유대인들의 죄를 지목합니다. 10절에서는 “너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말씀합니다. 11절에서는 “너희가 버린 이 예수께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셨다”고 말씀합니다. 둘 다 유대인들의 죄목에 해당하지요. 특히나 유대 종교지도자들?! 저들의 죄목은 사실상 훨씬 더 짙습니다. 왜 짙을까요? 애초에 예수님을 처음 고발하고, 불법적으로 그분을 잡아들이고, 불법적으로 그분을 재판했던 자들이 바로 이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건의 시발점이 사실상 이 사람들에게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그러니 어떻습니까? 자신들의 손으로 직접 죽인 이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 또한 그 예수의 이름으로 앉은뱅이가 일어났다고 하니, 이 사람들은 더 이상 핑계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베드로는 이처럼 담대하게 외쳤습니다. 당신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가 이제 참된 구원자가 되셨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12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한다는 것은 이처럼 담대한 일입니다. 세상은 비록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항상 우리를 고발하지만,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처럼 담대한 법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것?! 그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도리어 세상을 향하여 저들의 죄악을 지목하는 일?!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자들로서 우리는 마땅히 이 일을 해나가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하여 오늘 아침 함께 기도하길 원합니다. 우리 모두 세상 속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자들로서, 더욱더 담대하게 설 수 있길 위하여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