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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662
2월5일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연중 제4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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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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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sLAV-AdtU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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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신산(辛酸)하고 을씨년스러운 삶, 씁쓸하고 고독한 삶, 그래서 오직 주님에게로만 초점이 맞춰지는 삶>
참혹하고 을씨년스러웠지만 장엄하고 당당했던 세례자 요한의 일몰을 묵상합니다. 안타깝게도 그는 사악한 복수의 화신 헤로디아의 희생양이 됩니다. 한때 그리도 각광받던 그였는데, 어둡고 깊은 지하 감옥에 갇힙니다.
그것도 모자라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의 생일날 노리갯감으로 전락합니다. 정말이지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의 목은 잘려져 쟁반 위에 담겨집니다. 쟁반 위에 담겨진 그의 머리는 헤로디아 앞으로 배달됩니다. 그의 머리를 보고 깔깔대며 희희낙락했을 헤로디아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의인 중에 의인이었던 세례자 요한의 이 끔찍하고 고통스런 최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할 정도입니다. 그의 억울한 죽음은 어쩌면 곧 뒤따라올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의 예표입니다. 예수님의 선구자이자 예언자였던 세례자 요한의 죽음 안에는 더 억울하고 더 천부당만부당한 예수님의 죽음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억울한 죽음은 오늘 우리 가운데서도 계속됩니다. 아무런 죄도 없는 의인들이 이 세상에서 받고 있는 박해와 십자가 길, 그리고 억울한 죽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무죄한 이들과 선인(善人)들의 고통과 시련은 또 어떻습니까?
주변을 둘러보면 참으로 이해가지 않는 측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악이란 악은 다 저지르며 살아가는 사람들! 떵떵거리며 잘 먹고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반면에 잘못한 것이라곤 손톱만큼도 없는 사람들, 법 없이도 살 착한 사람들, 이웃의 고통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발 벗고 나선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겪는 고초가 참혹할 정도입니다. 이토록 공정하지 못한 현실을 신앙인으로서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까?
세례자 요한의 삶과 죽음은 또 어떻습니까? 그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처럼 구약시대를 종결짓는 마지막 예언자이자 예언자중의 예언자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마지막 대예언자의 죽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하고 덧없는 죽음입니다.
참으로 억울하고 이해할 수 없는 죽음입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그것이 예언자로서의 삶과 죽음의 본모습인 듯합니다. 쓸쓸하고 아쉽고 드러나지 않는 삶과 죽음, 자신이 아니라 자기 뒤에 오시는 주인공이신 주님을 빛내게 해주는 존재로서의 삶과 죽음이 곧 예언자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무척이나 신산하고 을씨년스런 삶, 씁쓸하고 고독한 현실, 그래서 오직 주님에게로만 초점이 맞춰지는 삶. 그것이 참 예언자로서의 삶이 분명합니다.
예언자들이 대단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하느님으로부터 등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부여된 예언자로서의 길을 묵묵히 걸어갔습니다. 너무나 괴로울 때는 있는 그대로 하느님께 하소연했습니다. 항상 하느님과 소통하며 그분의 뜻을 찾았습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 또 다른 예언자들인 사제들과 수도자들, 선구자들을 바라봅니다. 그들이 보다 가난해지도록 그들이 좀 더 고독해지도록 도와줘야겠습니다. 그들이 갖출 것 안 갖출 것 다 갖추고 떵떵거리며 산다면, 그것처럼 예언자로서 부끄럽고 비참한 삶이 다시 또 없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 예언자로 산다는 것,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쩌면 박해받는 의인으로서의 삶을 선택한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메시지를 가감 없이 전달하는 일, 사회 정의와 인권의 소중함을 외치는 일, 남들이 마다하는 선행과 봉사를 실천하는 일, 세상 사람들 눈으로 볼 때 별 의미 없어 보이는 일, 손해 보는듯한 느낌이 드는 일, 그 일을 하고 계신다면 제대로 된 예언자의 삶을 사는 것이 분명합니다.
오랜 역사 안에서 언제나 그랬듯이 참 신앙인의 길은 세상의 논리와 이치를 뛰어넘습니다. 나와 내 가족의 울타리를 벗어납니다. 결국 바보처럼 살게 합니다. 손해 보는 삶을 선택하게 만듭니다. 그것이 결국 주님께서 원하시는 예언자의 길이요 의인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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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Q_gxswcDc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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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산으로, 물을 물로 보기 위해서는?>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 엘리야, 모세와 같은 예언자 등으로 보았습니다. 특히 헤로데는 자신이 죽인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난 것이라 여기고 두려워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요한을 대신해 보복할 것이라 믿은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피해의식’이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남이 자신에게 피해를 주려고 한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남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입니다. 보통은 자신이 그러면 남도 그런 줄 압니다.
나자렛 인들이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그 공동체를 분별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 안에 있는 욕구가 악이요 눈을 가리게 만들어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매슬로는 “망치를 쥔 사람은 모든 것을 못으로 본다.”라고 말했습니다. 망치를 내려놓기 전에는 그리스도 공동체까지 자신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것으로 여깁니다. 종교에 대해서 본다면 “모든 종교는 다 돈 벌려고 장사하는 거야.”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돈밖에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보고 결국 구원의 공동체에 들어올 수 없게 됩니다.
인간의 눈을 멀게 하는 것은 ‘욕망’입니다. 욕망에 휘둘리는 사람은 그 욕망을 채울 수 없게 만드는 모든 것들을 장애물로 여깁니다. 그래서 눈이 멀어버립니다. 헤로데가 요한을 죽인 것도 이 욕망 때문입니다. 그는 요한을 의로운 사람으로 여겨 살려두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헤로디아에 대한 욕정과 자존심이 요한을 죽이게 했습니다. 물론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을 메시아로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자기들 자존심이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잔 다르크(1412-31)는 17살의 나이에 100년 영국과 프랑스의 100년 전쟁을 종식한 주인공입니다. 신앙심이 두터운 잔 다르크는 13세 때 처음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여러 성인과 천사들을 봅니다. 성인들은 잔 다르크에게 오를레앙을 포위하고 있는 영국군을 물리치고 프랑스의 황태자를 전통 관례에 따라 랭스에서 대관식을 치를 수 있게 도우라는 사명을 줍니다.
글도 모르고 ‘전쟁’의 ‘전’자도 모르는 잔 다르크가 영국군을 몰아내고 한 사람을 국왕으로 앉히라는 사명을 어떻게 수행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그것을 믿고 또 그렇게 했기에 교회에서 그녀가 받은 계시가 진짜라고 인정한 것입니다. 잔 다르크는 엄청난 성곽에서 소리치는 영국군을 직접 나서서 섬멸하고 영국군이 점령한 지역을 요리조리 피해 다니며 프랑스에서 영국군을 몰아냅니다. 그리고 랭스에게 황제가 대관식을 하게 만듭니다. 군인은 물론이요, 모든 프랑스가 잔 다르크를 성녀로 추앙합니다.
마지막 남은 영국군을 몰아내기 위해 전쟁에 참여했을 때 지원군이 필요했지만 새 황제는 지원군을 보내지 않습니다. 황제가 되니 더는 잔 다르크가 필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황제는 영국과의 화평을 원합니다. 영국은 잔 다르크를 사로잡아 프랑스에 큰돈을 받고 넘기려 했으나 프랑스는 거절합니다. 황제가 되기 전엔 잔 다르크의 계시를 믿는 듯했지만, 필요가 없어지자 토사구팽하였습니다.
프랑스에서의 영국의 패배를 안겨준 잔 다르크를 영국은 가만히 놔둘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형 죄목이 없었습니다. 실제로 잔 다르크는 자신의 칼로 단 한 명도 죽인 적이 없습니다. 전술과 함께 사기를 북돋운 것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신학자들과의 논쟁에서 하나도 밀리지 않습니다. 주교는 잔 다르크의 고해성사도 들어주지 않습니다. 종교보다 정치가 우선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합당한 죄목도 없이 헛된 환상에 사로잡힌 이단이라는 죄목으로 잔 다르크는 화형에 처합니다. 그때 나이 19세였습니다.
잔 다르크는 자신의 나라에서도 버려졌고, 적국에서도 버려졌으며, 심지어 교회에서도 버려졌습니다. 무려 500년이 지나서야 그녀를 성인품에 올렸습니다. 잔 다르크는 정치에 그렇게 희생되었지만 100년이라는 긴 전쟁을 종식하는 핵심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린 소녀를 통해 하느님께서 그러한 일을 하셨을 수밖에 없음을 압니다. 하지만 그때는 아무도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사람들은 예수님을 엘리야라고 하고, 모세와 같은 예언자라고 합니다. 헤로데와 같은 사람들은 자신이 죽인 요한이 살아났다고 말합니다. 제대로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각자의 욕망에 눈이 가려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욕망은 헤로데가 요한을 죽인 것처럼 많은 이들의 피를 흘리게 하고 그리스도와 참 교회를 알아볼 수 있는 눈을 빼앗습니다.
눈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바오로처럼 하늘의 빛을 받아야 합니다. 하늘의 빛으로 자신의 욕망이 불타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처럼 살고 싶어집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려고 하는 이들의 공동체에 머물고 싶어집니다. 이것이 눈에서 비늘이 떨어졌다는 증거입니다.
저도 처음엔 성당에 다니면서도 뱀의 욕구를 쫓았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이시오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를 다 읽고는 닮고 싶은 사람이 바뀌었습니다. 처음엔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이었는데, 이 책을 다 읽으니 예수님의 제자들이 닮고 싶어졌습니다. 이는 욕구가 변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 공동체가 다르게 보였습니다. 이전에는 나의 뜻을 채워줄 도구로 보였던 것이고 이후에는 내가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닮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공동체로 보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제가 되었습니다.
나를 바꾸고 구원해 줄 공동체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먼저 나의 욕망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성 요한이 말하는 ‘어둔 밤’의 길입니다. 나의 모든 욕망을 죽일 때 하늘의 빛이 보입니다. 그 빛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교회로 안내합니다. 나의 욕망들을 벗어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눈은 영원히 가려져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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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6,14-29 : 세례자 요한의 죽음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16절) 예수님의 명성과 업적의 소문이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지고 이제는 헤로데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그는 그 소문을 듣고 당황한다. 자신이 지은 죄 때문이다. 그는 부정한 죄를 지었고 그것을 계속 지적한 요한을 죽인 것까지 항상 마음에 부담을 갖고 있는데 예수님의 소문은 그를 더욱 당황하게 만들었다. 세례자 요한을 죽인 죄책감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요한은 헤로데가 혼인의 계명을 파기하는 것을 보고, 광장에서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18절) 하고 외쳤다. 우리는 동료들도 똑같이 꾸짖어야 한다는 것을 요한에게서 배운다. 충고는 우리의 의무이다. ‘나와 무슨 상관인가? 나는 그 사람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마귀하고만 상관없지, 모두 같은 축복을 받도록 초대받은 사람들이다. 헤로데는 꾸짖음을 들으면서도 그의 말을 기꺼이 들었다고 한다.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나 주겠다.”(23절) 호사스러운 왕실에서 죽음의 잔치가 열리고, 평소보다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을 때, 왕비의 딸을 불러와 춤을 추게 한다. 그 딸이 간통한 어머니에게서 무엇을 배웠겠는가? 헤로데는 무엇이든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한다. 얼마나 어리석은 맹세인가? 헤로데는 소녀의 춤 한 판에 왕국을 넘겨줄 만큼 욕정에 사로잡힌 포로였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이 어린 소녀의 춤 한 판에 자기 영혼을 넘겨주고 있지 않은가?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25절) 여인에 대한 사랑이 이겼다. 여인은 헤로데가 거룩하고 의롭다고 여기던 사람에게 손을 대게 만들었다. 자신의 음행을 다스리려 하지 않은 탓에 그는 살인죄를 저지르고 말았다. 진절머리를 치며 내쳤어야 할 간통한 여인을 갈망한 까닭에, 하느님 마음에 드는 인물로 알고 있던 세례자 요한의 피를 보고 말았다. 헤로데가 괴로워 한 것은 참회를 한 것이 아니라, 자기 죄에 대한 고백을 한 것뿐이다. ‘손님들’ 때문이다.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주었다.”(28절) 헤로데는 자기 혀 하나도 다스리지 못하고 살인을 저지르고 만다. 그 머리를 헤로디아에게 주자, 그 여자는 심판관을 살해함으로써 모든 것을 해결했다고 기뻐했을 것이다. 자녀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무엇을 말려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여기서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다. 왕의 잘못에 대해 자신의 위험을 생각지 않고 끝까지 지적할 수 있었던 그분의 예언자적 정신과 자세이다. 예언자는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항상 하느님의 뜻을 전한 사람들이다. 여기에서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예언자들은 항상 진리 편에서 그것을 증거했기 때문에 항상 박해를 받았고 죽임을 당해 왔다. 우리 자신이 이 시대의 예언자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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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구약의 구원 역사를 마무리하며, 신약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인물이 바로 세례자 요한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예수님께서 “율법과 예언자들의 시대는 요한까지다.”(루카 16,16)라고 확인해 주십니다. 세례자 요한은 바로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였습니다. 그는 헤로데라는 권력자의 부당함을 지적하였는데 그것이 빌미가 되어 참수를 당합니다. 이는 구약의 이사야 예언자의 삶과 비슷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곧게 내라는 이사야의 선포를 수용합니다(마르 1,2-4 참조). 그 옛날 이사야가 외친 것처럼,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외칩니다. 이사야와 세례자 요한은 삶의 마지막 모습도 닮았습니다. 이사야는 므나쎄 임금의 폭정을 거슬러 하느님 말씀을 전하다가 참수를 당하였고, 세례자 요한도 헤로데 임금에게 참수를 당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삶과 외침은 참예언자의 모습입니다.
우리도 세례자 요한이나 구약의 예언자들처럼 목숨을 걸고 하느님의 공정과 정의를 선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러기에는 우리가 너무나 약한 사람입니다. 공정과 정의를 추구하면서 살아가기에 고려해야 하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생계에 대한 걱정, 돌보아야 하는 가족들, 이외에도 많은 것들이 얽히고설켜서 우리의 발목을 잡습니다. 이렇게 약한 우리에게 세례자 요한의 모습은 멀리 떨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 예언자적 삶을 살아갈 수 없을지라도 우리에게 들려오는 예언자적 음성에 귀를 기울이면 어떨까요? 그 음성과 그 외침에 귀를 기울이는 가운데 나를 변화시켜 봅시다. 나만을 위하고 나만을 향하였던 마음을 주님께 돌리는 것, 그것이 바로 세례자 요한이 외치고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회개’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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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세례자 요한의 죽음>
복음서의 ‘세례자 요한의 죽음’ 이야기는,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에 초점을 맞춘 것처럼 보이는 이야기인데,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요한이 어떻게 죽었는가?”가 아니라, “왜 죽었는가?”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로서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선포했고, 바로 그 ‘회개 선포’ 때문에 죽었습니다. 복음서에 있는 이야기에서는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와 헤로디아의 혼인 문제를 비판하다가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만일에 그렇게만 생각한다면, 왕의 사생활을 비판하다가 왕과 왕비로부터 미움을 받아서 살해당한 것으로, 그래서 요한의 죽음을 사적이고 개인적인 일로 오해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 전체’를 보면, 요한은 ‘회개하기를 거부한’ 당시의 권력층과 기득권층으로부터 박해를 받았고, 결국 살해당했고, 그래서 그의 죽음은 공적인 일이고 ‘순교’입니다.
마태오복음을 보면, 세례자 요한은 당시의 권력층과 기득권층을 엄하게 꾸짖었습니다. “요한은 많은 바리사이와 사두가이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마태 3,7-8) 요한이 한 말은, “형식적인 회개를 하지 말고, ‘삶으로’ 실천하는 진짜 회개를 하여라.”라는 뜻인데,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말이 있기 때문에, 그의 말은 단순한 권고가 아니라, 아주 대단히 엄하게 꾸짖는 말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은 당시의 기득권층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 가운데에는 세례자 요한의 말을 듣고 진심으로 회개한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요한에게 반감을 품고, 그를 미워하고, 그에게 앙심을 품은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또 루카복음을 보면, 세례자 요한은 세리들에게는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라고 말했고, 군사들에게는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 라고 말했습니다.(루카 3,12-14) 복음서에는 세리들과 군사들이 먼저 요한에게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물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요한이 한 말들을 ‘권고’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요한의 말만 따로 떼어서 생각하면, 백성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당시의 권력층 사람들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꾸짖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경우에도, 세리들과 군사들 가운데에는 세례자 요한이 말한 대로 ‘삶으로 실천하는 회개’를 한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회개를 거부하고 요한을 싫어하고 미워한 세리들과 군사들(권력층 사람들)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을 붙잡아서 감옥에 가두었을 때에도, 또 요한을 죽였을 때에도, 당시의 여론은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요한을 예언자로 믿은 사람들은, 슬퍼하고 분노했겠지만 헤로데의 권력이 무서워서 침묵을 지켰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을 예언자로 믿지 않고, 회개하지도 않은 사람들은, 특히 권력층과 기득권층 사람들은 헤로데의 살인을 방관했거나 동조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그 살인의 공범들입니다.)
혹시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나 또는 주변 사람들이 요한에게 왕은(권력층 사람들은) 건드리지 말라고, 그 사람들은 내버려두고 일반 백성들에게만 하느님 말씀을 전하라고 충고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목숨을 잃는 한이 있어도 예언자로서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 세례자 요한의 입장이었을 것입니다. 예레미야서를 보면 이런 고백이 나옵니다.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 내지 못하겠습니다."(예레 20,9)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시니 저를 박해하는 자들이 비틀거리고 우세하지 못하리이다. 그들은 성공하지 못하여 크게 부끄러운 일을 당하고, 그들의 수치는 영원히 잊히지 않으리이다."(예레 20,11) 세례자 요한의 심정은 예레미야 예언자의 심정과 같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마침내 헤로데 임금도 소문을 듣게 되었다. ...... 헤로데는 이러한 소문을 듣고,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 하고 말하였다."(마르 6,14.16) “이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묶어 둔 일이 있었다. 그의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 때문이었는데, 헤로데가 이 여자와 혼인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다.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좋은 기회가 왔다."(마르 6,17-21ㄱ)
헤로데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서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라고 말한 것에 대해서, 그가 ‘양심의 가책’을 느낀 것이라고 해석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 뒤의 헤로데의 행동들을 보면 그가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헤로데는 예수님도 죽이려고 했습니다.(루카 13,31) 루카복음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루카 9,9) 헤로데는 죽은 요한이 되살아났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한 것은, ‘불순한 호기심’ 때문입니다.(루카 23,8) 그리고 마르코복음에는 헤로디아만 세례자 요한을 죽이려고 했고, 헤로데는 요한을 보호해 준 것처럼 표현되어 있는데, 그것은 아니고, 헤로디아가 백성의 여론을 살피지도 않고 성급하게 요한을 죽이려고 한 것을 막은 입니다.(마태 14,5) 세례자 요한을 죽이는 것은 처음부터 헤로데의(권력층 사람들과 기득권층 사람들의) 계획이었습니다. 복음서의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라는 말의 뜻은, “요한을 예언자로 믿고 있는 백성의 여론이 두려워서 헤로디아가 그를 죽이려고 하는 것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입니다. “좋은 기회가 왔다.” 라는 말은, “세례자 요한을 죽이기에 좋은 기회가 왔다.”라는 뜻이고, 그 기회는 헤로데 자신이 기다렸던 기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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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주객이 전도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주인과 손님이 바뀐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인격과 능력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외모와 재산을 보는 경우와 비슷합니다. 성당 안에 제대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제대를 보호하기 위해서 성당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서 많은 학원을 다닙니다. 피아노 학원, 태권도 도장, 영어 학원을 다닙니다. 좋은 선생님을 모시고 가정에서 배우기도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교리를 배우고, 성인전을 읽고, 기도하고, 미사 참례하는 것을 가르치는 데는 소홀 한 것 같습니다. 물은 “H2O"라고 배우면서 물이 가지는 의미가 상업적으로 퇴색되는 것 같습니다. 물은 공업용수, 지하수, 상업용수, 하수, 상수, 생수와 같이 구분되는 것 같습니다.
물은 단순히 사고파는 물건이 아닙니다. 물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물은 신앙 안에서도 성사를 드러내는 표징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면서 물은 정화의 상징에서 구원의 표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청하십니다. 그리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의 물을 말씀하십니다. 실로암의 물은 눈먼 사람에게 구원을 주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물 위를 걷고, 폭풍을 잔잔하게 하는 모습은 두려움을 이기는 주님의 모습을 전합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물은 사랑과 나눔 그리고 진정한 섬김을 보여 줍니다. 성체성사의 성혈을 이루는 포도주와 물은 하느님 안으로 일치되는 모든 피조물의 희망을 드러내고, 세례성사의 물과 성령을 통해서 인간은 다시 태어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주객이 전도 되었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안식일’입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는 안식일이라는 ‘틀’에 사람들을 가두려고 하였습니다. 안식일을 지킬 수 없는 세리, 창녀, 병자들을 죄인으로 취급하였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의 주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을 지킬 수 없는 사람들에게 자유와 평화를 주기 위해서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포도원 소작인’의 이야기도 하십니다. 주인이 보낸 하인들을 때리고 죽였습니다. 주인의 외아들마저 죽였습니다. 소작인의 본분을 망각하였습니다. 주인은 돌아와서 포도원을 다른 소작인에게 맡긴다고 하셨습니다.
초대교회에서 사도들은 기도하는 일, 복음을 전하는 일, 병자들을 고치는 일, 마귀 들린 이를 치유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이었습니다. 교회의 조직이 커지면서 다른 일들이 생겼습니다. 음식을 나누는 일, 재산을 관리하는 일, 교회를 운영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사도들은 기도하였고, 협조자를 구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음식을 나누는 일, 재산을 관리하는 일, 교회를 운영하는 일은 선발된 ‘부제’들에게 맡기기로 하였습니다. 이제 사도들은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기로 하였습니다. 이런 결정과 선택은 2000년이 지난 지금도 같아야 합니다. 교회 본연의 사명은 복음을 전하는 일,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 아픈 이들을 고치 일, 영적으로 병든 이들을 치유하는 일입니다. 이는 교회의 재정을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재물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분명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손님 접대를 하다가 어떤 이들은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접대하기도 하였습니다. 감옥에 갇힌 이들을 여러분도 함께 갇힌 것처럼 기억해 주고, 학대받는 이들을 여러분 자신이 몸으로 겪는 것처럼 기억해 주십시오. 하느님의 말씀을 일러 준 여러분의 지도자들을 기억하십시오. 그들이 어떻게 살다가 죽었는지 살펴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이십니다.” 우리가 신앙 안에서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인가 생각합니다. 가슴이 따뜻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계산하고 따지기 보다는 순수한 삶을 살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를 용서하시고 받아주시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이웃을 너그럽게 대해야 하겠습니다.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행복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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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헤로데>
마르코 6,14-29 (헤로데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
그때에 예수님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마침내 헤로데 임금도 소문을 듣게 되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는 엘리야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들과 같은 예언자다.” 하였다. 헤로데는 이러한 소문을 듣고,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 하고 말하였다.
이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묶어 둔 일이 있었다. 그의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 때문이었는데, 헤로데가 이 여자와 혼인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다.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좋은 기회가 왔다. 헤로데가 자기 생일에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유지들을 청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그 자리에 헤로디아의 딸이 들어가 춤을 추어, 헤로데와 그의 손님들을 즐겁게 하였다. 그래서 임금은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나에게 청하여라. 너에게 주겠다.” 하고 말할 뿐만 아니라,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 하고 굳게 맹세까지 하였다. 소녀가 나가서 자기 어머니에게 “무엇을 청할까요?” 하자, 그 여자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여라.” 하고 일렀다.
소녀는 곧 서둘러 임금에게 가서,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청하였다. 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임금은 곧 경비병을 보내며,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명령하였다. 경비병이 물러가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주었다. 그 뒤에 요한의 제자들이 소문을 듣고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무덤에 모셨다.
<헤로데>
적어도
헤로데는
사람이었다
요한의
목을 베어
죽였을망정
자신의
양심 안에는
살려놓아야
그나마
헤로데는
사람일 수 있었는데
요한의
목을 베어
죽였을망정
자신의
양심 안에
살려놓았으니
적어도
헤로데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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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분도회 이성근 사바 신부님]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이 세상을 떠나게 된 마지막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갈릴래아의 영주 헤로데는 자신의 생일잔치에서 춤을 추어 손님들을 즐겁게 해 준 헤로디아의 딸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어주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런데 그 소녀가 어머니 헤로디아의 부추김으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달라고 청함으로써, 세례자 요한은 허무하게 죽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였던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의 이러한 죽음이 허망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생애 내내 주님의 길을 닦고 준비한 예언자였습니다. 주님께서 오실 길을 준비하면서 사람들에게 환호를 받았지만, 온전히 자신의 사명과 위치를 깨닫고 스스로 낮추었습니다. 체면과 자만심에 빠진 헤로데의 결정으로 말미암은 그의 죽음은, 그리스도께서 결국 사람들의 음모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것을 미리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삶과 죽음을 통해서 주님을 증언하고 주님께서 오실 길을 닦았던 분입니다. 요한이 베풀었던 죄를 씻기 위한 세례는, 주님에게서 죄의 용서와 성령을 받기 위한 세례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보여 주었던 청빈과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자세는, 사도들과 모든 신자에게 복음 전파의 모범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시대를 넘어 모든 사람에게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로 남아 있는 세례자 요한의 모범을 따라 우리도 주님을 세상에 선포하는 소리에 합류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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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강영구 루치오 신부님]
<헤로데의 불행>
예수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마침내 그 소문이 헤로데 왕의 귀에 들어갔다. 어떤 사람들은 “그에게서 기적의 힘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죽은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 틀림없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의 소문을 들은 헤로데 왕은 “바로 요한이다. 내가 목을 벤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마르코 복음 6장 14절. 16절)
사랑하는 예수님, 우리 속담에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어도 악한 일을 하면 마음이 편할 리가 없다는 가르침입니다.
莊子도 이렇게 가르칩니다.
“若人作不善하여 得顯名者하면 人雖不害라도 天必戮之라.”
예수님, 당신 앞에서 문자를 쓰서 죄송합니다. 제 말이 아니라 莊子의 가르침입니다.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만일 사람이 선하지 아니한 일을 하여 이름을 세상에 드날리게 되면 비록 사람은 그를 해칠 수 없지만 하늘은 반드시 그를 죽인다.”
무서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실을 말씀드리자면 하늘이 그 누구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자업자득으로 자신이 저지른 악행에 스스로 짓눌려 죽는 것입니다. 당신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칼을 쓰는 사람은 칼로 망하는 법이다.”(마태오 26,52)
세상일들이 우연으로 생겨나는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필연입니다. 입으로 내 뱉는 말 한마디, 작은 눈짓 하나, 행동 하나도 모두 씨앗과 같습니다. 말 한 마디, 행동 하나 하나가 씨앗처럼 떨어져서 좋은 씨앗은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을 피우고 감미로운 열매를 맺지만, 악한 말이나 행동은 가시덤불처럼 자라나서 자신을 짓누르고 고통과 불행의 열매를 맺습니다.
天必戮之라는 가르침이나 “칼을 쓰는 사람이 칼로 망하는 법이다” 하신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는 속담대로 헤로데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자신이 목 벤 세례자 요한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는 평생토록 쟁반 위에 담긴 두 눈 부릅뜬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떨쳐버리지 못하고 비참하게 죽습니다.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자업자득이지요.
예수님, 저희가 어리석음에 빠지거나 탐욕에 사로잡히거나 분노하거나 증오심을 품음으로서 악한 씨를 뿌리지 않도록 지켜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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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행복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언제 행복할까요? 어떤 이는 좋은 사람과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라고 말하고, 또 다른 이는 행복한 사람 옆에 있을 때라고 말합니다. 그 밖에 많은 행복의 때가 있을 것입니다.
심리학자 로버트 에먼스와 에드 디너의 연구에서, 행복을 느끼기 위한 조건으로 다음 세 가지를 말합니다. 첫째, 삶에 대한 만족감, 둘째, 긍정적인 정서를 자주 느끼는 것, 셋째, 부정적인 정서를 적게 느끼는 것입니다.
결국, 부정적인 정서를 줄이면 행복해질 수가 있습니다. 어떤 일에서 좋은 점을 더 빨리, 그리고 자주 발견하는 사람은 삶에 대한 만족감도 올라가서 행복해집니다.
이 모든 조건은 나 혼자만의 힘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행복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은 늘 외적인 조건에 문제가 있다고 말합니다. 나의 해결보다 외적인 해결을 바라보니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헤로데 임금에 관한 이야기를 접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임금으로 권력의 힘이 막강했습니다.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것을 모두 가진 것처럼 보이는 헤로데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행복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는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라면서 불안함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그에게 부정적인 정서가 가득하므로 결코 행복해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왕실 가족의 타락한 윤리 형태를 비난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목이 잘리는 순교를 하게 된 이유에는 헤로데의 작은 맹세가 시작이었습니다. 헤로디아 딸의 춤값으로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들어주겠다는 작은 맹세가 세례자 요한을 죽이는 커다란 죄가 되었던 것입니다.
어떤 맹세도 다 들어줄 수 있다는 착각, 그 착각이 그를 큰 죄인으로 만들었고 동시에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되게 했습니다.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고 말합니다. 단 한 번의 커다란 행복만으로 충분한 것이 아닙니다. 소소한 긍정적 정서를 여러분 느끼는 것이 행복해지는 지름길입니다.
물론 부정적 정서를 없애기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긍정적 정서를 늘려서 부정적 정서를 흐리게 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차가운 물에 뜨거운 물을 계속 부으면 차가움이 사라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를 위해서 작은 죄도 범하지 않는 단호함이 필요합니다. 교만함을 버리고 겸손함으로 무장한 사람만이 계속된 행복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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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바라는 게 없는 상태>
행복해지고 싶다고 말합니다. 행복을 원한다고 말하지만, 바란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일까요? 행복은 바라는 것이 아니라, 찾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어떤 작가는 ‘행복은 바라는 게 없는 상태’라고 말했나 봅니다.
커다란 행복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피정을 다녀온 후 자기 전에 그날 있었던 행복 체험 한 가지를 반드시 적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울한 감정이 가득했을 때, 자신이 써왔던 행복 일기를 펼쳤지요. 그런데 이제까지 썼던 행복을 보면서 재미있는 점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까지 썼던 행복이 별로 특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일상 안의 작은 기쁨들이 모여서 행복한 나를 만들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행복은 바라는 것을 채우는 것이 아닙니다. 내게 다가오는 행복을 찾고 그 행복을 누리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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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헛된 맹세를 하지마라>
여자는 기념일을 먹고 살고, 남자는 체면을 먹고 산답니다. 여자는 쉽게 감동하기에 그렇고 남자는 자존심을 세워주면 어깨가 으쓱해집니다. 그렇다고 자존심을 건 맹세를 함부로 할 것은 아닙니다. 헤로데 왕은 요한이라는 인물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습니다.(마르6,20) 그런데 그에게 곤란한 일이 생겼습니다. 자기 생일에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유지들을 청하여 잔치를 베풀었는데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게 되었습니다. 왕은 헤로디아의 딸이 손님들을 즐겁게 해 주었기에 그에게 원하는 선물은 무엇이든 주겠다고 약속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헤로디아의 딸은 어머니의 바람대로“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마르 6,25) 하고 요구하였습니다. 너무도 당혹스러운 일입니다. 헤로디아는 요한이 자기의 결혼에 대하여 잘못되었다고 얘기했기 때문에 앙심을 품고 있었던 터였습니다. 앙심을 품는 사람은 남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만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욕심의 노예가 되어 그 앙갚음의 기회를 딸을 통해서 하게 된 것입니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더니……, 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 이미 약속한 것이고 또 손님들이 보는 앞이라 그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습니다.(마르6,26) 그래서 결국은 요한의 목을 베게 되었습니다.
의인의 목숨과 자존심을 건 헛된 맹세에서 하나를 선택했거늘 그놈의 자존심이 뭔지? 체면이 뭔지? 악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누가 뭐라고 하든 ‘다만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할 것은‘아니오' 라고 만(야고 5,12)해야 합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에, 의로운 일에 자존심이 좀 상하면 어떻고 체면이 좀 손상되면 어떻습니까? 요한과 헤로데, 홀로 정의를 외치다가 죽어가는 한 예언자의 모습과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의롭고 정의롭게 사는 사람의 목숨까지 빼앗아가는 나약하기 짝이 없는 왕의 모습이 극적으로 대조되고 있습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라는 말이 있듯이 헤로데는 자신의 잘못에 대한 불안감을 마음에 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내가 목을 벤 요한이 되살아났구나.”하고 말하였습니다. 혹 내 무의식 속에 감추어둔 무엇인가가 있어 불안하다면 고해성사를 통해 그 불안을 해소하기 바랍니다. 매듭은 풀어야 합니다. 풀지 않고 놔두면 세월이 흘러도 풀리지 않은 채 그대로 있는 법입니다.
가정에서도 직장 안에서도 그리고 어떤 공동체 안에서든 더 큰 것을 위해서 자존심이 상하고, 체면에 손상을 입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안에 그리스도의 기쁨과 평화가 함께 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자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비천하게 살줄도 알며 풍족하게 살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을 힘입어 나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습니다.”(필리4,12-13)
능력을 주시는 분을 힘입어 어떤 처지나 여건 안에서도 꿋꿋하기 바랍니다. 주님을 얻으면 모든 것을 얻는 것이요, 그것이 우리의 기쁨입니다. 위신, 체면을 지켜야 할 때 지키십시오! 자존심을 내세워야 할 때 내세우십시오! 그리고 헛것인 줄 알았으면 곧 버리십시오! 서둘러 버리십시오! 정말로 승리한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고 패배한 사람은 헤로데임을 잊지 마십시오. 헤로데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과 권한을 남을 위해 사용하기보다 자신의 안일과 욕망을 위해 권력을 남용함으로써 세례자 요한을 죽이는 결과를 가져왔고 스스로 죄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요한은 항상 예수님의 삶을 미리 닦는 선구자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당신의 모든 것을 남을 위해 사용하였습니다.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내놓으셨습니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예수님을 닮기를 갈망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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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中心의 삶>
-참 권위와 형제애兄弟愛의 원천-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다.”
오늘 화답송 후렴입니다.
“주님은 나의 힘, 내 기쁨이시도다.”
오늘 아침성무일도 독서후 응송입니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의 힘, 나의 기쁨, 고백하는 이들이 참으로 부요하고 행복하고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바로 주님 중심의 삶에 대한 고백입니다.
기분 좋은 몇가지 예화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오늘 말씀 묵상중 23년전 생활성서 잡지에 우리 요셉 수도원에 관한 인터뷰 기사중 아름다운 대목이 생각나 찾아 봤습니다.
‘이수철 원장수사는 안으로는 강이 되고 밖으로는 산이 되어야 한다는 말마디에 유난히 힘을 준다. 그는 언젠가 ’정주’라는 제목으로 이런 시를 지었다.
-“산처럼 머물러 살면/푸른 하늘/흰구름/빛나는 별들
아름다운 하느님/배경이 되어 주신다”-1997.8.11
참 좋다. 하느님 사랑 안에 항구히 머물러 정주의 삶을 살면 그렇게 좋은 것을 왜 우리는 어리석게도 이리저리 헤매는 걸까.’(1998.11;생활성서12쪽)
정주서원의 삶을 통해 잘 드러나는 하느님 중심의 삶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은 참 권위와 형제애의 원천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아랫집 수녀원의 전임 관구장이었던 서 마리 레몽 수녀가 그 모범입니다. 저보다 12세 더 잡순 소띠 띠동갑의 85세의 불편한 건강이지만 참 치열히 하루하루 열정적으로 한결같이 사시는 분입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사는 이들은 하느님 중심에 깊이 뿌리 내린 정주의 영성을 삽니다. 정주영성은 비단 분도수도자들뿐 아닌 믿는 이들 모두의 보편적 영성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2.4일은 작년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제안하였고 유엔에서 재가함으로 최초로 맞이한 ‘제1회 국제 인간 형제애의 날’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똑같은 아버지로부터 태어났다.”는 제하의 교황님 말씀도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에 깊이 뿌리내린 교황님의 권위와 형제애임을 깨닫습니다. 86세 노령에도 불구하고 교황님의 한결같은 열정과 노력은 언제나 감동이요 살아 있는 성인聖人임을 깨닫게 합니다.
또 하나의 모처럼 밝고 반가운 뉴스는 바이든 대통령과 문대통령의 두 정상간의 화기애애한 통화 내용이었습니다. “문대통령과 나는 가톨릭 신자이니 교황님과 자주 소통하자. 당선 직후 교황이 축하 전화를 주신 기억이 난다. 당시 기후변화와 민주주의 등 다양한 이야기를 했는데, 문대통령과 이야기를 해보니 두분의 견해가 비슷한 것 같다.”는 바이든 대통령의 언급에 이어,
문대통령은 “교황님과 대화를 한 적이 있다. 교황은 동북아 평화 안정과 기후 변화등을 기억하셨다, 당신께서 직접 역할을 맡을 수 있다는 말씀도 하셨다. 교황과 협력할 필요가 있다.” 화답했으며, 코로나 확산세가 진정되는 올해 하반기쯤이면 교황의 방북문제가 자연스럽게 제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합니다.
오늘은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축일입니다.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 섬 출신의 성녀는 3세기 중엽 데키우스 황제때 순교한 성녀로 아침성무일도 즈카르야의 노래 후렴 역시 성녀의 하느님 중심의 삶이 얼마나 확고한지 잘 보여줍니다.
“아가다는 마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처럼 즐겁고 자랑스럽게 감옥에 갔으며, 자기 고통을 기도로써 주께 봉헌하였도다.”
한결같이 하느님 사랑의 중심에 깊이 뿌리 내린 ‘정주의 성인들’임을 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도 우리는 많은 가르침을 받습니다. 오늘 마르꼬 복음의 배치가 절묘합니다. 예수님의 열두제자의 파견과 제자들이 귀가하여 보고한 후 오천명을 먹이신 일화 사이에 세례자 요한의 죽음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분명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통해 더욱 각오를 새로이 하며 하느님 중심의 삶을 확고히 했을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세상을 떠났지만 예수님이 그 뒤를 이어 사명을 수행하니 하느님의 섭리가 참 오묘하고 고맙습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과 너무나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헤로데입니다. 한 마디로 삶의 중심이자 줏대인 하느님이 없는 우유부단하고 경솔, 경박한 인물이었습니다. 요한이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호감을 가졌지만 헤로디아의 사주를 받은 그 딸의 유혹에 넘어가 요한을 죽게 만듭니다. 예수님의 활약에 ‘내가 죽인 요한이 살아났다!’며 전전긍긍 두려워하고 불안해 하는 헤로데의 마음 역시 하느님의 줏대 없는 삶의 반영입니다.
오늘 히브리서는 이런 모든 상황을 반면교사로 삼아 우리 모두에게 아주 구체적으로 하느님 중심의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것을 촉구합니다.
1.형제애를 실천하십시오.
2.손님접대, 즉 환대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3.감옥에 갇힌 이들, 학대받는 이들을 기억해 주십시오.
4.불륜이나 간음을 하지 마십시오.
5.돈 욕심에 얽매여 살지말고 지금 가진 것으로 만족하십시오.
하느님 중심에 깊이 뿌리내릴 때 자연스런 삶의 열매들이자 하느님 중심의 삶의 진정성을 보여주는 형제애와 정결, 자족自足의 삶입니다. 이어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 모두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산 지도자들을, 성인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 권고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일러 준 지도자들을, 성인들을 기억하십시오. 그들이 어떻게 살다가 죽었는지 살펴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이십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을 닮아 하느님 중심의 삶과 더불어 참 권위와 형제애의 삶을 살게 해 주십니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시편27,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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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 우리는 독서 내용이 복음 내용을 설명하고 있음을 봅니다.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다."(마르 6,18)
헤로데와 요한과의 관계는 미묘합니다. 권력자와 예언자의 관계이니 그다지 속 편한 사이는 아니겠지요. 그래도 어느 면에서는 헤로데가 요한을 인정하고 존중했다고 복음사가가 전합니다.(마르 6,20 참조)
요한은 헤로데의 과실을 지적하고 바로잡도록 진언합니다. 제1독서인 히브리서에 언급된 불륜과 간음에 대한 경고가 이를 뒷받침하지요.(히브 13,4) 그래서 불륜의 당사자 중 하나인 헤로디아에게 요한은 눈엣가시였습니다.
"형제애를 계속 실천하십시오."(히브 13,1)
어쩌면 요한은 헤로데에게 지치지 않고 형제애를 실천한 것일 겁니다. 하느님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을 다스리는 군주로서 하느님 마음에 드는 존재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 위험을 무릅쓰고 진언을 했을 테니까요. 진정한 형제애는 상대가 듣기 좋아하는 말만을 하지 않고, 상대가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존재가 되길 바랍니다.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여라."(마르 6,24)
요한의 목숨이 헤로디아 딸의 춤값으로 환산됩니다. 그런데 이처럼 자극적이고 불의하게 흘러가는 복음 속 사건 안에서 요한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는 분이시니 나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히브 13,6; 시편 118,6)
이 시편 저자의 고백이 곧 세례자 요한의 마음이고,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순교자 아가타 성녀의 마음일 것입니다. 사람이 두려웠다면 걷지 않았을 길에 들어서서, 끝까지 신의를 지켜 용감히 그 길을 완수한 이들이지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이십니다."(히브 13,8)
그들은 지상의 삶이 끝이 아님을 알기에, 영원한 삶의 주인이신 분께 몸을 던졌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살다가 죽었는지 살펴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십시오."(히브 13,7)
이제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에게 삶의 방향을 제시합니다. "돈 욕심에 얽매여 살지 말고 지금 가진 것으로 만족하라"고 권고하며, 역사 안에서 충실히 주님을 증거한 이들을 본받으라고 촉구합니다.
증거자들의 삶과 죽음이 때로 세상 눈에 어이없고 허무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바보도 아니고 딱히 모자라지도 않는 이들이 왜 세속 원리에 야합하지 않고 굳이 험한 길을 택하는지 믿음이 없으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으니까요. 대다수의 순교자, 증거자들이 입으로 외치기보다 삶과 죽음으로써 외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믿음의 눈을 뜨지 못한 이에게는 영원히 낯설고 거북할 겁니다.
"내가 목을 벤 요한이 되살아났구나."(마르 6,16)
헤로데는 예수님의 출현에 요한을 떠올렸지요. 착각에서 나온 틀린 말이었지만, 교회 역사 안에서 무수한 요한이, 무수한 제2의 그리스도가 자신들의 피로 믿음의 토양을 비옥하게 만들어왔음을 우리는 압니다. 세상 안에서 하느님을 증거하는 삶은 그렇게 이어져왔고 또 앞으로도 이어질 것입니다.
삶에서 마주치는 크고 작은 소용돌이와 고갯길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세상이 인정하는 평판과 지위가 없어도, 세속의 눈에 낯설고 거북해 보여도, 우리가 들어선 이 길은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이신 그리스도의 품으로 이어지니 힘 내어 우리의 믿음을 채워갑시다. 이 길에서 서로 힘을 주고받는 우리가 있어 든든하고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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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의미와 목적의 결핍은 사람을 병들게 한다
심리학자며 랍비인 마이클 라너는 30년간 연구로 그들이 진심으로 원하는 것은 더 많은 임금이나 수당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의 가장 깊은 관심사는 일에서 경험하는 ‘의미와 목적의 결핍’이었다. 라너는 미국인의 삶의 핵심을 경제적 이득이 아니라 의미와 돌봄과 연민으로 만들려는 의도를 가지고 ‘의미의 정치’라고 불리는 운동을 시작했다.
♣무의미함은 신체뿐 아니라 정서와 영성에도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면, 아녜스 샌포드는 여러 해에 걸쳐 우울증에서 회복되는 경험을 통해 인간이 본성적으로 타고난 봉인된 명령을 발견하는 것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샌포드가 자신의 특별한 존재 목적을 수행하기 시작하고 삶의 깊은 의미를 발견하자, 비로소 때때로 자살 충동을 불러일으키던 우울증이 사라졌다. 삶을 돌아보면서 샌포드는 우울증이 하느님의 시험은 아니었는지 자문해 보았다. 그리스도인은 나를 세상에 부르신 하느님의 뜻을 깨달아 실천하는 것이 삶의 목적과 의미를 이루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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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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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전해줍니다.
엘리야의 영과 권능을 지닌 세레자 요한은 엘리야가 아합 임금과 이제벨 여왕을 꾸짖었던 것처럼, 헤로데와 헤로디아를 무섭게 꾸짖었습니다. 그들의 결혼이 합법적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어둠이 빛을 싫어하는 까닭입니다. 사실, 더러운 이들에게 정결함은 오히려 적수가 되고, 타락한 이들에게는 고결함이 오히려 괴로움이 됩니다.
잔인한 이들은 자비를 보면 참지 못하고, 인정 없는 이들은 사랑과 진실을 참지 못하고, 불의한 이들은 정의를 참지 못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곤경에 빠집니다.
오늘 <복음>에는 의인과 악인의 극한 대조를 보여줍니다. 한편에는 음모를 꾸미며 속임수를 쓰며 악의에 찬 헤로디아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진실하고 강직하며, 그 어떤 거짓에도 굴하지 않는 세례자 요한이 있습니다.
한편에는 폭군이지만 무능력한 헤로데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참수당하지만 힘 있는 세례자 요한이 있습니다. 한편에는 혀를 다스리지 못한 헤로데가 있고, 그의 혀는 잔치에서 맹세하지만 결국 타인의 죽음을 부르고 불의를 가져옵니다.
다른 한편에는 혀가 곧은 요한이 있고, 그의 혀는 감옥에 갇히지만 자신의 죽음을 허용하되 의로움을 이룹니다. 그리하여 헤로데가 받은 것은 요한의 머리지만 두려움이 되고, 세례자 요한이 받은 것은 쟁반이지만 월계관이 됩니다.
한편,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죽음을 예표해 줍니다. 한 푼 춤 값으로 팔려버린 세례자 요한의 목숨은 어찌 보면, 참으로 억울한 죽음처럼 보입니다. 마치, 은전 30냥에 팔려버린 예수님의 목숨처럼 말입니다.
헤로디아의 조정을 받은 소녀가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주기를”요청하듯, 사제들과 유대 원로들의 조정을 받은 군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외치게 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머리가 쟁반에 올려 지듯, 예수님의 온몸이 십자가 위에 올려 질 것입니다.
이처럼, 의인 요한의 죽음은 “야훼의 종”인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보여줍니다. 그러나 올가미에 걸려 넘어진 이는 의인이 아니라, 폭군이었습니다. 거짓을 꾸미는 악인의 혀는 결국 자신이 쳐놓은 덫에 걸려 넘어지고, 진실된 의인의 혀는 영광의 관이 씌워졌습니다.
그렇습니다. 헤로데가 요한의 머리는 베었어도, 그의 소리는 벨 수가 없었습니다. 혀는 잠잠하게 만들었지만, 그 소리는 가라앉힐 수가 없었습니다.
감옥에 묶어 두어도 외치고, 죽어서 쟁반 위에서도 살아 외칩니다. 세월이 흐를지라도 폭군의 죄악을 고발하는 의인의 외치는 소리는 계속될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박혀서도 있어도 침묵으로 외칩니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우스는 말합니다.
“침묵 안에 완성되어 있는 하느님 사랑의 외침을 들으십시오.”
이제 우리도 진리와 정의를 위해 외치는 법을 배워야 할 일입니다. 또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무관심의 세계화’가 남을 위해 우는 법을 빼앗아 가버린 이 시대에, 남을 위해 우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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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마르 6,18)
주님!
뼈 속에 새겨져 숨 막히게 외치고 있는
진실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힘으로 짓눌러 가라앉힐 수 없는
그 무엇으로도 가로막을 수 없는
진리의 말씀을 저버리지 않게 하소서.
목이 베여도 결코 베어지지 않는
살아있는 말이 되게 하소서
울 줄을 알게 하소서.
진정으로 사랑하여 울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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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마르6,16)
예수님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마침내 헤로데도 예수님의 소문을 듣게 됩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세례자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고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엘리야'나 옛 예언자들과 같은 '예언자'라고 말합니다.
마귀들도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알아보는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알아보지 못합니다. 헤로데 임금도 예수님을 두고 자신이 목을 벤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났다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은 이 사실을 전하면서 이어서 정의를 부르짖다가 헤로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전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일러 준 여러분의 지도자들을 기억하십시오. 그들이 어떻게 살다가 죽었는지 살펴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이십니다."(히브13,7-8)
우리에 앞선 많은 영적 지도자들이 있는데, 그들이 바로 수많은 성인 성녀들이며,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순교자 세례자 요한이며,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입니다.
순교자들은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끝까지 믿은 사람들이며, 모진 박해 속에서도 끝까지 믿음을 살아낸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 천상 예루살렘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습니다.
'선하다' 라는 뜻을 지닌 성녀 아가타는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고자 평생 동정으로 사신 분입니다. 그리고 이 동정을 철저하게 지키려다가 순교하신 분입니다.
우리에 앞선 영적 지도자들의 믿음과 삶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그들의 뒤를 따라갑시다!
그들처럼
지금 믿고,
단순하게 믿고,
굳게 믿고,
삶으로 믿는,
그런 천주교인들이 됩시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화답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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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Qsu-4UIr098&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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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마르 6, 16)
하느님을
새까맣게
잊고 사는
우리들
삶이다.
하느님을
잊고 살기에
올바른 삶의
길을
잃어버렸다.
모두가 소중한
사람들이다.
오고
가는 것이
우리들 삶이다.
하느님께서
창조한
사람을
오히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우리의
현실이다.
인간에게서
비롯된 아픈
살인의
역사이다.
누구나
원하지 않는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
사람은
사람이
가야할 길이
있다.
그것은
보편적인
양심의 길이다.
잘못을 인정하고
잘못을 고치는
것에서
사람은 사람이
되어 간다.
세례자 요한같이
우리 또한
올바른
삶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육신은 죽일 수
있어도 정신과
신앙은 결코
죽일 수 없다.
인간의 의미와
삶의 의미를
다시금 묻게 된다.
사악한 인간의
모습은
정화되어야
한다.
세례자
요한같은
빛의 사람이
많아지길
기도한다.
하느님과 사람
하늘과 땅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의 길은
착한 삶을
우리가
사는 것이다.
살인의
이야기가 아닌
서로에게
기쁨을 주는
복음의 이야기를
원하신다.
사악함과
괴롭힘
살인은 이제
멈추어야 한다.
너무나
안타까운
우리 사회의
아픈 죽음들을
위해 기도드린다.
세례자 요한의
희생이
변화와
쇄신의
봄날 같은
희망임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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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무엇을 청할까요?">
우리가 청해야 할 올바른 지향과 기도는 언제나 생명을 위한 참된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하듯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는 용기를 청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이 중심이 되는 기도로 이러한 마음을 하느님께 청해 봅니다.
무섭고 사악한 마음이 하느님께 집중되어 정화되기를 청합니다.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참된 기쁨을 청합니다. 하느님께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은총을 청합니다. 살아계시는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함께 살아가고 일하는 공동체의 기쁨을 위해 기도드립니다. 하느님께 주신 저마다의 소중한 생명을 알아볼 수 있는 믿음을 진심으로 청합니다. 올바른 청원이 올바른 사랑의 삶으로 우리를 변화시켜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이름으로 서로를 해치고 아프게 한 우리의 어리석음을 봉헌하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생명의 의미가 다시금 사랑의 주님이 될 때 모든 만남은 선물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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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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