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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리 금수강산---대한민국, 그리고--- 이병철 삼성회장 부자스토리|
[북리뷰] 대한민국 다시 읽기
저자 : 한 창. 발행일 : 2010. 서평 : 한 근태 소장(한스컨설팅)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수년 만에 다시 돌아온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한국이 얼마나 좋은 나라인지 생각을 못했는데 미국에 살면서 한국의 장점을 다시 발견했기 때문에 다시 돌아왔다고 했다. 그가 한 말 중 기억나는 것 몇 가지만 꼽으면? “한국만큼 편한 나라는 없다. 모든 것은 자동적으로 배달을 해 준다. 가구나 텔레비전은 물론이고 심지어 장본 것도 배달해준다. 어디든지 쉽게 갈 수 있을 만큼 대중교통이 편하다. 전화도 잘 되고 인터넷 설치도 쉽다. 옷도 잘 입고, 좋은 음식점도 지천이다. 치안도 한국만한 곳이 드물다. 등등”
평소에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이슈이다. 요즘 들어 정말 국운이 상승하고 있다는 생각이 부쩍 든다. 박태준의 수영, 동계올림픽의 선전, 김연아의 피겨 우승, G20 개최 등등.. 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 약간의 자학증세를 갖고 있다. 오늘 소개할 책 “대한민국 다시 읽기”는 우리 자신이 성취한 것, 가진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다시 한 번 살펴본 책이다. 2005년 골드만삭스는 그들의 보고서에서 2050년 한국이 미국의 뒤를 이어 세계 2위의 부자나라가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2009년 9월 골드만삭스는 남북이 통일되면 30-40년 뒤에는 국내총생산이 프랑스, 독일, 일본을 넘어설 것으로 또 다시 예측했다. 그들은 장기 성장잠재력 지수라는 지표를 바탕으로 예측을 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2005년과 2009년 두 번에 걸쳐서다. 골드만삭스 같은 세계적인 기업이 터무니없는 얘기를 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뭔가 있기 때문에 그런 소리를 했을 것이다. 맥아더 장군은 6.25 전쟁 당시 처참하게 파괴된 한국을 보고 이렇게 얘기했다. “이 도시가 과거의 모습을 찾는데 100년이 넘게 걸릴 것이다” 도대체 지금 우리의 상태는 어떤가?
우리는 제조분야에서 세계시장을 평정했다.
1960년대 후진국이었던 나라 중 글로벌기업을 배출하는데 성공한 나라는 한국뿐이다. 중국, 인도, 브라질, 멕시코 등에서도 글로벌 기업이 태동할 조짐은 보이나 아직은 역부족 상태다. 업종별로도 세계 1 등인 곳이 수두룩하다. 우선 조선업이 그렇다. 조선업의 경우 2003년부터 수주량, 건조량, 수주잔량 등 모든 분야에서 1 등을 하고 있다. 2009년 현재 세계 10대 조선소 10개 중 7개가 한국이다. 반도체 부분도 그렇다. 반도체는 1998년 이후 12년째 1위다. 전 세계가 한국을 추적 중이다. 낸드플래시 부분은 세계 시장점유율 54%로 1위다. LCD 시장에서도 압도적 1위다. 비록 세계 1위는 아니지만 휴대전화, 철강, 자동차 부문에서도 발군이다.
휴대전화기는 2009년 2분기에 세계시장점유율 30.5%로 2위를 차지했다. 철강, 조강 생산량은 2007년 세계 5위다. 자동차 생산대수도 5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 밖에도 화섬 생산량 5위, 에틸렌 생산량 5위, 타이어 생산 3위를 차지하고 있다. 또 5위의 핵 원자로 보유국이기도 하다. 2009년 현대차의 시가총액은 GM을 눌렀다. 삼성전자는 소니, 노키아를 물리치고 인텔을 근소한 차로 뒤쫓고 있다. 그 중 발군의 스토리는 삼성전자다. 80년대 한국은 전자산업에서 일본의 라이벌이 되지 못했다. 그 당시 우리는 소니의 워크맨에 환호했고 일본 출장 때마다 아키하바라에 가서 최신형 전자제품을 샀다. 미국 유학을 했던 나도 소니의 트라이나이트론을 사는 것을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했다.
1969년 삼성전자가 산요의 도움으로 설립될 때만 해도 지금의 삼성전자를 상상한 사람은 없다. 삼성전자는 45만평의 수원전자단지의 땅을 매입했는데 45만평으로 한 이유도 도쿄의 산요전기 단지가 40만평이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삼성전자의 시가총액은 96년도 말 소니의 11분의 1이었다. 그러나 2002년 6월 마침내 소니를 앞질렀고 2009년 8월 현재 시가총액은 1천 억달러를 돌파함으로서 400억 달러 내외의 소니를 두 배 이상 앞질렀다(2012년 기준으로는 3배). 며칠 전 신문에는 분기 이익이 4조를 넘었다고 한다. 이것이 기적이 아니고 무어란 말이냐?
스페인의 1인당 GNI는 한국보다 한 단계 위인 7위지만 산업구조와 기업경쟁력은 스페인보다 훨씬 탄탄하다. 한국은 조선, 철강, 자동차 등 전통제조업분야부터 LCD, LED TV, 반도체, 휴대전화까지 고루 경쟁력이 있다. 스페인이 앞선 이유는 위치상 관광수입이 크기 때문이다. 외화보유고는 세계 6위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아시아 48개국 중 가장 앞서는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1987년 민의에 의해 헌법을 개정했으며 1997년 평화로운 정권 교체를 달성했다. 반면 태국 같은 나라는 만성 쿠데타에 시달리고 있다. 포르투갈은 1995년 인당 GDP가 만 달러를 돌파한 이래 성장을 멈춘 채 장기적인 침체에 빠져들었다. 석유부국 사우디아라비아 역시 유가 덕분에 70년대 2만6천 달러까지 인당소득이 올랐으나 2007년 이후 1만 5천불에 그치고 있다.
한국은 디자인에서도 강국으로의 도약하고 있다.
90년대만 해도 우리는 디자인 후진국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중국 소비자는 한국 제품의 최대강점으로 디자인을 꼽는다. 2009년 기아의 쏘울은 한국차 최초로 레드닷 디자인상에서 자동차 제품 디자인분야 “Honorable Mention” 상을 수상했다. 삼성은 와인잔의 감각적 이미지를 채택한 보르도 TV를 출시해 소니를 무너뜨렸다. 엘지전자의 휘센 또한 탁월한 디자인으로 9년 연속 세계판매 1위를 달성하고 있다. 200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프랑스의 르 클레지오는 한국인의 창의력이야말로 한국의 희망이라고 말한다. “문화경쟁력이 한국을 발전시킬 것이다. 문화적 이미지가 상품의 생명을 좌우한다. 한국은 이웃 중국, 일본과 다른 독특한 문화를 갖고 있을 뿐 아니라 훌륭한 예술가도 많다.”
한국은 스포츠 강국이다.
개선전과 개선 후가 이렇게 극명한 경우는 많지 않다. 우리는 1976년까지 올림픽에서 단 한 개의 금메달도 따지 못했다. 그러나 88년 서울올림픽에서 세계 4위를 차지한 이후 강국으로 도약했다. 원래는 스포츠는 일본이 강국이다. 올림픽에서 두 차례나 세계 3위를 차지했다. 한국에게 추월당하기 전 84년 LA에서는 5위를 차지했다. 우리보다 골프도 강국이었다. PGA와 LPGA에도 훨씬 먼저 진출했다. 하지만 지금은 게임이 되지 못한다.
올림픽도 세 차례나 유치했다. 64년 하계도쿄 올림픽, 72년 삿포르 동계올림픽, 98년 나가노에서 다시 동계올림픽을 개최했다. 2002년에는 한국과 공동으로 월드컵도 치렀다. 하지만 88년 이후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을 제외하고는 단 한 차례도 한국을 앞지르지 못했다. 서울 올림픽 이후 한국은 금 61개, 일본은 40개에 그치고 있다.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다. 54년에서 86년까지 월드컵 본선에도 진출하지 못했던 한국은 86년 이후 7회 연속 월드컵에 진출했고 2002년에는 월드컵에서 4강에 올랐다. 또 수영과 피겨 같은 선진국형 스포츠도 박태환, 김연아 같은 선수가 석권을 했다.
한국의 바둑 정복기도 대서사시다.
80년대 말까지 우리 바둑은 일본은 물론 중국에도 뒤졌다. 하지만 90년대 조훈현과 이창호 라인 가동 이후 단숨에 세계정상에 올라 세계가 거꾸로 한국을 뒤쫓고 있다. 80년대에는 다들 일본으로 바둑 유학을 떠났다. 조치훈이 유학을 간 것이 대표적이고 그것이 노상 신문에 회자되었다. 그 당시 한국기원은 일본 기원과 교류전을 개최하기 위해 눈물겨운 노력을 했다.
일본기원 관계자가 한국에 오면 김포공항부터 깍듯이 모시러 나가곤 했다. 그러나 일본은 한국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직 중국과의 교류전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1981년 1월 조치훈과 조훈현의 기념대국이 열렸는데 조치훈은 당시 천문학적인 3천만의 돈을 받았고 조훈현은 4분의 1 밖에 되지 않는 대국료에 만족해야 했다. 이 대결에서 조치훈은 두 판 모두 승리를 거두었다. 종잇장 같은 실력차이였지만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모두 엄청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했다. 기념대국을 끝낸 조훈현은 평생 처음으로 술을 마시고 가다 골목길에서 쓰러졌고 설상가상으로 눈이 잘 보이지 않아 기어가다시피 여관까지 가야 했다. 그 여파로 왕위전에서 서봉수에게 패하고 최악의 시절을 견뎌야 했다.
그러나 그 후 조치훈을 상대로 7연승을 거둔다. 절치부심의 결과다. 이 기간 조훈현은 혼신의 힘을 다해 변방의 한국 바둑을 세계정상으로 끌어올리는데 큰 기여를 한다. 그리고 마침내 89년 세계최대 대회인 응창기배에 홀로 출전해 연전연승하고 중국의 섭위평을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한다. 엄청난 사건이다. 한국의 위상이 달라지는 순간이다. 이를 계기로 한중일은 밀고 밀리는 바둑삼국지의 서막을 연다. 또 조훈현은 불세출의 천재 이창호를 배출한다. “느린 것으로 빠른 것을 제압한 이창호로부터 바둑의 신기원이 열렸고 한국 바둑은 십 수 년 간 세계를 지배했다. 중국과 일본 고수들에게 세계 일인자가 누구냐고 물으면 누구나 이창호라고 대답했다. 그는 바둑 사상 당대의 모든 고수가 마음으로 승복한 유일한 일인자였다.” 바둑전문기자 박치문의 말이다.
한국 바둑은 세 번의 도약을 이룬다. 첫째가, 1980년 조치훈의 명인쟁취이고, 둘째가 1989년 조훈현의 응창기배 우승이고 세 번째가 이창호의 등장이다. 이창호 이후 전국적으로 바둑학원과 강좌가 늘었고 바둑학과가 생겼다. 이세돌, 최철환, 박영훈 등 신예 강자가 출현한다. 1988년 일본에서 국제기전 후지츠배가 만들어진 이후 한국은 국제기전에서 최고의 성적을 올리고 있다. 국가별로 한국 57회, 중국 18회, 일본 20회, 대만 1회로 한국의 우승횟수는 일본과 중국을 합친 것보다 많다. 정말 대단한 나라다.
한국은 언어를 만들어냈다는 점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세계의 어느 나라도 글자를 만들지는 못했다. 아무리 억만금을 줘도 언어를 만들기는 쉽지 않다. 그만큼 대단한 사건이다. 한글의 비범성에 대해 펄벅 여사는 이렇게 말한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단순하면서 가장 훌륭한 글자다. 세종대왕은 한국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다.” 아무리 간단한 언어라도 인간이 언어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한글의 우수성은 IT강국의 인프라다. 입력하기 쉽기 때문이다. 한글은 일본 가타카나에 비해 7배 이상 입력이 간편하다. 영어에 비해서도 35%나 빠르다. 전 세계에서 한국보다 문자를 빨리 주고받는 나라는 없을 것이다.
종교적인 면에서도 한국은 대단한 나라다.
유교, 불교, 기독교 등 세 개의 고등종교를 원형 그대로 유지하면서 어떠한 분쟁도 없이 평화롭게 살아간다는 사실은 가벼이 볼 문제가 아니다. 불교도 우리는 잘 발전시켰다. 조계종의 발원지인 중국의 임제종이 한국의 선(禪)의 참모습을 조계종에 배우러 올 정도다. 유교도 그렇다. 한국의 성균관은 유교의 제례가 가장 완벽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어 중국 유학자들이 배우러 올 정도다. 기독교도 한국에서 가장 크게 부흥했다. 가장 큰 교회는 모두 한국에 있다. 발전시키면서 동시에 가장 근본적의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모든 종교가 번성하지만 별 다른 갈등 없이 잘 조화를 이루어사는 모습도 경이롭다. 인류가 당면한 가장 어려운 문제 중 하나가 종교간 다툼이다. 우리는 이미 종교간 화해를 하고 공존하고 있다. 한국인 가정에는 식구들이 저마다 다른 종교를 가진 경우가 많다. 쉽지 않은 일이다. 종교 간에도 별 다른 갈등이 없다.
수유리 한신대학원과 화계사는 지난 십 수 년 동안 크리스마스와 석가탄신일에 서로를 축하하는 현수막을 걸고 있다. 한국은 지난 2천 년의 역사 속에서 3개의 세계종교를 수용한 나라다. 이미 문명의 화해자로서 역할을 할 수 있다. 함석헌에 따르면 한국은 바로 이와 같은 인류사적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반만 년 동안 고난을 달게 받아온 나라다. 한국은 언제나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였기 때문에 화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강한 정체성과 치열한 경쟁이다. 한국은 비록 작은 나라지만 동화시킬 수 없는 강력한 정체성을 가졌다. 그래서 중국, 몽고, 만주, 일본 등이 한국을 침략해 성공을 거두는 듯 했지만 모두 토해내고 말았다. 우리 주변에는 만만한 나라가 하나도 없다. 세계 1등에서 4 등까지가 모두 우리 모두 주변에 있다. 공부 잘 하는 애들과 치열한 경쟁을 하는 격이다. 격투기 랭킹 1위에서 4위까지의 강자들과 매일 몸을 부대끼며 생활하는 기분이다.
남북대립도 우리에게는 건강한 스트레스로 작용했다.
오랫동안 한국인들은 언제 남침할지 모르는 북한스트레스 속에서 살아왔는데 그게 약이 됐을 것이다. 2008년 현재 북한 경제규모는 남한의 38분의 1이다. 개인소득은 한국의 18분의 1, 아프리카 케냐, 나이지리아와 비슷한 수준이다. 한 마디로 세계 15위의 경제대국과 180위권의 경제후진국이 경계를 맞대고 있는 것이다. 1965년만 해도 북한의 국내총생산은 한국의 2배 이상이었다. 1990년대 들어 소련의 원조가 중단되고 전국을 휩쓴 기근이 계속되지 북한의 최악의 국면이 되었다.
한국사람은 독한 성격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신라시대 품일 장군의 아들 관창은 어리다는 이유로 적장에게 잡혔다 살아왔다. 품일은 창피하다면서 어린 아들을 다시 전쟁터로 내보내 죽게 만든다. 김유신은 아들 원술이 당(唐)군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고도 살아서 돌아오자 그를 처형할 것은 건의한다. 가까스로 사형은 면했으나 유신은 생전에 다시 아들 얼굴을 보지 않는다. 계백은 가족을 모두 죽이고 전쟁터에 나온다. 적의 손에 죽는 것보다 내 손에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참 독한 사람들이다. 우리가 러시아, 중국, 일본 같은 초강대국 사이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위기 때마다 광기에 가까운 독함을 발휘했기 때문에 생존했을 것이다. 한국인의 광기와 독기는 한국을 삼키려는 주변 강국에게 독으로 작용했다. 함석헌의 말대로 중국이 먹었다 토하고, 만주가 먹었다 토하고, 영악한 일본이 먹었다 토했으며 러시아가 침을 흘리면서도 못 먹은 나라다. 그 덕분에 지금의 한국이 있을 것이다.
똑똑하면서도 근면한 특성도 기여를 했을 것이다.
보통은 똑똑하면 게으른데 한국인은 똑똑하면서도 부지런하다. 그러니 잘 살지 않을 방법이 없다. 1970년대 삼성전자의 강진구 사장은 전 임직원 앞에서 이렇게까지 얘기를 했다고 한다. “가정이냐, 회사냐 분명히 선택을 해야 합니다. 둘 다라는 식의 태도는 안 됩니다.” 참 엄청난 얘기다. 한국인의 연간 근로시간은 2357시간, OECD 연간근로시간 1777 시간보다 무려 580시간이나 길다. 한국인의 조급증도 성장에 기여를 했을 것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발걸음이 빠르다.
뭐니 뭐니 해도 성장의 제 1 원동력은 교육이다.
우리는 교육에 목숨을 건 민족이다. 본인은 굶을지언정 자식은 서울로 해외로 유학을 보낸다. 그래서 한때 대학을 상아탑 대신 우골탑이라고 불렀다. 소를 팔아 그 돈으로 보냈다는 의미다. 제사 때도 벼슬이나 직함이 없는 조상은 학생으로 쓴다. “현고학생부군신위”가 그렇다. 벼슬이 없는 우리 모두는 언제나 학생인 셈이다. 영화 두사부일체와 가문의 영광은 조직폭력배도 배워야 한다는 설정에서 출발했다.
오전 7시부터 하는 조찬 강연과 저녁에 하는 최고경영자 과정은 배우려는 사장으로 넘쳐난다. 전 세계적으로 희귀한 현상이다. 오죽했으면 과외금지조치까지 내렸겠는가? 과외금지정책은 인류역사를 통틀어 없는 일이다. 2008년 총예산의 5분의 1인 36조원을 교육에 투자했다. 2007년 한국 사교육비 비중은 GDP대비 2.9%로 OECD 평균치와 비교해 10배 이상 높다. 2008년 미국 대학에 재학 중인 한국학생은 12만 7천명으로 국가별 순위에서 3년 연속 1위이다. 다음은 중국, 인도, 일본 순이다. 한국이 세계 어느 민족도 해낼 수 없었던 단기간의 경제성장을 달성한 것은 교육열 외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물론 빠른 성장에 따른 부작용, 세대 간 갈등,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사이의 갈등, 취업 문제 등 문제는 많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한 일에 대해 설명할 수 있고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이 책을 통해 우리 자신을 새롭게 보길 권한다.
출처 :정수학당 원문보기▶ 글쓴이 : 수공, 유성은
지산 00:47 우쭐하네요. 펼쳐놓으니 우리는 가진게 너무 많은 나라네요. 힘이 불끈 솟습니다. 자랑스런 나라에서 멋지게 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화이팅팅팅!!!!!!!!!!!!!!!!
< 이병철 회장의 '미꾸라지와 메기' 사업 이야기 >
三星그룹의 故 '이병철' 회장의 젊은 시절 일화(逸話)를 소개하겠습니다.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중도에 그만두고, 자신의 고향인 경남 '의령'에서 농사를 지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이 분은, 일찍부터 이재술(理財術)이 뛰어 났던지, 논(畓)에서 돈 버는 방법을 연구해 냈습니다. 당시의 논 1마지기(200평)에서는 농사가 잘 되어야 쌀 2가마니가 생산되던 시절이었습니다.
이회장은 시험 삼아 논 1마지기에는 벼를 심고, 그 옆에 있는 또 다른 한 마지기 200평에는 '미꾸라지' 새끼 1,000마리를 사다가 봄부터 길렀습니다.
가을에 수확 때까지 양쪽 모두 똑같은 비용을 투입하여, 각각 재배하고 길렀는데, 벼를 심은 논에서는 역시 쌀 2가마니가 생산되었고, 미꾸라지를 기른 논에서는 커다란 미꾸라지가 약 2,000마리로 늘어났습니다. 그것을 전부 잡아서 시장에 팔았더니 쌀 4가마니 값을 받았습니다.
그 이듬해에 또 시험양식(養殖)을 했습니다. 한쪽 논 200평에는 역시 어린 미꾸라지 1,000마리를 작년과 같이 길렀고, 다른 논 200평에는 미꾸라지 1,000마리와 미꾸라지를 잡아먹고 사는 천적(天敵)인' 메기' 20마리를 같이 넣고 길러서, 가을에 양쪽 모두 수확을 하고 보니, 처음 논에는 2,000마리의 미꾸라지가 생산되었고, 메기와 미꾸라지를 같이 넣어 길렀던 다른 논 200평에서는 메기들이 열심히 미꾸라지를 잡아먹었는데도 4,000마리로 늘어났고, 메기는 200마리로 늘어났습니다. 그래서 그걸 모두 팔았더니 쌀 8가마니에 해당되는 돈을 벌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 우주(宇宙) 생명계(生命界)의 자연현상은 어려움과 고통과 위험(危險)이 닥쳐오면 긴장하여 더 활발히 움직이고, 생존본능(生存本能)이 강화되어 더 열심히 번식하고, 훨씬 더 강인(强靭)해 진다는 사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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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송용경 박사의 칭찬에 글 올립니다.
우리는 화려강산에서 무궁화 삼철리에 살고 있습니다.
어두웠던 카페가 이젠 살아나는가 싶습니다.
시간이 필요했던 지난 2년간 우리 효 카페가 활성화
되는데 일익을 담당하게 되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젠 어느정도는 채워지지 않았나하는 회고를 해봅니다.
효우님 모두들 감사합니다.
너무 길어서 저는 츤츤히 읽을랍니다.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