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7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로다 그가 왕의 마음에 예루살렘 여호와의 성전을 아름답게 할 뜻을 두시고 28 또 나로 왕과 그의 보좌관들 앞과 왕의 권세 있는 모든 방백의 앞에서 은혜를 얻게 하셨도다 내 하나님 여호와의 손이 내 위에 있으므로 내가 힘을 얻어 이스라엘 중에 우두머리들을 모아 나와 함께 올라오게 하였노라”
바벨론 포로에서 1차로 돌아온 자들은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돌아왔습니다. 1차로 돌아온 자들이 성전 지대를 다시 놓고 성전을 건축한 것이 약 15년 걸렸습니다. 성전을 재건하고 나서 유월절을 지키는 것을 지난주에 보았습니다. 유월절이 중요한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할 때에 마지막 재앙인 장자의 죽음에서 어린 양의 피를 바르면 죽음의 사자가 넘어간 사건입니다. 유월절을 기점으로 새로운 해의 첫해로 삼았습니다. 유월절이 이스라엘의 정체성이 됩니다.
본문 7:1~5절입니다. ‘이 일 후에’에는 성전 재건과 유월절을 지킨 후로 연결되지만 이 사이는 약 60년의 간격이 있습니다. 바사 왕 고레스와 아닥사스다가 왕을 계산하여 보면 그렇게 나옵니다. 이 때에 에스라가 중심이 되어서 2차로 포로에서 돌아옵니다. 2차로 돌아오는 자들을 인솔한 에스라의 족보를 다루면서 대제사장 아론의 십육 대 손이라고 합니다.
6~10절입니다. 이 단락에서 주목할 단어는 올라왔다는 단어입니다. 6절과 7절과 8절에서 올라왔다고 하면서 그 올라온 목적지는 예루살렘입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올라가야 할 곳은 어디입니까?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는 곳으로 올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출애굽이 일어나는 것이며 출 바벨론이 일어나는 것이며 출 세상과 별세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 땅에 함몰될 자들이 아니라 올라가야 할 자들입니다.
에스라는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인데 그가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음으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라고 합니다. 마치 스룹바벨이 왕의 신임을 받아 올라오듯이 에스라도 왕의 신임을 받아 2차 귀환자들을 인솔하여 예루살렘으로 옵니다. 바벨론에서 예루살렘까지 만 4개월이 걸려서 옵니다. 그 먼 거리를 무사히 오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었다고 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에 이런 부분을 주의해서 봐야합니다. 사람이 하는 일 같아도 늘 하나님께서 이루심을 보여주기에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올라온 에스라는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를 결심합니다.
11~26절입니다. 스룹바벨에게 고레스 왕이 조서를 내리듯이 아닥사스다 왕이 에스라에게 조서를 내립니다. 조서의 내용은 스룹바벨과 비슷하게 예루살렘으로 올라 갈 것과 각양 세제의 혜택과 성전을 짓는 일에 도우라는 조서입니다. 이 조서는 왕과 일곱 자문관들이 내린 것입니다. 성전을 위하여 사용할 수 있는 것을 무엇이든지 청구하게 하고 궁중창고에서 내어주라고 합니다. 이뿐만 아니라 에스라에게 네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네 하나님의 율법을 아는 자를 법관과 재판관을 삼아 강 건너편 모든 백성을 재판하게 하고 그 중에 알지 못하는 자는 가르치라고 합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과 그 언약대로 이루어내시기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27~28절을 봅니다.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를 받은 에스라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닥사스다 왕의 마음을 움직여서 예루살렘 여호와의 성전을 아름답게 할 뜻을 두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방 왕의 마음도 움직이십니다. 그러므로 왕과 고관들에게서 은혜를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내 하나님 여호와와의 손이 내 위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에스라가 힘을 얻어 이스라엘의 우두머리들을 모아 함께 올라왔다고 합니다. 에스라 자신의 힘과 능력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을 단락마다 확증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의 왕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백성들의 타락상을 고스란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어떤 역사도 자기들의 조상들과 자신들의 역사를 이렇게 고발하는 역사는 없습니다. 모든 세상의 나라의 역사들은 미화합니다. 미화하기 위하여 역사 왜곡도 스스럼없이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러한 세상의 역사와 전혀 다르게 왕들과 지도자들과 백성들의 죄악을 그대로 기술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사람의 영광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식입니다(시115:1).
본문 8:1~14절입니다. 2차로 귀환하는 자들의 명단입니다. 역시 1절에서 바벨론에서 올라온 자들의 계보라고 합니다. 에스라 7장과 8장의 중심부분에 이들 명단이 있습니다. 이들이 올라가서 재건된 성전에 채워져야 할 사람들입니다. 물론 1차로 돌아온 자들이 재건하고 그들도 성전의 구성원이 되지만 두 번째의 귀환자들도 사로잡혀갔다 돌아온 자들이 성전의 구성원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도 같은 원리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성전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그 하나님의 일하심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과 성령을 보내심으로 이루어내십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처소를 마련한다는 개념이 십자가로 하나님의 언약을 완성한 후에 성령을 보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 자들은 건물이 아닌 그리스도의 몸 된 성전이 됩니다.
15~20절입니다.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오기 위하여 아하와 강가에 모여서 삼일간 계수를 하여 보니 레위 자손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명철한 사람들을 보내서 여러 지역에 보내어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섬길 자를 데려오라고 합니다. 그러나 레위인과 성전일꾼들을 찾아서 데리고 옵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는 것도 우리 하나님의 선한 도우심을 입었다고 합니다(18). 성경의 본문과 앞뒤의 단락을 보면 반드시 이렇게 하나님의 일하심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바울 식으로 말하면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본주의가 설 자리가 없습니다.
21~23절입니다. “21 그 때에 내가 아하와 강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우리와 우리 어린 아이와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그에게 간구하였으니 22 이는 우리가 전에 왕에게 아뢰기를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내리신다 하였으므로 길에서 적군을 막고 우리를 도울 보병과 마병을 왕에게 구하기를 부끄러워하였음이라 23 그러므로 우리가 이를 위하여 금식하며 우리 하나님께 간구하였더니 그의 응낙하심을 입었느니라”
에스라는 먼 길을 떠나기 전에 왜 금식하면서 기도합니까? 그것은 아닥사스다 왕과 고관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을 증거 하였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선을 베푸시고 반역하는 자에게 진노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것이 여호와 하나님을 반역한 증거라고 합니다. 이런 말을 들은 자들이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여호와께 올라가서 성전을 짓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여호와 하나님을 증거 한 자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왕의 군대를 요청할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요청하면 얼마든지 허락을 받을 수 있지만 여호와의 이름 때문에 부끄러워서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두렵기도 합니다. 그래서 금식기도하고 출발하였는데 하나님께서 응낙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이 금식기도 하였기에 응낙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응답입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의 기도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이러한 기도가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기도한 것입니다.
24~30절입니다. 바벨론에서 가져온 여러 가지 은과 금과 그릇과 예물들을 성전에 드리는 내용입니다. 받은 대로 드리기 위하여 정확하게 저울에 달아서 드리게 합니다. 즐거이 드린 예물입니다.
31~34절입니다. 아화와 강을 떠나서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까지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도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적과 길에 매복한 자의 손에서 건져주셨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에 만 4개월에 걸쳐서 도착하여 삼일을 쉬고 여호와의 성전에 드릴 것을 모두 드립니다.
35~36절입니다. 사로잡혔던 자들이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이스라엘 전체를 위한 수송아지 열두 마리를 드립니다. 다른 예물로 드리지만 이스라엘 전체 12지파가 돌아온 것은 아닌데 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하여 12마리의 수송아지를 번제로 드립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2차로 돌아왔다고 할지라도 이렇게 돌이켜 주심을 이스라엘 전체의 돌이켜 주심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를 총독들에게 넘겨줌으로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의 성전을 돕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자들은 남 유다를 중심으로 베냐민 지파가 잡혀갑니다. 북 이스라엘의 열지파는 앗수르에 이미 망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는 바벨론에 함께 포로로 끌려갔겠지만 2차 귀환에서 결코 열두 지파가 다 돌아올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을 전체를 위하여 12마리의 수송아지를 번제로 드렸다는 것은 숫자의 의미보다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으시고 다 찾아내신다는 신앙의 고백이 담겨진 것으로 봅니다.
그러므로 에스라의 귀환은 에스라 혼자의 귀환이 아니라 사로잡혀간 자들 중에서 돌아오는 것이며 동시에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자기 백성을 찾아내시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이렇게 잃어버렸다고 돌아오는 이야기가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오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5장에서는 잃어버린 자를 찾으시는 이야기를 세 가지로 하고 있습니다. 양 백 마리 가운데 잃어버린 한 마리 찾는 이야기, 열 드라크마 중에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 이야기, 두 아들 중에 한 잃어버린 아들 이야기를 통하여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아버지의 집으로 귀환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스라에게 그리스도 영이 임하여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하면서 레위지파 사람들과 성전의 종들을 일부러 찾아서 함께 돌아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기신 자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으시고 다 찾으셔서 아버지의 나라로 데리고 가십니다(요6:38~40). 그런데 그 일을 십자가로 다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찾아내셔서 함께 살리시고 함께 하늘에 앉히신 것입니다(엡2:5~6). 예수님께서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아 내시고 선물로 주셨습니다(엡4:8~10). 그러므로 성도는 위엣 것을 찾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골3:1~4).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은 예수님 홀로 귀환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귀환하셨기에 우리도 그 본향을 사모하면서 오늘도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본향을 향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