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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 9,6ㄴ-10
형제 여러분,
6 적게 뿌리는 이는 적게 거두어들이고 많이 뿌리는 이는 많이 거두어들입니다.
7 저마다 마음에 작정한 대로 해야지,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
8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모든 은총을 넘치게 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언제나 모든 면에서 모든 것을 넉넉히 가져 온갖 선행을 넘치도록 할 수 있게 됩니다.
9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그가 가난한 이들에게 아낌없이 내주니 그의 의로움이 영원히 존속하리라.”
10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과 먹을 양식을 마련해 주시는 분께서 여러분에게도 씨앗을 마련해 주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여러 곱절로 늘려 주시고, 또 여러분이 실천하는 의로움의 열매도 늘려 주실 것입니다.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12,24-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25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26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다음, 축제를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온 헬라인들이 예수님 뵙기를 청합니다.
그러자 이를 알리는 필립보와 안드레아에게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요한 12,23)하시면서, 당신의 때가 왔음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 12,24)
대체 어떤 힘이 이 ‘밀알’을 죽음으로 밀어붙일 수 있을까?
묘하게도 죽음으로 밀어붙이는 그 힘은 ‘생명력’입니다.
생명의 힘이야말로 ‘밀알’을 죽게 할 수 있는 힘입니다.
‘죽을 수 있는 힘’, 그것은 살리기 위해 죽을 수 있는 힘입니다.
죽어야 살기 때문입니다.
결국 살리기 위해 죽을 수 있는 힘이 ‘생명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밀알’이 땅에 떨어져야 하고, 죽어 묻혀야 하고, 묻혀 사라져 자신이 없어져야 하고, 그러고서야 비로소 생명의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니 죽음의 고통은 생명을 드러내기 위해서 꼭 필요합니다.
곧 죽음의 고통은 자기를 벗게 하는 사랑의 다른 이름이요, 새 생명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요한 12,25)
여기에서 셈족의 언어 관습에서 '미워하다'라는 단어는 '사랑하다'라는 말과 관련하여 쓰여서 '덜 사랑하다', '지고의 가치로 여기지 않다'라는 의미를 뜻한다고 합니다.
이 대비를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당위성을 말해줍니다.
곧 땅에서의 ‘죽음’이 생명의 끝이 아니라, ‘참된 생명’('영원한 생명')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바로 참된 실재를 보존하는 길이며, 미래에 대한 신뢰와 의탁, 곧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개방이 됩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요한 12,26)
이는 ‘섬긴다는 것’과 ‘따른다는 것’의 긴밀한 연관성을 말해줍니다.
누군가가 따른다고 말하면서 따르는 그를 섬기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따름이 아닐 것입니다.
또 섬긴다고 말하면서 그를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도 진정한 섬김이 아닐 것입니다.
곧 따라 나서서 그분을 섬길 때라야 진정 따르는 것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우리의 성소의 길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따라 나서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분을 섬기지 않고 여전히 ‘따라 나선 자신’을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곧 집과 가족을 떠나는 왔지만 ‘떠나온 자기’를 아직 떠나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요한 12,23)고 알립니다.
그리고 ‘당신을 섬기는 사람은 당신을 영광스럽게 할 그 죽음의 길에 함께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그분의 죽음의 길에 함께 할 때 비로소 우리는 ‘당신을 따르는 것’이 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요한 12,26)
주님!
함께 있는 이를 존중하게 하소서!
함께 있는 이를 업신여기지 않게 하소서!
당신께서 저를 결코 무시하지 않으시듯, 저 역시 형제를 존중하게 하소서!
형제를 섬김으로 당신을 증거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참으로 아끼는 사람에게는 아낌이 없다>
제가 잘못 알고 있는지 모르지만 사도가 아닌 성인들 중에서 축일로 지내는 성인은 성 스테파노 부제 순교자와 오늘 축일로 지내는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뿐입니다.
성 스테파노는 잘 아시다시피 사도가 아닌 부제였지만 첫 순교자로서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의 초석을 놓은 분이기에 우리 교회가 축일로 지내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는?
스테파노가 그리스도교의 초석이기 때문이라면 라우렌시오는 로마 교회의 초석으로 우리교회가 인정하기 때문이지요.
그의 순교가 로마에서 썩는 밀알이 되어 많은 열매를 맺은 것이 바로 로마 교회의 번성이고 로만 가톨릭의 국교화인 거지요.
그래서 오늘의 전례는 밀알 하나가 썩어 열매를 맺는다는 복음을 읽습니다.
그렇다면 왜 라우렌시오의 순교가 가톨릭을 로마의 국교가 되게 했을까요?
로마의 순교자는 라우렌시오 말고도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데 왜?
그것은 라우렌시오가 자기 목숨 하나 하느님께 바친 것이 그의 사랑의 전부가 아니고 그의 공로의 전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라우렌시오는 자기 목숨만 하느님께 바친 것이 아니라 교회 재산의 관리자인 부제로서 교회가 주는 교회, 무엇보다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는 교회가 되게 했기 때문입니다.
실로 자기 목숨만 바치는 순교는 자기 구원을 이룰 수 있겠지만 다른 사람을 교회로 인도하여 다른 사람까지 구원케 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가 하느님께 받은 것을 나누어주는 교회가 되게 해야 하느님의 교회가 나만이 아니라 모든 이의 교회가 되고 교회가 보편적 구원의 성사가 되는 거지요.
라우렌시오 성인은 실로 순교자일 뿐 아니라 하느님 은혜의 충실한 분배자였습니다.
로마 황제가 교회가 보물을 갖다 바치라고 하였을 때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주님을 따르라는 말씀대로 교회의 보물을 팔아 몽땅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는 이에 분노한 황제에 의해 불에 달궈진 돌판 위에서 순교하였습니다.
죽을 때 그가 한 말과 행위는 참으로 영웅적일 뿐 아니라 영적인 것으로써, 황제가 교회의 보물이 다 어디 있냐고 물었을 때, 그는 자기가 보물을 나눠준 가난한 사람들을 데리고 가 이들이 교회의 보물이라고 하였지요.
진정 교회는 하느님 은총과 은사의 분배자이어야 하고, 교회의 관리자는 라우렌시오처럼 하느님 재산의 분배자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교회는 나누는 교회가 아니라 점차 부를 모으고 축적하는 교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은사를 받아 나누는 교회가 아니라 신자들로부터 재물을 긁어모아 축적을 하는 교회가 되어 가는데 그것은 우리 교회에 라우렌시오 같은 관리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저 자신부터 깊이 반성을 하는 오늘이 되고 싶습니다.
우선 세상 것을 소유하는 자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받는 제가 되어야겠습니다.
받지 않고는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받는 내가 되기 위해서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그것도 넘치게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하고 믿어야겠지요.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오늘 독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모든 은총을 넘치게 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언제나 모든 면에서 모든 것을 넉넉히 가져 온갖 선행을 넘치도록 할 수 있게 됩니다.”
(2코린 9,8)
다음은 말할 것도 없이 아낌없이 나누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참으로 아끼는 사람이 있다면 어떤 보물도 아낌없이 줄 수 있지요.
라우렌시오처럼 가난한 이들이 제가 아끼는 보물들이 된다면 말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한 알의 밀알이 되어야 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마태 12,24)
이는 ‘죽음을 통해 생명을 살리는 신비입니다.’
물론 봄에 씨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적게 뿌리는 사람은 적게 거두고 많이 뿌리는 사람은 많이 거둡니다."(2고린 9,6)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 소유한 것이 무엇이든지 하느님 앞에 씨를 뿌려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탈랜트, 시간, 능력, 재능, 물질, 믿음을 심어야 합니다.
그러면 열매를 풍성히 맺게 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의 밀알을 심는 것은 열매를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풍성한 열매 맺기를 원하면, 그만한 정성과 사랑으로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그리고 밀알이 땅속에 묻히면 죽어서 싹을 틔우게 됩니다.
만약에 씨앗이 땅속에 묻히길 거절한다면 아마도 새한테 먹히거나 짐승한테 밟혀 으깨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묻혀야 합니다.
밀알이 땅속에서 사라지는 것은 없어짐을 뜻하지 않고 생명을 낳기 위하여 뿌리내림을 뜻합니다.
사실 죽는다는 것은 곧 새롭게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얻기를 원하는 만큼 심어야 합니다.
얻기를 원하는 만큼 죽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그냥 죽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열매를 맺는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진정한 생명을 위하여 감당한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그리고 더 높은 가치 때문에 지상의 생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주님과 그분의 나라 때문에 지상의 매력에 집착된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일상의 삶 안에서 이웃을 위하여 나 자신을 포기하고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새 생명의 기쁨이 더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요한 12,26) 하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우리는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야 하고 결국 그리하면 아버지 하느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함께해 주시고 또 영광스럽게 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감당하고 있는 모든 일상의 삶을 기왕이면 한 알의 밀알의 삶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짊어지는 십자가는 귀찮고 번거로운 생고생이 아니라 주님과의 더 깊은 사랑으로 고양되는 축복의 초대입니다(홍승모).
오늘 기억하는 라우렌시오 성인은 로마 교회의 부제직을 수행하고 거기에서 거룩한 피의 봉사자로 일하다가 마침내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피를 흘렸습니다.(성 아우구스티노)
그는 교회의 재산을 관리하고 있었는데, 박해자들이 교회의 보물을 바치라고 하자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몰래 나누어 준 뒤 그들을 박해자들 앞에 데려가 "이들이 교회의 재산이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나는 주 하느님을 경배하며 그분만을 섬기니, 네 잔인한 고초를 두려워하지 않는도다.”하고 믿음을 증언하며 죽었습니다.
바로 그 믿음의 씨앗이 오늘 우리에게 신앙의 열매로 주어진 것입니다.
과연 순교자의 피는 믿음의 씨앗입니다. (성 예로니모)
일상 안에서의 삶을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상대를 위한 배려를 하다가 그만 지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젠 당신도 바뀔 때가 되지 않았느냐! 이제는 철이 들 때가 되지 않았느냐! 왜 나만 양보해야 하느냐! 이제는 당신 차례야!”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 알의 밀알이 된다는 것은 남에게 미뤄야 할 것이 아닙니다.
내가 묻혀 썩어야지, 남이 대신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 12,24)
그렇다면 열매를 맺고 안 맺고는 나의 죽음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할 만큼 했다고 생색을 내지 않고 끝까지 항구하길 바랍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영광스럽게 해 주시는 그날까지 결코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말고 최선에 최선을 다하는 기쁨을 차지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호의에 따라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시어, 의지를 일으키시고 그것을 실천하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필리 2,13)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이 받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2코린 6,1)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고통을 건너뛰는 행복, 희생없는 성공을 경계합시다>
저희 피정 센터는 바야흐로 대목입니다.
이박삼일 일정으로 아이들이 나가고 들어오고... 적막하던 어촌 마을이 시끌벅적합니다.
목청껏 소리 지르면서 신나게 뛰놀고, 야무지게도 잘 먹는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다들 흐뭇해합니다.
무대 위에 서서 마이크를 잡고 프로그램을 운영하지는 않지만 열심히 뒷바라지를 하고 있습니다.
어제는 동료 사제와 산더미처럼 쌓인 쓰레기를 분리 수거하면서, “어머니가 이 모습을 보시면 얼마나 슬퍼하시겠냐?” “젊을 때 공부 열심히 안한 결과!”라는 둥 농담을 주고받으며 땀을 뻘뻘 흘렸습니다.
그러면서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 하나!
뭐든 거저 되는 것은 없다는 것,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것,
행사가 성공리에 치러졌다면 반드시 누군가의 묵묵한 희생과 헌신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
조용히 땅에 떨어져 썩고 죽는 밀알 영성이 참으로 소중하다는 것!
아버지께서 부여하신 지상에서의 과제를 120퍼센트 완수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 앞에 남아있는 마지막 관문인 수난과 죽음의 길을 떠나시면서, 우리에게 남기시는 말씀의 핵심 키워드 역시 ‘밀알 하나’였습니다.
내어놓음이나 희생, 변화나 쇄신, 결국 죽음을 거부하는 밀알은 언제까지나 그저 한 알 밀알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기꺼이 자아를 포기하고 길을 떠날 때,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의 성장과 변화, 열매와 발전을 희망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이비 교주들이나 이단자들이 크게 강조하는 바가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고통을 건너뛰는 행복입니다.
희생이나 헌신없는 성공입니다.
말도 안되는 기적의 연출입니다.
십자가 길 대신 꽃길 보장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영광의 길에 참여하기 위해 수난과 죽음은 필수라고 강조하십니다.
두렵고 떨렸지만 점점 다가오는 죽음을 용감하게 수용하십니다.
내적인 갈등이 커질 때마다 아버지를 생각하고, 아버지께 의탁하며, 언젠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 드러날 아버지의 영광을 꿈꾸며, 얼마 남아있지 않은 당신의 여정을 힘차게 걸어가십니다.
제자인 우리들 역시, 스승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열심히 따라 걸어가야겠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한 배에 승선한 운명 공동체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운명은 곧 우리들의 운명입니다.
우리도 두려움을 떨치고 그분께서 선택하신 수난과 죽음의 길, 그러나 영광의 길을 기꺼이 선택해야겠습니다.
죽음은 오늘 제자들인 우리에게 다양한 형태로 다가옵니다.
고통이 극심할 때, 포기하고 싶어질 때는 ‘죽을 각오’로, 더 열심히 이 세상을 살아가야겠습니다.
미운 감정이 폭발할 때는 순교자의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고 용서해야겠습니다.
예수님 한분의 희생과 죽음으로 온 세상과 인류에게 구원이 다가왔듯이, 오늘 내 작은 희생과 헌신, 작은 죽음을 통해 작게나마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짐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오늘 이 작은 나의 희생과 봉사, 작은 죽음이 절대로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스승님의 십자가 길에 깊이 동참하는 사랑의 길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나 자신이 구원받기 위해서 하나의 밀알이 되는 것입니다>
1)
지혜서 저자는 의인들의 죽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시고, 그들이 당신께 맞갖은 이들임을 아셨기 때문이다.
그분께서는 용광로 속의 금처럼 그들을 시험하시고, 번제물처럼 그들을 받아들이셨다.
그분께서 그들을 찾아오실 때에 그들은 빛을 내고, 그루터기들만 남은 밭의 불꽃처럼 퍼져 나갈 것이다."
(지혜 3,2-7)
이 말을 우리 교회의 순교자들의 순교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안 믿는 자들과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순교자들의 순교가 바보 같은 죽음으로만 보이겠지만, 순교자들의 순교는 결코 ‘인생이 끝나버리는 죽음’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서 새 생명을 누리게 되는 ‘영원한 인생의 시작’입니다.
바로 그것을 우리 교회의 첫 순교자인 스테파노 순교자가 생생하게 증언했습니다.
'스테파노는 성령이 충만하였다.
그가 하늘을 유심히 바라보니,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예수님이 보였다.
그래서 그는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에 스테파노는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였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하고 외쳤다.
스테파노는 이 말을 하고 잠들었다.'
(사도 7,55-60)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스테파노에게 당신의 모습을 보여 주신 것은 스테파노를 ‘마중’ 나오신 것입니다.
박해자들은 자기들이 스테파노의 목숨을 끝냈다고 생각했지만, 스테파노는 하느님과 예수님의 환영을 받으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새 생명,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러니까 순교는 죽음이 아니라 새 생명의 시작입니다.
순교뿐만 아니라 모든 충실한 신앙인들의 죽음은 죽음이(끝이) 아니라 새 생명의 시작입니다.
믿음 없는 자들만이 죽음이라고(끝이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2)
바오로 사도는 지상에서의 인생을 ‘천막집’으로, 즉 임시 거처로, 하느님 나라에서의 새 인생을 ‘영원한 집’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이 지상 천막집이 허물어지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건물 곧 사람 손으로 짓지 않은 영원한 집을 하늘에서 얻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이 천막집에서 우리는 탄식하며, 우리의 하늘 거처를 옷처럼 덧입기를 갈망합니다."
(2코린 5,1-2)
신앙인의 인생은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집’을 향해서 가는 여행입니다.
그 ‘영원’을 생각한다면, 지금의 인생은 짧아도 아주 짧은 잠깐 동안의 일, 그냥 스치고 지나가는 순간일 뿐입니다.
3)
그 믿음을 바탕으로 해서 ‘밀알 하나’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읽으면,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라는 말씀은 “믿음 없는 사람들의 눈에는, 땅에 심어진 밀알이 죽은 것으로 보이겠지만, 그것은 죽음이 아니라 새 생명의 시작이고,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잠깐 거치는 과정일 뿐이다.” 라는 뜻입니다.
씨를 땅에 심는 일은 그 씨를 죽이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땅에 심어도 아무 소용이 없는 씨가 있습니다.
이미 죽어버린 씨, 즉 생명력이 없는 씨는 땅에 잘 심고 가꾸고 돌본다고 해도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심기도 전에 이미 생명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열매를 맺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영적인 생명력’을 잃어버린 사람이 바로 그런 경우에 해당됩니다.
4)
예수님께서는 인류 전체를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 자신을 하나의 씨로 바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 자신’을 위해서 하나의 씨가 됩니다.
순교자들의 경우에도 일차적으로는 자기 자신의 구원을 위한 씨로 자신을 바치고, 그 다음에는 순교를 통한 신앙의 증언으로 다른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씨가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활동에 대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합니다.
나도 복음에 동참하려는 것입니다."
(1코린 9,23)
자신이 그렇게 열정적으로 선교활동을 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자기 자신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도 실격자가 될 수 있음을 두려워했습니다(1코린 9,27).
신앙생활은 ‘나 자신’의 구원을 위한 생활입니다.
큰일이든지 작은 일이든지 간에 어떤 일에 대해서 스스로 하나의 밀알이 되어서 희생한다고 해도, 그 희생도 사실은 일차적으로는 ‘나 자신’의 구원을 위한 희생입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하늘 나라 꿈의 실현 - “예수님을 닮자”>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고, 그분 계명을 큰 즐거움으로 삼는 이!”
(시편 112,1)
지난 수요일(8.7) 입추부터 아침 저녁으로 찬 바람이 이니 가을이 성큼 다가온 듯 싶습니다.
풀벌레들 청아한 찬미와 더불어 배봉지속 배들도 무럭무럭 커가며 익어갑니다.
오늘도 옛 어른의 말씀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다산 정약용의 고백이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의 우리에게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황량한 귀양지에서 이렇게 마음을 다잡는다.
‘위기는 나의 바닥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다.’”
“이십년 세속의 길에 빠져 선왕의 훌륭한 정치가 있는 줄 알지 못했는데, 이제야 여가를 얻게 되었다.”
혹독한 고문 후 생명을 부지한 채 장기간의 유배생활은 말 그대로 죽어 사는 삶이요 자기와의 참 외로운 고투의 삶이었음을 봅니다.
그러나 다산의 위대함은 무너져 내리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해 불가사의한 업적을 남겼다는 것입니다.
제가 볼 때 다산은 스승 예수님의 발자취를 충실히 따라 살았던 분입니다.
참으로 진리이신 주님을 향한 사랑의 열정이 분투의 노력의 삶에 원동력이 됐음을 봅니다.
늘 읽어도 새롭게 와닿은 다음 제 자작시입니다.
“당신이
꽃을 좋아하면
당신의 꽃이
당신이
별을 좋아하면
당신의 별이
당신이
하늘을 좋아하면
당신의 하늘이
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다”
<1998.12.25.>
아마 진리이신 주님 향한 이런 사랑의 열정이 이뤄낸 다산의 업적일 것입니다.
새삼 진리이신 주님 향한 사랑의 열정이 마르지 않는 삶의 원천源泉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진면목을 잘 보여줍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하여 닮은 이들은 이렇게 살아 가며 하늘 나라 꿈을 실현시켜 갑니다.
저는 예수님의 삶을 네 측면에 걸쳐 살펴봤습니다.
1. “죽어라!”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그대로 예수님의 전 삶을 요약합니다.
이렇게 사는 이들이 참으로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죽어야 비로소 무수한 사랑의 열매들입니다.
평생 한 알 그대로의 이기주의적 삶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죽어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당신의 성사로 교회를 통해 끊임없이 열매를 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 열매들입니다.
순교자들은 물론 순교적 삶을 살았던 예수님의 후예들인 성인들도 바로 그 모범입니다.
죽어 살았던 다산의 헤아릴 수 없었던 업적도 그 하나입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도 그 모범입니다.
죽어 살면서 많은 열매를 맺는 영원한 현재 진행형의 성인들입니다.
258년경 30대 초반에 순교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성 라우렌시오는 참으로 가난한 이들을 사랑했던 성인입니다.
순교를 예감한 성인은 교회의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준 후 집정관 앞에 병자와 고아와 과부, 가난한 이들을 모두 데리고 나타나, “이 사람들이 교회의 재산입니다.” 외쳤습니다.
성인은 뜨거운 석쇠 위에 눞여 살이 타들어가는 순간에도 웃으면서, “이쪽은 다 익었으니 뒤집어라” 말했다 합니다.
순교 때나 순교 후에도 그의 몸에서는 향기가 났다 합니다.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는 주님의 식탁에서 주님을 받았기에 그 보답으로 자기 자신을 주님께 바쳐드렸다. 생활에서 그리스도를 사랑했고 죽음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았다.”며 그의 순교를 칭송했습니다.
성 라우렌시오는 로마의 수호성인이자 가난한 이들과 요리사, 소방관, 코미디언의 수호성인이기도 합니다.
2. “비워라!”입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이런 이들은 예수님을 닮아 참으로 무지의 탐욕을 비워낸, 집착에서 벗어난 이탈의 초연한 자유를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고집멸도(苦集滅道)란 불가의 사성제(四聖諦)에서 보다시피 모든 고통의 원인은 집착에 있습니다.
애오라지 일편단심 주님 사랑의 자연스런 귀결이 자기 죽음에 이어 자기비움의 초탈의 삶, 영원한 삶입니다.
새삼 삶은 끊임없이 자기를 비워가는 겸손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3. “섬겨라!”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도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섬김의 삶은 우리 믿는 이들 삶의 모두입니다.
섬김의 영성, 섬김의 사랑, 섬김의 기쁨, 섬김의 행복, 섬김의 환대, 섬김의 권위, 섬김의 직무입니다.
외로움에 대한 최고의 처방도 섬김의 생활화임을 깨닫습니다.
섬김은 영성의 잣대요, 섬김과 추종은 함께 갑니다.
섬김의 삶이야말로 영적건강의 지름길임을 깨닫습니다.
섬김의 자리 바로 거기에 우리가 평생 섬기고 추종하는 주님이 계시고 아버지께서도 이런 섬김의 사람을 인정하시고 존중하십니다.
일상의 모든 섬김을 통해서 주님을 섬기는 삶이요, 섬김(service)의 종(servant)이 되어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4. “나눠라!”입니다
오늘 제1독서 2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바오로 사도의 둘째 서간이 참 아름답습니다.
나눔의 사랑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깨닫습니다.
나누라 있는 소유물입니다.
깊이 들여다 보면 내 것이 어디 있습니까?
다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정말 그대로 주님 사랑을 닮은 이들이 나눔의 사람들입니다.
“적게 뿌리는 이는 적게 거두어들이고 많이 뿌리는 이는 많이 거두어 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모든 은총을 넘치게 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언제나 모든 면에서 모든 것을 넉넉히 가져 온갖 선행을 넘치도록 할 수 있습니다.”
없어서 못나눈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있어 나누면 좋고 그렇지 못하더라도 미소, 따뜻하고 진실하고 친절한 언행 등 신망애(信望愛)의 삶, 진선미(眞善美)의 삶 존재 자체도 참 좋은 나눔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만한 세상입니다.
평생 섬기고 따를 파스카의 예수님이 늘 곁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예닮의 여정’에 항구할 힘을 주시며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늘 나라를 살게 하십니다.
“가난한 이에게 넉넉히 나누어 주니,
그의 의로움은 길이 이어지고,
그의 뿔은 영광 속에 높이 들리리라.”
(시편 112,9)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둥지를 벗어나지 못하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3번 말씀하셨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에게 끌려가 조롱과 멸시를 받을 것이다.
그리고 죽겠지만 다시 살아날 것이다.”
처음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을 때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옷을 붙잡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선생님!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의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
베드로는 수난과 죽음만 생각하였지, 부활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없었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죽음을 넘어 부활한다는 확신이 없는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부활에 대한 확신이 없는데 어떻게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습니까?
부활에 대한 확신이 없는데 어떻게 박해와 고통을 참아낼 수 있습니까?
부활에 대한 확신이 없는데 어떻게 가진 것을 기꺼이 내어 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두 번째로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을 때입니다.
제자들은 모두 깊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제자들이 원한 것은 수난과 죽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징을 원했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셨던 표징을 원했습니다.
풍랑을 잠재우고, 물위를 걸으셨던 표징을 원했습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던, 중풍병자를 걷게 하셨던 표징을 원했습니다.
예수님의 표징으로 새로운 왕국이 세워지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면 명예와 권력 그리고 재물이 주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수난과 죽음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두 깊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을 때입니다.
이번에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수난과 죽음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예수님에게 이렇게 청하였습니다.
“주님! 영광의 자리에 오르시면 제 아들들을 하나는 예수님의 오른편에,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왼편에 앉도록 해 주십시오.”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수난과 죽음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명예와 권력 그리고 재물을 원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둥지를 버리지 못하면 결코 하늘 높이 나는 독수리가 될 수 없습니다.
밀알은 어쩌면 우리가 머물고 싶어 하는 둥지일 수 있습니다.
그 둥지에는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달콤한 먹이가 있습니다.
그 먹이에 취해서 우리가 둥지를 벗어나지 못하면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에서 멀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둥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제자들을 다그쳤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라우렌시오 부제는 재물이라는 둥지를 벗어났습니다.
모든 재물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진정한 보화는 가난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늘 본기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복된 라우렌시오는 하느님을 열렬히 사랑하며 신자들을 충실히 섬기고 순교의 영광을 받았으니
저희도 그를 본받아 사랑을 실천하고 그의 가르침을 따라 형제들을 섬기게 하소서.”
우리가 둥지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어쩌면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신앙은 끊임없이 둥지를 벗어나서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때로 시련의 바람이 불고, 고통의 암초가 다가올지라도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믿으며 힘차게 날아야 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적게 뿌리는 이는 적게 거두어들이고 많이 뿌리는 이는 많이 거두어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모든 은총을 넘치게 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언제나 모든 면에서 모든 것을 넉넉히 가져 온갖 선행을 넘치도록 할 수 있게 됩니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꾸준히 주님을 따르는 길을 향할 때>
요즘 시대를 평가한다면, ‘러닝머신 같은 시대’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움직이는 러닝머신 위에 올라가서 그냥 서버리면 뒤처지면서 러닝머신에서 떨어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열심히 뛰면 어떨까요?
그냥 그 제자리를 지킬 뿐입니다.
이처럼 쉬면 뒤처질까 봐 멈추지 못하고, 열심히 살아봤자 겨우 제자리 정도인 시대가 요즘이 아닐까요?
이런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성공의 법칙과 자기 계발에 몰두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건국 이래로 가장 많은 사람이 번아웃을 겪고 있는 시대입니다.
심지어 사제조차 뒤처짐을 느끼면서 어려움을 느끼는 시대입니다.
다들 바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어찌나 바쁜지 초등학생도 “너무 바빠요.”라고 말합니다.
저 역시 이제 습관적으로 바쁘다는 말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평상시의 제 생각은 자기만의 속도로 느리더라도 단단하게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살기란 너무나 힘듭니다.
바쁘게, 그렇지 않으면 뒤처지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어서 단단하지 못한 채 앞으로만 힘들게 가고 있습니다.
책을 남들보다 조금 많이 읽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렸을 때부터 독서를 좋아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 역시 다른 아이들처럼 글자 많은 책을 보면 “와! 글씨가 너무 많아.”라면서 책 읽는 것을 포기했던 저였습니다.
이런 제가 신학교에 들어간 뒤, 책을 통해 저를 조금씩 단단하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책 한 권 읽는다고 지식이 팍팍 들어오면서 단단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30년 넘게 꾸준히 책을 읽다 보니, 이제야 조금씩 단단해지는 저를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도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단단한 믿음이 묵주기도 한 번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미사 한 번, 피정 한 번 등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주님을 따르는 길을 향할 때, 조금씩 단단해지는 것입니다.
성 라우린세오 축일을 지내는 오늘입니다.
성인께서는 부제로 세상에 주님께 대한 믿음을 증거하면서 순교하셨습니다.
그런데 단번에 이런 믿음이 생겼을까요?
아닙니다.
꾸준히 주님의 뜻을 따르면서, 단단해질 수 있었고 순교의 월계관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 모습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땅에 떨어져 죽은 밀알 하나의 모습이었습니다.
이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었기에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
이 세상 안에서 교회가 찬란히 발전할 수 있었던 역할을 하셨습니다.
우리도 주님께 대한 믿음을 키워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단번에 믿음이 생기길 원한다고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은 계속해서 주님을 따를 때만 가능했습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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