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기억
- 강순
모든 기억의 서막은 서서히 열린다
사춘기 아이는 방문을 잠근 후 서서히 말을 잃어
가고, 식탁 위 꽃들은 노교수의 강의처럼 서서히 시
들어 잊혀져간다
배고픈 달이 지구에 가까워져 서서히 속눈썹을 떠
는 밤, 병든 아버지는 뱀의 허물 같은 늙은 관념을
껴입고 서서히 신음을 멈춘다
구름은 구름끼리 모여서 서서히 길을 잃고, 강물
은 구름의 그림자가 무거워 서서히 몸을 뒤척인다
일 잘하던 직원은 지각하며 서서히 세태를 배우
고, 과로한 버스기사는 쓰러져 세상과 서서히 멀어져
간다
우울증의 남자가 투신하던 빗속에서, 팝콘처럼 입
술이 부풀어 오른 조팝나무, 남자의 피를 빨아먹고 땅
쪽으로 서서히 고개를 숙인다
서서히 살아나는 기억은 서서히 지운 기억들 위로
포개어진다 그러므로 당신은 왼쪽에서 서서히 살아났
다가 오른쪽으로 서서히 지워진다
바람난 남자는 바람난 여자의 머리카락을 서서히 애
무하고, 바람나지 않은 여자는 바람나지 않은 남자의 어
깨에 내려앉은 햇살이 서서히 권태로워진다
타이어가 펑크 난 자동차는 기억 한가운데 서서히 멈
춰서고,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나는 오지 않는 당신을
기다리다 목마른 꿈속을 서서히 빠져나온다
모든 기억은 왼쪽으로 서서히 스며들어서 나는 왼쪽
으로 서서히 고개를 돌린다 그리하여 나의 오른쪽 목
이 조금 더 늘어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