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注] 朴正熙 前 대통령 밑에서 경제수석비서관, 재무부 장관을 지낸 金龍煥 의원(한나라당 부총재)이 「임자, 자네가 사령관 아닌가」라는 제목의 회고록을 낸다. 저자는 朴正熙 대통령의 통치방식을 통해 국가경영의 총책임자, 또는 기업의 총수(CEO)가 갖춰야 할 기본적인 덕목을 여러 곳에서 언급하고 있다. 중요 부분을 발췌해서 싣는다.
월간조선 2002. 3
-官治經濟는 불가피한 선택
개발연대의 우리나라 경제가 官治經濟(관치경제)였다는 일부 비판은 당시 朴正熙 대통령의 경제철학과 행동 양식을 깊이 있게 관찰하지 못한 데서 나온 관념론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기업인다운 기업인이 존재하지 않았고, 시장다운 시장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정부가 행위자의 입장에서 직접 참여한 것일 뿐이다. 오히려 정부가 기업 엘리트들과 함께 「기업 경영방식으로」 경제를 이끌어나가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이러한 정책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정부가 기업 엘리트에게 인센티브를 제공하여 특정 분야의 발전을 촉진한 것을 官治經濟라고 폄하, 罵倒(매도)하는 것은 역사를 옳게 보는 안목이 아니라고 본다.
개발연대 내내 민간기업에 제공한 정부 지급보증 등의 인센티브를 둘러싸고 특혜시비의 논란이 그치지 않았다. 당시 우리나라 기업은 기업으로서 인정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국제적인 수준에서의 브랜드 이미지나 신용 상태가 좋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어느 외국의 기업, 국제금융기관, 외국의 공기업 등이 누구를 믿고 차관을 제공할 수 있었겠는가. 직접 투자자의 시각에서 볼 때, 어느 기업을 믿고 투자할 것으로 기대할 수가 있었겠는가.
-主務장관의 의사와 자율권 최대한 보장
따라서 정부가 지급 보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우리나라 정부의 보증을 믿고 차관을 제공하고 직접투자를 한 것이지, 민간기업을 믿고 했던 것이 아니다. 당시의 상황에서 지급보증은 특혜라기보다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확신한다.
이것은 정부가 선도적인 행위자로서 시장에 개입할 수밖에 없었던 단면을 보여준다. 정부가 직접 개입하여 기업 엘리트들과 시장의 미성숙을 보완하고 외국자본(국제금융기관, 다국적기업, 우방 선진국 등)의 투자를 유인하기 위해서 지급 보증에 나섰던 것이다. 이 점에서 朴正熙 대통은 관치경제를 주도한 것이 아니라, 「株式會社 大韓民國(주식회사 대한민국)」의 CEO, 즉 대표이사 會長(회장) 역할을 自任(자임)했던 것으로 생각한다.
朴正熙 대통령은 어떤 프로젝트를 설정하든지 민간부문을 포함하여 광범위한 의견을 수렴한 후 신중한 결정을 내렸다. 특히 그 과정에서는 主務(주무)장관들의 의사와 자율권을 최대한 존중했다.
반면, 주무장관들의 정책추진 실적을 철저히 확인, 점검했다. 비서실을 통해서 점검하는 경우도 있고, 종합상황실, 총리실의 기획조정위원회 및 심사분석제도 등 제도적 채널을 통해 확인하기도 했다. 또한 중요한 프로젝트라고 판단될 경우는 담당 부처에 직접 나가 그 진행상황을 보고받았다.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 시절, 朴正熙 대통령의 독특한 정책 결정 방식을 여러 번 경험했다. 각 부처가 어떤 사안에 대해 대통령께 보고를 하기 직전, 청와대 담당비서관은 이를 미리 파악하고 대통령께 그 보고 내용에 관해 『곧 이러이러한 보고를 받으시게 되는데, 그에 대한 비서실의 의견은 이렇습니다』라는 식의 실무적 차원의 의견을 진언한다. 대통령은 간접적으로나마 일단 보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주무장관의 보고를 끝까지 경청하는 모습을 여러 번 목격했다.
이때 주무장관의 보고 내용이 본인이나 비서실의 판단과 맞지 않더라도 즉석에서는 좀처럼 반대의사를 표시하지 않았다. 일단 본인의 의견을 제시한 후 다시 한번 검토해 볼 것을 지시함으로써 주무장관으로 하여금 심사숙고할 기회를 주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그리고 필요한 경우에는 경제과학심의회나 민간 기업인들을 불러 직접 의견을 묻기도 했다.
-경제정책 결정은 민주적 절차 밟아
담당비서관은 대통령이 제시한 의견을 토대로 주무 부처와 다시 의견을 조율하게 된다. 대통령의 생각을 염두에 두고 주무장관으로 하여금 조정된 보고를 할 수 있도록 조력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청와대 비서진의 주요 기능으로 관행화돼 있었다. 담당비서관이 내각에 지시하거나 정부 정책을 직접 결정하여 대외적으로 공표하는 일 등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朴正熙 대통령은 1차적으로 주무장관의 의사를 존중하고, 장관 스스로의 정책이 실천된다는 외형적 절차를 갖추려는 배려를 항상 잊지 않았다.
만약 해당 사안이 중대하다고 판단할 경우, 대통령은 자신을 포함하여 관련자들간의 심도 있는 토론과 협의과정을 거쳐 정책 결정을 하는 절차를 거쳤다. 당시의 정치체제와는 전혀 다르게 경제정책의 결정과정은 매우 민주적이었다.
민주적 정책 결정을 위해서 朴正熙 대통령은 정기ㆍ부정기 회의를 자주 소집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중화학공업화 및 방위산업 육성, 부가가치세제의 도입 등 개발연대의 궤적을 장식하고 있는 굵직굵직한 정책결정은 사안의 성격상 극비를 요구하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민주적 토론을 거쳐 내려졌다.
특히 월간 경제동향 보고, 수출진흥 확대회의(무역진흥회의), 청와대 국무회의, 국가 기본 운영계획 심사분석회의, 방위산업 진흥 확대회의 등 정례화된 5大 회의는 민주적 정책결정을 위한 정기적 토론의 場이었다. 朴正熙 대통령은 이러한 회의를 국정 현황을 파악하고 이에 대한 살아 있는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중요한 채널로 인식하고, 또한 찬반양론을 조정하는 장으로 적극 활용했다. 독단적으로 정책을 결정하는 경우는 좀처럼 보기 어려웠다.
朴正熙 대통령은 합의형 정책 결정 과정을 거쳐 프로젝트가 결정되면 간섭을 하지 않고 주무장관에게 맡기되, 그 책임은 엄격히 묻는 타입이었다. 朴正熙 대통령의 리더십과 용인술 뒤에 감춰진 魔力(마력)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軍의 기획관리 기법을 행정에 활용
우리 軍은 1954년 경부터 최초로 미국式의 기획관리 기법을 조직관리에 적용하면서 朴正熙 대통령을 비롯한 고급 장교들은 가장 현대화·전문화된 집단으로 등장했다.
이 기법은 일찍부터 미국의 기업경영에서 활용돼 온 것으로, 일단 계획이 확정되면 그와 동시에 예산을 편성하여 집행 단계로 접어들면 연간 사업목표, 세부사업, 진로계획서를 도표로 제시한다. 이와같이 계획과 집행의 일관성을 통해 목표를 성취하는 것이 기획 관리기법의 중요한 특징이다.
朴正熙 대통령이 실천을 중시하게 된 데에는 이와 같은 계획-집행의 일관성과 목표달성을 중시하는 軍에서의 경험이 커다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제1·2 공화국의 경제적 파탄의 원인 중의 하나를 「실천력의 부재」로 지적했던 것도 당연한지 모른다.
朴正熙 대통령이 「현지 지도」를 일상화한 것도 실천을 중시하는 국가경영의 한 단면이었다. 대통령은 연초만 되면 중앙의 행정 각 부처뿐만 아니라 지방정부를 순시하면서 전년도의 실적을 보고받고, 신년도의 계획을 청취하는 일을 한 번도 거른 일이 없었다. 이때 행정부에서는 총리, 부총리, 관계부처 장관, 입법부와 여당의 지도급 인사, 청와대 비서진, 정부 산하기관장 등 주요 인사들이 모두 수행한다.
이러한 현지 지도는 계획을 실천하도록 자극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현장지도는 현장의 근로자들로 하여금 대통령의 관심과 애정을 확인하도록 함으로써 생산성을 더욱 자극하는 효과를 낳기에 충분했다. 대통령으로서도 현장에서 발전하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고 보람을 느끼면서 우리 국민의 저력을 확인했던 것이다.
朴正熙 대통령이 현장을 직접 지휘하기 위해서 중요사안에 부딪칠 때마다 청와대에 전담팀을 구성한 것이나, 경부고속도로, 포항제철, 울산공업단지 등의 국가 기간산업 건설현장에 직접 나가 독려했던 것은 현장 지도의 리더십을 십분 발휘한 사례로 기록되고 있다.
특히 경부고속도로의 건설 당시 대통령의 집무실은 계획의 실천을 지휘하는 작전사령부 같았다. 대통령 집무실을 들를 때마다 대통령이 25만분의 1 지도를 펼쳐놓고 삼각자를 대고 색연필로 노선을 직접 그리면서 경부고속도로의 건설에 강한 집념을 불태우는 현장을 여러 번 목격했다. 청와대 집무실은 마치 가난과 低발전이란 敵(적)과 대치한 「전투상황실」같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돌이켜 볼 때, 朴正熙 대통령은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는 과정에 20% 정도의 시간과 정열을 투입했다면 실제 확인과 진두 지휘를 통해서 실천하는 과정에는 80% 정도의 노력을 투입하지 않았나 싶다. 실제 개발계획의 성안은 자신의 국가경영 철학의 틀 속에서 행정부 각부, KDI, 관련 단체, 대학교수 등이 협력하여 광범위하게 모은 의견을 토대로 이뤄지지만, 실천과정만큼은 대부분 자신의 몫으로 돌렸다.
-『실천 없는 계획은 종잇조각에 불과하다』
朴正熙 대통령의 리더십은 戰後(전후) 많은 신생 독립국들이 추진한 경제개발계획이 실패로 끝난 반면, 우리나라는 어떻게 해서 성공할 수 있었는가를 밝힐 수 있는 중요한 단서다. 많은 신생 독립국들의 경우, 계획과 실천이 분리돼 계획이 「화려한 장신구」로 변질한 반면, 朴대통령은 일단 수립된 계획을 반드시 실천에 옮긴다는 집념으로 경제개발계획을 어김없이 실천했다는 점에서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즉, 「실천 없는 계획은 종잇조각에 불과하다」는 교훈을 일깨워 줬던 것이다.
朴正熙 대통령은 국민적 합의와 참여 속에서 국민적 에너지가 불타지 않는 한 경제발전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국민의 의식 속에 잠재된 패배의식을 타파하고 이것을 자신감으로 개조하는 정신혁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국민적 자신감을 「제2의 경제」라고 규정할 정도로 중요시했다. 대통령이 앞장서서 불가능하게 보였던 사업 구상을 하나하나 실현시키면서 점차 국민들도 「우리도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갖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 시작된 새마을운동은 국민적 합의와 참여, 나아가서 자신감을 일깨워 준 일대 정신 개조 혁명의 극치였다.
朴正熙 대통령은 우리 민족의 역사를 槪觀(개관)하면서 청산돼야 할 조선시대의 낡은 유산을 지적했던 적이 있다. 사대주의로 자주정신이 취약하고 士農工商(사농공상)의 계급제도로 게으름과 불로소득 관념에 사로잡혀 있고, 개척정신이 결여돼 체념에 빠져 있으며, 이기주의가 만연하고, 명예관념이 결여돼 있다고 평가했다.
1960년대 초까지도 이러한 의식구조에는 변화의 여지가 전혀 없었다. 국민들 간에는 「우리는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다. 선진국을 넘본다는 것은 분에 넘친다」는 일종의 패배의식이 팽배해 있었다. 자신감을 상실하고 스스로 자학하면서 살았다.
朴正熙 대통령은 그 원인으로 정부의 무능, 리더십의 결여 등을 지적했다. 특히 4·19를 겪으면서 국민의식이 자각돼 있었으나 리더십이 부재하여 이를 경제발전의 원동력으로 연결시키지 못했다고 평가한 적이 있다. 따라서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국민의 잠재의식 속에 내재된 정신적 역량이 반드시 발현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이른바 「제2의 경제」였다. 朴대통령은 리더십을 현명하게 구사하여 국민의 잠재적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轉機(전기)를 마련해야 한다고 믿었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 심은 것이 가장 큰 업적
이러한 朴正熙 대통령의 리더십은 국민들의 정신 속에 깊게 뿌리박힌 패배의식을 「우리도 하면 된다」는 국민적 자각으로 뒤바꾼 원동력이 됐다. 국민적 잠재력을 「우리도 잘 살아보자」는 국민 역량으로 결집ㆍ동원하는 데 성공한 리더십은 오늘날 경제발전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열쇠 중 하나라고 본다. 당시 유행하던 소위 「잘 살아 보세」라는 노래가 나오게 된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였다고 생각한다.
朴正熙 대통령은 제2의 경제를 자극하기 위해서 국민들이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몇 가지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하여 성공시켰다. 경부고속도로의 건설이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야당에서는 이것이 필요하지도 않고, 성공할 수 없고,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까지 맹렬히 비난했다. 뿐만 아니라 세계은행, 국제금융기관 그리고 우방국들까지도 무리한 욕심이라고 만류하고 나섰다.
朴대통령은 이러한 비난과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大役事(대역사)를 강행해 나갔다.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민족의 체념의식과의 한판 승부였던 셈이다.
경부고속도로, 포항종합제철, 울산석유화학단지 등은 황량한 들판에서 기공식을 했으나 대통령의 집념과 리더십으로 하나하나 마무리되면서 드디어 「우리도 할 수 있구나(can-doism)」 하는 민족적 자각, 자신감을 싹트게 했다. 대통령은 한판 승부에서 완승을 거둔 것이다. 이때부터 「엽전」이라는 체념의식도 점진적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이것이야말로 朴대통령의 업적 가운데서도 위대한 大業績이 아닐 수 없다.
朴正熙 대통령의 최대 政敵(정적)이었던 金大中 현 대통령조차도 1985년 4월호 한 월간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우리나라의 경제체제가 자유경제는 아니라고 비난하면서도 朴대통령은 우리 국민들에게 하면 된다는 자신감과 민족적 자각을 일깨운 지도자였음을 인정했다.
朴正熙 대통령은 제1·2 공화국의 정경유착의 폐단을 목격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기업 엘리트에 대해서 좋은 인상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경제발전 전략을 짜면서 현실적으로 기업 엘리트와 협력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인식했다. 그러나 협력관계이긴 했지만 정부와 기업은 동등한 파트너는 아니었다. 정부는 기업에 대해 리더십을 발휘하는 맏형 격(senior partner)이었다.
민간기업에 대한 맏형으로서 정부의 위치는 주로 금융자원의 독점에서 기인한다. 정부는 개발은행과 시중은행 및 우편저축을 통제함으로써 금융자원을 독점할 수 있었고, 따라서 민간기업으로서는 정부가 배분하는 신용에 크게 의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민간기업이 정부 우위를 받아들였던 것은 기업의 생존에 긴요한 자금 유동성을 확보하기 위한 일종의 費用(비용)이었던 것이다.
-기업인들에게 「대통령은 우리 편」이라는 믿음 줘
정부는 이러한 맏형격의 지위를 활용하여 고도로 動的(동적)인 민간기업의 에너지를 자극하고, 동원하고, 지도하는 정보-기업관계를 구축함으로써 경제개발계획의 목표를 초과 달성할 수 있었다.
나는 정부 정책과 국민적 역량동원도 중요하나 경제의 중심은 역시 기업인이라고 확신한다. 각종 인센티브가 주요 경제정책의 수단(지렛대)으로 등장하면서 경제관료들은 기업인들을 통제할 수 있는 강력한 권한을 갖게 됐는데, 이는 어떤 경제체제에서도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현상일 것이다.
이때 시장의 주체인 기업인들은 경제관료들에게 저항감, 심지어는 적대감까지 갖게 마련이다. 朴正熙 대통령은 이러한 역학관계의 현실을 직시하면서 항상 기업인들의 손을 들어줬다. 기업인들은 경제관료들과의 불편한 관계 속에서도 「그래도 대통령만은 우리 편이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리더십을 발휘한 것이다.
기업인들은 그에 대한 보답으로 생산과 수출에 전력투구했다. 관료들의 규제로 인한 고통을 감내하면서 오직 「수출이 최고다」는 신념으로 대통령의 의지에 부응하려 애썼다. 다소 수지타산이 맞지 않더라도 수출을 하려는 분위기가 형성돼 있을 정도였다. 지금 생각하면 朴正熙 대통령과 기업인들은 우리나라 개발연대를 이끌어갔던 쌍두마차였던 셈이다.
朴正熙 대통령은 개발 엘리트, 특히 행정부가 소신을 갖고 자율적으로 책임을 다 할 수 있도록 내각에 힘을 실어 주었다. 경제정책의 경우, 경제장관회의가 중심이 돼 이끌어 나갔다. 대통령은 국가경영을 특정 집단에 방임하기보다는 시스템의 작동에 맡겼던 것이다. 소수의 특정 집단이 국정을 좌우했던 5共, 6共 그리고 그 이후의 국정 운영방식과는 전혀 달랐다.
청와대 비서실의 월권행위를 철저히 차단했다. 비서실은 전면에 나서지 않도록 하고 행정부를 중심으로 국정운영 시스템이 풀 가동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 준 것이다. 비서실은 대통령의 뜻을 내각에 전달하고 내각의 생각을 대통령께 보고하는 메신저의 기능에 대부분 전념했다. 때로는 부처 간의 이견을 조정하는 역할을 하도록 했지만 행동반경에 분명한 한계선을 그었다. 이것이 비서실의 불문율이었다. 청와대 대변인을 맡은 공보수석비서관을 제외하고는 수석비서관들이 기자회견을 하거나, 세미나나 관련 단체의 토론에 나가 의견을 제시하는 일은 상상도 못했다.
-학자들 자문은 받되 행정 일선에는 배치 안 해
내각에 힘을 실어 주는 대신, 내각은 반드시 검증을 거친 인사를 중심으로 조각했고, 그에 상응하는 권한과 책임을 동시에 부여했다. 이와함께 내각의 관료들을 체계적으로 양성, 조직화하여 그들이 전면에서 경제개발계획을 이끌어 나가도록 했다.
朴正熙 대통령은 외국유학 경험이 있고, KDI나 대학에 포진하고 있던 인재들을 소중하게 생각했다. 사실 경제개발계획의 성안이나 추진과정에서 이들의 공헌은 결코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자문역할에 한정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들을 행정 일선에 배치하지는 않았다. 유일한 예외가 있었다면 평가교수단에서 활동하면서 검증을 받고난 후 재무부 장관에 중용된 南悳祐(남덕우)씨 정도였다.
朴正熙 대통령은 주요 경제각료들을 소집해서 의견을 교환할 때 당시 金滿堤 KDI(한국개발원)원장을 합석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그의 학문과 자질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그를 행정 책임자로 임명하지 않았다. 이처럼 대통령은 국정운영에서 테크노크라트들의 경험과 충성심을 우선시하는 용인술을 펼쳤던 것이다.
朴대통령은 내각의 권한과 책임을 극대화하기 위해 혁명동지들을 배제하는 처방도 마다하지 않았다. 朴正熙 대통령의 권력 기반은 어디까지나 軍이었다. 일반적으로 군사혁명에 의해서 수립되는 정권은 軍의 입김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그 결과, 혁명그룹은 私的(사적) 권력집단으로 변질되기 쉽다.
혁명 직후, 중앙정보부를 비롯한 권력기관에 혁명동지나 軍 출신 인사를 등용하여 권력기반을 강화하긴 했다. 특히 우리 軍은 가장 먼저 근대화된 집단으로 혁명 초기, 정권의 안정화 단계에서는 朴대통령도 이들을 유용하게 활용했다. 그러나 정권이 안정화하면서 사조직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는 혁명주체들을 배제하고자 이들을 외국의 대사나 국회 쪽으로 보냈고, 행정부에는 거의 남겨놓지 않았다.
朴대통령이 앞장서서 정치권, 사정기관, 軍으로의 압력을 차단해 주었다. 부총리 제도가 탄생한 것도 부총리에게 예산권을 장악케 함으로써 軍을 비롯한 권력기관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배려하려는 朴대통령의 확고한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末年에 정치-경제정책 바꿨더라면?
朴正熙 시대의 경제발전은 18년이라는 장기집권으로 가능했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없지 않다. 하지만, 관료집단과 기업 엘리트 집단을 양성했을 뿐 아니라, 1966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한국과학기술원 前身·초대 원장 崔亨燮), 1971년 KDI를 잇달아 설립,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던 한국인 두뇌집단을 불러들여 국가발전에 동원한 朴正熙 대통령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朴대통령은 이들이 국정 지표에 신명을 다해 동참할 수 있도록 뒷받침함으로써 심리적으로 든든한 후견인 역할도 했다.
나는 재부무 장관 재임시, 차관을 비롯한 수많은 인사를 했지만 대통령이 한 번도 인사 관련 건의를 거절한 적이 없었다. 또한 나에게 어떤 인사를 지시하거나 부탁한 적도 없었다. 그만큼 朴正熙 대통령은 경제관료들의 자율성을 앞장서서 보호했다. 나로서는 이러한 보호막 속에서 인사관리에 오히려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면서 더욱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통령의 철저한 후견에 힘입어 개발 엘리트들은 밤잠을 설치면서 일했고, 그것을 보람으로 생각하는 것이 당연시됐다. 그러니 근대화 과정에 참여했던 관료들이나 기업 엘리트들이 당시의 참여와 역할에 대해 일생일대의 영광으로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다만 한 가지의 아쉬움이 남는다. 우리나라가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72~1976년)으로 진입하는 시점에서 경제에 대한 정부의 직접 개입을 서서히 줄이면서 민간주도로 전환하고, 유보해 왔던 민주화에 대한 욕구를 어느 정도 수용하면서 유신체제를 마감하고 후계 정치구도를 고안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아쉬움이다.●
첫댓글 아.. 정말 나에게 조국이뭔지. 인생이뭔지. 남자가뭔지. 절실히 깨닫게 해줬던 대통령..아니.. 한 사람...!!!
이럴 때 쓰는 표현이....."맞습니다. 맞고요~" ....놈혀니는 쥑이뿌야 속이 시원할 거 같은데.....방법이 없네, 방법이....
오늘의 한국을 만든 위대한 지도자, 우리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