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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 1,2-5.24-28ㄷ
제삼십년 넷째 달
2 초닷샛날, 곧 여호야킨 임금의 유배 제오년에,
3 주님의 말씀이 칼데아인들의 땅 크바르 강 가에 있는, 부즈의 아들 에제키엘 사제에게 내리고, 주님의 손이 그곳에서 그에게 내리셨다.
4 그때 내가 바라보니, 북쪽에서 폭풍이 불어오면서, 광채로 둘러싸인 큰 구름과 번쩍거리는 불이 밀려드는데, 그 광채 한가운데에는 불 속에서 빛나는 금붙이 같은 것이 보였다.
5 또 그 한가운데에서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나는데, 그들의 모습은 이러하였다.
그들은 사람의 형상과 같았다.
24 그들이 나아갈 때에는 날갯소리가 들리는데, 마치 큰 물이 밀려오는 소리 같고 전능하신 분의 천둥소리 같았으며, 군중의 고함 소리, 진영의 고함 소리 같았다.
그러다가 멈출 때에는 날개를 접었다.
25 그들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서도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다가 멈출 때에는 날개를 접었다.
26 그들의 머리 위 궁창 위에는 청옥처럼 보이는 어좌 형상이 있고, 그 어좌 형상 위에는 사람처럼 보이는 형상이 앉아 있었다.
27 내가 또 바라보니, 그의 허리처럼 보이는 부분의 위쪽은 빛나는 금붙이와 같고, 사방이 불로 둘러싸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의 허리처럼 보이는 부분의 아래쪽은 불처럼 보였는데, 사방이 광채로 둘러싸여 있었다.
28 사방으로 뻗은 광채의 모습은, 비 오는 날 구름에 나타나는 무지개처럼 보였다.
그것은 주님 영광의 형상처럼 보였다.
그것을 보고 나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7,22-27
제자들이
22 갈릴래아에 모여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23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몹시 슬퍼하였다.
24 그들이 카파르나움으로 갔을 때, 성전 세를 거두는 이들이 베드로에게 다가와,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 세를 내지 않으십니까?” 하고 물었다.
25 베드로가 “내십니다.” 하고는 집에 들어갔더니 예수님께서 먼저, “시몬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서 관세나 세금을 거두느냐? 자기 자녀들에게서냐, 아니면 남들에게서냐?” 하고 물으셨다.
26 베드로가 “남들에게서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그렇다면 자녀들은 면제받는 것이다.
27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저는 한 마리의 ‘물고기’입니다>
오늘 복음의 전반부는 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 예고 말씀입니다.
여기에는 인간들이 예수님을 죽일 것이지만, 결국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일으키실 것이라는 사실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곧 하느님의 계획, 하느님의 승리가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는 선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미리 알려주심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이 그저 우연히 발생한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미리 계획하신 섭리임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당신께서 하느님의 그 계획에 기꺼이 동의하시고 함께 하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제자들에게 수난에 대한 준비와 부활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시는 제자 교육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후반부는 예수님께서 ‘성전 세’를 내시는 장면입니다.
‘성전 세’는 모세가 “누구나 자기 영혼의 속죄를 위하여 주님께 반 세겔을 내야 한다.”(탈출 30,13)고 말한 대로, 영혼과 육신의 속죄를 위해 내는 세금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금은 자신이 다스림을 받는 왕에게 내는 것임을 일깨워주면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이니 ‘성전 세’를 면제받아야 되지 않겠느냐고 반문하십니다.
곧 ‘어떻게 아들이 자기 아버지의 집을 위한 세금을 낼 수 있겠느냐?’는 반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먼저 당신께서 성전의 주인이심을, 그리고 당신의 자녀들도 ‘성전 세’로부터 자유로움을 밝히십니다.
그렇게 하시면서도 ‘성전 세’를 내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 이유를 밝히십니다.
그것은 타인에 대한 배려와 사랑입니다.
자신이 옳긴 하지만 무모한 분쟁을 가질 필요가 없기에, 지혜로운 방법으로 세금을 내기로 하십니다.
곧 세금 낼 돈을 호수로 가서 낚시를 해서, 먼저 잡힌 물고기의 입을 벌려 거기에 들어있는 은전으로 세금을 내라고 하십니다.
이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당신의 놀라운 권능을 드러내십니다.
당신께서는 땅에서도 동전을 취하실 수도 있었지만, 호수에서 그 기적을 이루십니다.
‘물고기’는 교회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한 마리의 ‘물고기’입니다.
당신 생명의 호수를 헤엄쳐 다니는 한 마리의 물고기입니다.
당신 사랑의 파도에 몸을 맡기고 살아가는 물고기입니다.
당신 그물에 걸려든 한 마리의 물고기입니다.
그리고 제 입에는 당신 형상이 새겨진 고귀한 동전이 물려 있습니다.
당신 말씀이 물려 있습니다.
제가 당신께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 생명의 말씀이 저를 먹여 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 영혼을 당신께 바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마태 17,27)
주님!
저는 당신 생명의 호수를 헤엄쳐 다니는 한 마리의 물고기이오니,
당신 형상이 새겨진 고귀한 동전을 입에 물고,
당신 파도에 몸을 맡기고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 사람만으로 너무 충분한>
제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은 수원이지만 마음의 고향은 전라남도 신안의 자은도입니다.
1980년대 한 보름 정도 지냈던 곳인데도 그곳이 제 마음의 고향이 되었습니다.
마음의 고향이란 가장 아름다운 추억이 있는 곳이고, 그래서 오랜 세월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곳이지요.
그때 저는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는 곳을 소개받아서 찾아갔습니다.
천주교 주소록에서 목포 북교동 성당 주임 신부님 전화번호를 찾아 신부님이 자주 가시지 못하는 공소를 소개해달라고 해 간 것입니다.
그때는 저도 30대 초반으로서 바오로와 프란치스코처럼 복음을 선포하고 싶었던 순수한 열정 하나만 가지고 찾아갔던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기의 복음 선포를 이렇게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선포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도 복음 선포를 위해 파견하면서 일할 줄 아는 사람은 일하라고 하였고, 일했는데도 먹을 것을 주지 않을 때 그때 애긍을 청하라고 했지요.
그래서 저는 자은도에 가서 해 뜨면 무작정 들로 나가 일하는 곳이 있으면 신자 비신자 가리지 않고 아무 밭에나 가서 일했는데, 그때는 5월이라 마늘 캐는 일이 전부였습니다.
그렇게 일하고 해지면 돌아와 씻고 간단히 저녁 먹은 뒤 그때야 미사를 드리고 교리하고 얘기를 나누곤 하였지요.
서울에서는 신자들이 매일 미사를 드릴 수 있고, 좋은 강의도 많아서 제가 강의해도 반응이 시큰둥하였지만, 그곳은 미사조차도 귀했기에 반응이 뜨거웠고 강의를 하면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쏙쏙 빨아들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짧게 있었고, 그렇게 오래 지났는데도 잊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어쨌거나 요즘 제가 제 개인 얘기를 많이 했는데 오늘도 이 얘기를 길게 한 이유는 오늘 복음 얘기 때문이지요.
주님은 성전세를 내고 있었고 또 성전세를 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자녀들은 면제받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스타테르 한 닢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
주님은 당신이 성전의 주인이시니 오히려 성전세를 받아야 할 분이고, 제자들도 주님 성전에서 봉사하는 이들이니 성전세를 낼 필요가 없다고 하시면서도,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 성전세를 내라고 하신 겁니다.
요즘 사회적으로는 종교인들도 세금을 내야 한다고 하고, 극히 일부 신자들 중에 교무금이나 헌금 안 내기 운동도 벌이는데, 이는 교회가 너무 부유하고 돈 얘기를 너무 많이 하기 때문이지요.
이렇듯 가난하지 않거나 돈이 개입되면 언제건 어디서건 복음 선포는 순수성을 잃게 됩니다.
저만 해도 돈이 오가지 않고 오직 복음만 오간 그때, 그 자은도가 그래서 그리운 것입니다.
복음과 사랑은 대가 없이 전해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라는 말씀대로.
사랑해줬으니 돈 내놓으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해야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적절한 순서와 아량이 필요하다>
“똥이 무서워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행동이 좋지 않은 사람은 서로 상종할 수 없으니, 이쪽에서 삼가서 피하라는 뜻입니다.
물론 전혀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나쁜 사람도 없고, 완벽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삶의 지혜가 필요하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상대가 되지 않으면 때로는 기다려야 하는 아량이 필요한 것입니다.
성전세를 거두는 이가 베드로에게 다가와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 세를 내지 않으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세금은 로마 총독이 로마제국을 위해 거둬들이던 세금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자체적으로 징수하던 인두세였습니다.
스무 살 이상 성인 유다인 남자라면 누구나 해마다 영혼의 속죄를 위해서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입니다.
사실 세상의 임금들은 관세나 인두세를 남에게서 받아내지 자기 가족에게 부여하지는 않는 법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님께서 세금을 내셔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성전의 참 주인이시며 “성전보다 더 큰 분”(마태 12,6)이시기 때문에 당연히 속죄받을 필요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전 세도 바치셨습니다(마태 17,27).
성전의 참 주인이신 분께서 성전세를 내신 까닭이 어디 있을까요?
그야말로 요즘 표현으로 스캔들이 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 세금을 내셨는데, 예기치 않았던 돈으로 성전 세를 내셨습니다.
호수의 고기를 잡아 그 입안에 있던 돈으로 베드로의 몫과 주님의 몫으로 주도록 함으로써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신다’는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시며 우리의 구원자이시라는 모습에는 손상을 입지 않으시면서도, 하느님께는 영광이 드려지며 인간의 비위는 조금도 건드리지 않는 모습에 참 지혜를 만날 수 있습니다.
마음이 꼬인 사람에게는 우선은 한발 물러서는 것이 좋습니다.
원리(原理)는 소중합니다.
그러나 실천하며 살아가는 데는 적절한 순서와 아량이 필요합니다.
오늘 하루, 우리의 마음을 어디에 두고 살아야 할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일상 안에서 많은 일들을 접하면서 그때마다 다른 사람에게 걸림돌이 되고 있지 않은지 신중히 고려해야 할 상황들이 있습니다.
아주 분명하고 명확하게 말하거나 일관되게 행동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그릇이 되지 않는데, 시간을 허비할 필요 없습니다.
더더욱 비굴하게 물러서는 것 같이 보이는 때 정말 참 지혜가 필요함을 절감합니다.
때로는 비유를 들고, 때로는 비유를 해설해 주시던 예수님,
손가락에 침을 발라 눈을 닦아주시고, 귓구멍을 열어주시던 예수님,
일어서라고 하시며 손을 잡아주시던 예수님,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리라 하시던 사랑의 예수님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내 생각을 앞세우지 않고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넉넉한 마음으로 지혜를 갈망하는 날 될 수 있길 희망하며, 눈높이를 맞춰가는 가운데 기쁨과 평화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성전 세를 받으셔야 할 주님께서 성전 세를 바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 세와 관련해서 베드로 사도에게 아주 특별하고 기이한 명령을 내리십니다.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
오늘 보여주시는 기적은 대체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독특한 이적 사화는 아마도 후대에 가필(加筆)된 것으로 추정됩니다만,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이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제정해놓은 편협하고 제한된 제도나 관습으로부터 철저하게 자유로운 분이심을 강조하는 기적이 아닐까 싶습니다.
유다 지도층 인사들은 목숨을 걸고 성전 세를 징수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 성전 세가 어떤 사람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지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의 구린 관례나 시궁창 냄새 나는 악습을 완전 개무시하는 한 표현이 지니고 있는 돈주머니에서 성전 제를 내지 말고 물고기 속의 돈으로 성전 세를 바치라는 말씀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께서는 세금 징수에 목숨거는 유다인들에게 큰 엿을 하나 먹이신 것입니다.
카파르나움 세금 징수원은 예수님께 성전 세를 요구했는데, 사실 이것처럼 천부당만부당한 일이 다시 또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그분은 이스라엘의 주님이신 하느님 아버지의 외아드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리도 애지중지하는 성전의 주인이십니다.
그렇다면 백성들이 바치는 성전 세를 수령하실 분은 사제나 랍비들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성전의 주인이신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성전세 징수원은 기가 막히게도 성전의 주인이신 예수님께 성전세를 바치라고 하였습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했겠는지, 충분히 짐작이 갑니다.
서글프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셨던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명하신 것이 갈릴래아 호수에 가서 낚시를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전 세를 바치셔야 할 분이 아니라 성전 세를 받으셔야 할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굳이 까칠한 유다인들의 비유를 건드릴 필요가 없으니 베드로 사도에게 꽤 웃기는 방법으로 돈을 마련해 성전 세를 바치라고 당부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다시 한번 예수님의 지극한 겸손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왕 중에도 한참 아래쪽의 왕인 세상의 왕에게 겸손하게 세금을 바칩니다.
큰 나라 전체를 다스리는 황제가 한 고을을 다스리는 영주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부여해주신 권한을 단 한 번도 남용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저 겸손하게 하느님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바로 그것만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따라가십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하느님이신 분입니다.>
1)
오늘 복음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것을 계시하셨다는 증언입니다.
성전 세를 내신 일은 부수적인 일이고, 성전 세를 내는 일을 계기로 삼아서 당신의 신원을 드러내신 일입니다.
‘성전 세 규정’은 탈출기 30장에 있습니다.
"인구 조사를 받는 이는 누구나 성소 세켈로 반 세켈을 내야 한다.
한 세켈은 스무 게라이다.
그 반 세켈은 주님에게 올리는 예물이다.
인구 조사를 받는 스무 살 이상의 남자는 누구나 주님에게 예물을 올려야 한다.
너희 목숨에 대한 속죄로 주님에게 이 예물을 바칠 때, 부자라고 반 세켈보다 더 많이 내도 안 되고, 가난한 이라고 이보다 덜 내도 안 된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서 속전을 받아, 만남의 천막 예식 비용으로 쓰도록 내주어라.
이것이 주님 앞에서 너희 목숨에 대한 속죄의 기념이 될 것이다."
(탈출 30,13-16)
성전 세는 로마제국과는 상관없이 유대교에서 자체적으로 징수하던 세금이었습니다.
당시에 성전 세는 일 년에 한 번씩 거두었고, 그 돈은 성전 유지와 관리를 위한 비용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성전 세를 내지 않느냐는 질문에 베드로 사도가 "내십니다." 라고 대답한 것은 예수님께서 평소에 성전 세를 내셨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2)
“그렇다면 자녀들은 면제받는 것이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계시입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를 비롯해서 사도들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것을 이미 믿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본 사도들은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라고 자신들의 믿음을 고백했습니다(마태 14,33).
또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라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 사도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라는 신앙고백의 말을 했습니다(마태 16,15-16).
그래서 ‘성전 세를 내신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계시하셨음을 기록한 것은 복음서를 읽는 독자들을(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믿는 믿음은 사실은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라고 믿는 믿음입니다.
삼위일체 안에서 성부 하느님과 성자 하느님은 한 분이신 하느님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10,30).
이 말씀은 비유나 상징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 말씀하신 ‘진리’입니다.
3)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하느님이신 분이니까 성전 세를 내지 않아도 되는데, 왜 내셨을까?
27절에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를 원문대로 직역하면, “그러나 그들이 걸려 넘어지게 하지 않도록”입니다.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다.’ 라는 번역은 좀 이상합니다.)
‘걸려 넘어지게 하지 않도록’은 ‘죄 짓게 하지 않도록’입니다.
성전 세를 거두는 이들은 정당한 직무 수행을 하는 중이고, 그리고 그 규정은 원래 하느님께서 직접 명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 문제나 정결 예식 문제로 바리사이들과 충돌한 일이 많은데, 그 충돌은 바리사이들이 만든 규정들 때문이었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계명들과 율법들을 ‘모범적으로’ 준수하셨습니다.
또 성전 세를 거두는 이들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성전 세를 내신 것은 “하느님의 명령을 지키는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 그리고 성전 세를 거두는 이들의 직무 수행을 존중하고 그들을 배려하기 위해서”라고 해석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 세를 낼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 ‘작은 기적’을 행하시는데, 그 기적은 “봉헌이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일”이라는 가르침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나의 것’은 없습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주님께서 주신 ‘주님의 것’입니다.
그것을 잠시 내가 맡고 있는 것뿐입니다.
4)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니까 성전 세를 내지 않아도 되는데 왜 내셨을까?” 라는 질문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이 왜
사람들 손에 넘겨져 죽으셨을까?” 라는 질문에 연결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인류를), 그리고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주셨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 일은 우리에 대한(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것이(1요한 4,9-10) 우리의 믿음입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분별의 지혜와 사랑 - “겸손한 삶”>
“주님을 찬미하라.
하늘로부터 높고 높은 곳에서 찬미들하라.”
(시편 148,1)
찬미의 종교요 찬미의 기쁨으로 살아가는 찬미의 사람들인 우리들입니다.
어제 제 고향집이 구암리카페로 변했다는 사실에 흥분했지만, 웬지 모를 참 미묘한 느낌이 떠나지 않았고 지금도 그러하고 아마도 평생 그러할 것입니다.
결코 쉽게 판단할 일이 아니기에 깊고 긴 침묵속에 담아둬야 할 것 같습니다.
분별의 지혜와 겸손한 사랑은 함께 갑니다.
참으로 이런 이들은 판단을 보류하며 침묵하며 하느님께 맡깁니다.
공동생활에서도 참 필요한 겸손한 사랑, 분별의 지혜입니다.
김훈의 소설에서도 겸손과 지혜를 발견합니다.
이런 내용을 자주 발견하는데, 연륜에서 오는 겸손과 지혜일 것입니다.
“이승훈의 죽음과 형식에는 순교와 배교가 합쳐져 있다.
그는 고문과 순교의 과정을 배교로 마감하고 참수되었지만, 그의 최후의 내면이 배교인지 순교인지는 달레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만이 아신다.
정약용의 신문과정은 그가 천주교 지도자들과 동료 지식인을 고발한 대가로 사형을 모면했으리라는 정황을 보여주지만 증거는 없다.
형틀에 묶여서 고문당하고 있는 인간의 육성 진술을 놓고 신앙의 순수성을 따지는 언설은 무의미해 보인다.”
(김훈, 허송세월 232쪽)
겸손한 지혜와 연민이 배어있는 통찰입니다.
특히 사람의 경우는 삶 전체를 깊이 들여다 보면서 일체의 판단을 보류해야 할 경우가 참 많습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에서도 지혜로운 통찰이 빛납니다.
“마음이 자세에서 드러나듯 몸가짐 또한 마음에 스며든다.
마음의 안정을 원한다면 먼저 몸가짐부터 정돈하라.”
<다산>
“얼굴이 단정하면 마음도 경건해지니, 옷매무새와 띠를 항상 단정해야 한다.”
<관자>
이 또한 겸손한 삶의 지혜이자 예의입니다.
결코 마음따로 몸따로의 삶이 아닙니다.
어제 교황님의 삼종기도 후 강론 중 일부 말씀과 평화를 호소하는 메시지 핵심 내용 또한 우리 마음의 귀를 기울이게 합니다.
“우리의 편견에 기초해 있는 믿음이라면 그것은 참된 믿음이 아니다.
참된 믿음과 기도는 정신과 마음에 열려있다.
너희가 정신과 기도가 닫혀 있는 사람을 발견할 때, 그의 믿음과 기도는 참되지 않다.
마리아여, 우리가 주님의 목소리를 믿음으로 듣고, 그분의 뜻을 용감히 실천하도록 도우소서.”
“평화를 위한 우리의 강렬한 기도를 새롭게 합시다.
특별히 우크라이나, 중동, 팔레스틴, 이스라엘, 그리고 미안마를 위해!”
교황님의 시야는 세계 곳곳에 열려 있음을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주님의 자제력과 분별의 지혜가 빛납니다.
이 또한 겸손한 사랑의 반영입니다.
아버지와의 깊은 일치의 삶이 바탕이 되고 있음을 봅니다.
주님은 수난과 부활에 대해 두 번째 예고하며 자신은 물론 제자들의 마음 가짐을 새롭게 합니다.
주님은 분명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살면서 오늘 지금 여기에 집중했음을 봅니다.
제자들은 몹시 슬퍼했다는 반응입니다.
예수님 또한 제자들의 심중을 이해하면서 일체의 판단을 보류한 채 이런 현실을 겸손한 침묵중에 깊이 담아뒀을 것입니다.
이어 성전 세를 바치는 문제로 국면을 전환합니다.
주님은 분별의 지혜를 발휘하여 주님의 자녀들이자 제자들이 성전 세에서 자유롭지만 세상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겸손히 성전 세를 내도록 말합니다.
흡사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바치라’(마태22,21)는 말씀을 연상케 합니다.
“그렇다면 자녀들은 면제받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스타테르 한 닢을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
여기서 물고기 예화의 자연이적은 처음부터 대담에 깔려 있지 않았고 후대에 첨부됐을 것이라 해서 생략했습니다.
그러니 자연이적은 크게 염두에 두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굳이 해석을 한다면 하느님을 닮은 예수님의 초인적 능력은 곳곳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탁월하다는 것일 겁니다.
오늘 에제키엘 예언서에서 계시되는 자유롭고 겸손한 사랑의 하느님 모습이 친근감이 가고 감동적입니다.
예루살렘 성전 안에 갇혀있는 하느님이 아니라 사람들의 고난의 현장에서 함께 하시는 현장의 하느님, 역사의 하느님이심을 보여줍니다.
바빌론 유배 중 크바르 강가에서 만나는 에제키엘의 하느님입니다.
이제 하느님은 바빌론 유배중인 백성들과 함께 한다는 것이 에제키엘 메시지의 핵심 주제입니다.
바로 이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성령을 통해서, 교회 안에서 하느님 현존의 전조(前兆)가 되고 마침내 하느님의 백성은 성전이 됩니다.
하느님의 겸손한 사랑의 극치이자 절정입니다.
바로 내가, 우리가 있는 지금 여기가 주님이 현존하시는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온갖 피조물에서 발견하는 하느님의 영광이니 온세상이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그래서 어느 신비가 시인은 고백합니다.
“세상은 하느님의 장엄함으로 가득차 있다.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그분의 진리와 선과 아름다움을 계시하면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우리의 눈을 열어 보는 것을 배우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있다.
에제키엘 같은 묵시적 비전이 아니라, 우리가 정말 볼 수 있다면 황홀하게 하는 아름다움에 에워싸여 있음을 알 것이다.”
그대로 “주님의 영광 하늘과 땅에 가득하네.”라는 오늘 화답송 후렴과 일치합니다.
우리가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야 할 자리는 오늘 지금 여기입니다.
우리가 있는 곳이 신을 벗어야 할 주님이 함께 계신 거룩한 성전입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겸손한 사랑중에 분별의 지혜를 발휘하며, 언제 어디서나 찬미와 감사를 드리며 살게 합니다.
“너희는 주님 이름 찬미들 하라.
당신의 이름만이 홀로 높으시도다.
하늘땅 아득 높이 찬란하신 그 영광!”
(시편 148,13)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구원은 세상의 방법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을 믿고 따라서 구원받기 위해서입니다.
루가복음 19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자캐오는 구원받았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구원받았음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자캐오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자캐오는 행위로써 구원받았습니다.
구원은 믿음과 그 믿음을 드러내는 행위로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죽음 이후 심판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실천하면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이 땅에 빛과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늘어나고, 신자가 늘어나지만 세상이 변하지 않는 것은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대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없는 구원을 바라는 건 아닐까요?
우리는 재물과 명예 그리고 권력을 구원의 선물로 생각하는 건 아닐까요?
우리는 세상에서 성공하고, 건강하게 지내고, 원하는 게 채워지는 것을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요?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내가 변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믿음으로 하느님께서 변하기를 바라는 건 아닐까요?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구원은 명예, 재물, 권력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마치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채우면 채울수록 더 갈증이 나기 마련입니다.
그것들을 채우기 위해서는 양심을 버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것들을 채우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뜻을 버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던 아합왕이 그랬습니다.
충실한 부하 우리아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다윗이 그랬습니다.
동생 아벨을 죽였던 카인이 그랬습니다.
선악과를 먹고 낙원에서 쫓겨났던 아담이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보다, 나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게 쉽다.”
구원은 세상의 방법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그러자 제자들은 몹시 슬퍼하였습니다.
왜일까요?
제자들은 죽음을 통한 구원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랐던 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징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면 명예와 재물 그리고 권력을 줄 거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했던 제자들은 변하였습니다.
그리고 기꺼이 죽어 많은 열매를 맺는 밀알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와 죽음이 없는 구원은 허상입니다.
믿음을 사랑으로 드러내지 않는 구원은 풀잎 끝에 맺힌 이슬과 같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님께 우리도 십자가와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를 청하며 예전에 읽었던 글을 나누고 싶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볼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가벼운 마음으로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많은 사람을 사랑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맞이하고 있는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하며 살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일이 없었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사람들에게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삶이 아름다웠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기쁘게 대답할 수 있도록
내 삶의 날들을 기쁨으로 아름답게 가꾸어 가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어떤 열매를 얼마만큼 맺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도록
내 마음 밭에 좋은 생각의 씨를 뿌려 놓아
좋은 말과 좋은 행동의 열매를 부지런히 키워야 하겠습니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인간관계는 푸는 것>
글을 쓰기 위해 산사에 머물던 시인이 어느 날 택배를 받았습니다.
기다렸던 물건이었고, 빨리 이 물건을 볼 생각으로 택배 상자의 끈을 가위로 자르려고 했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고 계셨던 스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끈은 자르는 게 아니라 푸는 것이다.”
자르는 것이 편할까요?
아니면 푸는 것이 편할까요?
당연히 자르는 것이 훨씬 편합니다.
그런데 자르는 것을 선택하지 못하게 하는 스님을 보며, 별걸 다 나무라신다고 생각하면서 힘들게 매듭을 풀었습니다.
그러자 스님께서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잘라버렸으면 그 끈이 쓰레기가 될 뿐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풀면 나중에 다시 쓸 수 있지 않느냐?
자르는 것보다 푸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인간관계처럼 말이다.”
택배 끈을 풀면 다시 사용할 수 있지만 잘라버리면 그냥 쓰레기통에 버려질 수밖에 없는 것처럼, 우리의 인간관계도 정말 그런 것이 아닐까요?
인간관계를 아예 잘라버리려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자기와 맞지 않는다고, 자기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자기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가위로 싹둑 잘라버리듯이 관계를 잘라버리고 끊어버리려고 합니다.
하지만 택배 끈도 풀면 계속 사용할 수 있는 것처럼, 인간관계 역시 풀어나갈 때 비로소 연결의 끈이 이어질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관계를 너무나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단 한 명의 예외 없는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성전 세’ 논란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이 논란은 예수님도 성전 세를 내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당시 사제와 라삐는 성전 세를 내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신원에 관한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또 회당에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은 어떤 신원으로 하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죽었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실 예수님의 몸은 성전 그 자체입니다.
따라서 성전의 주인이 세금을 낸다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사제와 라삐보다 훨씬 더 큰 존재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하지만 때가 되지 않은 것을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불필요한 논쟁과 충돌을 피하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또 믿지 않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끊으려는 것이 아니라, 계속 푸시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 역시 구원의 대상이기에 자기를 낮춰서라도 관계를 푸시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이 사랑을 보면서, 우리의 사랑을 바라보게 됩니다.
너무 쉽게 관계를 잘라버리려고 하지 않았나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또 따른다면, 우리의 이런 모습을 과감하게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관계는 푸는 것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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