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C바르셀로나(이하 바르사)를 시작으로 티키타카 전술이 유행했고, 현재 축구계에서 점유율은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유행한 전방 압박 전술 또한 축구계를 강타했고, 압박의 조직은 더욱 긴밀해지고 있는 추세이다. 이 두 가지 전술의 목표는 경기 주도권을 가져오는 데에 있다. 점유율을 유지함으로써 주도권을 틀어쥐는 동시에 상대의 공격 기회를 최소화할 수 있다. 또한 전방압박을 통해 공을 다투는 공간을 우리 골대에서는 멀고 상대편 골대에는 가까운 쪽으로 유도함으로써, 우리의 위험성은 낮추고 상대에겐 위협을 가할 수 있다.
많은 팀들이 이러한 전술적 이점을 잘 이용하고 있다. 흔히 말하는 ‘빅클럽’들은 리그 경기에서 점유율을 높게 가져가는 동시에 강한 전방압박으로 주도권을 쥔다. 절대적인 선수들의 기량 차 때문에 빅클럽은 리그 내 대다수 팀들과의 경기에서 주도권을 쥐는 데에 문제를 겪지 않는다. 지금껏 많은 강팀들은 비슷한 수준의 팀과 만났을 때에도 주도권 싸움을 이김으로써 상대를 압도하려고 했다. 이른바 ‘정면 승부’이다.
서로의 장기를 펼치는 ‘정면승부’를 팬들은 기대한다. 이번 시즌 UEFA챔피언스리그 4강전 FC바르셀로나와 바이에른뮌헨 간의 1차전이 바로 그러한 기대에 잘 부응한 경기였다. 양팀은 전방압박과 점유율이라는 비슷한 철학을 바탕으로 정면으로 맞붙었다. 결과는 3:0이라는 다소 일방적인 결과가 나왔다. 70분경까지 치열하게 대결을 펼쳤지만 끝내 메시의 득점이 먼저 터지면서 이후 경기는 일방적으로 흘렀다. 하지만 최근 강팀 간 경기에서 ‘정면승부’와는 다른 양상으로 경기를 치르는 팀들이 나타났다. 주도권을 ‘주도적으로’ 포기하는 팀들이 나타난 것이다.
(△ 수비 전술로 펩의 바르사를 꺾었던 09-10시즌의 인터밀란. 출처:UEFA홈페이지)
주도권을 틀어잡기 위한 싸움을 벌이는 대신, 상대가 원하는 경기를 맘껏 할 수 없도록 패러다임을 바꿨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첼시와 아틀레티코마드리드(이하 아틀레티코)이다. 이 두 팀은 강팀을 상대할 때만큼은 경기 주도권에 대한 집착을 버린 듯하다. 32라운드 맨체스터유나이티드와의 라이벌 전에서 무리뉴는 70%가 넘는 점유율을 맨유에게 내주면서도 1:0으로 승리를 거머쥐었다. 아틀레티코마드리드도 이번 챔피언스리그 8강 2차전에서 패하기 전까지 시즌 내내 라이벌 레알마드리드를 압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점유율 측면에서 레알을 이긴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여기서 ‘주도성’은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주도권과는 달리 경기 양상을 스스로 선택했는가가 바로 여기서 말하려는 ‘주도성’이다. 많은 대한민국 남자들이 군복무를 달가워하지 않는 이유는 주도적인 선택이 아니라 강제적인 의무이기 때문이다. 주도성을 갖고 수비에 스스로 임하는지, 타의에 의해 수비를 해야만 하는 것인지는 큰 차이를 만들 수 있다. 첼시와 아틀레티코는 경기 주도권을 상대에게 내주는 것을 스스로 ‘선택’했다. 경기 양상은 밀리는 것 같지만 주도권 다툼에 밀려 취하는 수세와는 확연히 다르다. 외형적으론 상대가 경기 내내 공격을 펼쳤다고 볼 수도 있지만, 시각을 바꾸면 상대가 맘껏 공격하도록 내버려 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두 줄 수비’를 앞세워 단단하게 수비를 갖춘 채로 상대에게 주도권을 내준다.
주도적으로 선택한 수세, 수비에 막혀 원하는 대로 공격이 되지 않는 공세. 안정적으로 수비에 집중하기 때문에 경기 주도권을 다투면서 받아야할 스트레스를 피할 수 있다. 주도권 다툼에서 패배했을 때 오는 정신적 스트레스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다.(주도권 다툼에서 패한 팀들은 경기에서 크게 지기도 한다. 특히 펩이 지도하는 팀에게 대패하는 경우가 많다.) 첼시 혹은 아틀레티코는 원하는 경기운영을 ‘주도적으로’ 포기한 반면, 이들을 상대하는 팀들은 어쩔 수 없이 원하는 경기 운영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경기 주도권을 쥐고 있는 팀이 역설적으로 수동적인 상태가 되는 것이다. 첼시와 아틀레티코는 상대가 원하는 경기 운영을 할 수 없도록 만드는 데에 전술적 목표를 둔 듯하다. 첼시나 아틀레티코를 상대하는 팀들은 경기 리듬을 잃게 되는 것은 다반사이다.
(△아틀레티코가 레알을 4:0으로 꺾으며, 기념비적 승리를 거뒀던 지난 2월의 마드리드더비 출처:AT마드리드 홈페이지)
이런 수비 전술의 가장 큰 장점은 쉽사리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상대하는 입장에서 짜증나는 끈적끈적함이 강점이다. 어떤 강팀을 만나도 이런 장점은 유효하다. ‘주도적인 수비 전술’의 성공은 무리뉴가 인터밀란을 지도하면서 바르사를 꺾을 때부터 꽤 유효해보였다.
사실 이번 시즌 첼시가 바르사 혹은 뮌헨과맞붙었으면 상당히 재미있는 경기가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점유율과 전방압박이란 요소를 가장 잘 보여주는 바르사와 뮌헨을 상대로, 끈끈하게 수비를 굳히고 파브레가스로부터 시작되는 날카로운 역습과 세트피스의 강점을 앞세워 좋은 승부가 됐을 것이다. 첼시 대 바르사 혹은 뮌헨의 대결은 결과가 쉽사리 예상되지 않는다.
이러한 수비 전술을 소극적이라고 평할 수 있지만 지독하게 계산된 전략이라고 봐야 한다. 다른 라이벌들을 제치고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기 위한 매우 합리적인 선택으로 평가할 수 있다. 상대적 약팀과의 경기를 착실히 이겨놓았다면 리그 내 라이벌과의 경기에서는 무승부만 거둬도 승점 상 우위에 설 수 있다. 챔피언스리그 경기의 경우 특히 홈&어웨이 경기로 치러지기에 무승부는 전략적인 선택이 될 수 있다. 리그 내 라이벌 또는 챔피언스리그 토너먼트 단계에서 만나는 팀들과의 경기는 일단 지지 않으면 것이 만족할만 하다. 실제로 첼시는 이번 시즌 맨체스터유나이티드, 맨체스터시티, 리버풀, 아스날을 상대로 리그에서 1번도 패하지 않았다. 본인들의 전술을 일정부분 포기한다는 점에서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지만, 축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우승컵을 들어올리는 것이다. 결국 전술이란 승리를 위해 어떤 방법을 취하는가에 대한 문제일 뿐이다.
물론 첼시나 아틀레티코 식 수비 전술도 완벽한 것은 아니다. 견고한 수비를 세운다고 해도 때때로 실점은 나올 수밖에 없다. 순간적인 수비집중력이 떨어질 수도 있고, 세트피스에서 실점을 내주기도 한다. 토너먼트 단계에서는 끝내 무승부로 결국 승부를 가리지 못하는 경우도 나올 수 있다. 수비 전술은 무적의 전술은 아니다.
(△PSG와의 경기가 풀리지 않자 격정적인 무리뉴 출처:UEFA홈페이지)
이번 챔피언스리그에서 첼시와 아틀레티코가 탈락한 양상은 수비 전술이 가진 약점을 보여주었다. 첼시는 이브라히모비치의 퇴장으로 절대적 우세를 누릴 수 있었지만, 경기 내내 뒤에 무른 채 수비를 펼쳤다. 실점만 하지 않는다면 진출이 가능했기에 안정적인 선택이기도 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공세로 나섰다면 득점을 만들 수 있는 공격진을 갖췄기에 아쉬운 선택이었다. 연이은 세트피스에서의 실점으로 PSG와 무승부를 거두고 원정 다득점 원칙에 따라 탈락하고 말았다. 아틀레티코는 이번 시즌 내내 수비 전술로 레알을 압도했다. 챔피언스리그8강에서도 역시 튼튼하게 수비를 갖추면서 레알을 괴롭혔다. 하지만 수비적 전술로 득점을 만들어내는 것은 쉽지 않았고, 마지막 순간 치차리토에게 골을 허용하면서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이번 시즌 유럽 무대에서 가장 큰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은 역시 FC바르셀로나와 바이에른뮌헨이었다. 점유율과 강한 압박을 통해 주도권을 틀어쥐는 스타일에 팬들은 열광하고 있다. 한편, 첼시와 아틀레티코는 유럽무대에서 성과를 거두는 데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다음 시즌의 양상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첼시나 아틀레티코는 강팀답지 않게 답답한 경기를 펼친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들의 끈적함(!)은 어떠한 강팀도 괴롭힐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에게 주도권을 일부러 내주고 수비를 굳힌 채 역습을 노리는 팀과, 이에 맞서 상대의 방패를 뚫기 위해 끊임없이 두드려야하는 팀의 경기는 당분간 끝나지 않을 대결로 보인다. 모두가 같은 축구를 한다면 지켜보는 입장에서 즐거울 리 없다. 다양한 전술로 경기를 펼칠 때 우리가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것 아닌가. 내년 시즌에도 끈적한 ‘주도적 수비 축구’의 약진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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