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정릉(宣靖陵)
신록의 계절 5월은 어느 때보다 아름답고 활기찬 계절이다.
푸른 초목과 꽃들이 만발하여 세상이 풍요롭고 찬란한 절기다. 따뜻한 햇살과 부드러운 바람이 기분을 상쾌하게 하고 활력을 불러 온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생동감 넘치는 산과 강, 들녘에는 울긋불긋 인파가 넘친다.
오랜 세월동안 이어온 산악 동인들의 등산하는 모습도 옛날과는 다르다.
젊은 시절의 등산은 산 정상을 올라가고 종주를 하며 하루의 등산 일정을 끝냈지만 지금은 아니다. 노년에 들어선 동호인들은 지난 2년 동안 수도권의 둘레길, 자락길, 강변길을 번갈아가며 걸었다.
수락산, 불암 산에서 시작되는 서울 둘레길 1코스로부터 북한산 8코스에 이르는 157Km 구간을 완주하였다.
금년 들어 다시 시작한 ‘걷기’ 코스는 조선 왕릉 코스로 잡았다.
‘조선왕릉’은 조선조(1392-1897)의 왕과 왕비, 그리고 대한제국(1897-1910)의 황제와 황후 73명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능은 모두 42기가 있으며, 북한에 있는 2기를 제외한 40기가 2009년 유네스코 세계 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오늘은 서울 강남구 선릉 로에 위치한 선 정릉을 답사하기 위해 인근 지하철역에서 모였다. 선 정릉은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을 말하는 것이다.
선 정릉은 조선조 9대왕 성종과 계비인 정현황후 윤 씨와, 성종의 둘째 아들인 중종의 왕릉이 있는 곳이다.
선 정릉 입구를 들어서니 울창하고 싱그러운 숲이 하늘을 가린다.
맑은 하늘만 빠끔히 보이고 신비로운 기분이 드는 숲속 길을 심호흡 하며 걷는다. 토요일 주말인데도 인적이 드물어 고요한 숲속은 정적이 흐르는 듯하다.
1970년대 서울 강남역이 개발 되면서 선릉과 정릉 주위로 높은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서게 되어, 두 능은 도심 속의 회색 숲속에 있는 녹색 섬처럼 남아 있다. 우리나라에서 땅값이 가장 비싼 이곳에 7만 평이 넘는 금싸라기 땅과 왕릉이 함께 있다는 게 신기하다.
선 정릉은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며 사랑을 받는 공간으로 남아 있다.
숲이 주는 위안을 누리며 매일 찾아 와도 싫증이 나지 않을 것 같은 공간이다.
선릉 가까이 올라가 도심을 바라보면 서울의 높은 건물 사이에 왕릉이 자리 잡고 있는 모습을 사진기에 담아 명작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과거 역사와 현재가 공존하는 공간이라 더욱 의미가 있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곳이다.
아버지 성종과 왕후가 누워 있는 선릉과, 아들 중종 홀로 누워 있는 정릉을 돌아보고 나오는 길가에 제각과 역사 문화회관이 작게 꾸며져 있다.
회관 내부에는 전국 조선 왕릉에 대한 정보와 위치, 성종과 중종의 가계도 관련 정보를 볼 수 있다.
왕릉 답사를 마치고 출구를 나서며 조선 왕조의 파란 만장한 역사가 떠올랐다. 성종의 아들은 두 사람이 왕위에 올랐다.
연산군이 성종을 이어 10대 왕에 책봉되고 중종이 11대 왕위에 올랐다.
연산군은 원래 성군의 자질을 보여 국가 경영을 수월하게 해 냈고 훌륭한 업적도 남겼다. 그러나 그는 생모 ‘폐비 윤씨’ 사건으로 인하여 성군에서 폭군으로 변했다. 장희빈을 후궁으로 들이며 폭정이 계속되고 끝내 ‘중종반정’으로
탄핵을 당해 폐위가 된 것이다.
1506년 9월 2일,
중종은 왕위에 오르던 날 밤 옥에 갇혀 있는 이복형 연산군을 찾아간다.
연산군은 이복동생 중종에게 눈물로 호소한다.
자기 생모(폐비윤씨) 의 죽음을 알고 나서 마음에 금이 갔고 스스로 붕괴의 길을 걸었다고 ...
연산군은 중종의 손을 잡고 “아우야! 나처럼 되지 마라 ...”
중종은 눈물 젖은 얼굴을 마지막으로 형의 손에 대었다.
“감사합니다, 왕 형! ... 전 실패하지 않겠습니다.”
왕실의 슬픈 가족사에 대한 상념이 쉽게 지워지지 않는 하루였다.
첫댓글 선 정릉은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며 사랑을 받는 공간으로 남아 있다.
숲이 주는 위안을 누리며 매일 찾아 와도 싫증이 나지 않을 것 같은 공간이다.
선릉 가까이 올라가 도심을 바라보면 서울의 높은 건물 사이에 왕릉이 자리 잡고 있는 모습을 사진기에 담아 명작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과거 역사와 현재가 공존하는 공간이라 더욱 의미가 있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