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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 2,8─3,4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8 “너 사람의 아들아, 내가 너에게 하는 말을 들어라.
저 반항의 집안처럼 반항하는 자가 되지 마라.
그리고 입을 벌려 내가 너에게 주는 것을 받아먹어라.”
9 그래서 내가 바라보니, 손 하나가 나에게 뻗쳐 있는데, 거기에는 두루마리 하나가 놓여 있었다.
10 그분께서 그것을 내 앞에 펴 보이시는데, 앞뒤로 글이 적혀 있었다.
거기에는 비탄과 탄식과 한숨이 적혀 있었다.
3,1 그분께서 또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네가 보는 것을 받아먹어라.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집안에게 말하여라.”
2 그래서 내가 입을 벌리자 그분께서 그 두루마리를 입에 넣어 주시며,
3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내가 너에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배를 불리고 속을 채워라.”
그리하여 내가 그것을 먹으니 꿀처럼 입에 달았다.
4 그분께서 다시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이스라엘 집안에게 가서 그들에게 내 말을 전하여라.”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8,1-5.10.12-14
1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하고 물었다.
2 그러자 예수님께서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에 세우시고
3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5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10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12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13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14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작은 이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게 하소서>
오늘 복음인 마태오복음 18장은 마태오 복음사가에 의한 네 번째 설교 집성문으로, 교회 설교 혹은 공동체 설교라 불립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야 지역에서 유다지역으로 가시기 직전에 교회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목표에 대한 설교인데, 교회공동체 안에서 차지하는 작은 이들의 가치(1-14절)와 공동체 안에서의 형제애(15-35절)를 다루고 있는데, 오늘 복음은 그 전반부로서, 제자들의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마태 18,1)
예수님께서는 이 물음에 세 가지 말씀을 주십니다.
첫째는, 우선 ‘누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인지’를 먼저 밝히십니다.
먼저 하늘나라에 들어간 사람이라야 그곳에서 큰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먼저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3)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어린이’란 열두 살이 되기 이전의 아이를 가리키는데, 고대인들은 ‘어린이’는 오늘날 우리가 여기고 있는 것과는 달리, 손이 많이 가고 책임감도 없고, 늘 어른의 지시를 따라야 하는 하찮은 존재요, 율법을 모르는 죄인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회개하여 어린이 같이 된’ 사람이란 어른처럼 자신이 주인이 되어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무능력함을 받아들이고, 주인께 신뢰로 의탁하는 죄인을 말합니다.
이를 산상설교에서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마태 5,3)고 선언하셨습니다.
둘째는 ‘누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인지’를 밝히십니다.
곧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마태 18,4)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명예나 권력을 가진 이나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 결국 자신을 낮추어 겸손하게 주님을 예배하는 이가 ‘가장 큰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가장 작은 계명이라도 스스로 지키고 가르치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마태 5,19)이라고 제시하셨습니다.
셋째는 ‘누가 당신을 받아들이는 사람인지’를 말씀하십니다.
곧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태 18,5)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무력하고 미천한 이, 나에게 중요하다고 여겨지지 않는 이를 받아들이는 일이요, 나에게 상처를 준 죄인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사실 당신께서는 먼저 미천하고 무력한 이들을 당신 제자로 받아들이셨고, 죄인으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마태 18,10) 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되찾은 양의 비유'(12-14절)를 통하여, '아버지의 뜻”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마태 18,14)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작은 것 하나마저도 귀중하게 여기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말해줍니다.
비록 보잘 것 없는 죄인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치 전부인 양 소중히 여기시는 아버지의 지극하신 사랑입니다.
하오니, 주님!
저희가 작은 이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게 하소서!
하찮고 비천한 이일수록 더 더욱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마태 18,3)
주님!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게 하소서.
아기가 어머니께 소중한 것처럼, 제가 당신께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하시고,
아기가 어머니께 속해 있듯, 당신께 속해 있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어린이스러운 회개와 어른스러운 회개>
오늘 주님께서는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라고, 그래야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마태 18,2ㄷ)
그래서 저는 오늘 ‘어린이스러운 회개’와 ‘어른스러운 회개’를 묵상해봤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씀하시는 어린이는 철부지 어린이가 아닐 것입니다.
철부지 어린이는 보통 자기밖에 모릅니다.
그래서 늘 자기 중심적이고 배려할 줄 모르며 처신이 미성숙합니다.
그러므로 어린이스러운 회개는 이런 어린이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어울리는 어린이요 회개일 터인데 그것이 무엇일까요?
제 생각에 그것은 첫째로 단순함입니다.
복잡하지 않은 것이고,
복잡하지 않다는 것은 여러 가지가 얽히고설키지 않은 것이고,
여러 가지 또는 상반된 가치와 욕심이 얽히고설키거나 충돌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복잡한 이유가 그 반대인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생각이 많아서 머리가 복잡하고,
하고 싶은 것이 이것저것 많아서 복잡하고,
이 말도 솔깃하고 저 말도 솔깃하여 복잡하고,
이것이 좋아 보이고 저것도 좋아 보여 복잡하고,
육적인 욕망과 영적인 갈망이 같이 있어 복잡하지 않습니까?
두 번째로 어린이에게는 선입관이나 편견이 없습니다.
그래서 백지처럼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고, 한 마디로 때가 묻지 않아 영혼이 깨끗하며,
그래서 얘기하는 것을 곧이곧대로 믿고 받아들입니다.
세 번째로 어린이는 약하고 겸손합니다.
달리 말하면 자기의 약함을 인정한다는 것이고.
그래서 자기 힘에 의지하지 않고 부모나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며,
도움의 손길을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도움에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이러한 이유로 어린이는 단순하게 믿고 잘 믿으며.
그 결과로 여러 가능성에 다 열려 있으며.
신앙 면에서도 하늘나라의 문이 열려 있으며.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며 겸손하게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렸을 때는 어른이 하라는 대로, 교회가 가르쳐주는 대로 아무 의심 없이 하느님을 믿었다가
나이를 먹어가며 점차 때가 묻어서 하느님을 믿지 않다가, 더 나이 먹으면 다시 단순해지고 겸손해져 하느님을 다시 믿는 회개를 해야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어른스러운 회개도 또한 해야 합니다.
앞서 봤듯이 철부지 어린이는 자기밖에 모르고 매우 자기 중심적입니다.
그래서 남의 사정이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래서 남을 고려하거나 배려할 줄을 모릅니다.
한 마디로 미성숙하여 남을 위한 여백이 없고, 사랑의 기초가 아직 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이스러운 회개가 믿음의 회개라면, 어른스러운 회개는 사랑의 회개입니다.
성숙하면 할수록 마음이 넓어져 이웃을 위한 공간이 있으며, 늘 남을 배려하고 남에게 너그러워질 것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가장 큰 사람>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불러 가운데 세우시고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마태 18,4) 하시고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마태 18,10)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어린이를 중심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결국 어린이와 같은 단순함과 순수한 마음, 어린이가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듯 주님께 온전히 의탁하라는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이 모인 곳에서, 미아 발생으로 부모의 애간장을 태우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보면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지하지 못하는 어중간한 아이가 길을 잃고 헤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전적으로 의탁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세상에서는 많이 소유한 것이 위대하게 보이지만, 하늘나라에서는 가진 것 없는 사람, 자신을 낮추어 비우는 사람이 위대합니다.
애당초부터 가진 것이 없는 것이 자랑이 아니라 가진 것을 모두 버릴 줄 아는 사람이 되라는 가르침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꾸만 더해서 많이 갖고, 현명한 사람은 자꾸만 덜어서 많이 갖습니다.”
(이규경)
노자도 “성인은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므로 밝고, 자기를 옳다고 하지 않으므로 빛나고, 자기를 자랑하지 않으므로 공이 있고, 자기를 뽐내지 않으므로 윗사람이 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루카 18,17)
회개하여 순진무구한 어린이의 마음으로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탁할 때 우리는 하늘 앞에서 큰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많이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랑을 지니고 했느냐가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사랑이 담긴 일을 보시고 기뻐합니다.
“형제 여러분,
생각하는 데는 어린아이가 되지 마십시오.
악한 일에는 어린 아이가 되고 생각하는 데는 어른이 되십시오.”
(1고린 14,20)
주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 천국에서 위대한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마음이 넓고, 속이 깊은 사람, 생각하는 차원이 높은 사람이 되려면 주님을 꼭 닮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큰 사람은 키가 커서 큰 사람이 아니라 마음이 커서 큰 사람입니다.
하루를 허물로 누벼놓았어도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않고 주님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자비를 구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시는 주님 품에 안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나의 자존심을 내려놓고 주님 안에서 큰 사람이 되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내가 죽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은 어린이처럼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어 작은 이들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라고 하십니다.
욕심이 있는 사람은 자기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은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작은 생명도 죽이지 못하고 살리려 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자기를 낮춘다는 말은 자기를 비운다는 말과 같고 자신을 죽인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삶입니다.
자신을 죽이려면 자신을 죽이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먼저 알아야 합니다.
사람의 모든 선택의 기준은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자아가 죽으면 정말 행복할까요?
하버드대 연구원으로 지내던 37세의 뇌 과학자였던 질 볼트 테일러는 샤워 도중 신비한 체험을 합니다.
갑자기 어지러워 비틀거리다가 욕실 벽을 손으로 짚습니다.
그런데 어디부터가 자기 손이고 어디까지가 욕실 벽인지 구분이 안 되는 거였습니다.
그 이유는 언어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영역인 좌뇌 쪽에 출혈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니까 이번엔 자기가 누군지 내 이름이 뭔지 어떤 사람인지조차 점점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세상 사례로 시끄러웠던 그녀의 머릿속은 순식간에 고요하고 조용해집니다.
나와 세상을 구분하기 물리적 경계가 희미해지고 그냥 엄청난 우주의 에너지 자체만을 느낍니다.
모든 것과 하나가 된 거 같은 기분을 그녀는 이런 느낌을 마치 요술 램프에서 빠져나온 지니가 된 거 같았다고 표현합니다.
테일러는 이런 경험을 두고 “나의 정신적 에너지가 행복이 넘치는 침묵의 바다를 거대한 고래처럼 미끄러지듯 나아갔다.”라고 표현합니다.
좌뇌는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재잘거림을 통해서 우리를 삶에서 뒤처지지 않게 해줍니다.
자뇌의 언어 중추가 나는 누구누구, 이렇게 말함으로써 우리의 정체성을 느끼게 합니다.
이때 우뇌는 좋고 나쁨, 옳고 그름의 판단을 하지 않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모든 사람을 인류라는 가족의 평등한 존재로 여기고 국적, 인종, 종교 이런 인간들의 많은 경계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어린이들의 뇌를 사용하는 방식입니다.
어린이들은 좌뇌가 덜 활성화되어 모든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온 우주와 하나가 되는 행복감을 느낍니다.
[출처: 하버드대 뇌과학자의 깨달음, 심리학 고양이, 유튜브]
그렇다면 자아, 곧 나가 죽으면 모두가 참 행복을 느낄까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자아가 강하면 어쨌거나 세상에서 자기만을 생각하는 존재가 되기 때문에 관계의 친밀함에서 오는 행복은 포기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관계가 힘들어 스스로 관계를 위해 자기 정체성을 만드는 자아를 죽이는 경우도 발생합니다.
세계적인 뇌 과학자 애덤 지먼은 자기가 죽었다고 말하는 48세 환자 그레이엄과 만납니다.
그레이엄은 이미 본인이 죽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먹지도 자지도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행복한 표정은 짓지 못합니다.
사실 이는 그가 사람들과의 관계가 어렵기 때문에 스스로를 죽은 사람으로 여기게 된 것입니다.
그는 실제로 무덤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고 합니다.
니콜라스의 부모님은 항상 마약에 절어 있었습니다.
열두 살 되던 해에 니콜라스 엄마와 양아버지는 자주 싸웠으며, 어느 날 어머니가 부엌에서 피를 흘리며 경련을 일으키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니콜라스는 그때를 이렇게 회상합니다.
“저는 어머니에게 서너 걸음 다가갔어요.
정상적으로 걷다가 갑자기 꿈속에 들어간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해졌다 모든 게 낯설고 어색하게 느껴졌어요.”
그 후로 니콜라스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몸까지도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상태로 살게 됩니다.
현실은 안개가 자욱하고 꿈 같거나 시각적으로 왜곡된 것처럼 보입니다.
분명히 내 생각인데 내 생각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거나 내 감정이지만 마치 남의 감정처럼 멀게만 느껴집니다.
[출처: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의 소재가 된, 소위 '걷는 시체 증후군'으로 불리는 전세계에서 가장 희귀한 정신질환, 심리학 고양이, 유튜브]
이런 경우는 자아가 사라져도 행복하지 못합니다.
사실 자아가 사라진 게 아니라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자기를 감추어 놓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없으면 반응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관계를 맺기 위해 현실에서 반응하고 느껴야 할 주체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자아를 죽여나가는 방향은 세상을 끊는 방식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을 포용하는 방식입니다.
이 방식을 어린이에게서 배울 수 있습니다.
어린이는 자아가 지나치게 강해지지 못하는 환경에 자기를 밀어 넣습니다.
바로 부모라는 존재의 품입니다.
그 품 안에서는 내가 누구인지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기, 배고파요!”라고 말할 때 그 아기가 자기일 수 있습니다.
왜 제3자로 자기를 표현할까요?
부모의 시선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믿어야 합니다.
아이가 자기를 부모와 함께 죽이는 것과 같습니다.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롤’에서 스크루지 영감은 돈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색하고 이기적이며 탐욕스러운 노인이었지만, 자신이 죽었을 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모습을 보고는 회개하여 모든 사람을 잘 받아들이는 존재가 됩니다.
그는 살았지만, 죽었다고 믿고 살게 되었기에 착해졌습니다.
현실을 도피하기 위함이 아닌 쉘 실버스타인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되기 위해 자아를 잊어야 합니다.
하늘 나라는 이 행복이 지속되는 나라입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이 세상은 언제나 호기심 천국이요 즐길 거리로 충만한 멋진 무대입니다>
여름 신앙 학교 시작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마지막 차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하루 쉬는 날이라 만사 제쳐 놓고 ‘방콕’을 하며 밀린 잠을 실컷 잤습니다.
그런데 웃기는 일이 생겼습니다.
잠을 자는 동안 본인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저절로 나오는 것입니다.
“아이고 아파라! 아이고 쑤셔라!”
잠을 자면서 신음 소리를 내는 것이 정말 오랜만이었습니다.
오래전 주택공사 현장에서 막노동을 세 달 정도 한적이 었었는데, 일 시작하고 일주일 내내 밤마다 그렇게 앓았습니다.
온 몸이 쑤시고 아프고, 그런데 딱 일주일 지나니 적응이 되더군요.
요즘 산업 현장에서 땀흘리며 일하시는 노동자들, 참으로 고생이 많으십니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힘든 때인데, 두꺼운 작업복에 작업화, 작업모에 안그래도 더워죽을 지경인데, 철판 위는 복사열로 달구어져 계란 프라이를 해도 될 정도입니다.
다시 한번 현장 근로자들의 노고를 체험할 수 있게 해주신 주님께 깊이 감사드리는 요즘입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찐하게 체험하는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덥다 덥다 하면 더 덥습니다.
왜 나만 이래야 해, 하고 불평불만 하며 더 힘듭니다.
이왕 일 하는 것, 짜증내지 않고 환하게 웃으면서, 여름에는 땀 흘리는 것이 정상이지, 건강에도 좋고 다이어트에도 좋다는 생각으로 기쁘게 일하면, 그것이 성덕으로 나아가는 길이요, 주님께로 나아가는 길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이 세상을 너무 복잡하게, 너무 인상 쓰면서 살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어린이처럼 단순하게, 철부지처럼 희희낙락하면서 재미있게 살아가라고 당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마태 18, 3-4)
인생의 고수는 사실 매사를 재미있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세상만사를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고 만사를 흥미진진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큰 고통이나 시련이 다가온다 할지라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며, 이 고통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밋밋한 내 일상에 자극을 주시는구나, 나를 재미있게 해주시려나 보다 하고 생각해야겠습니다.
고수의 눈으로 바라보면 이 세상은 언제나 호기심 천국이요 즐길 거리로 충만한 멋진 무대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길 잃은 양’은 ‘남’이 아니라 ‘나’입니다. 누구든지.>
1)
여기서 ‘누구든지’ 라는 말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아무도 제외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지금 예수님의 가르침은 제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가르침이고, ‘모든 사람’이 실천해야 할 가르침입니다.
“어린이처럼 되어라.”,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어라.” 라는 말씀은 “겸손한 사람이 되어라.” 라는 뜻입니다.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는 뜻으로는 “하늘나라에 들어간다.”입니다.
‘회개’는 여기서는 각자 자신의 교만을 버리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나는 교만했던 적이 없다. 나는 항상 겸손하게 행동했다.” 라고 주장하거나, 아니면 말은 그렇게 안 하더라도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자기 스스로 그렇게 주장하거나 생각하는 사람은 백 퍼센트 위선자이고, 교만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위선과 교만부터 회개해야 합니다.
2)
‘되찾은 양의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길 잃은 양’은 남이 아니라 ‘나’입니다.
이 비유에서 ‘아흔아홉 마리’는 의인들의 실제 수가 아니라, 양을 잃었을 때의 목자의 슬픔과 되찾았을 때의 기쁨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의인들과 죄인들의 실제 비율은 ‘99대1’이 아닙니다.
실제 상황을 반영한다면 ‘1대99’ 라고 말해야 할 텐데, 사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길 잃은 양’이고, 회개해야 할 죄인들이고, 예수님의 속죄와 구원이 필요한 존재들입니다.
지옥은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이 가는 곳이고, 하늘 나라는 ‘회개한 죄인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회개할 필요가 없는, 또는 회개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성모님 외에는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런데 성모님은 회개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 또 늘 하느님과 함께 계시기 위해서 ‘회개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3)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라는 말씀에서 히브리서에 있는 다음 말이 연상됩니다.
"형제애를 계속 실천하십시오.
손님 접대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손님 접대를 하다가 어떤 이들은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접대하기도 하였습니다."
(히브 13,1-2)
이 말에서 ‘손님’은 ‘낯선 나그네, 뜨내기’를 뜻하기도 하고, ‘작은 이들,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을 뜻하기도 합니다.
‘천사들’을 접대했다는 말은 하느님을 접대했다는 뜻입니다.
‘나보다 작은 이들’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곧 주님께 사랑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 작은 이들이 곧 주님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오실 때 ‘나보다 작은 이’의 모습으로 오실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라는 말씀은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마태 25,45)
천사들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는 말씀은 작은 이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수호천사들이 곧바로 하느님께 말씀드린다는 뜻이고, 다시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시고, 다 알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자기보다 작은 이들’을 무시하고 업신여기고 학대하는 것은 ‘사랑이신 하느님을 거스르는 큰 죄’이고, 그것은 심판 때에 엄한 처벌을 받게 되는 죄입니다.
4)
그러면 그 죄를 짓는 사람 쪽에는 수호천사가 없는가?
있다면 왜 그렇게 하는 것을 내버려 두는가?
위선자들, 교만한 자들, 작은 이들을 학대하는 자들 쪽에도 분명히 수호천사가 있고, 양심을 통해서,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충고를 통해서, 또는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서, 그러면 안 된다고 계속 타이를 것입니다.
그러나 위선자들과 교만한 자들 쪽에서 그 ‘사랑의 충고’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합니다.
수호천사의 반대쪽에는 마귀들이 있습니다.
마귀들은 “보잘것없는 사람들은 무시하고 업신여기고 학대해도 된다.” 라고 끊임없이 유혹합니다.
“너는 지금 충분히 겸손하다.”, “너는 죄가 없으니 특별히 회개할 것이 없다.” 라고 유혹할 때도 많을 것입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 중심의 “참 좋은 교회 공동체”>
"온갖 재산 다 얻은 듯, 당신 법의 길 걸으며 기뻐하나이다.
당신 법이 저의 즐거움, 그 법은 저의 조언자이옵니다."
(시편 119;14,24)
제 사랑하는 고향집이 구암리카페가 되었다해도 고향집에 대한 사모(思慕)의 정(情)은 날로 깊어갈 것입니다.
첫 사랑의 추억처럼 늘 잊지 못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구암리 카페가 프란치스코 수사 강론 카페처럼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오늘 강론 제목은 “주님 중심의 참 좋은 교회 공동체”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도 이런 공동체일 것입니다.
공동체를 떠나 살 수 없는 사람입니다.
사람 "인(人)"자 글자 자체가 공동체적 인간임을 보여줍니다.
공동체가 사람을 만들고 사람이 공동체를 만듭니다.
공동체의 붕괴와 파괴가 인간성 상실의 원인이 됩니다.
예전 마을은 하나의 커다란 가정과도 같은 공동체였습니다.
요즘은 마을도 사라져 갑니다.
인구도 줄어들고 또 사람들도 편중되어 있어 균형과 조화의 마을 공동체를 이루기도 쉽지 않습니다.
참으로 사람은 누구나 공동체에 소속되고 싶은 소속감을 지니고 싶어하며 나름대로 공동체에 몸담고 살아갑니다.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지 않거나 공동체의 지지와 사랑을 받지 못하고 홀로 살아가는 이들은 얼마나 많고 허약한지요!
날로 늘어나는 1인 가구에 가톨릭교회 공동체의 역할이 날로 증대되고 있습니다.
홀로든 함께든 모두를 하느님 품에 안고 하나의 인류 가족 공동체로 살아가도록 하는 가톨릭교회의 미사전례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때로 남남의 사람들이 미사은총 안에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룬 모습을 볼 때마다 이런 범(汎) 인류의 교회 공동체가 우리의 미래가 아니겠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도대체 가톨릭교회의 미사전례가 아니고 이렇게 하나로 모을 수 있는 방법이 어디 있을 수 있겠는지요!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공동체 생활에 지혜를 제공합니다.
“작은 문턱에 걸려 넘어질지언정 산에 걸려 넘어질 일은 없다.
그러므로 마무리를 지을 때의 자세는 낮고 또 낮아야 한다.”
<다산>
“발걸음은 항상 정중하게 하고, 손놀림은 항상 공손히 하라.
걸을 때는 땅을 가려서 밟고, 개미 한 마리(개미집)라도 밟지 마라.”
<경재잠>
경재잠(敬齋箴)은 주자가 서재의 벽에 써붙이고 스스로 경계한 잠으로, 옛날 서원학생들 기숙사 중 하나인 경재(敬齋) 앞에 내걸어 학생들을 훈계하였기에 경재잠(敬齋箴)이라 부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예전 공부는 주로 군자가 되는, 성인이 되는, 즉 참사람이 되는 공부였음을 봅니다.
오늘날 문사철(文史哲)의 인문학은 날로 쇠퇴하고 실용학문의 공부가 주류인 세상과는 달랐습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평생공부는 참사람되는 공부임을 봅니다.
사제가 수도자가 신자가 되기 전에 사람이 되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성철 스님이 입버릇처럼 했던, “사람 못된 게 중되고, 중 못된 게 수좌되고, 수좌 못된 게 부처된다” 라며 선방 수좌들을 세속의 기준으로 가장 못된 인간들이라고 일갈했던 말씀도 생각납니다.
토마스 머튼에 대한 후대의 평가, 즉 “머튼은 가톨릭인이기보다는 크리스천이었고, 크리스천이기보다는 종교인이었고, 종교인이기 보다는 인간이었다.”라는 말과도 일맥상통합니다.
괴물이나 폐인이 아닌 참사람이 되는 공부가 얼마나 힘든 평생공부인지 깨닫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사람이 되기 위한 공동생활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으로부터 우리는 참사람되기 위한 주님 중심의 참 좋은 교회 공동체 생활의 비결을 배웁니다.
참으로 어린이처럼 편견이 없고 개방적이고 유연한 예수님을, 작은 이들을 끔직히 사랑했던 예수님을 배워 닮는 것입니다.
공동체 성원들이 서로 맞추려 하다보면 공동체의 일치는 요원합니다.
그러니 모두가 공동체 일치의 중심인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께 자기를 맞춰 주님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살아서 몸소 깨달아 실천한 진리들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참사람이 되는 비결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겸손임을 깨닫습니다.
어린이는 편견이 없고 순수하며 개방적이고 유연합니다.
이 또한 부단한 회개의 열매입니다.
이런 이는 그대로 주님의 현존이요 이런 이를 받아들임은 그대로 주님을 받아들이는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 작은 이들에 대한 존중과 배려, 애정의 관심입니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달고 바다 깊은 곳에 빠지는 편이 낫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있는 내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이와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작은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관심사는 그대로 하느님의 관심사를 반영합니다.
작은 이들을 무시하는 것은 그대로 주님께 대한 무시의 대죄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을 닮는 것이 하느님을 닮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고대로 끊임없는 회개로 어린이처럼 낮아져 겸손한 사람이 되는 것, 그리고 작은 이들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 참사람이 되는 지름길임을 깨닫습니다.
자비로운 주님 중심의 참 좋은 교회 공동체의 참사람들이라면 끊임없는 회개로 어린이처럼 겸손한 사람이 되는 공부와 더불어 작은 이들에 대한 배려와 존중의 사랑 공부는 평생공부임을 깨닫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을까요?
답은 단 하나, 공동체의 중심인 주님과의 일치의 우정관계를 날로 깊이하는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 불림받은 예언자 에제키엘이 그 좋은 모범입니다.
에제키엘이 삼킨 두루마리가 상징하는 바 주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성체요 말씀입니다.
주님은 두루마리를 에제키엘 입에 넣어주며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아, 내가 너에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배를 불리고 속을 채워라.”
에제키엘이 먹었더니 꿀처럼 입에 달았다 합니다.
주님은 두루마리를 먹이신 다음 말씀을 선포하라 명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아, 이스라엘에 가서 그들에게 내 말을 전하여라.”
에제키엘 예언자 역시 후대의 바오로 사도처럼 똑같이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사시는 주님이시다.”(갈라 2,20) 라고 고백했으리라 생각됩니다.
똑같은 주님께서 ‘예닮의 여정’중인 우리 모두에게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성체와 말씀을 두루마리를 먹이심으로 당신과의 일치를 깊이하시고, 당신을 닮은 참사람으로 각자 삶의 자리로 파견하십니다.
“당신 말씀 제 혀에 얼마나 달콤한지!
그 말씀 제 입에 꿀보다 다옵니다.
당신 법은 제 마음의 기쁨, 영원히 저의 재산이옵니다.
당신 계명을 열망하기에,
저는 입을 벌리고 헐떡이나이다.”
(시편 119;103,111,113)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회개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
제가 태어난 곳은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안덕리입니다.
앞에는 안덕 저수지가 있고, 뒤에는 높은 산이 있습니다.
집 앞에는 채석장이 있었는데 이제는 더 이상 돌을 캐는 일은 없다고 합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모신 선산이 있고, 집안의 장손이 있어서 부모님을 모시고 가끔 다녀왔습니다.
말 그대로 해님만, 달님만 알아준다면 만족한다는 두메 꽃처럼 깊은 산골입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인가 아랫마을에 쉼터가 생겼습니다.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이라 아픈 사람들이 요양차 내려왔습니다.
입소문이 나서인지 외지에서 건강 회복을 위해 사람들이 찾아온다고 합니다.
예전에 도시는 정주하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었습니다.
교통이 발달하고, 도시화 되면서 도시의 형태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사망하는 사람이 출생하는 사람보다 적어지면서 도시의 기능과 모습도 변하고 있습니다.
이제 도시는 상주 인구를 기준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외지에서 찾아오는 사람들과 잠시 머무는 사람들을 기준으로 재편되고 있다고 합니다.
강남이 개발되면서 사람들이 강남으로 몰렸는데, 요즘은 강북으로 사람들이 몰린다고 합니다.
강북만이 가지고 있는 정과 문화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강북에는 고궁이 있고, 한옥이 있고, 오래된 문화가 있습니다.
거기에 젊은이들의 취향과 입맛을 끄는 콘텐츠가 함께 어우러지면서 인적이 드문 마을들에 사람들의 생기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명동에서 8년을 살았기에 강북의 맛과 멋이 있는 곳을 찾곤 했습니다.
명동에서 나오면 바로 남산 한옥마을과 남산길이 있습니다.
을지로로 내려오면 도심 속의 쉼터인 청계천 물길이 있습니다.
종로로 나가면 광장시장이 있고, 혜화동으로 나가면 대학로와 낙산이 있습니다.
홍대, 연남동, 경의선 길, 성수동, 이태원에도 젊은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습니다.
이런 모습은 비단 서울에 한정된 게 아닙니다.
전주에는 한옥마을이 있고, 여수에는 벽화 거리가 있고, 남해에는 독일마을이 있습니다.
순천에는 습지가 있습니다.
양양에는 서핑 해변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늙음과 낡음은 다릅니다.
비록 오래되었을지라도 멋지게 늙어가면, 새로운 콘텐츠가 접목된다면 사람들은 그곳을 찾기 마련입니다.
미주 지역에는 140여 개의 한인 성당이 있습니다.
이민과 유학생들이 많았을 때는 한인 성당이 늘어났고, 공동체도 활기가 넘쳤습니다.
몇 가지 이유로 한인 공동체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첫째는 공동체 인원의 감소입니다.
고령화되면서 고인이 되는 분들이 늘어납니다.
젊은이들은 미국성당으로 가거나, 성당에 나오지 않으려고 합니다.
언어와 문화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민과 유학생도 줄어들고 있습니다.
둘째는 한국에서 파견된 사제와 공동체의 갈등입니다.
사소한 이유도 있지만, 본당의 신축과 이동이 관련된 갈등도 있습니다.
사제의 독선과 권위주의가 더해지면 갈등의 폭도 커지기 마련입니다.
한국과는 다른 사목 환경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그렇습니다.
먼저 회개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이제 나의 뜻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회개는 자신을 낮추는 겸손에서 시작됩니다.
회개는 어려운 이웃에게 손을 내밀면서 시작됩니다.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변화는 사랑의 완성을 따르게 됩니다>
지난 7월부터 계속 바쁜 일정이었습니다.
7월 15일부터 27일까지 튀르키예, 그리스 성지순례를 다녀왔고, 지난 8월 2일부터 4일까지는 제가 소속되어 있는 연수지구 유소년 연합 캠프가 있었습니다(제가 연수지구 유소년 지도신부라서 참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또 8월 5일부터 9일까지는 서품 동기 은경축 기념 일본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이 모든 날짜도 길지만 제가 없는 시간을 위해 미리 준비했던 시간, 그리고 다녀와서 밀려 있는 일을 하느라 정신없을 정도로 바쁜 시간이었습니다.
이제 모든 일정을 마치고 밀린 일도 어느 정도 정리하면서 어제는 푹 쉬려고 했습니다.
월요일 새벽 미사를 마치고 곧바로 침대로 들어가서 하루 종일 잠만 자야겠다는 거창한(?) 계획을 세웠지요.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잠이 오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피곤하니까 잠을 자야 해.’라고 머리에서 말하는데, 점점 정신이 맑아지면서 해야 할 일이 떠올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는 온종일 책 읽으며 공부하고, 또 글을 쓰는 데 시간을 보냈습니다.
더 피곤해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더 힘이 나는 것입니다.
사실 피곤하면 쉬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번아웃이 와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실제는 정말 아무것도 안 해야 힘을 얻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변화가 필요할 때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새로운 변화를 계속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그냥 세속적인 과거의 습관적인 모습에 갇혀 있는 삶이 아닌, 주님께서 원하시는 새로운 변화를 추구해야 할 것을 이야기하십니다.
오늘 복음도 그렇습니다.
당시의 어린이는 아직 인간으로 보기에 부족한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린이를 무시했고, 어린이와 마찬가지로 당시의 사회적 약자라고 할 수 있는 여성이나, 병자들을 행해서도 거리를 두는 것이 당시 사회의 풍조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회 풍조를 과감하게 버려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시고,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변화되지 않으면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변화는 세상이 원하는 변화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변화이고, 이 변화에 맞춰서 살아가는 모습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살아갈 때 더욱 힘차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며, 하늘 나라에서의 영광을 맞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원하는 변화는 자기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변화는 사랑의 완성을 따르게 됩니다.
더 큰 영광을 위한다면 무엇을 따라야 할까요?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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