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에 안산에 살던 권사님 부부가 이사를 오셨다. 시골에서는 어느 마을에 누가 이사를 온다 하면 뜨르르하게 소문이 나서 이삿짐이 오기도 전에 모두 알게 된다. 특히 목회자는 이사 온 분들을 속히 파악하여 신자가 아니라면 전도를 하거나 신자라면 서운하지 않게 신속하게 심방을 해야 한다. 그런데 이분들은 소리 소문 없이 갑자기 이사를 오셔서 미처 파악을 못하고 있었다.
5월의 어느 주일, 처음 뵙는 분이 한 분 예배에 참석하셨다. 점심 식사도 함께 하셨다. 그때서야 우리 교회 구역에 있는 마을로 이사를 오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권사님은 기도를 많이 하시는 분이셨다. 남편은 몇 년 전에 교회를 다니다가 그만두었다고 했다. 남편의 영혼구원을 위해 기도를 많이 하고 계신다고 했다.
기도를 많이 하는 권사님이 우리 교회 구역으로 이사를 와서 기뻤다. 시골에서 목회를 하다 보니 새 교우 한분이 생기는 것이 매우 감격스럽다. 일꾼이 부족한 우리 교회로 그분을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다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옛 생각이 났다. 23년 전의 일이다.
1989년 3월에 우리 부부는 전주에서 이곳(옹동면 산성리)으로 이사를 왔다. 내가 고창에서 교직에 있다가 칠보중학교로 발령이 났는데 거주지를 전주로 옮기려고 전주로 이사를 간지 일 년 정도 지났을 때였다. 그 때 우리는 전주에 있는 사마리탄 한몸교회를 다녔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반반씩 섞인 교회였다. 배 목사님은 장애인 사역과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통합교회에 비전을 갖고 그 교회를 개척했다.
우리는 전주로 이사한 후 다닐 교회를 찾다가 그 교회를 찾았다. 1년 쯤 되었을 때 배 목사님과 우리 부부는 장애 사역을 동역하고자 시골에 터를 잡자고 해서 우리가 귀촌을 했다. 그러니 시골로 이사는 갔어도 교회는 여전히 전주에 있는 그 교회를 다닐 셈이었다.
우리가 이삿짐을 옮기기 전부터 산성교회의 목사님과 성도들은 우리가 이사를 온 후 산성교회에 다니리라 생각하고 기대를 잔뜩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삿짐을 풀고 있는데 산성교회 성도님 몇 분이 심방을 오셨다. 그분들은 기껏 기대를 하고 오셨는데 우리가 교회는 전주로 다닐 거라고 하니 매우 실망하여 돌아가던 일이 생각난다. 그때는 시골 교회의 형편을 많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에 와서 시골 교회 목회를 하다 보니 시골 교회의 어려움을 체감하며 살고 있다. 단 한 명의 일꾼이 얼마나 귀한지, 한 성도가 불어나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특히 젊은 일꾼이 얼마나 중요한지 등.
당시 산성교회 목사님께서 우리가 지역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는 것에 대단히 실망하셨다고 하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때 우리 부부는 30살이었으니, 연세가 많은 성도들이 대부분인 시골교회에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해 온 젊은 부부가 합류한다면 얼마나 힘이 될까, 하고 기대를 했을 것이다.
우리는 두 어린 아이들을 업고 안고 시내버스-직행버스-시내버스를 번갈아 타며 주일마다 전주로 교회를 다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다른 계획을 갖고 계셨다. 3~4년 후에 갑자기 배 목사님이 공부를 더 하신다고 미국으로 가셨다. 그가 떠나자 사마리탄 한몸교회는 처음의 취지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 후로 어떻게 되었는지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일반교회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교회이름에서도 사마리탄을 뺐다는 얘기를 들었다.
배 목사님이 미국으로 떠난 후 우리는 산성교회로 옮겼다. 목사님과 온 성도들이 매우 반겨주셨다. 우리는 찬양대원, 주일학교 교사, 중고등부교사를 맡았다. 그 후 10여년이 지나 늦게나마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지금은 산성교회의 목회자가 되어 섬기고 있다. 전(前)목사님이신 문 목사님께서 은퇴하시면서 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당시 이제 막 신학공부를 시작한 전도사였던 남편에게 자리를 넘겨주셨다. 물론 그것 또한 하나님의 계획하심 속에 있었음을 믿고 있다.
시골 교회에서는 새 신자가 늘어나는 것이 더욱 좋은 일이긴 하지만, 교회의 일꾼이 부족한 상태라 도시의 일꾼이었던 성도가 이사를 오는 것 또한 반가운 일이다. 우리는 권사님 가족이 우리 교회 구역으로 이사를 오셔서 매우 기뻤다. 게다가 권사님은 기도의 사람인지라 월요일부터 새벽기도회에 참석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그 마을은 걸어서 교회에 오기에는 조금 멀었다. 걸어서 40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우리 교회에서는 새벽기도회 때에는 차량 운행을 안 한다. 왜냐하면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는 분들이 모두 걸어서, 또는 자전거로, 자동차로 다니기 때문이다. 만약 먼 거리에서 새벽기도회에 참석하고 싶은데 자전거로도 자동차로도 다닐 수 없는 형편에 있는 사람이 있다면 상담하여 교회차를 운행할 수 있지만 지금까지는 그런 분이 없었다.
월요일에 권사님의 집을 심방했다. 심방예배를 드리고 나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 새벽기도회 참석 문제를 상의했다. 마침 함께 심방을 갔던 김 집사님이 봉고차가 있는데 그 이웃 마을에 살고 계신다. 김 집사님이 자원하여 차량봉사를 하고 싶다고 하셨다. 그쪽 방향에서 새벽에 걸어오거나 자전거로 오시는 분들이 네 명 계신다. 이참에 김 집사님이 봉고차를 운행하는 김에 함께 타고 다니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김 집사님은 한 달 남짓 차를 운행하던 중 그리 쉬운 일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다섯 명이 시간을 맞추는 것도 힘들었고, 수입이 없어 동생들의 도움으로 사는 김 집사님에게 차량 기름 값도 만만치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리하여 한 달 남짓 지날 무렵, 김 집사님은 차량 운행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다른 분들이야 원래대로 자전거로, 혹은 걸어서 다닐 수 있지만 새로 오신 권사님은 걸어서 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그분은 새벽기도회를 꼭 참석하고 싶어 하셨다.
단 한 분이라도 더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는 것이 고맙고 절실한 마당에 차선책을 마련해야 했다. 그리하여 사모인 내가 권사님만 새벽에 모시러 가기로 했다. 다른 분들은 어차피 이전에도 걸어서 또는 자전거로 잘 다니시던 분들이어서 오히려 그 편이 더 편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3시 30분에 교회에 나가 기도를 하다가 4시 25분에 내 차로 권사님을 태우러 간다. 4시 35분에 동네 모정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30분에서 40분 사이에 권사님을 태우고 교회에 와서 5시까지 다시 기도를 한다.
사람인지라 권사님이 때로는 늦게 일어나 못 나오는 날도 있고, 너무 늦게 나와서 내가 빈 차로 돌아오기도 한다. 한 달 남짓 지난 지금까지 딱 두 번 그런 일이 있었다. 한 번은 권사님이 알람이 꺼져 있어서 일어나 보니 5시였다고 했고, 또 한 번은 시간을 잘못 봐서 40분이 넘어서 나온 탓에 기다리다가 차가 오지 않으므로 걸어서 오다 중간에서 5시가 넘어서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권사님을 사모인 내가 새벽에 태우고 다닌 지 일주일 쯤 지난 후 어느 날, 권사님의 둘째 아들이 와서 그 얘기를 듣고 너무 고맙다고 내게 봉투를 하나 주었노라고 했다. 집에 들어와 펴 보니 6만원이었다. 그때는 “아들이 효자로구나, 어머니 새벽기도 다니는 것을 기뻐하고 또 고마워할 줄도 알고”라고 기특하게 생각했더랬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나고 두 번째 달이 될 즈음에 권사님이 다시 봉투를 하나 내미셨다.
그 때는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이 퍼뜩 들었다. 권사님이 차 기름 값을 낸다는 것인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말했다.
“권사님, 이러지 마세요. 어느 누구라도 먼 거리에서 새벽기도회에 참석하고 싶어 한다면 사모인 저는 고맙고 기뻐서 태우고 다닌답니다. 제게 미안해 할 필요 없어요. 제가 당연히 할 일을 한 것뿐인데요. 요즘 새벽기도회에 나온다는 것만으로도 저는 권사님께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데 기름 값을 주신다면 오히려 제가 부끄럽고 부담되지요. 새벽기도회에 나오시는 권사님께 제가 오히려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답니다. 기도 용사 한 명이 목회자에게는 큰 힘이 돼요. 그러니 잘 나오시기만 하면 돼요. 기름 값 걱정 하지 마시고요. 그리고 부담도 갖지 마세요. 성도들 어느 누구에게라도 필요하다면 봉사하는 것이 목회자 사모로서의 할 일이예요.”
권사님은 “하나님, 참 감사합니다”라고 하셨다. 권사님은 자동차 기름 값을 주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때문에 그동안 좀 부담되고 미안하고 그랬던 모양이었다.
가끔 성도들이 목회자에게 무엇인가 주고 싶어 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사실, 우리는 성도들이 가져다주는 것을 먹고 산다. 온갖 야채, 반찬, 양념류 등. 며칠 전에는 필로스 회원 목사님 부부들이 모임을 가졌다. 이런 저런 얘기 끝에 내가 “우리 사택에는 성도들이 준 참기름, 들기름을 밀쳐놓고 먹어요” 했더니, 어느 사모님이 “우린 지금 기름이 떨어졌는데 사모님 교회에 기름 얻으러 가야겠네요” 했다. 그래서 그 다음 날 어느 성도가 주었던 참기름 한 병을 주었다.
가끔 어떤 성도들은 목사님 고기 사드리라고 혹은 외식 한 번 하라고 돈을 주기도 한다. 성도들이 주는 것을 단호하게 밀쳐내기가 어색할 때에는 간혹 받기도 한다. 목사님은 그 돈을 선교비나 구제비로 사용하도록 한다. 그는 성도들에게 돈 받는 것을 반대한다. 목회자가 공돈 맛을 알면 타락하게 된다고 돈을 멀리 하고자 한다. 어느 날 이웃 교회 장로님과 만나 대화를 하던 중 그 장로님이 말했다.
“형님이 늦게 목사가 되어 도시의 꽤 큰 교회에서 목회를 하게 되었어요. 우리 가족들이 모였을 때 내가 형수님께 ”절대로 성도들이 주는 돈 봉투를 덥석 받지 마십시오. 특히 사모는 돈을 너무 좋아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니 조심하세요“라고 말했어요.”
집에 와서 그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사모로서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돈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자유로운 자가 누가 있을까. 사모로서 돈에게서 자유함을 누릴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시라고 기도해야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오늘날 목회자들이 올무에 걸리는 일이 크게 세 가지가 있다. 돈, 이성문제, 명예욕. 간간이 뉴스나 신문지상에서, 혹은 인터넷에서 이 세 가지로 문제가 되어 비난을 받고 교계를 어지럽히는 목회자들을 접하게 된다. 또한 가끔 주변에서 사모가 ‘돈’ 문제로 올무에 걸려 곤혹을 치르는 경우를 보기도 한다. 그러한 일들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6:10)”
나는 주변에서 평생을 작은 교회, 혹은 시골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은퇴를 한 후 집 한 칸 마련하지 못해 애태우는 경우를 종종 보아왔다. 어느 은퇴 목사님 부부는 누군가가 지어준 작은 집에서 돈이 없으므로 겨울에는 난방을 제대로 할 수 없어 이불을 뒤집어쓰고 오들오들 떨며 산다는 얘기를 들었다. 목회자들의 삶이란 어찌 보면 불공평한 점이 많다.
물론 개인의 능력의 문제이기도 하겠지만, 어느 목회자는 은퇴 후에 넓은 아파트, 많은 은퇴금 등을 받아 여유로운 노후생활을 하는가 하면, 어느 목회자는 목회할 때에도 돈에 쪼들려 자녀들 교육도 힘들었으며 노후준비도 하지 못하여 은퇴한 후에 갈 곳이 없어 거리로 나앉기도 한다는 것이다. 정말 대책이 없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는다. 내 코가 석자인데 남의 형편 살필 겨를이 어디 있나, 싶긴 하지만 은퇴 목회자들의 최소 생활 보장은 마련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