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스페셜 2부 팍스 코리아나(Pax Koreana) : 고구려에 의한 평화
중국 랴오닝성에 위치한 신빈 만주족 자치현. 지방의 작은 도시이지만, 찬란했던 과거를 간직하고 있다. 중국 최후의 통일왕조. 청나라를 세운 태조 누르하치. 그는 자신의 고향에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로 하고 부근에 있는 오래된 성을 고쳐 쌓아 그 터를 닦았다. 총 6km에 달하는 성벽은 돌과 흙을 섞어서 쌓은 토석 혼축 성이었다. 그런데 성의 구조가 독특하다.
조법종 교수 / 우석대 사회교육과 “특히 보시는 것처럼 돌출된 성벽이 안으로 상당히 들어오다가 갑자기 여기서 꺾이면서 맞은편에서 내려오는 산성의 성벽과 어긋나 있습니다. 이 ‘어긋나 있다’라는 것은 적이 침입해 오는 입구 부분에서 적을 2차, 3차로 막을 수 있는 측면에서도 공격하고 정면에서도 2, 3면으로 공격할 수 있는 다면의 공격 형식을 갖는 방식이 ‘고구려 산성의 대표적인 특색’인데 그 모습을 그대로 갖고 있습니다.”
성은 본래 고구려의 것이었다. 406년 1월(영락 永樂 16년), 이곳에 적이 쳐들어왔다.
‘적들이 우리 목저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우리를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 삼국사기
그들은 연(燕)나라. 광개토태왕 즉위 이전부터 고구려와 대립했던 숙적이었다. 연나라는 선비족의 하나인 모용 부족이 세운 나라였다. 랴오닝성 베이퍄오시 외곽에 위치한 한 야산. 곳곳에 구멍이 뚫려 있다. 시신을 모시는 묘혈이 있던 자리다. 골짜기를 따라 이런 구덩이가 수백 개에 이른다.
어호규 교수 / 한국외국어대학 사학과 “여기 골짜기를 경계로 해서 골짜기 동쪽 구역하고 골짜기 서쪽 구역 두 구역으로 나눠집니다. 동쪽에서는 약 50여기, 서쪽에서는 약 360여기 정도가 발굴됐습니다. 고분은 토광(土壙)을 파고 목관(木棺)을 안치한 전형적인 선비(鮮卑) 계통의 무덤들이었습니다.”
중국 발굴 역사상 최대 규모인 이 선비족 무덤 떼에선 그들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유물들이 많이 발견됐다. 칼과 창 그리고 도끼 등 그들은 많은 철제 무기를 갖고 있었다. 또한 화려한 금동장식에 말 관련 유물들도 함께 나왔다. 그들은 말을 탄 강력한 전사들이었다. 당시는 이른 바 5호 16국 시대. 선비족을 비롯한 5개의 북방 민족들이 16개의 나라를 세우며 싸우던 시대였다.
선비족의 일족인 모용 선비는 고구려 영토까지 침범해 왔다. 고구려에서 두 번째 수도 국내성이 있던 지린성 지안시. 고구려는 항상 평지의 도성 주변에 왜적의 침입에 대비한 산성을 따로 쌓았다. 342년 태왕의 할아버지 고국원왕은 환도산성을 보수하고 거쳐를 옮겼다. 연나라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로부터 9달 후 연나라가 쳐들어왔다(342년 11월).
"연(燕) 나라 임금 모용황(慕容?)이 직접 강병 4만을 거느리고 진군하였다. 고구려 남녀 5만여 명을 포로로 사로잡고 궁궐의 집들을 불태웠다." - 삼국사기
그들은 고구려가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도록 쐐기를 박고자 했다. 태왕의 증조부 미천왕릉으로 추정되고 있는 한 무덤. 마치 산처럼 거대한 무덤의 정상에 올라서면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한 가운데가 움푹 패어 있다. 관을 모시고 있는 돌방은 물론 밑바닥까지 파냈다.
조법종 교수 “(돌 방의) 위치는 이것 보다 조금 더 높았을 겁니다. 다른 계단형 석실(돌 방) 무덤의 예를 봐서는 7부 능선 위 쯤 될 텐데 모용(慕容) 선비(鮮卑)족들은 그 밑에 더 중요한 보물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아마도 여기까지 다 파낸 것 같습니다.”
그들이 노린 것은 따로 있었다. 연나라의 병사들은 미천왕의 무덤을 파헤쳐 그 시신을 가져갔다. 고구려의 보복을 막으려는 인질이었다.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끔직한 악행을 저질렀던 연나라. 그들이 다시 고구려를 공격해 온 것이다. 연나라는 왜 이토록 집요하게 고구려를 공격했을까.
중국 동북지역의 남부 평원을 관통하는 강 요하. 고구려와 연나라는 이 강을 사이에 두고 대립했다. 중원과 만주를 가르는 요하를 경계로 서쪽은 요서, 동쪽은 요동으로 나뉜다. 요동을 장악하려는 고구려와 요서를 차지한 후 동쪽으로 진출하려던 연은 서로에게 걸림돌이었다. 태왕에겐 더 강한 군대가 필요했다. 재정과 회계 군사행정을 맡아보는 전문관료들을 확충했다.
이도학 교수 / 한국전통문화학교 한국고대사 “군사적인 업무를 맡아보는 전문 직책을 설정하고 되고 또 일련의 대대적인 군사 개혁이라고 하는 작업 속에서 특별히 이런 직책을 신설해서 군사 능력을 배가시키기 위한 그런 차원에서 나온 것이 아니겠는가...”
조상들의 원한을 풀고 요동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비족을 요하 너머로 몰아내야 했다. 그는 서쪽으로 진격했다. 목표는 요하 바로 앞에 요충지였다. 국내성 북서쪽에 위치한 랴오닝성 랴오양시. 당시 중국 동북지방에 중심지로 요동 전체를 관할하는 거점이었다. 수 년 전 이곳에서 오래된 성의 유적이 발굴됐다. 현장에선 성의 주인이 누구인지 말해주는 유물이 나왔다. 붉은 색을 띤 고구려의 기와. 고구려의 전통무양인 연꽃무늬도 있었다.
여호규 교수 “고구려 시기에 기와는 궁궐이나 관청, 사원(절) 이런 곳에서만 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요동성내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건물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이곳엔 고구려의 요동성이 있었다. 성은 고구려 특유의 방어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당시 요동성에 주인은 연나라였다. 광개토태왕의 고구려 군은 연나라 군을 격파하고 요동성을 손에 넣었다. 고구려 역사에 획기적 사건이었다.
김현숙 박사 / 동북아 역사재단 “일단 요서(遼西)지역과 요동(遼東)지역을 구분 짓는 요하(遼河) 경계선이 생김으로 인해서 서쪽 국경선이 완전히 안정을 찾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그 기본선을 확보하고 난 이후에 고구려는 멸망할 때까지 요하 경계선을 끝까지 고수를 합니다.”
태왕은 요하를 건너 서쪽으로 갔다. 랴오닝성 베이젠시에 위치한 대량갑 유적. 밭 한가운데 마치 무덤처럼 솟은 흙더미가 있다. 마을 주민들은 이곳을 오래된 무덤으로 생각했다. 귀한 보물을 기대하고 땅을 판 도굴군의 눈앞에 특이한 구조물이 들어났다. 층층이 흙을 다져 쌓은 벽. 이곳은 옛 성의 군사시설이었다.
“예전에 국가에서 무슨 일이 있을 때 불을 붙이던 봉화대입니다.”
봉화대까지 갖춘 성의 정체는 무엇일까? 중국 동북지방의 역사와 지리를 정리한 책. 베이젠 부근에 숙군이란 성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숙군성은 연나라 동북부의 요새로 요서에서 요하로 가는 길목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402년(영락 12년), 고구려 군이 이곳을 공격했다.
"태왕께서 군사를 보내 연나라의 숙군성을 공격도록 하셨다." - 삼국사기 "연나라의 장수가 성을 버리고 도망갔다." - 삼국사기
여호규 교수 “고구려가 요하를 넘어가지고 요서 지역으로 진출하려는 시도를 했던 것으로 볼 수 있고요. 그래서 숙군성을 장악했다는 건 일단 요서 지역으로 진출 하려는 거점을 확보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태왕께서 행차를 돌려 양평도(襄平道)를 지나 동으로 역성(力城), 북풍(北豊) 등으로 오면서 영토를 시찰하고 사냥을 한 후에 돌아왔다." - 호태왕비
요동 정벌엔 광개토태왕에 원대한 전략이 담겨 있었다. 요동성이 있는 랴오양에서 자동차로 2시간 거리에 위치한 안샨. 시 외곽에 위치한 거대한 바위산엔 동굴이 뚫려 있다. 동굴 벽은 온통 붉은 색이다. 이곳은 고대로부터 쓰이던 철광석 광산이었다.
장쓰준 교수 / 안샨 사범대 정치역사학과 “57년에 고고학자들이 이곳에 들어왔는데요. 그들은 안에서 책상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책상 위에는 광산용 램프가 있었습니다. 고대 광산에서 쓰던 램프가 남겨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기 그릇, 요나라 때의 사기그릇이 있었습니다. 그것으로 이 동굴이 아무리 늦어도 요나라 때(10~12세기)부터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태왕은 요동지역에 좋은 철광석이 풍부하다는 점을 노렸다. 고대사회에서 철은 가장 중요한 재화이자 군사력을 좌우하는 필수자원이었다. 광개토태왕은 요동지역의 철로 고구려 군의 갑옷과 무기를 만들었다.
막강한 전투력을 자랑하는 고구려의 철갑기병들도 계속 수를 확충해 갔다. 이제 광개토태왕의 눈은 요동반도의 남쪽 끝으로 향했다. 삼면이 바위 절벽인 험준한 산 위에 자리 잡은 비사성. 성은 광개토태왕 당시 고구려의 것이 됐다.
윤명철 교수 / 동국대학교 교양교육원 “멀리서는 서해에서의 움직임을 측정할 수가 있고 서쪽과 동쪽으로 각각 진저우(金州)만과 다롄(大連)만을 동시에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성을 장악할 경우는 요동반도 남쪽의 해양에 대한 상황을 정확히 인식할 수가 있고요.”
비사성에서는 요동반도의 일대의 바다가 한 눈에 보인다. 이곳은 고구려 제일의 해양방어 기지였다. 태왕은 비사성을 중심으로 요동 반도의 바다 곳곳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비사성의 동쪽에 위치한 대장산도. 이곳 해안가에는 오래 전에 지은 성터가 남아 있다.
“이것이 무슨 성이죠?” “고려성이요.” “고려성이요? 왜 고려성이라고 부르죠?” “한국이 고려국이었잖아요. 예전에는 고려국이라고 불렀어죠.”
고구려 성이라고 불리웠던 옛 성. 성벽은 사라졌지만 성의 기단부는 아직 남아 있다. 성은 서해를 향해 열려 있어 들어오고 나가는 배의 움직임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다. 또한 바닷가 절벽 위에 세워진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고려성의 범위가 상당히 넓었어요. 좀 더 가면 릉(陵)도 있어요.” “릉이요?” “무덤이요.”
창하이 현의 역사를 기록한 책은 성의 유래를 이렇게 말한다. ‘고구려가 장산열도를 점거했다.’ 서기 404년 광개토태왕 당시였다. 대장산도에서 배로 30분 거리에 위치한 광록도(廣鹿島). 이곳에도 고구려의 성의 있다.
“고려성(高麗城)입니다. 고려성이요.” “저것이요?”
성은 깊은 만이 시작되는 입구에 세워졌다.
“얼마나 됐는지는 저도 잘 몰라요. 제가 아는 건 저걸 고려성이라고 부른다는 거예요.” “어릴 때부터 저걸 고려성이라고 부른 건가요?” “네. 노인들이 그래요. 제 할머니 때도 다 고려성이라고 불렀어요.”
광록도엔 고구려의 수군기지가 있었다. 수심이 얕고 깊게 들어온 만은 배를 숨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또한 요동반도와 서해 일대를 오가는 한반도와 중국의 모든 배들을 감시하고 통제할 수 있었다. 현지의 기록에 의하면 광개토태왕은 이곳을 점령한 후 고구려 백성들을 이주시켜 확고한 고구려 영토로 만들었다.
윤명철 교수 “광개토태왕 당시에도 산동(山東)지방에 있었던 남연(南燕)과 무역을 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그 이전이나 그 이후에도 고구려인들에게 이 주변 지역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압록강 하구라던가 대동강 하구라던가 이런 지역에서 요동(遼東)반도 남쪽을 거쳐서 발해(渤海)만이나 산동(山東)반도로 들어가는데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경제적 물류라는 측면에서도 여기는 중요했었죠.”
요동은 장악한 태왕의 힘은 대륙을 넘어 서해에 이르렀다. 요동반도와 부근의 섬을 점령한 광개토태왕은 중국과 한반도 오가는 서해 항로를 장악할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다. 요동정벌이 한창일 무렵(399년, 영락 9년), 급보가 날아왔다. 신라의 사신이었다.
“태왕께 고하옵니다. 왜(倭)인들이 나라에 가득차서 성과 연못을 부수고 있습니다.”
바다건너 왜가 신라를 침공한 것이다. 왜의 침략. 그것은 태왕에게도 지나칠 수 없는 문제였다. 신라의 궁성이 있던 경주 월성. 월성의 성벽은 지금도 상당히 남아 있다. 쌓은 지 천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높고 튼튼하다.
주보돈 교수 / 경북대학교 사학과 “지금 현재 남아 있는 모습만 봐도 굉장히 높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경사가 많이 졌는데 저 아래에는 성을 건널 수 없게 하려고 물을 끌어들여 해자(垓字)를 만들었습니다.”
당시 신라의 적은 왜구였다. 그들은 수도를 포위할 만큼 극성이었다. 광개토태왕 당시 신라에 왕은 내물왕. 왜구의 공격 앞에 그는 무력했다. 삼국사기는 당시 신라의 상황을 우는 말에 빗대어 적고 있다.
주보돈 교수 “불시에 공격을 받아서 경주가 함락되니까 내물왕이 북쪽으로 고구려 영역 근처까지 도망을 가게 됩니다. 위기에 빠져서 고구려에 급하게 원병(援兵)을 요청하게 됩니다.”
왜구의 신라 공격엔 배후가 있었다. 3년 전 한성 점령 당시 종을 자처했던 백제였다.
“백제는 태왕께 지금부터 영원히 ‘노예 같은 신하’가 되겠습니다라고 했었다. 그런데 백잔(百殘)이 맹세를 어기고 왜(倭)와 화통하였다.” - 호태왕비
백제 아신왕은 줄곧 고구려를 칠 방법을 궁리했다. 돌파구는 하나. 바다 건너 왜었다. 고대 일본에 수도였던 아스카 판개궁(板蓋官). 이곳에 백제의 왕자가 나타났다. 아신왕은 아들 전지를 보내 왜의 참전을 요구했다. 전성기의 백제는 서해의 물길을 장악하고 중국의 선진문물을 수입해서 일본열도에 나누어주며 왜를 백제 편으로 끌어 들었다.
이도학 교수 “왜로서는 선진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중요한 창구 기능을 했던 나라가 백제였던 것이죠. 백제가 정치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놓여 있을 때 백제와 보조를 같이 해야만 백제와 관계가 계속 이어지게 되고 그로 말미암은 최대의 수혜자 역할을 왜가 계속할 수 있었기 때문에 백제의 요청에 왜가 응할 수밖에 없었죠.”
왜는 백제의 요구대로 신라를 공격했다.
“태왕께 귀의하여 구원을 요청합니다.(歸王請命)”
고구려가 연나라와 싸우는 사이 왜를 끌어들여 고구려의 동맹인 신라를 무너뜨리고 고구려까지 치려는 백제의 전략이었다. 광개토태왕은 좌시할 수 없었다.
“태왕께서 보병과 기병 5만 명을 보내 신라를 구원했다.” - 호태왕비
광개토태왕은 고구려의 최정예 부대를 동원했다. 지난 2007년부터 발굴중인 경주 쪽샘지구 발굴현장. 신라 귀족과 왕족들의 무덤 수백기가 발굴된 이곳에서 전례 없는 유물이 출토됐다. 그것은 말의 갑옷 마갑이었다. 고대에는 전차와도 같았던 말을 보호하기 위해 덮은 마갑. 그런데 그 형태가 일반적인 갑옷과는 달랐다. 작은 철조각을 이어 만든 것이었다. 마갑위엔 사람이 입었던 미늘갑옷 찰갑도 덮여 있었다. 고구려의 찰갑기병이 경주까지 내려온 것이다.
소재구 소장 / 국립경주문화재 연구소 “많은 기병과 보병이 오면서 찰갑(札甲)과 마갑(馬甲), 투구를 장착한 무장들이 내려왔을 것이고 이런 선진화된 투구와 갑옷의 여러 문화가 신라에 전파되지 않았나 생각되고 있습니다.”
찰갑은 잘 단련된 철조각을 물고기 비늘 모양으로 잘라 부식방치를 위해 옻칠을 한 후, 엮어서 만든다. 윗옷 하나에만 천개가 넘는 철조각이 쓰인다. 찰갑 갑옷은 유연하고 탄력이 뛰어나 활동이 용이하다. 고구려의 찰갑기병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런 비늘 갑옷을 입고 말까지 완전히 갑옷을 덮었다. 찰갑으로 감싼 중장기병이 적진을 돌파하면 가벼운 갑옷과 창으로 무장한 경기병이 적에 뒤로 돌아 공격한다. 적의 진이 붕괴되면 기병과 보병이 적을 둘러싸 섬멸하는 것이 고구려의 전술이었다. 왜구는 고구려 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김태식 교수 / 홍익대학교 역사교육과 “그 당시에 군사는 중장기병(重裝機兵)을 누가 장악하고 있는가, 또는 운영할 줄 아는가, 이런 문제인데 왜병은 기마군도 없었던 것으로 보이고 철제 갑옷도 충분하지 않아서 수준 차이가 크게 났던 것으로 보입니다.”
왜군은 남쪽으로 도망쳤다. 고구려 군은 왜구의 뒤를 쫓아 한반도의 끝에 이르렀다. 그곳은 지금의 분산성. 금관가야의 요새였다. 낙동강 하류에 위치한 금관가야는 바닷길을 통해 중국, 일본과 교역하며 가야연맹국의 중심세력으로 성장해 있었다.
송원영 학예사 / 대성동 고분박물관 “고구려는 동북아시아 최강의 군사력을 가진 국가였기 때문에 생존 자체에 위협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어마어마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금관가야는 왜, 백제와 연합을 해서 고구려와 신라에 맞서는 형국을 가지고 있었던 거죠.”
백제를 통해 중국 및 일본과 교류하던 가야는 고구려가 강성해지면서 해상교역로가 막히고 신라까지 고구려의 동맹국이 되자 위기의식을 느꼈다. 그들이 선택한 것은 백제, 왜와의 연합이었다. 당시 금관가야의 군사력은 어느 정도였을까. 김해 대성동에서 발굴된 왕릉급 무덤. 금관가야는 철의 매장량이 풍부해 발달된 철기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도 철로 갑옷을 만들어 입었다. 철판을 통째로 이어붙인 판갑옷이다. 작은 철조각을 이어 만든 고구려의 찰갑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금관가야의 판갑은 화살을 쏘면 관통한다. 치명적인 부상을 막을 수 없다. 고구려의 찰갑은 어떨까. 화살은 튕겨 나온다. 가죽 끈으로 연결된 철조각들이 유연하게 안으로 밀리면서 화살의 힘을 흡수한 뒤 튕겨 낸다. 재료는 같지만 성능 면에서 월등한 차이를 보인다.
윤온식 학예사 / 국립김해박물관 “판갑은 창이나 화살 같은 무기의 공격을 받았을 때 깨지거나 휘어지는 측면이 있고 창이 비켜가지 않겠죠. 그래서 방호력에서는 찰갑이 우수하다는 게 일반적 생각입니다.”
가야 군사의 활은 고구려 군의 갑옷을 뚫지 못했다.
“중발성이 곧 항복했다.” - 호태왕비
그러나 백제 아신왕은 포기하지 않았다. 404년(영락 14년), 수군을 이끌고 다시 고구려로 갔다. 이번엔 왜로부터 수군을 지원받아 고구려의 대방 땅을 공격했다. 광개토태왕이 직접 나섰다.
“왜(倭)가 법도(法度)를 지키지 않고 침입하였다. 태왕께서 왜구를 궤멸했다. 참살한 것이 무수히 많았다.” - 호태왕비
김용만 소장 / 우리역사문화연구소, <광개토태왕의 위대한 길> 저자 “왜(倭)는 후연(後燕)과 더불어 고구려 내지(內地)를 쳐들어온 유일한 외적(外賊)이 됩니다. 즉 후연과 왜는 고구려 천하 안에 있는 같은 동질 의식을 느끼는 존재가 아니라 고구려 천하질서를 어지럽히는, 쉽게 말하면 악당(惡黨)이라 볼 수 있겠죠.”
결국 왜는 축출됐다. 이후 한반도 남쪽엔 큰 변화가 있었다. 가야의 무덤 40여기가 발견된 부산의 복천동 고분. 가야의 토기와 함께 전혀 다른 성격의 유물이 발견됐다. 철로 만든 방어용 전투 장비. 병사의 목을 가리는 철제 목가리개다. 작은 철조각을 이어 붙인 찰갑도 발견됐다. 모두 고구려 영향을 받은 전투장비다.
이유진 학예사 / 복천박물관 “고구려 벽화 고분에서나 볼 수 있는 작은 철재로 만든 찰갑과 무기류들이 출토되고 있거든요. 이런 것들은 광개토태왕의 남정(南征)을 기점으로써 출토되고 있고 이런 영향이 고구려의 영향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로써 광개토태왕 당시 고구려의 힘은 한반도 남부의 끝에 이르렀다. 광개토태왕은 중국대륙에서 일본 열도에 이르는 해상물류의 모든 거점을 장악하여 동아시아의 바닷길을 고구려의 것으로 만들었다.
태왕이 남반도 정벌에 집중하고 있을 때 다시 북방에 문제가 생겼다. 랴오닝성 푸순시에 위치한 고이산성 옛 이름은 신성이다. 높이 10m 내외에 토성이 약 4km에 걸쳐 남아 있는 고구려 성이다. 지금도 고구려의 유물이 발견된다.
서영수 교수 “(고구려가) 요동 벌로 나가려면 이 통로로 나가야 합니다. 거꾸로 모용(慕容) 선비(鮮卑), 수(隋), 당(唐) 제국의 군사가 쳐들어 올 때도 이쪽으로 와서 바로 목저성, 남소성 이런 데로 해서 고구려 국도(수도)쪽으로 향하는 그 길목에 해당되는 성입니다.”
이 성은 태왕의 할아버지 고국원왕이 고구려로 가는 길목을 지키기 위해 쌓았다. 399년 후연에 군사 3만 명이 이곳을 쳐들어왔다.
“연나라 장군 모용 희가 신성, 남소성 두성을 함락했다.” - 삼국사기
선조 대부터 100년 이상 고구려를 괴롭혀 온 연나라. 이제 그 질긴 악연을 끝내야만 했다. 랴오닝성 북서부의 대도시 차오양. 중국 동북부에 현존하는 탑 중에 가장 오래된 탑, 북탑. 벽돌로 쌓은 총 13층에 탑으로 석가모니의 사리가 안치돼 있다. 1987년 발굴 당시 탑의 가장 밑 부분에서 본래 있던 건물의 흔적이 발견됐다. 연나라의 수도 용성의 주춧돌이었다.
여호규 교수 “차오양(朝陽), 지역은 전연(前燕), 후연(後燕), 북연(北燕), 3연(三燕)이 모두 도성(都城)으로 삼았던 그래서 모용(慕容) 선비(鮮卑)의 가장 중심 지역이다라고 얘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광개토태왕 후연의 심장부를 쳤다(407년 영락 17년).
“태왕께서 보병과 기병 5만병을 보내 모조리 죽여 없앴다. 노획한 (적의) 갑옷이 만여 벌이며 그 밖에 군수 물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 호태왕비
그리고 군사를 서쪽으로 이동시켰다. 고구려는 만리장성에 이르렀다. 만리장성에 북쪽으로 가는 입구 고북구. 옛 만리장성에 모습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이곳은 고대로부터 중원으로 가는 북방민족들의 통로였다.
서영수 교수 “고대의 가장 중요한 통로에 해당됩니다. 한족(韓族)이 동북방으로 진출할 때도 이 길을 통해서 가고 유목 민족이나 고구려가 하북(河北)으로 진출할 때도 이 통로를 통해서 갑니다.”
고구려 군은 만리장성을 넘어섰다. 그 너머는 지금의 중국의 수도인 북경이다. 북경 인근에 위치한 작은 마을 순의구. 이곳엔 고려영. 즉 고구려 군의 병영이라는 뜻을 가진 지명이 남아 있다.
“여기를 왜 고려영 마을이라고 부르게 된 건지 아세요?” “제가 어릴 때부터 고려영이라고 불렀어요. ‘영(營)’이라고 하는 건 ‘병영(兵營)’을 말하는 거예요.” “노인들 말로는 ‘고려영은 조선에서 온 사람들에 의해 어떻게 됐다’고 했었는데 정확하게는 잘 모르겠어요.” “조선을 예전에는 고려라고 불렀잖아요. 고려(高麗), 조선의 군대가 지나면서 이곳에 묵었기 때문에 그렇다고 들었어요. 고려, 그러니까 조선의 군대가 이곳을 지나가서 고려영이라 불렀다는 거예요.”
어떻게 북경 인근에 고구려에 이름을 딴 지명이 있는 것일까. 중국의 한 역사서에 이를 짐작하게 하는 단서가 있다. 고구려는 북경 부근의 연군을 공격했다. 그리고 후연의 군사 백여명(百餘人)을 죽였다.
김용만 소장 “연군은 고구려에게 수모를 줬던 모용 선비족의 영웅이었던 모용황의 사당이 있던 곳입니다. 그래서 아마 복수를 위해 고구려가 공격했고...”
태왕은 왜 이런 기습을 했을까. 평안남도 남포시에 자리한 덕흥리 고분. 광개토태왕의 신화로 추정되는 한 인물의 무덤이다. 주인공의 초상이 그려진 벽 위엔 그에 정체를 밝혀줄 글씨가 남아 있다. 그는 광개토태왕 재위 중에 세상을 떠났고 살아생전 유주자사란 벼슬을 한 사람이었다.
유주는 어디일까. 벽화의 한쪽 벽면엔 그가 다스리던 유주지역에 관리들이 묘사돼 있다. 그런데 이들 중 눈에 띠는 지명이 있다. 벽화에 써진 연군은 오늘날의 북경일대, 어양과 상곡 또한 북경인근에 지명들이다. 유주자사 진은 오늘날 북경과 허베이성 일대의 유주지역을 관할하던 후연의 고위 관리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408년 이전 어느 시점 그는 고구려로 망명을 해왔다. 광개토태왕은 그에게 오늘날 차관급의 벼슬인 소대형을 내렸다. 그리고 그에게 후연 내부에서 고구려를 위해 일정한 역할을 할 것을 주문했던 것으로 보인다. 얼마 후 후연은 반란이 일어난다(407년 영락 17년). 후연의 고위관료 풍발에게 황제 모용 희가 피살됐다.
서영수 교수 “후연과 싸울 때 많은 소모전을 하면 국력이 약화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후연의 자체 붕괴가 가장 고구려에게는 이득이 되는 것인데 바로 공교롭게도 고구려와 치열하게 싸웠던 후연이 407년 마지막 황제 모용희(慕容熙)가 풍발(馮跋)에 의해 피살되고 스스로 붕괴됐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들이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전략 중에 한 부분이 아닐까...”
후연은 무너지고 연나라엔 새로운 황제가 즉위한다. 태왕은 즉시 그에게 사신을 보냈다. 그는 고운(高雲, 북연 1대 황제). 삼국사기는 그가 고구려 계통에 인물이라고 적고 있다. 342년 전년에 끌려갔던 고구려인의 포로 후예가 북연의 황제가 된 것이다. 태왕은 북연을 같은 민족의 나라로 받아들였다. 이로써 적의 나라였던 후연은 고구려의 우방이 됐다. 태왕의 정복은 계속 됐다.
“태왕께서 공격해서 깨뜨린 성이 64개 마을이 1400개 였다.” - 호태왕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복자, 그에게도 최후가 왔다.
“내가 죽고 만년 뒤까지 나의 무덤을 편안히 지키는 일에는 오직 내가 몸소 다니며 공략하여 데려온 한인(韓人)과 예인(穢人)들만을 시키도록 하라.” - 호태왕비
그가 말한 한인은 삼한지역에 살던 백제와 신라, 가야의 사람, 예인은 동해안 일대에 살던 주민들을 말한다. 그는 자신이 정복한 한반도 중남부 지방의 모든 주민들을 고구려의 백성으로 감싸 안으려 했다.
조법종 교수 “언어적으로 동일해야 되고 문화적으로 동일해야 되고 정치, 역사적으로 운명 공동체라는 것을 반영하는 것 같습니다. 즉 이제 새롭게 들어온 ‘한예(韓穢)’는 새로운 고구려의 국민으로서 고구려와 함께 할 하나의 운명 공동체로서 하나의 새로운 민족을 이룬 것이고...”
광개토태왕이 그렸던 새로운 고구려. 그것은 오늘날의 한민족이었다. 충주 고구려 비에 그가 바랐던 한민족의 미래가 그려져 있다.
양기석 교수 / 충북대학교 역사교육과 “실제 광개토태왕이 생각했던 큰 꿈이란 것은 영토적 지배, 영토적 야욕에 있었던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동북아시아, 좁혀서는 한반도 내의 여러 정치 체제와 종족들이 고구려 중심으로 각 종족과 나라가 공동(共同)의 번영(繁榮)과 안정(安定)을 추구하는 이런 측면에서 광개토태왕의 혜안(慧眼)을 찾아볼 수 있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한반도와 만주, 연해주, 중원을 넘나들며 동아시아에 걸친 대제국을 완성한 광개토태왕. 그가 넓히고자 한 것은 영토가 아니었다. 사해(四海)의 백성들을 아우르는 고구려의 질서. 한민족이 이룩한 평화 속에서 모든 사람들이 행복을 누리기를 소망했다. 그것이 그가 바라던 대제국 고구려. 고구려에 의한 평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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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책을 벗 삼아 원문보기 글쓴이: 문화재지기
님들은 그럼 얼마나 똑똑하길래 역사스페셜도 비판할수있는지 궁금하네요 하히해 이사람은 별아는거 없이 빈정거리기만 하고 있구만 같은편인가?ㅋㅋ
아싸아싸//여긴 그렇게 인기있다던 로마인이야기와 먼나라이웃나라도 까는 곳입니다. 역사스페셜도 유인촌이 나왔던때는 몰라도 요즘건 별로더이다.
역사스페셜 따위는 대학생들이 사학관련 교양수업만 들어도 발라버릴 수 있습니다. 사학과 교수들이 역사스페셜 틀어주면서 구절 하나하나까지 몽땅 반박하던게 생각나네요. 이덕일 같은 책장사꾼의 말도 잘 들어주는게 역사스페셜입니다. a라는 기록물에 1이라는 기록과 2라는 기록이 있는데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1이라는 기록을 사옹하면서 2라는 자기 주장에 반하는 기록은 슬그머니 언급조차도 안하는게 역사스페셜의 만행이죠. 하는 짓거리 보면 솔직히 일본 역사왜곡과 다를바 없습니다. 실컷 현지 가서 답사하고 문화재 분석하고 하더니 엉뚱한 결론 내는거 보면 거기에 들인 시간과 비용이 정말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야말로 돼지목에 진주라고 할 정도로 아깝죠. 저런 헛된 결론 내는데 쓰인 시간과 비용으로 차라리 제대로 연구나 하던가. 주제 정해놓고 냅다 이래저래 과정을 끼워맞추고 결론을 내버리니 당연히 왜곡이 생길수밖에 없죠.
역스하니까 생각나는게 제가 무등리에서 발굴할 때 갑주가 나와서 역스팀이 촬영하고 인터뷰하는데... 아놔 자기들 좋은 부분만 인용하는 것을 보면서 ㅋㅋ 심지어 교수님과 선배님들은 역스팀이 같이 점심먹자고 하니까 거절했었죠 ㅋㅋ
참 내가 처음인가 모르겠지만 괜찮은 글같아 올려 봤는데 댓글달아논게 웃겨서 댓글놀이 하고 갑니다 수준높으신분들 앞에서 찌그러져 있어야 겠네요 하이애나 떼도 아니고ㅉㅉㅉ
삭제된 댓글 입니다.
퍼온 글을 까면 자기를 까는 줄 아는 흔한 착각...
아싸 아싸님을 깐사람 한명도 없어요
이글을 깟지
아하스페르츠//
...여기서 퍼온 글중에 까일만한 내용이 있으면 이제껏 글쓴이를 까지 않았나요
...퍼온 사람을 깐 것은 보질 못했는데....그럼 혹시 저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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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Q라는 판단은 들지 않으니 손대지 않겠슴메요.
22.
역사를 한 학문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는 일반인들과 여론, 언론들이 가지기가 참 힘든데, 저분도 단지 그런 분들중 하나일뿐이란 생각이 듭니다. 고구려마져 없었으면 암울하지 않았겠냐는 말을 보면, 저분이 제국주의자라기보단, 역사를 학문으로 보지 못하는 일반인의 한계를 가지신것일뿐이라 생각이 되네요.
3333 하복님 의견에 동의... 그런 의미에서 너무 공격적으로 깔 필요는 없다고 생각. 물론 대부분의 댓글들은 합당하다고 보지만, 예민하고 공격적인 부분이 없다고는 못 하겠네요.
태평성대는 조선시대가 甲 200년간 번영을 누리고 전란후에 또 200년을 번영했으니
민족주의 사관이 왜 무서운지 알 수 있죠. 역사에 애국심이 들어가버리면 라면에 냅다 짜장소스 들이부은 것 처럼 완전 다르게 변해버리니...
그리고 삼국사기에 언제부터 광개토왕을 태왕으로 불렀던가.... 기록 구절을 인용할려면 최소한 있는 그대로 번역하는게 당연한 도리 아님? 왜 삼국사기 구절 인용하는 것조차도 지들 입맛에 맞게 왜곡질인지 모르겠군요. 삼국사기 기록에는 태왕이라는 구절은 하나도 없는데
그게 pax인가요? ㅋㅋ evil empire 고구려라고 하는게 더 어울릴듯. 동예멸망, 옥저멸망, 그리고 남하해서 백제수도 홀라당 불태우고, 한반도 남동쪽 최말단 촌구석까지 들어가서 드잡이질, 가야병신 만들고, puppet 신라왕내세웠는데, 신라가 각성해서 ㅈ to the ㅁ.
그 [한반도 토착집단]이라는 것의 범위가 대체 뭐유?!...^^;
사실 그딴건 없죠. 말실수;;
하기사 환단고기도 방영했던 역사스페셜인데말이죠
아니 걍 대놓고 '우리도 강건 병영국가를 가져본 적 있어서 자랑스럽다' 라고 하면 될 걸 뻔한 침략활동을 '사실 고구려는 평화를 위해 어쩌구 저쩌구' 로 포장은 왜 해야 하나요;
여기도 인식수준이 딱 역개루 같은 곳이네. 패배 사관. 그걸 학문이라고 믿고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