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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불할 생각도 없는데, 극락에는 왜 가려고 하십니까?
무주상추천 0조회 5826.10.16 22:30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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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은 ‘서쪽의 낙원’이 아니라, 부처가 되기 위해 수행하기 가장 좋은 곳입니다. 극락에 가면 뭐 하고 싶으세요? 고생도 없고, 걱정도 없고, 아픈 데도 없이 편안하게 살고 싶으신가요?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극락에 대해서 중요한 것을 놓치고 계신지도 모릅니다. 큰스님께서는 이날 법문에서 극락을 영어로 Western Paradise 라고 번역한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우리말로 하면 ‘서쪽의 낙원’입니다. ‘낙원’이라고 하면 어떤 곳이 떠오릅니까? 아무 걱정도 없고, 고생할 일도 없고, 부족한 것도 없이 편안하게 행복을 누리는 곳. 그런데 큰스님께서 말씀하신 극락은 그런 의미에 머무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극락은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 지극히 잘 갖추어진 곳입니다. 공부하기 좋고, 수행하기 좋고, 마침내 부처가 되기에 가장 좋은 조건과 환경이 갖추어진 곳입니다. 그렇다면 질문이 달라집니다. 나는 왜 극락에 가고 싶은가? 그리고 그 질문은 결국 더 근본적인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나는 왜 아미타불을 부르고, 왜 마음을 닦고 있는가? 큰스님의 이날 법문은 바로 그 이야기였습니다. 큰스님의 법문 01. 같은 트로트도 나이가 들면 다르게 들립니다 큰스님께서는 종교에는 반복이 중요하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트로트를 예로 드셨습니다. 젊은 시절에 듣고 부르던 트로트와 나이가 들어서 듣고 부르는 트로트는 노래도 같고 가사도 같습니다. 그런데 느낌은 전혀 다릅니다. 노래가 달라진 것이 아닙니다. 내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불교도 마찬가지라고 하셨습니다. 똑같은 법문을 듣고, 똑같이 아미타불을 염불하더라도 내면의 공덕을 쌓기 전과 내면의 공덕을 쌓아가면서 받아들이는 것은 다릅니다. 그래서 종교에는 반복이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아미타불 염불을 반복하고, 아미타불의 사상과 신앙을 반복해서 실천해 나가는 것입니다. 02. 그런데 우리는 왜 마음을 닦습니까? 여기서 큰스님의 법문이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큰스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본성은 지혜와 복덕이 완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현재 우리의 마음은 무지와 죄업에 덮여 있고, 복덕과 지혜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본래 없었던 지혜와 복덕을 새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 갖추고 있는데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03. 본래 부잣집 사람이 길을 잃었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이것을 아주 재미있게 비유하셨습니다. 원래 아주 부유한 집에서 살던 사람이 있습니다. 집에는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복덕과 지혜를 모두 갖추고 잘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정신이 이상해져 집을 나왔습니다. 자기 집이 어디인지도 잊어버리고 이 마을 저 마을을 떠돌아다닙니다. 수많은 세월을 길거리에서 떠돌다 보니 제대로 씻지도 못했습니다. 옷도 더러워지고 몸도 엉망이 되었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지금 중생의 상태가 이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본래 지혜와 복덕을 갖추고 있는데 그것을 잊어버리고 사바세계를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본래 가진 것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04. 보석이 오물에 덮였다고 보석이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큰스님께서는 또 다른 비유를 드셨습니다. 아름다운 보석 하나가 굴러 떨어져 오물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여기저기 부딪히고 굴러다니면서 계속 오물이 달라붙었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보석이 가지고 있던 영롱함도 보이지 않습니다. 겉으로 봐서는 그것이 귀한 보석인지조차 알 수 없습니다. 완전히 오물 덩어리가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보석이 없어진 것일까요? 아닙니다. 보석은 그대로 있습니다. 다만 오물에 덮여 있을 뿐입니다. 큰스님께서는 우리의 마음도 이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본성은 남아 있는데 기능이 죽어 있습니다. 지혜의 기능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복덕의 기능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삶이 힘들어집니다. 그렇다면 해야 할 일은 밖에서 새로운 보석을 가져오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보석을 덮고 있는 오물을 닦아내는 것입니다. 05. 집과 몸은 닦으면서 왜 마음은 닦지 않을까요? 큰스님께서는 청소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사람은 자기 집을 청소합니다. 공항이나 기차역처럼 많은 사람이 이용하는 곳은 하루 종일 끊임없이 청소합니다. 집만 닦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은 평생 자기 몸을 닦습니다. 씻고, 가꾸고, 병이 나면 치료하고, 건강을 유지하려고 애씁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들어갑니다. 몸의 주인인 마음을 닦습니다. 그렇다면 불자는 이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 마음을 닦습니까?” 우리 마음의 본성에는 지혜와 복덕이 갖추어져 있는데 지금은 무지와 죄업에 덮여 있기 때문입니다. 수행은 밖에 있는 무엇을 가져다가 내 안에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덮고 있는 것을 걷어내어 본래의 기능을 회복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06. 중생의 삶이 고통스럽다는 데서 불교는 시작합니다 여기서 큰스님의 말씀이 더욱 강해집니다. 큰스님께서는 “중생의 삶이 고달프다는 것을 느끼지 않으면 불교를 믿으면 안 돼요. 불교는 거기서부터 시작이에요.” 라고 하셨습니다. 불교는 고통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사는 것이 힘들고, 뜻대로 되지 않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고, 늙고 병들고 죽습니다. 큰스님께서는 바로 이 중생의 고통, 고해(苦海)에서 불교가 시작한다고 하셨습니다. 07. 기도해서 편하게 해주는 것이 불교일까요? 그런데 고통스러워서 절에 온 사람에게 “기도하면 안 힘들게 해주겠다.” “기도하면 행복하게 만들어주겠다.” 고 한다면 어떨까요? 큰스님께서는 아주 역설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겠다는 것은 결국 그 사람에게 불교를 믿을 필요가 없게 만들어주겠다는 말과 같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불교는 “고통이 없게 해드리겠습니다.” 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 고통스러운지를 보게 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큰스님께서는 그 원인을 무지와 죄업에서 찾으셨습니다. 그러니 불교에서 해야 할 일은 고통을 덮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만들어내는 무지와 업을 닦아가는 것입니다. 08. 밖에서 얻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마음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큰스님께서는 세상 사람들도 가만히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무지를 없애기 위해 평생 공부합니다. 배우고, 지식을 쌓고, 능력을 키웁니다. 또 잘살기 위해 평생 돈을 법니다. 복덕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큰스님께서는 그렇게 세상에서 배우고 벌어놓은 것들은 결국 몸과 함께 끝난다고 하셨습니다. 불교에서 하려는 것은 그것과 다릅니다. 밖에 있는 것을 끌어모아 나에게 더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있는 내 마음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지혜와 복덕이 없어서 새로 만들어 넣는 것이 아닙니다. 무지와 업에 덮여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는 지혜와 복덕의 기능을 다시 살리는 것입니다. 09. 혼자 떨어져 있는 물은 썩습니다 큰스님께서는 여기서 물을 비유로 드셨습니다. 물은 세상을 살리는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물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고립되어 고여 있으면 썩을 수 있습니다. 물이 모이고, 흐르기 시작하면 강물이 되고, 강물은 결국 바다를 향해 갑니다. 큰스님께서는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하셨습니다. 자기가 살려면 먼저 물처럼 한곳에 모여야 합니다. 10. 상가에서 힘을 얻어 바다로 갑니다 큰스님께서는 그 한곳을 상가(僧伽)라고 하셨습니다. 수행 공동체입니다. 혼자 흩어져 있지 않고 상가에 모여 힘을 얻습니다. 그리고 다시 흘러갑니다. 연못에서 물길로, 물길에서 강으로, 강에서 마침내 바다로 갑니다. 수행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함께 수행하면서 힘을 얻고 자기가 본래 가야 할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11. 눈을 떠야 갈 길이 보입니다 큰스님께서는 다시 마음의 본성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우리 마음의 본성은 지혜와 복덕을 갖추고 있습니다. 큰스님께서는 그것을 아미타불과 연결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무지와 업에 덮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먼저 덮고 있는 것을 벗겨내야 합니다.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을 벗겨내야 눈이 뜨이고, 눈이 떠져야 갈 길도 보입니다. 큰스님께서는 염불을 이 과정과 연결하셨습니다. 아미타불을 끊임없이 염하는 것은 단순히 소원을 이루기 위한 주문이 아닙니다. 내 마음을 덮고 있는 것을 끊임없이 닦아내고, 눈을 뜨고, 내가 가야 할 길을 볼 수 있도록 하는 수행입니다. 12. 극락을 ‘서쪽의 낙원’으로 알고 있다면 완전히 착각한 것입니다 여기서 큰스님께서는 극락세계 이야기를 꺼내셨습니다. 그날 외국의 불교 책을 하나 보셨는데 극락세계를 이렇게 번역해 놓았다고 하셨습니다. Western Paradise. 우리말로 하면 ‘서쪽의 낙원’입니다. 그런데 큰스님께서는 이 번역을 문제 삼으셨습니다. Paradise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릅니까? 편안하고, 풍족하고, 고생할 필요가 없고, 행복하게 즐기며 사는 곳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극락을 그렇게만 생각한다면 극락에 대해서 완전히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13. 극락은 수행하기 위한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곳입니다 큰스님께서 말씀하신 극락의 의미는 달랐습니다. 극락은 수행하기에 조건이 지극히 좋은 곳입니다. 편안하게 놀기 좋은 곳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행복하게 지내는 곳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공부하고, 수행하고, 마침내 성불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과 환경이 가장 잘 갖추어진 곳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극락왕생의 의미도 완전히 달라집니다. 죽어서 편안하게 살기 위해 가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의 지혜와 복덕을 회복하고 마침내 부처가 되기 위해 수행하러 가는 것입니다. 14. 그렇다면 왜 아미타불을 염합니까? 여기까지 오면 큰스님께서 앞에서 하신 이야기들이 하나로 연결됩니다. 우리는 본래 지혜와 복덕을 갖추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지와 죄업에 덮여 그 기능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닦습니다. 혼자서는 어렵기 때문에 상가에서 함께 수행합니다. 그리고 아미타불을 끊임없이 염하며 마음을 덮고 있는 것을 닦아냅니다. 눈을 떠야 길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길을 따라 수행하기 위한 조건이 가장 잘 갖추어진 극락세계를 향합니다. 목적은 단순한 편안함이 아니라 성불입니다. 15. 불자가 많다고 모두 신행하는 것은 아닙니다 큰스님께서는 불자가 수백만 명이라고 해도 정말 왜 불교를 믿는지 알고, 왜 아미타불을 염하는지 알고, 왜 극락으로 가려고 하는지 알고, 그 길을 실제로 걸어가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믿는다고 말하는 것과 실제로 신행하는 것은 다릅니다. 부처님께서 가르쳐주신 길을 알고, 그 길을 믿고, 실제로 그 길을 걸어가는 것. 그것이 신행입니다. 그래서 염불도 이유를 알고 해야 합니다. 내 눈을 가리고 있는 무지와 업을 닦아내고, 눈을 뜨고, 내가 가야 할 길을 보기 위해 끊임없이 염불하는 것입니다. 16. 명품을 파는 곳은 오히려 조용합니다 큰스님께서는 법문 후반에 다시 재미있는 비유를 드셨습니다. 명품을 파는 곳은 조용하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며 물건을 떨이하는 곳과는 다릅니다. 이 비유를 통해 큰스님께서는 정말 귀한 법과 많은 사람이 몰리는 것은 반드시 같은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마음의 본성에는 지혜와 복덕이 갖추어져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잊은 채 오랜 세월 무지와 업으로 사바세계를 헤매고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중생을 가엾게 보시고 부처님께서 그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 길이 불교입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보여주신 그 길을 믿고 실제로 걸어가는 것이 신행입니다. 17. 먼저 자기 자신에게 감사하십시오 법문의 마지막은 감사 이야기였습니다. 큰스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에게 감사해요.” 전생에 어디에서 어떤 복덕을 지었기에 이번 생에 몸만 닦고 살아가는 것을 넘어 마음까지 닦는 인연을 만났겠느냐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먼저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래야 부처님도 보이고, 불법도 보이고, 스님도 보이고, 절도 보인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나를 정말 소중하게 여긴다면 나를 살려주는 사람이 얼마나 고맙겠습니까. 아플 때 나를 치료해주는 의사가 고맙고, 모르는 것을 가르쳐주는 선생이 고맙고, 나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이 고맙습니다. 마찬가지로 중생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을 보여주신 부처님이 고마워집니다. 그 뜻을 알고 귀의하는 것과 아무 뜻도 모른 채 그저 엎드리는 것은 다릅니다. 큰스님께서는 뜻도 모른 채 하는 것은 맹목적인 신앙이 될 수 있다고 경계하셨습니다. 불교는 결국 왜 마음을 닦는지 알고, 왜 염불하는지 알고, 어디로 가는지 알고, 그 길을 실제로 걸어가는 것. 그것이 신행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법문을 들으며 제가 생각해 본 부분 이번 법문을 들으며 극락을 바라보는 기준이 훨씬 분명해졌습니다. 극락은 죽어서 편안하게 쉬러 가는 ‘서쪽의 낙원’이 아니라, 부처가 되기 위해 수행하는 데 필요한 모든 조건이 지극히 잘 갖추어진 곳이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들으면서 ‘부처 사관학교’라는 표현이 떠올랐습니다. 사관학교는 놀러 가는 곳이 아닙니다. 배우고, 훈련하고, 자신을 단련하기 위해 가는 곳입니다. 극락 역시 그곳의 안락함과 모든 장엄이 중생의 수행과 성불을 돕기 위해 존재한다는 점에서 그렇게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조금 도발적으로 이런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성불에 뜻이 없는 사람에게는 극락이 오히려 지옥입니다. 물론 극락이 실제로 지옥이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쉬러 갔는데 공부하라고 하고, 놀러 갔는데 수행하라고 하고, 욕망을 채우러 갔는데 오히려 그 욕망과 무지부터 닦아내라고 한다면, 그곳이 자신이 기대하던 Paradise일 수 있겠습니까? 다만 성불에 대한 뜻이 아직 부족한 중생도 깨달음으로 이끌어 주는 것이 아미타불의 본원이라는 점은 잊지 않아야겠습니다. 결국 질문은 하나로 모입니다. 나는 극락에 가서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편안하게 살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끝까지 수행해서 성불하고 싶은 것인지. 극락왕생을 발원하기 전에 먼저 이것부터 물어봐야겠습니다. 나는 정말 부처가 되고 싶은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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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어서오세요
벗님을 존경합니다 고맙고 감사합니다.
님께서는 꼭 성불하실 것입니다.
업장은 소멸되고,바른 깨달음얻어지이다.
원공법계제중생 자타일시성불도
나무아미타불 __() __
반가워요
거룩하신 삼보님께 귀의 합니다
일체 중생의행복을 발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