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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 9,1-7; 10,18-22
주님께서는
1 내가 듣는 앞에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이 도성의 징벌이 다가왔다.
저마다 파멸의 무기를 손에 들고 나와라.”
2 그러자 북쪽으로 난 윗대문 쪽에서 여섯 사람이 오는데, 저마다 파괴의 무기를 손에 들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아마포 옷을 입고, 허리에는 서기관 필갑을 차고 있었다.
그들은 이렇게 와서 구리 제단 곁에 섰다.
3 그러자 이스라엘 하느님의 영광이 그때까지 자리 잡고 있던 커룹들 위에서 떠올라 주님의 집 문지방으로 옮겨 갔다.
주님께서는 아마포 옷을 입고 허리에 서기관 필갑을 찬 사람을 부르셨다.
4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저 도성 가운데로, 예루살렘 가운데로 돌아다니면서, 그 안에서 저질러지는 그 모든 역겨운 짓 때문에 탄식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이마에 표를 해 놓아라.”
5 그분께서는 또 내가 듣는 앞에서 다른 이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저 사람의 뒤를 따라 도성을 돌아다니며 쳐 죽여라.
동정하지도 말고 불쌍히 여기지도 마라.
6 늙은이도 젊은이도, 처녀도 어린아이도 아낙네도 다 죽여 없애라.
그러나 이마에 표가 있는 사람은 아무도 건드리지 마라.
내 성전에서부터 시작하여라.”
그러자 그들은 주님의 집 앞에 있는 원로들부터 죽이기 시작하였다.
7 그분께서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 집을 부정하게 만들어라.
그 뜰들을 살해된 자들로 채워라. 가거라.”
그러자 그들은 도성으로 나가서 사람들을 쳐 죽였다.
10,18 주님의 영광이 주님의 집 문지방에서 나와 커룹들 위에 멈추었다.
19 그러자 커룹들은 날개를 펴고, 내가 보는 앞에서 땅에서 치솟았다.
그들이 나갈 때에 바퀴들도 옆에서 함께 나갔다.
그들이 주님의 집 동쪽 대문 어귀에 멈추는데, 이스라엘 하느님의 영광이 그들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20 나는 크바르 강 가에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떠받들고 있는 생물들을 보았다.
나는 그들이 커룹임을 알 수 있었다.
21 그들은 저마다 얼굴이 넷이고 날개도 넷인데, 날개 밑에는 사람의 손 같은 형상이 있었다.
22 또 그들의 얼굴 형상은 내가 크바르 강 가에서 보았던 모습, 바로 그 얼굴이었다.
그들은 저마다 곧장 앞으로 나아갔다.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8,15-20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5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16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17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19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20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잘못한 내 형제에 대해서 포기하고 무관심하고 있지 않는지>
오늘 복음의 앞부분은 교회공동체 안에서의 형제간의 교정에 대한 말씀입니다.
곧 “잘못한 형제를 어떻게 혹은 어떠한 과정을 통해 고쳐주어야 하는가?” 하는 교정 방법과 절차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것을 네 단계로 제시해 줍니다.
첫째는 혼자 단독으로 하는 교정이요, 둘째는 두세 사람이 함께 하는 교정이요, 셋째는 교회를 통한 교정하는 것이요, 넷째는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기는 것을 통한 교정입니다.
이를 베네딕도 성인은 <수도규칙>에서 이렇게 다룹니다.
“우리 주님의 명령에 따라(마태 18,16-17), 그의 장로들이 한두 번 그를 남몰래 훈계할 것이다.
그래도 고치지 않거든 모든 이들 앞에서 공적으로 책벌할 것이다.
만일 이렇게 해서도 고치지 않거든, 파문이 어떤 벌인지를 아는 경우에는 파문에 처할 것이요, 그렇지 못하고 둔한 자일 경우에는 육체의 벌에 처할 것이다.”
(수도규칙 23,2-5)
복음이나 베네딕도 규칙서에서 다 같이 말씀하시는 것은 단지 잘못한 형제에 대한 형식적인 교정 방법이나 절차가 아니라, 오히려 그 안에 스며들어 있는 ‘사랑’과 ‘배려하는 마음’입니다.
곧 서로를 형제요 자신의 일부로 여기는 마음이요, 타인을 ‘남’이라 여기지 않는 마음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몸의 지체라는 사실에서 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교정’은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이거나 처벌을 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형제적 사랑’에서 나오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곧 그가 잘 되기를 바라는 것, 그가 구원받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그의 <규칙서> 4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잘못한 형제를 고쳐주지 않고 내버려 두는 것은 영혼을 죽이는 살인행위와 같다.
왜냐하면 잘못한 형제는 마치 독 있는 뱀에 물린 상태와 같은데, 그 독을 빼내어주지 않고 그대로 나두는 것은 잔인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는 잘못한 형제의 ‘교정’이 지극한 형제적 사랑에서 비롯되어야 함을 말해줍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신의 불편을 제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형제적 사랑 때문에 사랑으로 형제의 잘못을 꾸짖고 교정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형제를 꾸짖거나 교정할 때는 사랑이 아니면 차라리 말아야 할 일입니다.
오직 사랑과 신뢰, 그리고 하느님께 의탁해서 할 일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다섯 번째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사실 이 네 번째까지 이르게 되면, 자포자기 하거나 무관심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때가 잘못한 형제를 위해 '마음을 모아 하느님께 사랑으로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그러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이루어주실 것'(마태 18,19)입니다.
'땅에서 풀어야 하늘에서 풀릴 것이기 때문'(마태 18,18)입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을 모아’ 하느님께 기도하는 일'입니다.
먼저 ‘마음을 모으는 일’이요, 다음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로 청하는 일’입니다.
스스로가 해결사가 되려고 하지 말고, 아버지께 신뢰로 의탁하는 일입니다.
성 베네딕도도 <수도규칙>에서 “(잘못한 형제들에게) 사랑을 더 베풀 것이며, 또 모든 이는 그를 위해 기도할 것”(규칙서 27,4)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있는 공동체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이니,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마태 18,20)
그러니 결코 포기하거나 무관심하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혹 잘못한 내 형제에 대해서 포기하고 무관심하고 있지는 않는지, 혹 사랑이 없어서 그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마태 18,15)
주님!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형제의 잘못을 앞세우기에 앞서 그가 잘 되기를 위해 기도할 줄을 알게 하소서!
그의 잘못이 드러나거든 그에게 더 많은 사랑이 필요함을 알고 힘을 모아 사랑하게 하소서!
그를 돕는 길이 죄를 찾아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데 있음을 알게 하소서.
제 사랑만으로는 안 될 때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주님이신 당신께 의탁할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신의 병보다 영혼의 병을>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마태 18,15-16ㄱ)
어제 복음은 백 마리 양 가운데 길 잃은 한 마리 양의 비유인데,
주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가장 작은 사람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는 말씀으로 끝이 났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우리 형제가 나에게 죄를 짓거든 단둘이 만나서 그를 타이름으로써 그를 죄의 구렁텅이에서 구해주라고 하시고, 그래도 안 되면 둘이 타이르고 최종적으로는 교회에 알려서 고쳐주라 하십니다.
어제 아흔아홉 마리를 놔두고서라도 한 마리를 찾으라고 하심과 같이 한 사람을 구하는 데 온 공동체가 책임을 지라는 것입니다.
저의 아버지는 한 사람이 잘못하면 저의 누나들 모두를 혼내셨답니다.
특히 동생이 잘못했을 때 애꿎게 언니들이 같이 혼났는데, 그것은 언니가 되어 가지고 동생의 잘못을 막지 않은 것 때문이었답니다.
이것은 저의 아버지만 그러신 것이 아닐 것입니다.
옛날 어른들은 거의 모두 이렇게 자녀를 교육했지요.
예를 들어 동생이 누군가에게 맞고 있는데 그것을 본 형이 그런 동생을 놔두고 저 혼자 돌아왔다면, 그 얘기를 들은 어느 부모가 그런 놈을 가만 놔두겠습니까?
제가 아버지라도 그런 놈은 무지막지하게 혼쭐낼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교육을 제대로 받은 보통의 사람이라면 이렇게 위기에 처할 때 모르는 체할 형제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위기에 처할 때 만약 모르는 체한다면, 그것은 무관심하기에 어떻게 되든 관심 없거나, 미움, 질투, 시기 등으로 형제가 잘못되기를 바라거나, 아무튼 사랑하지 않기에 모르는 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영적으로 문제가 있을 경우입니다.
육체적이나 경제적으로 형제가 잘못되었을 경우, 그러니까 형제가 병들거나 부도가 나서 쫄딱 망하게 되었을 경우는 그것을 딱하게 여기고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하는데, 죄를 지을 경우, 특히 나에게 죄를 지을 경우, 이 경우에는 이상하게도 연민을 가지기보다는 분노하고 미워합니다.
사실 육신이 병든 것보다 영혼이 병든 것이 더 불쌍한 것인데도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제 생각에 그것은 죄를 지은 것, 특히 나에게 죄를 지은 것을 영혼의 병이라고 생각지 않기에 불쌍히 여기지 않는 것일 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영혼의 병인 죄를 육신의 병보다 더 안타깝게 생각하고, 더 고쳐주려고 해야 하고,
어떻게든 그러니까 혼자 안 되면 둘이서, 둘이서도 안 되면 공동체적으로 고쳐주려고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거듭 말합니다.
죄도 병입니다.
아니 죄가 더 안타까운 병이고, 죄야말로 신자인 우리가 더 고쳐줘야 할 병입니다.
나한테 죄지은 것이 영혼의 병 때문이라고 이해한다면,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이렇게 인식의 전환이 이뤄진다면,
그의 죄 때문에 같이 미워하고 분노하기보다 안타까워할 것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박해하고 중상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따라서 자기 원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당하는 해(害)로 말미암아 괴로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가슴 태우는 사람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머릿수가 아니라 마음이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사랑은 향기입니다.
아무리 숨겨도 멀리까지 퍼져갑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을 황홀하게 합니다.”
(이규경)
황홀한 사랑에로 열려있기를 바랍니다.
성무일도 기도에 보면, “겹겹이 둘러싸인 어두움 속에 내 마음 거짓으로 가득하오나 하느님 전능으로 다스리시면 내 마음 백옥같이 희어지리다.”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어둠 속에 있다는 것을 알면 빛을 그리워하게 됩니다.
그러나 때로는 어둠 속에 있다는 사실조차 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누군가 그것을 일깨워줘야 합니다.
그래야 그가 바른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른 충고를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칭찬은 달지만, 충고는 한없이 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변의 머릿수가 아니라 마음입니다.
쓰지만 약이 되는 바른 충고를 해 줄 수 있고 또 충고를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소중합니다.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으니 한마음, 한 뜻을 이룰 수 있는 형제가 있다면 기뻐하십시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런 형제가 되어 주십시오.
인간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을 선호하지 말고 “주님의 이름으로” 모두를 품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실 믿는 이들에게 “충고는 하느님의 소리요, 하느님의 뜻”(성녀 안젤라 메리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충고를 한다는 것은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따라서 남을 충고하기 전에 자기 자신에게 충고해서 바꾸고 변화시키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또한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 그것에 대해서도 세심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프란치스코 교황)
공자께서도 “충언은 사람을 바로 서게 한다.”하였습니다.
먼저 주님께서 내 마음을 다스리고 백옥같이 희게 만드시길 기도하면 주님은 그 마음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오늘은 나에게 주어진 쓴소리를 하느님의 소리로 듣기를 희망합니다.
깊은 산길을 가고 있는 사람에게 제일 무서운 것은 마주 오는 사람이랍니다.
그리고 산길을 가고 있는 사람에게 가장 반가운 것 역시 사람이랍니다.
사람이 제일 좋기도 하면서 제일 힘든 존재이기도 합니다.
좋을 때는 더없이 편하지만 틀어지면 그것만큼 불편한 것이 없습니다.
가장 친했던 사람이 가장 어렵고 힘든 사람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자기의 기대가 충족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됩니다.
내 기대와 상대의 바람, 그리고 허물조차 공유할 수 있는 마음이 커졌으면 좋겠습니다.
혹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위해 기도하는 날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진심을 주고받기까지 더 큰 사랑이 필요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면죄부와 대사는 어떻게 다른가?>
오늘 복음은 교회의 권위에 대한 마태오 복음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시며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하늘 나라는 죄와 벌이 모두 사해져야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거든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교회에서 파문 당하면 하늘 나라에서도 파문 당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개신교는 그러나 교회의 이 죄사함과 벌까지 면해주는 권한을 교회에 주었음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며 가톨릭은 돈을 받고 죄를 용서해 준다는 뜻의 ‘면죄부’를 팔아 바티칸 베드로 성당을 지었다고 주장합니다.
우선 교회에 죄와 벌의 모든 용서의 권한이 주어졌음은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쳐주시며 그 치유가 죄의 용서의 권한이 사람에게 주어졌음을 보여주는 표라고 하신 복음으로 알 수 있습니다.
영화 ‘나라야마 무사시코’에서는 고려장과 같이 70세가 넘으면 먹을 것을 줄이기 위해 부모를 산에 버리는 옛 일본 풍습을 보여줍니다.
이 영화에서는 어머니가 아들이 주저하는 것을 보고 일부러 몰래 튼튼한 앞니를 부러뜨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어머니는 가족을 살리기 위해 둘째 아들이 첫 경험을 하는 날 큰아들의 지게에 실려서 산에 오릅니다.
새로 태어나면 누군가 죽어야 하는 상징을 보여줍니다.
마찬가지로 한 일본의 전설에서는 자기 아내를 살리기 위해 노모의 간을 빼서 달리는 아들에게 어머니의 혼령이 나타나 “천천히 가라. 넘어질라.”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부모는 자녀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내어 놓습니다.
하느님도 아드님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맡기셨다는 뜻입니다.
나라야마 무사시코에서는 어머니를 버리고 왔더니 슬퍼하는 기색이 전혀 없이 어머니의 옷을 이미 나누어 걸쳐 입고 있는 가족들을 바라보며 영화가 마무리됩니다.
하느님께서 교회를 낳으셨고 교회를 통해 구원의 백성이 탄생하기를 원하셨다면 ‘다’ 주셨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면죄부는 조금 다른 이야기입니다.
면죄부는 죄를 사해준다는 뜻인데, 죄사함을 돈으로 살 수는 없는 일입니다.
내가 천국에 갈 수 있는데 그 은총을 죄인에게 돈을 받고 팔 수는 없는 일과 같습니다.
죄와 벌은 개인의 몫이기 때문에 돈을 받고 죄를 사해준다는 식의 ‘면죄부’라는 말은 가톨릭에서는 나올 수 없는 말이고 개신교가 만들어낸 말입니다.
그들이 면죄부라고 말하는 단어는 라틴어 ‘은총의 문서’(Litterae indulgentiales)의 번역입니다.
이는 분명 ‘대사’(Indulgentia)와 차이가 있습니다.
대사는 본래 ‘은혜, 자비’의 뜻으로 로마 제국 시대 특별한 날에 이뤄지는 형벌의 사면을 가리키는 법률 용어입니다.
대사는 죄의 용서와는 관계없고 일정한 전제조건(기도와 회개, 성지순례, 자선, 교회에 대한 기부 등)을 채울 때 죄에 대한 보속을 감면하거나 전부 없애주는 은총입니다.
대사는 교회가 죽은 이들의 잠벌을 없애주려는 목적도 있지만, 더 큰 목적은 그것을 위해 노력하는 신앙인의 신심의 발전에 있습니다.
16세기에는 대사 관행이 널리 퍼졌고 종종 남용되었습니다.
일부 성직자, 특히 독일의 요한 테첼(Johann Tetzel)과 같은 인물은 베드로 성전 재건을 명목으로 사람들이 천국에 갈 수 있는 길을 사거나 미래의 죄에 대한 용서를 살 수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방식으로 면죄부를 판매했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의 방침이 아닌 당시 돈으로 잘못을 되갚는 게르만족의 전통과 결합한 잘못된 관행이었습니다.
교회는 트렌트 공의회(1545~1563)에서 공식적으로 은총의 문서 판매를 금지하였고, 1570년에는 대사를 거래하고자 하는 자들을 파문시킨다는 조항을 추가하였습니다.
정리하자면, 하느님께서는 교회에 죄를 용서하는 권한과 벌을 없애주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죄와 벌을 함께 용서해 주지 않는 이유는 죄의 영향을 조금이라도 느껴봐야 죄의 무거움을 느끼고 다시는 죄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다윗이 병적조사를 한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나 흑사병이 들게 하시는 벌은 주셨습니다.
교회가 벌을 사해주는 대사 제도를 시행하는데 은총은 돈을 주고 사고팔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 제도는 결국 신자들의 신심을 높이는 데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저 사람 대신 제가 가겠습니다!>
교도소나 구치소에 갈 때마다 느끼는 안타까운 일이 한가지 있는데, 재소자들의 가슴에는 하나같이 이름 대신 번호가 새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민영 소년 교도소 설립을 꿈꾸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때 만일 꿈이 이루어진다면, 아이들의 가슴에 번호 대신 이름을 달아주고 이름을 불러주자는 안을 내어놓기도 했습니다.
16670번,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님의 번호였습니다.
수용소 안에서 콜베 신부님의 삶과 죽음은 한마디로 무죄한 어린양의 삶과 죽음, 속죄양으로서의 삶과 죽음이었습니다.
죽음의 수용소로 악명 높았던 나찌 수용소 안에서 콜베 신부님은 동료 수감자들에게 마지막 희망이자 위로였습니다.
한 포로가 죽음의 방으로 끌려가며 외쳤습니다.
“내 불쌍한 아내! 내 아이들!”
당시 연병장 내에는 수많은 운동장에 포로들이 서 있었는데, 그중에서 한 말라깽이가 걸어 나오며 외쳤습니다.
“저 사람 대신에 제가 가겠습니다!”
그 한 마디로 인해 콜베 신부는 깊은 지하 감방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당시 열 명의 수감자가 함께 갇혀 있었는데, 물 한잔도 빵 한 조각도 없이 죽음의 순간만을 기다려야만 했던 그곳에서 콜베 신부님의 성덕은 더욱 발휘됩니다.
가장 허약했던 콜베 신부님은 의외로 가장 오래 견딥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오직 한가지였습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인 동료 수감자들을 향한 극진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콜베 신부님은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에 떨던 동료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고 위로의 말을 건넸습니다.
자신의 몸을 추스르기도 힘든 병약했던 콜베 신부님이었지만 마지막까지 살아남아서 기도와 위로 속에 동료들을 떠나보내고 나서 자신도 떠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기적과도 같은 일이 생깁니다.
평소에 배급이라고 받던 빵 조각들도 늘 남들에게 양보해서 가장 체력이 바닥나 있던 콜베 신부님이었지만, 15일간이나 굶주림을 견디면서 동료들의 눈을 모두 감겨줍니다.
끝까지 생존해있는 콜베 신부님을 확인한 나찌들은 신부님에게 탄산 주사를 맞힙니다.
콜베 신부님, 살아 생전부터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과 원죄 없으신 성모님께 온전히 의탁한 투철한 신앙인이었습니다.
신부님의 그러한 신심은 하루하루 피 말리는 수용소 생활 안에서 활짝 꽃 피어났습니다.
그 절망스럽고 고통스러운 수용소 생활 가운데서도 수감자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차라리 죽는 게 더 낫겠다.’는 마음이 들었지만 콜베 신부님을 통해서 다시금 살아갈 힘을 얻곤 했습니다.
콜베 신부님은 공포 속에서 하루하루를 견뎌내던 그들에게 끊임없이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던져주었던 것입니다.
동료 수사들과 함께 나치에 체포된 후 수용소로 향하는 트럭 안에서의 일입니다.
숨 쉴 틈도 없이 끌려가는 사람들로 빽빽했던 트럭 안에서 동료 수사들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기약도 없는 미래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어디로 끌려가는지도 몰랐던 것입니다.
그때 콜베 신부님은 차분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용기를 잃지 마십시오.
우리는 지금 죽으러 가는 길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길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차까지 타면서 가니 이 얼마나 커다란 행운입니까?
여러분, 이제 우리는 가능한 많은 불쌍한 영혼들을 구하기 위해 더 많은 기도를 해야 합니다.
성모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공동체에서는 내 몸이든 형제의 몸이든 모두 내 몸입니다.>
1)
오늘 말씀은 ‘공동체의 형제애 실천’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을 이 말씀에 대한 설명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몸은 한 지체가 아니라 많은 지체로 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각의 지체들을 그 몸에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습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
(1코린 12,14.18.26)
몸의 일부가 병들었다면, 그것은 몸이 병든 것입니다.
손가락도 내 몸이고, 발가락도 내 몸입니다.
어느 지체가 무슨 병에 걸렸든지, 어떻게 얼마나 다쳤든지 간에 그것은 내 몸이 병들거나 다친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애를 실천해야 하는 것은 공동체로서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내 몸이든 형제의 몸이든, 공동체에서는 모두 내 몸이고,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나 자신이 아프기 때문입니다.
내 몸에 병이 들었거나 어딘가를 다쳤다면, 가장 먼저 나 자신이 치료를 하려고 애를 쓰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9) 라는 계명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이 계명은 “네 이웃은 너 자신이니 당연히 사랑해야 한다.” 라는 계명입니다.>
2)
예수님 말씀에서,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이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네 형제가 죄를 지은 것을 네가 알았거든”입니다.
죄는 하느님께 짓는 것입니다.
만일에 표현되어 있는 그대로 형제가 ‘나에게’ 죄를 지었다면, 그를 용서하거나 처벌하는 일은 나의 권한이 되어버리는데, 우리에게는 용서할 의무만 있을 뿐이고, 다른 사람을 심판하고 처벌하는 권한이 없습니다.
그 권한은 오직 주님께만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네 형제가 주님께 죄를 지은 것을 네가 알았거든”으로 읽는 것이 옳습니다.
단둘이 만나든지,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만나든지 간에, 죄를 지은 형제를 타이르는 것은 “나는 의인이고, 그는 죄인이니까, 의인으로서 죄인을 타이른다.” 라는 생각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 ‘같은 죄인’으로서 함께 회개하자고 권고하는 일입니다.
“너, 회개하여라.”가 아니라, “우리 함께 회개하자.”입니다.
3)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라는 말씀은 개인적으로, 또는 사적으로 노력해도 성과가 없다면, 공적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하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자기 혼자서 자기 몸을 치료하려고 애써도 소용이 없어서 병원에 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순서의 문제가 아니라 일의 경중에 관한 문제입니다.
작은 상처라면 병원에 가지 않아도 되지만, 반드시 병원에 가야 하는 큰 부상이나 큰 병이 있습니다.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는 “파문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교회의 ‘파문’은 ‘최종 선고’가 아닙니다.
파문은 영구 추방이 아니라 죄인을 회개시키기 위한 방법일 뿐입니다.
따라서 파문당한 죄인이 진심으로 회개한다면, 교회는 그를 다시 받아주게 됩니다.
4)
‘공동체’, 또는 ‘형제애’ 라는 말 때문에 무의식중에 ‘남의 일’로 여길 때가 많은데, 만일에 죄를 지은 그 사람이 ‘내가 정말로 사랑하는 나의 부모’라면?
또는 ‘내가 정말로 사랑하는 나의 자녀’ 라면?
그러면 예수님 말씀이 완전히 새롭게 다가오게 됩니다.
사랑하는 나의 부모나 자녀나 연인이 죄를 지어서 주님의 심판을 받고 지옥에 가는 것을 본다면?
그런 일을 보면서, 죄인의 심판이 이루어짐으로써 주님의 정의가 실현되었다고 기뻐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이 그렇게 되는 것을 크게 슬퍼하고, 안타까워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하늘나라는 ‘슬퍼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나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늘나라 자체는 ‘지극히 행복한 나라’인데, 그 나라에 함께 들어오지 못하고 지옥으로 떨어진 가족들을 생각하면서 슬퍼하는 사람들 때문에 ‘지극히 슬픈 나라’가 되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나중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지금의 나를 보면서 또 우리를 보면서, 하늘나라의 성인 성녀들과 가족들이 몹시 슬퍼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 교회 공동체의 영원한 스승 - “그리스도 주 예수님”>
“찬양하라, 주님을 섬기는 자들아,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라
이제부터 영원까지 찬미하라, 주의 이름”
(시편 113,1-2)
오늘 화답송 시편이 좋습니다.
하느님 찬양으로 하루를 시작함이 축복입니다.
오늘 역시 옛 어른의 말씀부터 소개합니다.
“배움이란 눈으로 읽어 머리에 채우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전해 받아 삶에 새기는 것이다.”
<다산>
“스승의 가르침에 제자는 공손한 태도와 겸허한 마음으로 극진하게 배워야 한다.
선한 것을 보면 따르고 의로운 일을 들으면 실행해야 한다.”
<관자>
우리의 평생 삶에 보고 배울 스승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참으로 감사하게도 우리에게는 영원한 평생 스승이자 주님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 계십니다.
저 역시 날마다 평생 스승이자 주님이신 예수님으로부터 겸손히 배우는 마음으로 강론을 씁니다.
늘 우리와 함께 계신 주님이자 스승이신 주님이신 예수님은 그날 말씀을 중심으로 우리에게 가르침과 깨우침을 주십니다.
평생교육에 매일미사보다 더 좋고 유익한 수행은 없다는 것이 우리 가톨릭 신자들의 자랑입니다.
또 우리가 배울 분들은 무궁무진합니다.
영원한 스승이자 주님을 따르고 배웠던 교회 역사상 모든 성인들 역시 우리의 스승이 됩니다.
평생 영원한 스승이신 주님을 따르는 데 이정표가 되고 삶의 좌표가 되는 성인들입니다.
또 깨어 눈만 열리면 삶의 스승은 곳곳에서 만납니다.
저에게는 요즘 저녁부터 밤새 피었다 다음날 오전 해뜰 때 까지 만개한 들꽃 달맞이꽃들도 삶의 스승이 됩니다.
“밤새 깨어 님 기다리던 달맞이꽃 청초한 사랑!
축복인사 받으시고 오늘도 힘내시고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이른 새벽 수도원 산책하며 기도중 찍은 활짝 핀 달맞이꽃 사진과 함께 지인에게 보낸 메시지의 내용입니다.
밤에도 깨어 살라는 가르침을 주는 달맞이꽃들입니다.
아주 오래전 써놨던 시 두 편도 떠오릅니다.
“당신께 맺혀있는 이슬방울되어
영롱하게 깨어 살다가
흔적없이 사라지는 인생이고 싶다”
<2000.8.6.>
“풀잎들 밤새 별꿈 꾸며
뒤척이며 잠못 이루더니
아침 풀잎마다 맺힌 영롱한 별무리 이슬방울들”
<2000.10.1.>
24년 전 여기 수도원 산책 중 깨달음과 더불어 선물처럼 주어진 시입니다.
평범한 일상의 자연도 저에게는 참 좋은 삶의 스승이 됩니다.
오늘은 1941년 8월14일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순교한, 만47세로 삶을 마감한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기념일입니다.
생전에 “성모승천대축일에 죽고 싶다.”라고 말했던 그의 소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새삼 성인들의 순교날은 동시에 삶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의 천상탄일이라는 사실이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그러니 죽음은 동시에 천상탄일의 축제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성 마리아 콜베 사제는 아마추어 무전사, 양심수, 정치범, 수감인, 가정, 언론인, 기자, 약물중독자, 낙태 근절 운동의 수호성인이기도 합니다.
죄수번호 16670 숫자가 적힌 죄수복을 입은 그의 순교 직전의 일화는 늘 들어도 감동입니다.
한명의 죄수가 탈출하여 이에 대한 벌로 차출되어 죽게 되자 폴란드 출신의 병사 ‘프란치셰코 가조우니체크’는 “내 아내, 내 아이들, 그들은 어떻게 될까?” 울부짖을 때 콜베 사제가 나선 것입니다.
“나는 가톨릭 사제이다.
나는 그사람을 위해 죽고 싶다.
나는 늙었다.
그는 부인과 아이들이 있다.”
젊은 병사를 대신하여 성인은 순교했고, 기사 회생한 가조우니체크는 1995년 3월 13일 사망합니다.
그러니까 콜베 성인 순교 후 53년 동안 살다가 95세 천수를 누리고 산 것입니다.
그는 살아서 1982년 10월10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한 성인의 시성식에 참석하였고,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해집니다.
“나는 폐에 숨이 붙어있는 한, 막시밀리안 콜베의 영웅적 사랑의 행위에 대해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을 자신의 의무로 여기고 살아 왔고 또 그렇게 살 것이다.”
오늘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도 좋은 깨우침이 됩니다.
제1독서 에제키엘서 9장과 10장은 참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9장이 우상숭배자들의 비참한 죽음을 소개하는 반면 10장은 주님의 영광이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는 장면입니다.
에제키엘 예언자가 환시를 통해 본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회개하지 않고 죄중에 살아갈 때 주님의 영광도 떠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주님이 떠난, 희망도 빛도 평화도 사라진 그 자리는 그대로 지옥일 것입니다.
새삼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신 기도와 회개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함께 가는 끊임없는 회개입니다.
기도와 회개는 끝이 없습니다.
살아 있는 그날까지, 죽는 그날까지 계속되어야 할 기도와 회개의 삶입니다.
혼자서의 기도보다 더 중요한 것이 공동체의 기도입니다.
공동체가 얼마나 중요한지 요즘 시찰을 앞둔 설문지만 봐도 담박 들어납니다.
“1. 공동체 생활, 2. 공동체의 리더십, 3. 공동체의 일, 4. 공동체의 미래”에 따른 모든 항목들마다 공동체가 반드시 붙습니다.
새삼 우리의 삶은 ‘더불어의 여정’임을 깨닫게 됩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말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교회 공동체와 함께 할 때 제일 안전하고 튼튼하며 또 멀리 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고마운 가르침을 주십니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함께 마음을 모아 기도하면 아버지께서 들어주신다 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공동체일 때 앞서 복음에서처럼 죄를 지은 형제의 교정도 훨씬 수월해질 것입니다.
형제가 죄를 지었을 경우 공동체의 배려가 참 섬세합니다.
끝까지 화해와 치유를 위해 온갖 최선의 노력을 다 할 수 있음도 공동기도의 위력임을 봅니다.
아주 예전 ‘교정이 없는 공동체는 약한 공동체’라는 장상의 말도 있지 못합니다.
기도하는 땅의 공동체는 하늘에 그대로 연결되었음을 봅니다.
‘너희’가 가리키는 바 교회 공동체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눈들면 기도하라 하늘이요 땅과 하늘을 하나로 연결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하늘과 땅은 교회 공동체의 기도를 통해 하나로 연결되었음을 봅니다.
땅의 교회 공동체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여 있을 것이고, 땅의 교회 공동체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 하니, 한마음으로 땅에서 바치는 교회 공동체의 기도가 공동체의 화해와 일치, 그리고 하늘과 땅의 소통에 얼마나 절대적인지 깨닫습니다.
사실 이런 공동 전례기도 은총 없이 교회공동체의 일치는 불가능합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살아가는 우리 교회 공동체요 우리 각자의 인생입니다.
“해 뜨는 데서부터 해 지는 데까지,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시편 113,3)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의지’>
신문사에 있을 때입니다.
제게 가장 중요한 일은 구독자를 늘리는 거였습니다.
구독자를 늘리기 위해서 본당을 찾아가서 홍보하였습니다.
홍보하면서 교우들에게 창세기의 이야기를 하곤 했습니다.
하느님께서 타락한 소돔과 고모라를 벌하시려고 했을 때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 이렇게 청하였습니다.
"하느님, 저 도시에 선한 사람이 50명만 있어도 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50명만 있어도 벌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50명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점점 숫자를 줄여서 이야기 했습니다.
45명, 40명, 30명, 20명, 10명까지 내려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10명을 봐서라도 벌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신문 구독자가 50명만 넘으면 좋겠다고 부탁하였습니다.
정 어려우면 40명만 넘어도 좋겠다고 부탁하였습니다.
이렇게 신문 구독자가 있으면 하느님의 축복이 함께 하실 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교우 분들은 저의 이야기를 듣고 기쁘게 구독신청을 하였고, 기부금도 내 주었습니다.
미국에 있는 유일한 가톨릭 신문이라고 하면서 도움을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5년 동안 팬데믹도 있었지만 그래도 임기를 무사히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후임 신부님이 10월에 신문홍보를 위해서 온다고 합니다.
저도 50명은 넘을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입니다.
선하고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그런데 밀밭에 가라지가 자라듯이, 이 선하고 아름다운 세상에 ‘악’이 들어왔습니다.
교회는 그 악을 죄의 뿌리라고 합니다.
죄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이 하느님과 멀어지려고 하는 성향입니다.
죄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의지’의 결과입니다.
자유의지는 두 가지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하느님을 찬양하며,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방향이 있습니다.
그것이 문화, 문명, 예술이 됩니다.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방향이 있습니다.
그것이 전쟁, 폭력, 야만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처럼 이 세상을 벌하지 않으시는 것은 선한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들이 하느님께 돌아올 수 있도록 기다리시기 때문입니다.
살신성인으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몰로카이의 다미안 신부님은 나병환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였고, 본인도 나병환자가 되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자신을 저격한 청년을 찾아가서 용서하였습니다.
이태석 신부님은 아프리카 수단에서 선교하였습니다.
신부님의 삶을 기록한 ‘울지마 톤즈’는 씨앗이 되어 많은 학생이 사제의 길을 가도록 이끌었습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콜베 신부님은 죽어야 할 사람을 대신해서 죽음을 선택하였습니다.
1982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그를 ‘자비의 순교자’라 부르며 시성하였습니다.
신부님은 포로수용소의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였습니다.
죽음의 공포를 넘어 희망을 전하였습니다.
신부님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가셨고, 천국에서 빛나는 신앙이 별이 되셨습니다.
신부님은 이웃을 위해서 대신 죽음을 선택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명하는 것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벗이 된다.”
콜베 신부님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우리의 현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다르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욕망이라는 열쇠를 굳게 쥐고 있습니다.
교만이라는 열쇠를 굳게 쥐고 있습니다.
시기와 질투라는 열쇠를 굳게 쥐고 있습니다.
그런 열쇠로 세상의 문은 열 수 있겠지만 천국의 문을 열 수 없습니다.
우리의 욕망은 지구를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많은 생명을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병들어 가는 지구에서는 인간 역시 병들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나 자신을 위해서 계획한 것들, 생각한 것들을 실천하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잘못한 사람도 구원에서 제외될 수 없습니다>
어떤 직무를 맡는 도중 극심한 육체적, 정신적 피로를 느끼고 직무에서 오는 열정과 성취감을 잃어버리는 증상, 곧 정신적 탈진을 소위 ‘번 아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서 번 아웃을 가장 많이 겪는 직업군 1순위는 무엇일까요?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밖에 없는 서비스업 종사자일까요?
아니면 잠도 자지 않고 연구에 몰두하는 전문직에 있는 사람들일까요?
또 일의 강도가 심한 육체적 노동을 하는 사람일까요?
모두 아니었습니다.
놀랍게도 전업주부라고 합니다.
이상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전업주부는 자기가 일의 강도와 시간을 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번 아웃은 일의 강도와 시간에 비례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노동량에 따른 보상 정도에 따라 번 아웃이 온다는 것입니다.
주부는 노동량 대비 보상이 가장 적은 집단이었습니다.
보상은 단순히 급여의 많고 적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누군가로부터 인정받을 때, 일에서의 느끼는 보람을 느낄 때 보상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는 우리 삶에서 누군가에게 충분히 힘이 되어 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말과 행동을 통해 얼마든지 힘이 되어 주고, 이에 따라 자기 역시 다른 이에게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외로운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그만큼 우리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외로운 사람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어떠했을까요?
나와 맞지 않는다고 사랑을 거둬들이고, 나에게 상처를 준다고 해서 단절을 해버리고, 나보다 뛰어나다면 어떻게든 깎아내리려고 힘을 쓰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구원되기를 원하셨던 예수님의 마음을 떠올려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잘못한 형제자매를 고쳐 주려고 서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올바르고 지혜롭게 그를 바로잡아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혼자보다 둘이나 세 사람이라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음을 합해서 기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잘못했다고 거부하는 사랑이 아니라, 언제나 함께 하는 사랑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잘못한 사람도 구원에서 제외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외로운 사람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쉽지 않은 우리의 결정이고, 또 잘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완벽한 사랑을 기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잘 아시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려는 우리의 노력에 큰 박수로 응원해 주실 것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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