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독서
▥ 요한 묵시록의 말씀 11,19ㄱ; 12,1-6ㄱㄷ.10ㄱㄴㄷ
19 하늘에 있는 하느님의 성전이 열리고 성전 안에 있는 하느님의 계약 궤가 나타났습니다.
12,1 그리고 하늘에 큰 표징이 나타났습니다.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이 나타난 것입니다.
2 그 여인은 아기를 배고 있었는데, 해산의 진통과 괴로움으로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3 또 다른 표징이 하늘에 나타났습니다.
크고 붉은 용인데, 머리가 일곱이고 뿔이 열이었으며 일곱 머리에는 모두 작은 관을 쓰고 있었습니다.
4 용의 꼬리가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휩쓸어 땅으로 내던졌습니다.
그 용은 여인이 해산하기만 하면 아이를 삼켜 버리려고, 이제 막 해산하려는 그 여인 앞에 지켜 서 있었습니다.
5 이윽고 여인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사내아이는 쇠지팡이로 모든 민족들을 다스릴 분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의 아이가 하느님께로, 그분의 어좌로 들어 올려졌습니다.
6 여인은 광야로 달아났습니다.
거기에는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처소가 있었습니다.
10 그때에 나는 하늘에서 큰 목소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제 우리 하느님의 구원과 권능과 나라와 그분께서 세우신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다.”
제2독서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 15,20-27ㄱ
형제 여러분,
20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
21 죽음이 한 사람을 통하여 왔으므로 부활도 한 사람을 통하여 온 것입니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입니다.
23 그러나 각각 차례가 있습니다.
맏물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다음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그분께 속한 이들입니다.
24 그러고는 종말입니다.
그때에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권세와 모든 권력과 권능을 파멸시키시고 나서 나라를 하느님 아버지께 넘겨드리실 것입니다.
25 하느님께서 모든 원수를 그리스도의 발아래 잡아다 놓으실 때까지는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셔야 합니다.
26 마지막으로 파멸되어야 하는 원수는 죽음입니다.
27 사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그의 발아래 굴복시키셨습니다.”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1,39-56
39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40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42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43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44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45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46 그러자 마리아가 말하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47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48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49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50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51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52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53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54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55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56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혁명의 노래>
오늘은 성모승천 대축일임과 동시에 우리 민족의 기쁨인 광복절이기도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성모송에 언급되고 있듯이, '은총이 가득 하신 분', 곧 참으로 복되신 분이셨습니다.
‘은총이 가득하다는 것’은 축복의 풍요로움과 구원의 완성을 말해줍니다.
사실 마리아는 구세주를 낳아 인류를 구원하는 계기를 마련하셨으며, 그러기에 하느님의 가장 완전한 구원의 도구가 되셨습니다.
또한 단순히 예수님을 낳으신 어머니라는 혈연의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오늘 복음에서 엘리사벳이 칭송하고 있듯이, '하느님의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던' 신앙의 여인이었기에 행복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보면, 참으로 기구한 운명의 여인이요, 비운의 어머니셨습니다.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 시골 처녀로 어린 아기를 안고 피난길에 올라야 했고, 뼈를 깎는 가슴 아픈 예고를 들어야 했던 어머니였습니다.
어린 아들을 잃고 3일 동안 애태웠고, 아들 예수에게 문전 박대를 당했고, 아들이 십자가형에 처형당하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고, 아들의 시신을 끌어안고 울부짖었던 어머니셨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십자가상에서 죽으시고 묻히셨지만 부활하실 것을 믿으셨으니, 이 부활이 바로 구원의 완성이요, 우리의 희망이요 기쁨입니다.
분명 성모님께서는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시기 위해 하느님의 특별한 배려로 원죄의 물듦이 없이 출생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원죄의 결과로 갖게 되는 죽음이 없이 곧바로 승천하여 하느님께로 가심은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셨습니다.
그러기에 원죄 없으신 잉태가 진정 성모님께 베풀어진 자비라면, 이제 성모님의 승천은 온 이스라엘에게 베풀어진 자비입니다.
이토록 성모님의 승천은 우리의 삶과 미래가 하느님 안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입은 우리 모두가 성모님같이 영광을 입은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성모님의 노래'를 들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자신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자비와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구원을 노래합니다.
이는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 안에 살아 있다는 노래요, 동시에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의 삶을 바꾼다는 혁명의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우리 안에서 큰일을 이루시는 주님을 찬미합니다.
욥처럼 우리 안에서 그분께서 이루신 '측량할 수 없이 큰 일, 헤아릴 수 없이 놀라운 일'(욥 5, 9)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사부 베네딕도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 자신 안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을 찬미'(규칙서 머리말 30절)하는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우리 안에서 이루신 측량할 수 없이 큰 일, 헤아릴 수 없이 놀라운 일들을 찬미합니다.
당신께서 우리 안에 살아계시고 활동하심을 찬미합니다.
우리가 당신의 자비를 입은 존재요, 우리의 삶이 당신 안에 있음을 찬미합니다.
당신과 함께 저희에게 영광을 입혀주심에 찬미합니다.
복되신 성모님과 함께 우리 주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
오늘 우리는 성모님의 승천과 함께 우리 민족에게 베풀어진 기쁨인 광복을 기념합니다.
이 광복이 바로 우리에게 베풀어진 성모님을 통한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마치 제1차 세계대전이 파티마 성모님의 전구로 종결되었듯이,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동란 역시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님의 승천대축일에 종결되었습니다.
그러니 오늘은 우리 안에 베풀어진 하느님의 자비와 축복을 찬미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또한 오늘은 해방의 기쁜 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남북이 분단된 불행한 날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도 형제적 화해와 평화를 이루지 못한 채, 많은 이들이 동포요 형제를 적으로 여기고 대적하며, 여전히 편협하고 경직된 사고로 살고 있습니다.
이제는 평화를 원하고, 연대와 협력과 대화의 시대를 열어가야 할 때입니다.
상대방을 굴복시키려 하거나 내 편으로 변화시키려 하기보다, 상대방의 고통과 어려움에 공감하고 연민으로 다가가야 할 때입니다.
오늘 성모승천 대축일에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님께 특별히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루카 1,54)
주님!
제 안에서 활동하시는 당신을 찬미합니다.
제 안에 베푸신 헤아릴 수 없이 놀라운 당신의 자비를 찬미합니다.
오, 주님!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여 찬미하는 일이 제 삶의 전부가 되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자비의 노래 외엔 아무 것도 아니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은총으로, 은총으로, 은총으로>
“아들을 낳으실 때 아무 흠 없이 동정성을 간직하신 그분께서 사후 당신의 육신을 아무 부패 없이 간직하셔야 마땅했다.
태중에 창조주를 모셨던 그분은 하느님의 집에 거처하셔야 마땅했다.
성부의 정배가 되신 성모님께서는 하늘의 신방에 거처하셔야 마땅했다.”
성모 승천 교리를 믿을 교리가 되게 한 다마스쿠스의 요한의 이 선언은
흠 없이 주님을 낳으신 마리아가 부패 없이 승천해야 함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이 말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원죄 없이 잉태되시고 흠 없이 잉태하신 마리아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부패 됨 없이 하늘로 오르시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며,
은총으로 시작하신 주님께서 은총으로 끝맺음도 해주실 것이라는 얘기지요.
사실 오늘 축일의 의미도 마리아가 당신의 능력이나 공로로 하늘에 오르셨음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불러올리셨음을 기념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원죄 없이 잉태되어 나시고, 죽어 부패 없이 하늘에 오르실 때 마리아가 한 것은 없습니다.
적어도 주도적이고 능동적으로 한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해야겠습니다.
그렇다면 마리아가 한 것은 무엇입니까?
정말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까?
무염시태와 승천에 있어서 마리아의 몫은 위대한 믿음과 위대한 수동태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도록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대로 되어지는 것이고,
하느님 명령에 순명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내가 하고 내 힘으로 하려고 함으로써
하느님께서 내 안에서 그리고 나를 통해서 하시려는 것을, 하실 수 없게 합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가장 완전한 수동태가 되셨습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라고 하신 다음,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고 주님께서 가르쳐주셨는데
아버지 뜻이 땅에서 가장 완전하게 이루어진 것이 마리아에게서입니다.
그래서 저도 이렇게 바꿔 기도하곤 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제 안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아무튼 마리아는 자신이 주님의 종이 되겠다고 함으로써 주님의 어머니가 되는데,
종으로 낮추니까 하느님께서는 그를 주님의 어머니로 높여 주신 것이고,
주님의 어머니이기에 원죄 없이 잉태되기도 하셨지만 주님의 어머니이기에 부패 없이 승천하게도 하셨지요.
이 지점에서 다마스쿠스의 요한과 프란치스코의 같은 점과 차이점이 갈립니다.
같은 점은 두 분 모두 마리아를 주님의 어머니에 방점을 둔다는 점입니다.
교회의 오랜 전통은 마리아의 동정성을 너무 강조하면서 마리아를 따르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정배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는데, 다마스쿠스의 요한이나 프란치스코는 주님의 어머니이심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어머니가 되기 위해 다마스쿠스의 요한은 마리아가 성부의 정배가 되셨다고 하였지만, 프란치스코는 성령의 정배가 되었다고 했는데, 이 점이 차이점이고, 이보다 더 중요한 차이점은 동정을 간직함으로써 주님의 어머니가 되셨다고 함으로써 주님의 어머니가 되는 데에 마리아의 공로가 있었음을 암시하지만, 프란치스코와 프란치스칸들은 은총으로 어머니가 되셨다고 하는 점입니다.
그래서 굳이 마리아의 공로가 있다면 오늘 엘리사벳의 칭송처럼 주님의 말씀을 믿으신 것이고,
그럼으로써 천사의 말처럼 은총이 가득한 여인이요 어머니가 되신 점입니다.
은총으로 잉태되시고,
은총으로 어머니 되시고,
은총으로 승천하신 마리아를 기리며 본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겸손함으로 하늘을 바라봅시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구세주의 어머니를 우리에게 보내주셨고
어머니를 통하여 우리의 필요를 전구해 주시도록 안배하셨습니다.
오늘 성모승천 대축일을 맞이하여 성모님의 전구로 겸손한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아울러 성모님을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길에 있어서 모범이요, 안내자요, 동반자로 모실 수 있는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성자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하늘로 불러올리셨습니다.
교황 비오 12세는 1950년 교황령에서 “원죄에 물들지 않고 평생 동정이었던 하느님의 모친 마리아가 지상 생애를 마친 다음 영혼과 육신이 함께 천상으로 들어 올림을 받았다는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계시된 신앙의 진리이다.” 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이는 성모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이 장차 얻게 될 신분을 이미 받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모님께서도 예수님과 같은 운명을 하느님 안에서 누린다는 뜻입니다.
천국을 차지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성모승천은 우리에게 희망을 안겨 줍니다.
인간의 몸을 지니신 성모님께서 하늘로 올림을 받았기에 우리도 하늘로 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도 하늘로 올림을 받을 수 있도록 성모님처럼 살아야 한다는 초대이기도 합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믿음의 승리요, 모든 믿는 사람들의 예형이요, 모범으로서 죽음을 극복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성모님과 더불어 하늘의 꿈을 이루기를 희망합니다.
성모님은 항상 아드님이신 예수님과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철저히 따랐습니다.
성모님을 예수님의 첫 번째 사도라고 말합니다.
성모님은 예수님과의 특별한 일치 안에서 예수님의 부활에 온전히 참여할 수 있는 은총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육신은 예수님의 육신처럼 썪지 않고 보호되었습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길 원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곧 육신과 영혼 모두를 구원하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모님으로부터 받으신 몸과 함께 부활하셨으며, 변모되신 인성으로 하느님 아버지께로 올라가셨습니다.
우리 인간의 몸과 같은 몸으로, 하지만 변모된 몸으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창조된 인간이신 성모님의 승천은 우리의 영광스러운 운명이 무엇인지 확증해 줍니다.
이미 그리스 철학자들은 인간의 영혼이 죽음 이후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었고, 그들은 육신을 멸시했으며, 육신을 영혼의 감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육체가 하느님 나라의 행복 가운데서 영혼과 일치하도록 하느님께서 준비하셨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변모된 육체는 하늘나라에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교 계시이며 우리 신앙의 핵심인 “육신의 부활”입니다.
성모님 승천은 우리가 몸과 마음, 우리의 모든 존재를 통해 하느님을 섬기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라는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육신으로만 하느님을 섬긴다면 노예와 같은 행동일 것입니다.
단순히 영혼으로만 하느님을 섬긴다면 우리 인간 본성과 반대되는 것입니다.
성 이레네오 교부(220년경)는 말합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하느님의 영광이고, 하느님을 보는 것이 사람의 생명입니다.”
형제들을 향한 관대한 섬김으로 표현된 하느님께 대한 기쁜 섬김 안에서 살아간다면 부활의 날에 우리 운명은 우리의 천상 어머니의 운명과 같을 것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강론 요약).
우리의 구원은 육체와 영혼의 결합체인 인간 구원입니다.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몸의 신학’을 통하여 영육의 소중함을 일깨우셨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성모님은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루카 1,46) 라고 고백합니다.
하느님의 눈길을 마리아에게로 끌어당긴 것은 바로 겸손입니다.
하늘에 올림을 받으신 성모님을 바라보면서, 겸손이야말로 우리를 하늘로 이끄는 길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겸손을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재능, 재산이나 성과 때문에 우리를 들어 높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낮추는 사람, 섬기는 이를 들어 높이십니다.
사실 마리아는 자신에게 어떤 호칭이나 직함을 붙이지 않습니다.
그저 “주님의 종”이라고 부르실 뿐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겸손한가?
칭찬받고 인정받기를 좋아하는가?
성모님처럼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할 줄 아는가? 아니면 주목받으려 하는가?'
살펴야 합니다.
성모님은 자신의 작음을 통하여 먼저 하늘을 얻었습니다.
자신을 비우는 만큼 하느님으로 채워집니다.
자신이 보잘것없는 사람임을 깨닫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임을 인정하는 만큼 하느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모님은 바로 자신의 겸손 때문에 은총이 가득한 분이십니다.
성모님은 일평생 집안일을 하면서 평범하고 겸손하게 사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희망을 줍니다.
우리도 평범한 일상 안에서 하늘에 불러올림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시간 성모님의 전구를 통해 더 겸손하고, 더 낮아짐으로 하늘을 향하여 한 발 더 다가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의 삶의 여정에 함께 하여 누구보다도 철저히 주님을 뒤따랐던 성모님을 성자 예수님께서 누리신 영광에 동참하게 하늘로 불러올리셔서 천상 영광을 누리고 세상의 모든 이를 위한 전구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구원받기를 원하는 이는 성모님의 도우심을 청해야 합니다.
굳이 성모님을 통하지 않아도 되지만, 통하지 않으면 그만큼 “전구하심”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따라서 성모님께 의탁함으로써 더 큰 은총을 입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의 잉태에서 죽음까지 그리고 성령강림을 기다리며 제자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면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아드님이 십자가에 매달려서 갖가지 모욕을 당하며 돌아가시는 것을 보았을 때 다른 모든 이의 믿음은 흔들렸지만, 성모님께서는 그분이 하느님이셨다는 믿음을 끝까지 지키셨습니다.”
(성 알폰소리구리오)
바로 성모님은 예수님의 삶의 여정에 누구보다도 가까이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셨습니다.
믿는 이들의 모범이십니다.
그래서 “성모님을 통하여 모든 것을 예수님께로! 예수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성모님께로!”입니다.
성모님의 시선이 늘 당신의 아드님을 향해 있었고 하느님의 뜻을 가슴에 품었기에, 우리도 “성모님처럼 생각하고 그분이 바라신 것을 바라고 그분이 하시고자 하는 바를 행하고 그분이 지향하시는 바를 지향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님 안에 머물기 위해서는 먼저 성모님 안에 있으라는 뜻입니다.”(알베리오네)
성모님 축일에 그분의 겸손과 믿음을 묵상했으면 좋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성모님께서 육체를 지니고 승천하셨다는 의미는?>
오늘은 성모 승천 대축일입니다.
성모 승천은 그리스도의 소명에 참여한 우리가 모두 미래에 받게 될 영광을 미리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광은 노력 끝에 얻어지는 열매입니다.
아무 공로도 없이 받을 수 있는 영광은 없습니다.
2012년 런던 올림픽 축구 종목에서 홍명보 감독이 이끄는 우리나라 선수들은 동메달의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군 생활이 면제되는 특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단 4분만 뛰고 군 면제를 받은 선수도 있었습니다.
바로 김기희 선수입니다.
그는 뛰어난 선수가 아니어서 단 한 번도 운동장에서 뛰어보지도 못하고 벤치만 지켜야 했습니다.
3·4위전 일본과의 경기에서 홍명보 감독은 남은 교체 선수 카드 한 장을 김기희 선수를 위해 사용합니다.
왜냐하면 단 1분이라도 승리에 공헌한 선수라야 올림픽 메달의 영광을 받을 자격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늘 나라의 영광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치가 있는 일은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자기 동네에서 아무리 골을 많이 넣어도 올림픽 메달을 따거나 군면제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성모님께서 육체를 지니고 승천하셨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육체도 하느님 영광을 위해 쓰였다는 뜻입니다.
저는 꾸준히 만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지금 제가 있는 본당의 신자들이 아닙니다.
이전에 담당했던 본당이나 꾸르실료 등에서 봉사했던 분들을 만납니다.
제가 지금도 그들을 만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렇게 말하면 그분들이 실망할 수도 있겠지만, 필요해서입니다.
예를 들면 제가 영성관에 있을 때 저를 도와주는 오산성당 자매들이 있었습니다.
영성관 사정상 사제관 도우미를 둘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세 분의 자매들이 매주 한 번씩 와서 청소도 해 주고 빨래도 해 주고 밑반찬도 해 놓고 가곤 했습니다.
사실 저도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고 그 일을 도와주는 이들이라면 그 육체도 상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믿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혼자 다 하지 않으시고 키레네 사람 시몬이 당신 십자가를 함께 지도록 하셨습니다.
모든 영광은 구원의 십자가에서 오기에, 예수님은 당신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소명을 최대한 많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 당신 영광에 참여시키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성모님은 하느님 구원에 육체적으로도 필요한 분이셨습니다.
왜냐하면 당신 아드님이 인간이 되려고 하시는데 그 아들에게 인성을 내어줄 인간이 필요했는데, 흠 없는 육체를 지니신 분은 성모 마리아밖에 안 계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이렇게 외칩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열매: karpos)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엘리사벳이 그리스도를 성모님의 ‘열매(karpos)’라고 표현한 데는 이미 성모님이 ‘주님의 어머니!’가 되기에 합당한 분이란 뜻이 들어있습니다.
가지에서 열매가 맺히는데 그 열매는 분명 나무에서 수액이 흘러들어와야 합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를 성모님의 열매라 표현한 이유는 성모님께서 그리스도께 무언가를 주셨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 죄가 없어야 하는데 그 나무에 죄가 있다면 열매가 온전할 수 없습니다.
성모님만이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하시며 당신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봉헌하신 분입니다.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내리신 주님의 명령입니다.
그러니 죄가 없는 육체는 본래 썩을 필요가 없습니다.
생명 자체이신 분께 계속 생명력을 얻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의 성인 중에 몸이 썩지 않는 성인들이 매우 많습니다.
루르드의 성녀 베르나데트는 150년이 지났지만, 정말 아름다운 몸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또한 성모님의 육신을 지닌 승천으로 해석해볼 수 있습니다.
그분들은 마음만 주님께 봉헌한 분들이 아니라 육신도 주님의 뜻에 봉헌하여 그만큼 주님께서 많이 필요로 하신 육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설교하실 때 사용한 성대가 썩지 않고, 어떤 분은 세례 주던 오른팔과 선교하기 위해 다니던 발만 썩지 않고, 어떤 분은 심장이 썩지 않습니다.
그것들을 그만큼 완벽히 봉헌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머리카락까지도 다 지니고 하늘로 오르셨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을 봉헌한다면 주님은 그것이 영원히 하늘 나라에서 영광을 받을 것으로 축성하여 돌려주십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 우리 모두는 또 다른 성모님이 되어야 합니다>
아직도 결핍과 흠결투성이인 저 자신의 모습, 백번 천번 결심을 하지만 크게 변화되거나 성장하지 않은 제 모습에 실망도 큽니다.
동료 형제들의 모습도 개진도진, 거기서 거기라 안심이 되고 위로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가끔 가뭄에 콩나듯이 멋진 형제를 만납니다.
부족함과 미성숙을 극복하고 하루 하루 일취월장합니다.
주어진 탈란트도 잘 활용해서 자신의 능력치를 극대화시킵니다.
그런 능력치를 바탕으로 공동체와 교회를 위해 적극적으로 봉사하고 헌신하니, 선배 입장에서 너무나 감사하고 뿌듯합니다.
성장은커녕 퇴보하고, 겨우겨우 현상 유지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눈부신 성장을 거듭하니 참으로 부럽습니다.
성장하지 않는 인생, 성장하는 않는 신앙, 성장하지 않는 공동체, 이 얼마나 부끄러운 모습인지.
이런 면에서 오늘 우리가 예의주시해야 할 분이 계십니다.
오늘 대축일을 맞이하시는 성모님이십니다.
그분은 인류 역사상 가장 높이 올라간 분이십니다.
성장에 성장을 거듭해서 가장 큰 진보를 이룬 분이십니다.
성모님은 오늘 우리에게 한 인간이 얼마나 변화될 수 있는지, 얼마나 성장을 거듭할 수 있는지, 인간이 어떻게 ‘하느님화’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잘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경축하는 성모 승천 대축일은 우리 모두에게도 희망과 자극을 주는 축제입니다.
예수님의 잉태와 출산, 양육을 위한 성모님의 큰 희생과 노고도 대단한 것이지만, 우리가 좀 더 예의주시해야 할 부분은 성모님의 신앙여정입니다.
한 평생 다양한 위기와 고통, 큰 십자가와 험난한 가시밭길이 성모님 생애 내내 따라 다녔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의 태도를 보십시오.
조금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머뭇거리지 않으셨습니다.
희미한 안개 속의 위험한 길을 걸어가시면서도 그 발걸음이 늘 당당했습니다.
천사를 통해 들려온 하느님의 약속을 마음에 새기고 매일 새롭게 결코 만만치 않은 신앙의 길을 기쁜 얼굴로 걸어가셨습니다.
성모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잉태하셨고, 사랑의 힘으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낳으셨습니다.
이제 성모님께 주어졌던 역할이 우리 모두에게 확대되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 안에 예수님을 잉태하지 못한다면, 그 옛날 성모님의 아기 예수 잉태는 그저 오래전 이야기일 뿐입니다.
오늘 우리 각자의 삶 안에서 아기 예수님의 잉태는 되풀이되어야 합니다.
나도 힘들지만 미혼모가 낳고 떠난 아기 한 명을 입양하면 그것은 내가 아기 예수님을 낳는 일입니다.
우리 가족도 힘들지만 도움이 필요한 보육시설 아동들의 구체적 결핍을 채워주는 일은 어떤 면에서 내가 직접 또 다른 아기 예수님을 낳는 일입니다.
힘겹게 살아가는 이웃들의 필요에 응하는 일, 작지만 시간 내어주는 일은 또 다른 아기 예수님을 낳는 일입니다.
하느님은 어디 다른 하늘 아래서 멀리 계셔야 할 존재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 일상생활 속에서 늘 새롭게 거듭 태어나셔야 할 존재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 모두는 또 다른 성모님이 되어야 합니다.
성모님처럼 아쉽지만 또 다시 나를 떠나고, 안타깝지만 어제와 결별하고, 늘 새로운 여행길을 떠나는 사람에게 하느님은 부단히 다시 태어나실 것입니다.
인간 존재라는 것 때로 한없이 부족하고 나약하지만, 때로 작은 울타리에 갇혀 괴로워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무한히 성장해나갈 수 있는 가능성으로 충만한 존재가 역시 인간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하는 에너지가 있음을, 성모님처럼 큰 도약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결국 우리 안에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께서 늘 현존하고 계심을 굳게 믿길 바랍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도 성모님처럼>
1)
우리도 성모님처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그곳에서 예수님, 성모님과 함께 영원히 살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의 희망이고,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런데 그 희망이 이루어지려면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성모님처럼 사는 것.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희망하고, 그곳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으면서도, 성모님처럼 살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
(콜로 3,1-4)
신앙인은 ‘위에(하늘에) 있는 것’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아래에(땅에) 있는 것’은 버리는 사람입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1요한 2,15-17)
이 두 권고는 뜻으로는 ‘같은 권고’입니다.
‘지나간다’는 ‘허무하게 사라진다.’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는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을 더 많이 가지려고 욕심 부리고 집착하는 일들은 모두 어리석은 일이 될 뿐이다.”입니다.
먼지처럼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만 사랑하고 추구하는 사람은 그것들과 함께 허무하고 허망하게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지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2)
‘마리아의 노래’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의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교만한 자들, 통치자들, 부유한 자들’은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실제로는 들어가려고 노력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습니다.
‘교만한 자들’은 하느님의 계명들과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자들입니다.
‘통치자들’은 여기서는 ‘모든 통치자들’이 아니라, “백성 위에 군림하고, 백성에게 권세를 부리는(루카 22,25)”, 어리석고 교만한 통치자들을 가리킵니다.
‘부유한 자들’은 하느님이 아니라 재물을 섬기는 자들입니다.
그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아예 없는 것일까?
있습니다.
회개하면 됩니다.
교만한 자들은 회개하고, 교만을 버리고 겸손해지면 됩니다.
어리석은 통치자들도 회개하고, 권력을 내려놓고, 자신을 낮추고, 백성을 섬기는 참된 지도자로 변화하면 됩니다.
부유한 자들은 회개하고, 재물에 대한 탐욕과 집착을 버리고 온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만 섬기면 됩니다.
3)
‘마리아의 노래’에 언급되어 있는 ‘비천한 이들’과 ‘굶주린 이들’은 가난하고 힘없고 인간 세상에서 소외당하는 소외계층 사람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작은 이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무조건 자동적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까?
그것은 아닙니다.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또 소외계층에 속한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보장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는, 가난해서 재물에 대해서 더 집착하고, 더 탐욕스러운 경우가 있고, 자신도 인간 세상에서 소외당하고 차별 당하면서도 자기보다 더 약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작은 이들,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도 회개해야 합니다.
재물이 아니라 하느님만 섬겨야 합니다.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도 믿음과 희망을 버리지 말고, 끝까지 인내하면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루카복음 16장에 있는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그 비유에 나오는 ‘부자’는 ‘마리아의 노래’에 나오는 ‘교만한 자들, 통치자들, 부유한 자들’이고, ‘라자로’는 ‘비천한 이들, 굶주린 이들’입니다.
그 비유에서 아브라함이 부자에게 한 말,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라는 말은(루카 16,25) 지금 ‘가난하고 힘없는 처지에 있는 작은 이들’에게는 큰 위로가 되고, 신앙생활을 끝까지 할 수 있는 힘과 용기와 희망을 주는 말입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 교회의 영원한 어머니 - “복되신 동정 마리아”>
“오피르 황금으로 단장한 왕비,
당신 오른쪽에 서 있나이다.”
(시편 45,10ㄷㄹ)
오늘 화답송 후렴이 흥겹습니다.
잠시 오늘 옛 어른의 말씀이 좋아 나누고 본격적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공부란 지식을 쌓는 것을 넘어 사람이 되는 일이다.”
<다산>
사람 중의 사람이 오늘 성모승천대축일의 주인공 복되신 동정 마리아요 이런 성모님을 닮는 공부가 진짜공부입니다.
“행하고도 남은 힘이 있으면 그때 학문을 닦으라.”
<논어>
남는 시간이 있으면 사람되는 학문에, 공부에 힘쓰라는 말입니다.
작년 성모승천대축일 강론 때는 강론중 광복절을 상기하며 애국가를 불렀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특히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대목을 부를 때는 성가처럼 일치의 숙연한 분위기였습니다.
작년 이날부터 만세칠창을 하기 만1년 하루도 빼놓지 않고 기도하듯 바쳤습니다.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지만 온전한 독립국가가 될 때까지, 아마 죽는 그날까지, 집무실의 ‘십자가의 예수님과 태극기’ 앞에서 기상후, 기상전 바칠 것입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성령님 만세!”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
“가톨릭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성 요셉수도원 만세!”
성모승천대축일이자 광복절에 참 잘 어울리는 만세칠창으로 오늘 따라 더욱 마음에 와닿습니다.
올해는 ‘빛을 되찾았다’는 광복(光復) 79주년이 되는 광복절이자 ‘복되신 동정 마리아가 지상생애를 마친 다음, 육신과 영혼이 함께 천상의 영광으로 들어 올림을 받았다’는 오늘 대축일은 1950년 11월1일 교황 비오 12세의 사도헌장 <지극히 관대하신 하느님>을 통해 교황무류성으로 선언함으로써 믿을 교리로 지정됩니다.
광복 5년 후 6.25사변 중 1950년 제정된 성모승천대축일에서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를 깨닫습니다.
대한민국은 물론 한반도의 수호성인이 복되신 동정마리아의 전구로 6.25 사변중에도 적화(赤化)되지 않았고 언젠가는 온전한 광복의 나라가 되리라 믿습니다.
우리 한민족의 영원한 수호자이자 어머니가 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입니다.
오랜만에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요 납북자인 정인보 작사에,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43세 가난하게 살다가 죽은 ‘보리밭’과 ‘나뭇잎배’를 작곡한 윤용하 요셉 작곡의 광복절 노래를 불러 봅니다.
한번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불러 보시기 바랍니다.
1.“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기어이 보시려던 어른님 벗님 어찌하리
이날이 사십년 뜨거운 피 엉긴 자취니
길이길이 지키세 길이길이 지키세”
2.“꿈엔들 잊을 건가 지난 일을 잊을 건가
다 같이 복을 심어 잘 가꿔 길러 하늘 닿게
세계의 보람될 거룩한 빛 예서 나리니
힘써 힘써 나가세 힘써 힘써 나가세”
세계의 보람될 거룩한 빛, 구원의 빛은 대한민국 한반도 예서 나리라 믿습니다.
성모승천 대축일 아침 성무일도 아름다운 찬미가와 시편 후렴들도 새삼스런 감동이었습니다.
1.“태양의 빛입으신 동정녀시여 열두별 머리위에 꾸미신이여
저달을 발판삼아 우뚝서시니 환하게 빛나도다 당신의광휘”
5.“우리의 동정성모 성마리아께 영광의 화관씨워 드높이시고
여왕과 어머니로 세운삼위께 영원한 찬미찬양 있어지이다”
오늘 제1독서 묵시록과 제2독서 코린도 전서 말씀을 근거로 한 찬미가입니다.
“맏물”(1코린 15,23)이신 그리스도께서, 미완성의 상태로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이르게 될 완성을 보여주었으며, 이어 성모님의 승천이 구원된 우리의 미래를 분명하게 알려 주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바라보는 하늘은 그대로 예수님, 성모님이 승천하신 영적승리와 희망을 상징하는 하늘길, 하늘문이 되었음을 깨닫습니다.
다음 시편 후렴도 은혜롭습니다.
“기뻐하라, 오늘 동정녀 마리아, 하늘에 올림을 받으셨도다.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다스리시는도다.”
가사들의 한결같은 특징은 ‘동정녀 마리아께서 하늘에 올림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하느님의 은총의 보답입니다.
‘동정마리아께서는 성부의 뜻과 성자의 구속사업과 성령의 모든 활동에 전적으로 헌신함으로써 교회를 위해 신앙과 사랑의 모범이 되심으로, 교회의 가장 뛰어나고, 유일무이한 교회의 전형이 되신 것입니다.’ (가톨릭교리서 967항)
참으로 우리 믿는 이들의 영원히 보고 배울 롤모델이 된 우리의 영원한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입니다.
첫째, 겸손과 섬김의 어머니입니다.
섬김을 받으로 오신 주님이 아니라 겸손히 섬기러 오신 주님입니다.
모전자전, 그 어머니에 그 아드님입니다.
보십시오.
오늘 마리아 성모님은 태중의 아기 예수님과 함께 엘리사벳과 태중의 세례자 요한을 찾아 나서지 않습니까?
섬기로 오신 겸손의 모범을 보여주십니다.
마리아 성모님의 겸손한 섬김의 자세에 감동한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차 외칩니다.
동병상련, 평생도반 두 어머니의 영적우정도 참 깊어졌을 것입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둘째, 감사와 찬미의 어머니입니다.
오늘 복음의 후반부 마리아의 노래, 마니피캇은 우리 교회가 2000년 동안 저녁성무일도시 성모님과 함께 불러온 감사찬미가입니다.
말 그대로 가난한 이들인 아나뵘의 노래입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감사는 저절로 찬미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영혼의 건강과 치유에 감사와 찬미의 기도와 삶보다 더 좋은 수행은 없습니다.
감사와 찬미의 기도와 삶과 더불어 성모 마리아의 주님 향한 믿음, 희망, 사랑도 더욱 증대되었을 것입니다.
참 아름답고 매력적인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이요 성모 마리아가 그 모범입니다.
셋째, 순종과 믿음의 어머니입니다.
순종으로 표현되는 믿음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했던 순종의 어머니, 영원한 예스맨 성모마리아입니다.
앞서 예수님 탄생이 예고 됐을 때, 성모 마리아의 순종의 응답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마리아의 순종의 믿음의 결정체같은 응답에 주님께서도 분명 감동하셨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마리아가 한없이 고맙고 사랑스러웠을 것이며 마리아에 대한 신뢰도 한없이 깊어졌을 것입니다.
역시 엘리사벳이 이런 마리아의 믿음을 격찬합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제가 감동하는 것은 성모님은 십자가의 길, 제13처 피에타의 성모님의 전구를 청하는 기도문입니다.
“구세주 예수님,
주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려 품에 안으신 성모님의 전구를 들으시어
저희도 성모님 품 안에서 효성스러운 자녀로 살다가 마침내 그 품 안에서 죽게 하소서.”
십자가의 예수님을 품에 안으셨을 때, 순종의 비움(케노시스)을 통해 드러나는 성모님의 절정의 믿음은 그대로 아드님께 전수되었음을 봅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우리의 희망이자 기쁨의 원천이 됩니다.
감사송 고백처럼 오늘 하늘에 오르신 분, 하느님을 낳으신 동정 마리아께서는, 완성될 주님 교회의 시작이며 모상으로서, 이 세상 나그넷길에 있는 주님의 백성인 우리에게 확실한 희망과 위안을 보증해 주셨습니다.
거룩한 어머니 마리아를 닮아 겸손과 섬김의 삶, 감사와 찬미의 기도와 삶, 순종과 믿음의 삶에 항구한 노력을 기울입시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를 돕습니다.
“성모 마리아,
하늘에 오르시니
천사들의 무리가 기뻐하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성모님의 승천은 우리 신앙인이 가야 할 미래를 보여 주는 사건>
2008년 시흥5동 성당에 있을 때입니다.
목사님이 성당엘 찾아왔습니다.
대화 중에 목사님은 제게 몇 가지 물어보았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성모님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가톨릭은 성모님을 믿느냐고 하였습니다.
개신교 신자가 그렇게 말한다면 어느 정도 이해해 줄 수 있지만, 신학대학에서 신학을 배운 목사님이 그렇게 말하니까 조금 답답했습니다.
먼저 흠숭과 공경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흠숭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공경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친 성인과 성녀에 대한 존경의 표현이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예수님을 낳으신 성모님께는 좀 더 큰 존경과 사랑을 표현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사랑하는 제자에게 ‘이분이 이제 너의 어머니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성모님에게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톨릭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성모님을 어머니로 존경과 사랑을 드린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교회를 위해서 전구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가톨릭은 성모님을 믿는 종교가 아니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목사님은 저의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오늘은 성모 승천 대축일입니다.
성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저도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저는 5살 때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한 적이 있습니다.
큰 길에 나갔다가 그만 버스에 타고 말았습니다.
내리고 보니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었습니다.
집에서는 난리가 났었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제가 얌전하게 생겨서 누가 데리고 갔을 거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저는 길을 잃어버리면 파출소로 가라고 했던 아버님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저는 눈에 보이는 파출소로 갔고, 거기에서 하루를 보냈습니다.
아버님은 실종신고를 했고, 제가 있는 파출소로 찾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머물면서 사제들과 대화를 하셨는데, 저는 파출소에 머물면서 경찰 아저씨가 사주신 순두부찌개를 먹었습니다.
제가 사제가 되었을 때입니다.
인사이동으로 제가 가야 할 성당이 정해지면 어머니는 저보다 먼저 성당에 가서 기도하였습니다.
아들 사제가 건강한 모습으로 사목에 충실할 수 있도록 기도하였습니다.
제가 외국으로 갔을 때를 빼고는 어머니는 언제나 저보다 먼저 가서 기도하였습니다.
4년 전에 하느님의 품으로 가신 어머니는 13년 전에 하느님의 품으로 가신 아버지와 함께 저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우리가 성모님을 공경하는 이유는 교회에서 선포한 성모님께 대한 믿을 교리도 있지만 성모님께서 신앙인의 모범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는 ‘순명’입니다.
천사 가브리엘의 이야기를 들었던 성모님은 당혹스러웠지만 하느님의 뜻임을 알았고,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응답하였습니다.
순명은 원하는 것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순명은 원하지 않는 것이라도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따르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열정’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마리아의 노래’에서 볼 수 있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이신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열정이 있었고, 가야 할 길을 충분히 알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이, 굶주린 이를 보살피시는 분이심을 알았습니다.
세 번째는 ‘중재’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볼 수 있습니다.
성모님은 혼인 잔치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혼인 잔치에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예수님께 부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때가 오지 않았지만 성모님의 청을 받아주셨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사랑하고, 공경하는 성모님의 승천 대축일입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우리들 모두 언젠가 하느님의 품으로 갈 수 있다는 희망의 표징입니다.
누군가 이야기했습니다.
영원한 것은 끝도 없는 시간의 연장이 아니라, 채워짐이라고 했습니다.
희망이 채워지고, 사랑이 채워지고, 믿음이 채워지는 것이 바로 영원함입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끝도 없는 시간의 연장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 속에서 우리는 모두 사랑으로 채워질 수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우리 신앙인이 가야 할 미래를 보여 주는 사건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일생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충실한 응답이었습니다.
성모님은 자신의 삶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으셨습니다.
우리도 성모 마리아처럼 자신보다는 이웃과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는다면 이 세상에 더 많은 평화가 이룩될 것입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많은 문제와 어려움이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의 도우심으로 지혜롭게 극복되기를 기도드립니다.
성모승천 대축일은 광복절이기도 합니다.
분단된 조국은 절반의 광복입니다.
언젠가 하나 되는 조국으로 진정한 광복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면서 성모님의 전구를 청합니다.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의 기준은 어디에 있는지>
‘머리카락 색깔 측정기’라고 들어 보셨습니까?
단순히 전 세계의 모든 머리카락을 인종을 구별한 것이 아닐까 했더니, 사실은 인종 차별에서 나온 측정기라고 합니다.
1927년 오이겐 피셔는 아리아인(독일인)의 인종적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해 인종 혼합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인종적 순수성을 평가하기 위해 만든 것이 바로 이 ‘머리카락 색깔 측정기’였습니다.
이 인종 차별적인 이론은 곧바로 사람들에게 거부되었을 것 같지만, 반대로 뉘른베르크법에 영향을 끼쳐서 1930년대와 제2차 세계 대전에 이르기까지 나치 체계를 뒷받침했습니다.
유다인, 흑인, 로마니인 등을 표적으로 삼아 박해하거나 살해하는 행동을 합법화한 것입니다.
당시의 아리아인들은 이런 생각과 결정을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많은 아리아인은 이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집단주의에 빠져서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초대교회 때부터 있었던 수많은 박해, 지금은 분명 당시의 사람들이 잘못 판단했다고 말하지만, 당시에는 오히려 예수님이 잘못되었고 또 국가 반대하는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잘못되었다고 판단했고 단죄했습니다.
지금의 내 판단이 무조건 옳을까요?
아닙니다.
그 기준을 이 세상의 테두리에 맞춰서 따져 들어가면 옳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주님 기준으로 따져보면 틀릴 때가 더 많습니다.
따라서 자기 기준에 맞추는 교만의 마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교만의 마음으로는 제대로 판단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겸손의 마음으로만이 세상의 기준을 접고 주님의 기준에 맞춰서 바르게 살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기준을 철저하게 지켰던 분이 바로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이십니다.
예수님 잉태 소식을 들었을 때도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응답하시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겸손을 보여주십니다.
또한 태중에 하느님의 아드님이 계신대도 먼저 친척 엘리사벳을 찾아가십니다.
이에 엘리사벳은 깜짝 놀라서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루카 1,43)라고 말하지요.
이 밖에도 성모님의 겸손은 끝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성전에서 잃어버렸을 때, 카나에서 첫 번째 기적을 행했을 때, 무엇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걸으셨고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을 끝까지 지키시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셨습니다.
이렇게 철저하게 하느님께 기준을 맞춰서 사신 분,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성모님을 하늘로 불러올리셨습니다.
오늘 성모 승천 대축일을 맞이하면서, 우리의 기준은 어디에 있는지를 묵상했으면 합니다.
세상이 아닌 철저하게 하느님께 맞춰야 합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