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이 김선달
온실가스와 방귀
환경론자들은 온난화 방지를 위해 지나친 육식(肉食)을 자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소가 내뿜는 이산화탄소의 양은 상당하기 때문이다. 소가 사료를 소화시키는 과정에서 많은 양의 메탄이 생성된다. 소는 이렇게 생산된 메탄을 방귀와 트림으로 배출한다. 한 연구기관의 조사에 따르면 소 4마리가 자동차 1대와 맞먹는 온실가스를 내뿜는다고 한다. 뉴질랜드 정부는 지난 2003년 소나 양 등의 가축이 뀌는 방귀에 대해 세금을 부과하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농민들의 거센 반발로 방귀세의 도입은 결국 백지화되고 말았다. 한편 동유럽 발트해 연안 끝에 있는 에스토니아 정부는 2009년 1월부터 소를 키우는 농가에 대해 방귀세를 부과하기 시작했다. 축산업이 발달한 덴마크에서도 소 한 마리당 약 14만원의 방귀세를 부과하는 세법 개정안의 도입을 추진 중이라고 알려져 있다.
방귀세의 효시(嚆矢)
각설하고, 2000년대 초 국내에서 세계최초로 방귀배출에 대한 비용부과가 이루어졌으니 이 방귀세는 지난 2005년부터 발효된 국제협약인 탄소배출권과 그 후 부과된 동유럽 방귀세에 비해 훨씬 앞선 시기에 이루어졌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상당히 이른 시기에 환경문제를 발생자 비용부담에 연계시킨 점은 합리적이고 가치 있는 노력으로 평가된다. 협약은 당시 초등학교에 다녔던 김 홍이라는 학생과 에너지산업계에 몸담고 있는 그의 이모부 인 필자 사이에 이루어졌다. 조카 집에 놀러온 이모부가 방귀를 자주 뀌자 홍이는 피해 보상차원의 비용지불을 요구했고 이모부는 민원(民願)을 받아들인 것이다.
보상비는 1회에 500원으로 정했는데 이는 필자의 아들 지윤이(홍이에게는 형이 됨)가 초딩 때 코를 훌쩍거리며 구두 한 켤레를 닦을 때 마다 받았던 200원에 비하면 방귀 빈도(頻度)로 미루어 볼 때 매우 파격적(破格的)인 것이었다. 한편, 지윤이의 친구 ‘남우’라는 아이는 변비가 있어 똥을 한번 눌 때 마다 배변 촉진수당으로 아빠한테 500원씩 받았다는데 지윤이는 이를 몹시 부러워했다. 아무튼 녀석의 집에 가게 되면 홍이는 필자에게 거의 붙어 다녔으며 잘 때도 바로 옆에서 자면서 횟수를 헤아리곤 했다. 필자가 미국으로 발령이 나자 방학 때 놀러 와서 가족들과 함께 록키산맥과 옐로우스톤을 여행했는데 그때도 열흘 가까이 필자 곁을 지키며 돈 벌이를 하고 갔다. 이래저래 녀석에게 별도의 용돈을 줄 필요는 없었다.
방귀탐구
방귀는 소장(小腸)에서 미처 흡수되지 못한 음식물이 대장(大腸)에서 살고 있는 세균에 의해 발효되면서 생긴 가스가 항문을 통해 빠져 나오는 현상으로 사람은 누구나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하루 평균 13번 이상 많게는 20번 정도의 방귀를 뀐다고 한다. 필자는 고등학교 때부터 이 분야에 권위자였는데 위의 평균 치 보다는 훨씬 윗 돌았다. 개구쟁이였던 필자는 친구들의 얼굴에 한 방 날리고 도망가곤 했는데 한번은 자취방에서 친구들에게 붙잡혀 옷이 벗겨진 채 그 곳을 밥풀로 플러깅(plugging) 당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생성물은 무색(無色), 무취(無臭), 무해(無害)하여 3무(三無)의 특장(特長)을 가지며 소리만 요란할 뿐이어서 소음(騷音)을 제외하고는 환경에 미치는 영향은 없었다고 본다.
홍이 김선달
흔히 '기상천외(奇想天外)한 발상으로 재물을 취하는 사람‘을 ‘봉이 김선달(본명 김인홍, 자호는 낭사)’에 비유한다. 허나 이재(理財)에 능한 면을 지나치게 부각시켜 바라봄은 적절치 않다. 조선 후기의 풍자적(諷刺的)인 인물인 평양출신의 재사(才士) 김선달은 워낙 풍류와 시를 좋아하고 양반을 골탕 먹이고 뺏은 돈을 어려운 서민에게 나누어줘 재산은 모으지는 못했다고 한다. 조선시대 봉이 김선달이 대동강 물을 팔아먹은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하다.
하면, 환경문제를 빙자(憑藉)하여 재물을 취한 김 홍이야말로 현대판 봉이 김선달이라 하겠다. 아니 홍이 김선달로 명명(命名)함이 옳을 듯하다. 방귀세 협약 시 초딩이였던 김 홍은 이제 어엿한 대학생이 되어 건축학을 전공하고 있으며 입학한 지 겨우 한 학기가 지났으나 전공에 심취(心醉), 학교 연구실에서 살다시피 하여 가족들이 좀처럼 얼굴 보기도 어려울 정도라고 한다.
아마도 몰입(沒入)의 즐거움을 만끽(滿喫)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노력과 천부(天賦)의 기지(奇智)를 바탕으로 추후 큰 동량재(棟梁材)가 되리라 기대해 본다.
‘12.7.31 경주 석장동 일우(一隅)에서, 정명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