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떠나신 그 겨울을 회상하며
이향로
7년 전 겨울 어둑어둑 섣달 어둠이 깔리는 초저녁 먼저 걸려온 남편의 전
화는 직장생활 20년 만에 점포장으로 승진 되었다는 반가운 전화였다. 그
기쁜 소식을 어디에 알릴 사이도 없이 뒤따라 걸려온 전화, 친정 작은아
버지의 다급한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얘 어머니가 갑자기 쓰러지셨다. 지금 119 불렀는데 얼른 충주건대병원으로 와라"
동생 내외와 부랴부랴 충주에 도착하니 충주에 사는 사촌들까지 모두 모여 우릴 기다리
고 있다. 뇌출혈로 엄마는 쓰러지셨고 상태는 아주 안 좋았다.
오빠가 있어도 수술결정을 하는데 다른 형제들 동의도 있어야 했나보다. 다른 방법
은 없단다. 생각할 여유고 울고불고 할 여유도 없이 어머니는 수술실로 옮겨졌다.
몇 시간에 걸친 수술 후 의식이 있으신 건지 없으신 건지 분간이 안 되는 혼수상태
로 어머니는 중환자실로 옮겨지셨다.
그때부터 하루 세 번 면회시간에만 어머니의 얼굴이나마 뵐 수 있었다. 면회시간이
되면 물에 적셔서 전자렌지에 돌려 따뜻해진 물수건으로 얼굴, 손, 발을 닦아드리면서
울기도 하고, 얘기도 들려드리곤 했다. 그런데 죽어서도 가장 늦게까지 살아있는 감각
이 청각이고 자식들이 애통해하는 곡소리는 저승 문 앞에서까지 듣는다고 했듯이 무의
식 상태인 것 같은 어머니지만 내 이야긴 들으시는 것 같았다. 내가 울며 이런저런 말
씀을 드리면 손가락하나 움직이지 못하시는 분이 주르륵 한 켠으로 눈물을 흘리시는
거다.-
그때 난 마흔에 낳은 늦둥이가 5개월을 갓 넘겼을 때인데 매일 아침 그 애를 들쳐 업
고 병원으로 향했다. 그러기를 한달 여쯤 평생을 함께해온 동네어른들, 집안 친척들,
다녀갈 사람들이 모두 병문안을 다녀가도 어머니는 차도가 보이질 않았다. 어머니는
회복이 되셔도 말씀은 못 하실 거고 온몸의 반쪽은 마비가 되실 거라는 진단이었다.
그러자 작은아버지께서 우리형제들을 불러놓고 하시는 말씀이,
“어머니 집으로 모시자. 이렇게 병원에 있는 걸 어머니도 원하지 않으실 거다.”
처음에 우린 안 된다고 펄쩍 뛰었지만 결국 작은아버님 말씀대로 퇴원을 결정했다.
주렁주렁 매달렸던 주사바늘들을 모두 빼 버리고 산소호흡기 하나에 의지한 채 구급
차에 실려 고향집으로 돌아가는 길.
난 평생을 살아도 그날, 그 참담한 기분을 잊지 못할 거다.
구급차가 병원을 출발할 때부터 흩날리기 시작한 눈발은 갈수록 거세게 퍼붓고 스산
한 겨울 텅 빈 들판이 하얗게 어디가 어딘지 분간도 안 되게 덮여 가는데 동네 어귀에
도착해서는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에 차가 언덕도 아닌 약간 비스듬한 비탈길을 올라
가지 못하는 거다. 뒤에서 밀어서 간신히 집 앞에 차를 대고 들것에 실려 어머니는 안
방에 모셔졌다. 정신지체장애인인 큰올케는 병간호를 할 수 없기에 그때 학교 다니는
애들이 없는 막내올케가 친정집에 남았다. 수술 후 목에 호스를 끼고 그 고무줄로 유
동식을 넘겨드리는 분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참으로 앞이 캄캄하고 막막했다. 난 시
장을 돌아다녀 선식도 사고 약국에서 제약회사에서 나온 유동식도 사고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서 허둥대고 있었다.
그렇게 이틀이 지나고 퇴원한지 사흘째 되는 아침 특별히 다른 움직임이 없던 어머
니는 한 많은 75년을 마감할 준비를 하시는지 숨이 가빠지셨다. 자식들은 황망한 가운
데 어머니를 보내드릴 준비를 했다. 따뜻한 물수건으로 온몸을 닦아드렸다. 병원에서
한 달여 동안 꼼짝도 못하고 누워계셨던 등과 엉덩이 쪽엔 검게 패인 욕창이 생겨있었
다. 펑펑 울면서 물수건으로 닦아드리고 파우더를 발라드렸다. 변변한 옷 한 벌 없는-
옷장을 열어 그래도 조금이라도 더 나아보이는 한복으로 곱게 갈아 입혀드리고 어머니
의 마지막 길을 배웅할 준비를 마쳤다.
그날은 어머니가 쓰러지시고 꼭 한달이 되는 날이었다.
4남매와 작은아버지가 지켜보는 가운데 어머니는 늦은 밤 조용히 이승을 하직하고
먼 길을 떠나셨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임종을 지켜주셨던 작은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엔 “얘들아 지금은 우는 거 아니다, 울지 마라" 하시다 마지막 숨을
거두시고 나면 "이제 곡들 해라" "실컷들 울어라"하신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자리는
그야말로 멍석을 펴 놓은 울어야 할 자리이다. 돌아가신 부모님 앞에 울지 않는 자식
은 불효라는 생각을 친정 부모님 두 분 다 돌아가시고 시아버님도 먼 길 보내드린 후
내가 갖게 된 생각이다. 누구나 그 자리에선 부모님이 돌아가신 슬픔에도 울고 그냥
자신의 설움에도 울고 그저 맘껏 목 놓아 울어도 조금도 흉이 되지 않는 울음자리라고
생각된다. 아들 셋에 딸 하나 사남매를 두신 우리 어머니는 평생 동안 그야말로 고생
과 한으로 사시다 가신 분이다. 열여덟에 아버지 얼굴도 한번 못 보시고 어른들이 정
해준대로 시집을 오셨단다. 혼삿날을 정해놓고 어떻게 생긴 신랑일까 하고 얼마나 노
심초사하며 궁금해 했던지 꿈에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는데 초례청에서 뵈니 꿈에 본
모습과 꼭 같았다고 하셨다. 어릴 때부터 허약하고 병치레가 유난히 많았던 오빠는 결
국 청각장애인이 되었다. 큰아들인 오빠내외가 장애인들인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조
카애들마저 올케를 닮은 정신지체아가 태어났다. 손주들을 낳아놓기만 했지 키울 줄
모르는 며느리대신 엄마가 밤잠 못 주무시며 키우셨고 그 녀석들 학교도 따라다니셔야
했고 온갖 집안일을 도맡아 하셨기에 돌아가실 무렵엔 관절염이 심해지셔서 걷기도 힘
드실 정도였다.
그렇게 가실 줄 알았으면 수술도 안하고 그냥 곱게 보내드리는 건데. 머리 한 올 없
는 빈 머리로 가시게 한 것도 가슴이 미어지고 수술 후 가래 빼고 음식물 넣어드리기
위해 목으로 고무호스 끼워 드린 것은 지금생각해도 죄송하고 가슴이 저려온다.
노환으로 일년쯤 거동이 불편하셨다가 6개월은 방안에서 꼼짝 못하시고 계시다 친
정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는 사람은 이렇게 살다가는 거구나 하는 느낌으로 슬픔 속에
서도 감사할 수 있었고 아침에 쓰러지셔서 다음날 시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당황했
으면서도 서로 힘들지 않고 편안하게 돌아가신 아버님께 고마움 같은걸 느끼며 펑펑
목 놓아 울 수 있었다. 그런데 어머니의 마지막은 그냥 모든 게 헝클어진 기분 속에
엉망진창인 기분으로 '이건 아니야' '너무 억울해' 하며 현실을 받아들이려는 마음보
다 부정하고픈 마음이 앞서니 기도도 되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이 실신할까봐 청심환
을 먹일 정도로 난 정신없이 울부짖으며 상여 뒤를 따랐는데 어머니를 하관하고 돌아
서선 내가 생각해도 이상하리만큼 차분해지며 울음도 그쳤다. 그리고 어머니가 평생
동안 그렇게도 애지중지하며 살아오신 어머니의 물건들을 올케들이 모두 들고 나와서
훨훨 태워버리는데도 멍해진 난 조금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가장 소중한 어
머니를 땅에 묻고 왔는데 세상에 내가 아쉽고 아까운 게 무엇이 있으랴!
그 후 세월이 7년이나 흘러서 그때 등에 업혀 병원을 오가던 젖먹이 우리꼬마는 올
해 초등학교 2학년 되었고 가슴깊이 묻어두고 감히 열어보기도 두려웠던 그 겨울 가슴
시린 얘기를 이렇게 술술 하게도 되었다.
2005 20집
첫댓글 어머니가 평생 동안 그렇게도 애지중지하며 살아오신 어머니의 물건들을 올케들이 모두 들고 나와서
훨훨 태워버리는데도 멍해진 난 조금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가장 소중한 어
머니를 땅에 묻고 왔는데 세상에 내가 아쉽고 아까운 게 무엇이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