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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6 장 드 디 어 만 나 게 되 었 군
1
江城如畵裏, 山晩望晴空.
雨水夾明鏡, 雙橋落彩虹.
人煙寒橘柚, 秋色老梧桐.
誰念北樓上, 臨風懷謝公.
강과 성은 마치 그림 같은데,
해저무는 산에서 맑은 하늘 바라본다.
시냇물은 거울을 합친 듯 맑고,
두 개의 아름다운 다리는 무지개가 떨어진 듯 곱기만 하다.
앙상한 귤나무 위로 밥짓는 연기 피어오르고,
늙은 오동나무에는 가을 빛만 완연하다.
홀로 북쪽 누각에 올라 누구를 생각하는가.
불어오는 바람 맞으며 사조(謝朝)를 그리워 하노라.
선성(宣城).
선성은 안휘성의 남부에 있는 아름다운 도시이다.
이백(李白)이 굳이 노래하지 않아도 경정산(敬亭山)이 있고,
사공루(謝公樓)가 있어서 천하에 이름이 높았다.
육조(六朝)의 대시인인 사조는 선성의 태수로 있으면서 그
아름다움에 반해 북쪽에 높은 누각을 짓고 그 위에 올라가
선성의 절경을 감상하고는 했던 것이다.
저녁 하늘이 온통 핏빛으로 붉게 물들 즈음,
석양의 긴 그림자를 밟으며 선성의 남문(南門)을 들어서는 한
인영이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 검은 안대, 번뜩이는 외눈...
바로 당금 무림을 온통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넣고 있는
신화의 사나이, 냉혈무정 노독행이었다.
노독행은 선성의 남문대로(南門大路)를 천천히 걷고 있었다.
석양에 드리워진 그의 그림자는 유난히 길고 어두워 보였다.
멀지않은 곳에 취선루(醉仙樓)라는 간판이 붙은 주루가
있었다. 노독행의 발길은 그 주루로 향했다.
아직 저녁 시간이 되지 않아서인지 주루는 약간 한산했다.
노독행은 구석진 곳에 앉았다.
"무얼 드릴까요, 손님?"
점소이 하나가 빠르게 다가와 별로 깨끗하지도 않은 수건으로
탁자를 열심히 닦으며 물었다.
"죽엽청. 안주는 아무 거나."
점소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재빨리 주방으로 사라졌다.
노독행은 턱을 고인 채 무심코 벽을 바라보았다.
거미 한 마리가 열심히 벽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노독행이 바라보고 있는 동안 거미는 벽을 기어올라가더니
벽과 천장이 만나는 모서리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노독행은 물끄러미 거미가 집을 짓는 광경을 올려다 보았다.
그는 문득 자신의 신세가 저 거미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이면 당장 점소이의 손에 깨끗하게 치워질 거미집의
운명을 거미는 전혀 모르고 있을 것이다. 오직 집을 짓는 일에만
충실할 뿐이다.
어쩌면 거미집의 운명을 알고 있다고 해도 거미는 집을 지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일외에는 거미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노독행도 마찬가지였다.
내일의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채 그는 복수를
하기 위해 다시 또 길을 떠나왔다. 어쩌면 그는 거미보다 비참한
종말을 맞이할 지 몰랐다. 복수만을 생각하며 날뛰다가 허무하게
쓰러질지 모른다.
그래도 그는 복수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외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나는 과연 거미인가?
복수에 미친 한 마리 거미...
어제 그는 방립동과 모용추수에게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떠나왔다.
이름모를 작은 봉우리에서 엽동을 만난 다음 그는 그길로
이쪽을 향해 온 것이다.
이유는 한 가지였다.
- 양무극은 육십년 전에 동천목산(東天目山)의
구유곡(九幽谷)이란 곳에 살고 있었소. 그곳에 가면 혹시 그자에
대한 단서를 잡을지도 모르겠소.
엽동은 이 말밖에는 하지 않았다.
무언가 좀더 중대한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았으나 끝내는
하지 않았다.
노독행이 그 점에 대해서 묻자 엽동은 씁쓸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 아직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없소. 하지만
어쩌면...어쩌면 당신에게 좀더 정확한 이야기를 해 줄수 있을지
모르오. 그 기간이 며칠이 걸릴지 혹은 몇 달이 걸릴지 그건
모르겠지만...
그 말을 할 때의 엽동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하고 침울했다.
노독행도 더 이상 그를 추궁하지 않았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만의 비밀을 가질 권리가 있으며,
누구도 그 권리를 파괴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단지 그는 엽동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 저 아래 내려가면 두 남녀가 있을 거야. 그들에게 말해줘.
나는 해야할 일이 있어 떠난다고. 그리고 일이 끝나면
돌아오겠다고.
엽동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 그외에 더 할 말은 없소?
노독행은 그때 잠깐 머뭇거렸었다.
하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 없어.
그리고 그는 주저없이 몸을 돌려 산을 내려온 것이다.
그는 의식적으로 방립동과 모용추수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 했다.
한 번에 한 가지씩 생각하자.
지금은 우선 복수에 대한 생각을 할 때다.
양무극은 과연 살아 있는가?
그리고 만약 살아 있다면 그가 과연 조향령을 데리고 간
금안의 복면인인가?
만약 그렇다면 그자와 조향령의 관계는?
그리고 그들에게는 대체 무슨 비밀이 있을까?
그 일이 혹시 과거 노가살수문의 혈겁과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
수많은 의문점들이 쉴 사이 없이 뇌리에 떠올랐다.
의문은 많았지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
뿐이었다.
동천목산의 구유곡으로 직접 가보는 수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이다.
점소이가 술병과 몇 가지 안주를 가지고 왔다.
노독행은 술병을 병째 들고 몇 모금 들이켰다.
죽엽청 특유의 강렬하면서도 향긋한 향기가 입안에 감돌며
짜릿한 것이 목구멍을 넘어갔다.
그때 쿵쿵 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주루안으로 한 사람이
들어왔다.
그 인물이 들어오자 주루안의 공기가 갑자기 홱 달라졌다.
들어온 인물이 대단한 기도를 풍기는 절대고수이거나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아름다운 미녀여서가 아니었다.
오직 그자의 전신에서 풍기는 지독한 악취 때문이었다.
그는 전신에 누더기를 걸치고 백발이 성성한 늙은 거지였다.
이 세상에 색깔이 모두 몇 종류나 되는가?
이 늙은 거지의 옷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 옷감의 종류가 모두 얼마나 되는가?
그것도 역시 이 늙은 거지의 옷을 보면 너무도 쉽게 알 수가
있다.
도데체가 걸치고 있는 옷의 어느 한 부분도 성한 곳이 없었다.
그야말로 덕지덕지 꼬매고 기워서 도저히 원래 입고 있던
의복의 색깔이 어느 것이었는지 알 수가 업었다.
게다가 그 늙은 거지의 몸에서 풍겨나오는 악취란....
설사 지독한 감기가 걸린 코맹맹이라 할지라도 코를 움켜잡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것이었다. 늙은 거지에게서
가까운 곳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벌써 허겁지겁 멀찌감치 떨어진
탁자로 이동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 늙은 거지는 자기가 입고 있는 옷이 호화로운
곤룡포라도 되는 양 한손에는 꼬질꼬질한 손때가 묻은
죽장(竹杖)을 들고 한손은 뒷짐을 진 채로 거만한 표정으로
주루의 입구에 딱 버티고 서 있었다.
주루에 있던 사람들은 그 늙은 거지의 표정이 너무도
가소로워서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늙은 거지는 생쥐처럼 작고 검은 자위만 번들거리는 눈으로
주루를 쓰윽 훑어 보았다.
그러다가 무엇을 보았는지 입에 침을 질질 흘리며 한쪽으로
보무도 당당하게 걸어갔다.
어깨를 앞으로 쭉 내밀고 으쓱거리며 걸어가는 늙은 거지의
모습은 정말 눈뜨고는 못봐줄 광경이었다.
한쪽에 서 있던 점소이는 당장에라도 손도끼를 들고 늙은
거지의 뒷통수를 후려갈기고 싶다는 표정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늙은 거지의 몸에서 나는 악취가 너무 지독해서
접근하기도 싫은 것 같았다.
늙은 거지가 다가간 곳은 주루의 중앙에 있는 제법 커다란
탁자였다.
탁자에는 질좋은 금의를 걸친 당당한 체구의 중년인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중년인의 앞에 놓인 탁상위에는 그야말로
산해진미(山海珍味)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호화로운 음식들이
잔뜩 놓여져 있었다.
늙은 거지는 금의중년인의 바로 옆으로 오더니 두 눈 가득
탐욕스런 빛을 번들거리며 탁자위의 음식들을 정신없이
바라보았다.
"헤...이 음식들은 모두 자네가 시킨 것인가?"
금의중년인은 늙은 거지가 가까이 다가올 때부터 풍겨오는
지독한 악취 때문에 이미 잔뜩 눈쌀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런데 늙은 거지가 입을 열자 그 안에서는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참으로 끔찍한 악취가 마구 뿜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금의중년인은 우거지상을 한 채 한손으로 코를 막았다.
"그렇소. 그런데 왜 그러시오?"
늙은 거지는 누런 이를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아무리 봐도 자네 혼자 먹기에는 양이 너무 많은 것 같네.
그래서 노부가 자네의 부담을 덜어주려고 하는 것이지."
말이야 번듯하지만 늙은 거지의 속셈은 삼척 동자가 보기에도
뻔한 것이었다. 돈 한 푼 안내고 금의중년인의 음식을 나누어
먹겠다는 심보였다.
금의중년인도 바보는 아닌지 짙은 송충이 같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냉랭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 혼자 충분히 해결할 수 있소. 그러니 노인장은 걱정말고
가보시오."
늙은 거지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
"괜찮겠나? 보아하니 자네는 식성(食性)도 그리 좋은 것 같지
않은데 너무 무리하다가 배탈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러나?"
제딴에는 제법 자상하기 그지없는 표정을 지으며 말하는 것
같았으나 금의중년인이 보기에는 시커먼 속이 빤히 들여다
보이는 가소롭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금의중년인은 딱 부러지게 말했다.
"음식이 남아도 내 음식이 남는 것이고 배탈이 나도 내 배가
탈이 나는 것이니 노인장은 더 이상 신경쓰지 마시오."
왠만큼 낮짝이 두꺼운 인물이라도 이런 말을 들었다면 그대로
돌아서고 말았을 것이다.
하나 늙은 거지의 안면은 인세(人世)에 보기 드문 가공할
철판으로 덮혀 있는 것이 분명했다. 늙은 거지는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사해(四海)가 모두 한 식구인데 자네는 어떻게 그런 섭한
말을 하는가? 노부는 지금까지 공정한 것을 최고의 원칙으로
알고 살아왔네. 콩알 반쪽이 있어도 배고픈 사람과 함께 나누고
한 잔의 박주(薄酒)일망정 목마른 사람들과 함께 마셨네. 그러니
어찌 자네의 괴로움을 보고만 있겠는가? 노부가 그 괴로움을
함께 나누어 가지겠네."
이어 금의중년인이 무어라고 할 사이도 없이 그의 앞에 털썩
주저앉더니 상위의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기 시작했다.
금의중년인이 어처구니가 없어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사이에
늙은 거지는 눈부신 속도로 상위의 산해진미들을 섭렵하고
있었다.
"후루룩...쩝쩝..."
늙은 거지의 손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이 오리구이의 뒷 다리는 정말 입에 살살 녹는군. 잉어찜도
제법 잘 익었고....아이구. 이 연화탕(蓮花湯) 좀 봐. 어쩌면
이렇게 간이 잘 맞을까. 이 소소삼선(素燒三鮮)은 맵지도 않고
짜지도 않은게 정말 부드럽군."
늙은 거지는 금의중년인의 앞에 놓인 술병을 병째 들고
벌컥벌컥 마셨다.
"카....죽이는구나. 이게 말로만 듣던 그
금존청(金尊淸)이라는 거로군."
늙은 거지는 보기만 해도 구토가 넘어올 정도로 더러운
옷소매로 입가를 쓰윽 닦더니 금의중년인을 바라보며 누런 이를
드러내고 히죽 웃었다.
"이런 음식을 다 먹지 못하고 남겨야 하는 자네의 고통이
어떤지 충분히 짐작이 가네. 자. 그럼 본격적으로 고통을 함께
나누어 볼까?"
늙은 거지는 양 소매를 걷어 붙이고는 정말로 본격적인
음식사냥에 나섰다.
시커먼 손으로 여기저기 음식을 조물딱거리며 걸신들린 듯이
먹고 있는 늙은 거지를 보자 금의중년인은 방금전에 먹었던
음식을 모조리 게워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늙은 거지는 양 손으로 정신없이 음식을 입속으로 쳐넣으며
금의중년인을 향해 손짓을 했다.
"자네도 먹게..."
입속에 가득 음식을 쳐넣고 말을 하니 입속에 있던 내용물들이
밖으로 삐져 나 왔다. 늙은 거지가 더러운 손으로 입밖에 삐져
나 오는 내용물을 도로 쑤셔 넣는 광경을 보자 금의중년인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늙은 거지는 반쯤 삐져 나 온 오리다리를 열심히 입속으로
우겨넣으며 금의중년인을 올려다 보았다.
"아니 왜 일어서는가? 벌써 배가 부른가?"
금의중년인은 싸늘한 눈으로 늙은 거지를 노려보았다.
"노인장. 나는 참을만큼 참았소."
늙은 거지는 히죽 웃었다.
"먹고 싶은걸 참았단 말인가? 그럼 어서 먹게. 그런걸 참으면
병이 되네."
늙은 거지는 자기가 뜯다만 오리의 뒷다리를 내밀었다.
금의중년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정말 말로 해서는 안되겠군."
늙은 거지는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암. 음식을 먹을 때는 말을 해서는 안되지."
금의중년인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늙은 거지의 멱살을 바짝
움켜잡았다.
작고 왜소한 늙은 거지의 몸은 당당한 체구의 금의중년인의
손아귀에 붙잡히자 너무도 쉽게 쳐들려졌다.
"어어...? 자네 왜 이러나?"
늙은 거지는 양 손을 허우적거리며 발버둥을 쳤다. 그러는
와중에도 입속에 있는 음식을 쉴사이없이 오물거리고 있었다.
금의중년인은 멱살을 잡혀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으면서도
계속 음식을 삼키고 있는 늙은 거지의 모습을 보자 어이가 없는
모양이었다.
"허허참..."
한동안 너털웃음을 짓던 금의중년인은 이내 두 눈에 쌍심지를
돋구었다.
늙은 거지가 음식찌꺼기가 더덕더덕 붙어 있는 양 손을 입으로
쪽쪽 빨더니 자신의 멱살을 잡고 있는 금의중년인의 소맷자락에
쓱쓱 문질렀던 것이다.
금의중년인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벼락 같은 호통을 내지르며
늙은 거지의 몸을 집어 던졌다.
"이 망할 놈의 늙은이가....!"
늙은 거지의 몸은 화살처럼 허공을 가로지르고 날아갔다.
"아이구...젊은 놈이 늙은 노인네를 잡는다...!"
늙은 거지는 사지를 발버둥거리며 날아갔다.
공교롭게도 늙은 거지는 노독행이 앉아 있는 탁자 방향으로
날아왔다.
"아이고고....나 죽는다!"
죽는다고 멱따는 듯한 비명을 지르던 늙은 거지는 그대로
노독행의 탁자위로 떨어졌다.
아니, 떨어지려고 했다.
그 순간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금시라도 탁자위에 내동댕이쳐질 줄 알았던 늙은 거지의 몸이
빠르게 회전하며 노독행의 머리를 향해 질풍 같은 양손을
휘두르는 것이 아닌가?
파파팍!
허공이 온통 늙은 거지의 주름진 손그림자에 휩싸여 버렸다.
기경(奇驚)스럽게도 늙은 거지는 단 일수에 무려 마흔 여덟
개의 장영(掌影)을 뿌려내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늙은 거지를 집어던졌던 금의중년인 또한
노독행을 향해 질풍처럼 달려오며 오른주먹을 앞으로 쭈욱
내밀었다.
쾌액!
한 줄기 섬뜩한 음향과 함께 금의중년인의 주먹은 철퇴와 같은
기세로 노독행의 가슴을 향해 폭사되어 왔다.
그 주먹에 실린 가공할 위세는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2
허공에는 우박처럼 떨어져 내리는 수십 개의 손그림자!
가슴앞으로는 철추(鐵鎚)와 같은 위세로 다가오는 무서운
주먹!
두 공세앞에 무방비상태로 놓인 노독행의 몸은 그대로 박살이
나고 말 것 같았다.
노독행은 그자리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그는 전혀 피할 생각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어찌 보면 삶을
포기한 사람같기도 했다.
그런데 그때 다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그토록 맹렬한 기세로 날아오던 늙은 거지의 장세가 노독행의
머리에서 한 치쯤 되는 곳까지 왔을 때 갑자기 씻은 듯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뿐만 아니라 금시라도 노독행의 가슴을 궤뚫어 버릴 듯
다가오던 금의중년인의 주먹 또한 노독행의 바로 앞에서 방향을
바꾸어 노독행의 관자놀이옆을 지나가 버렸다.
중인들은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눈을 크게 뜨고 장내를
주시했다.
늙은 거지와 금의중년인은 노독행에게서 반 장 떨어진 앞에
나란히 서 있었다.
두 사람의 얼굴에는 괴이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늙은 거지는 한동안 자리에 미동도 않고 앉아 있는 노독행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자네는 왜 우리의 공격을 피하지 않았나?"
노독행은 천천히 들고 있던 술병을 들이켰다.
탁!
술병을 내려 놓았을 때 노독행은 나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살기가 없는 무공은 아이들의 손장난이나 마찬가지야."
늙은 거지와 금의중년인의 안색이 모두 굳어졌다.
늙은 거지는 날카로운 눈으로 노독행을 쏘아보며 되물었다.
"우리의 공격이 아이들의 손장난이라고?"
노독행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늙은 거지는 돌연 히죽 웃었다.
무언가 몹시 흥미로운 일을 만난 사람처럼 두 눈에 반짝이는
광채를 뿜어내고 있었다.
"우리의 무공이 아이들 손장난이라면 자네의 무공은
어떤건가?"
노독행은 짤막하게 말했다.
"나는 사람을 죽이지."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데 그 말을 듣자 늙은 거지는 왠지
가슴이 섬뜩해 왔다.
노독행은 천천히 고개를 쳐들고 늙은 거지를 올려다 보았다.
"난 사람을 죽일 때가 아니면 무공을 쓰지 않아. 그리고 일단
손을 쓰면 상대의 숨통을 끊어놓을 때 까지는 절대로 멈추지
않아."
나직한 음성이었으나 그 음성을 듣는 순간 주위는 갑자기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중인들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몸에 오한이 생겨서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늙은 거지는 평생을 강호속에서 살면서 수많은 일을
겪어왔지만 이렇게 절실하게 말을 하는 사람은 아직 본 적이
없었다.
이자는 절대로 허튼 말을 하는게 아니다.
정말로 손을 쓰면 반드시 상대를 죽이고야 말 것이다.
반드시 그렇게 할 것이다.
늙은 거지는 갑자기 머리를 박박 긁었다.
허연 비듬이 수북히 늙은 거지의 어깨와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늙은 거지는 비듬을 털어낼 생각도 하지 않고 탄식인지
감탄인지 모를 소리를 중얼거렸다.
"냉혈무정...과연 이름 그대로군. 정말 냉혈무정한 사나이야."
"내....냉혈무정?"
그들에게서 가까이에 있던 손님들중 몇 사람이 늙은 거지의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까무러칠 듯한 비명을 내질렀다.
순간 장내가 완전히 아수라장으로 변해 버렸다.
"냉혈무정이다!"
"냉혈무정이 나타났다!"
"저자가 바로 단신으로 천상회를 무너뜨리고 스물여덟 명의
절정고수들의 합공(合攻)을 물리친 바로 그 사람이다!"
여기저기서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 터져 나 오고 탁자를 뒤엎는
소리가 거푸 터져 나 왔다.
그중에는 냉혈무정이란 이름만 듣고도 놀라서 주루밖으로
달려나가는 자들도 있었고, 탁자밑으로 기어들어가는 인물들도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은 눈에 불을 켜고 당금 무림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는 신화의 주인공을 보기 위해 앞으로 다가왔다.
냉혈무정은 단순한 공포의 상징이 아니었다.
그는 혼자의 힘으로 무인(武人)이라면 누구나가 꿈꾸는 신화를
이루어낸 장본인이었다.
철저한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세계에서 그는 처절할 정도로
무서운 무공과 강인한 체력, 불굴의 정신력으로 수많은
혈전속에서 살아남았다. 불과 넉달 남짓한 기간동안에 그가
지나온 길을 본 사람이라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할 것이다.
무림역사상 그처럼 끔찍하고 처절한 피의 행로(行路)를 걸어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중인들은 두려움과 공포, 경이와 흥분이 가득한 눈으로 검은
안대의 사나이를 주시하고 있었다.
늙은 거지는 별뜻없이 중얼거린 자신의 말 한마디가 이런
소란을 일으킨 것을 보고 고소를 금치 못했다.
"이거 노부답지 않게 실수의 연속이로군. 이러다가는 온
선성의 사람들이 모두 몰려나오겠는데."
늙은 거지는 아직도 기름기가 묻어 있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며 물었다.
"노부가 누구인지 아는가?"
노독행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무공과는 달리 강호의 견식은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늙은 거지는 히죽 웃었다.
"혹시 낙구천이라는 이름을 들어 보았나?"
노독행은 물론 들었다. 그것도 바로 어제 엽동의 입을 통해서
듣지 않았는가?
노독행은 늙은 거지의 봉두난발한 얼굴을 빤히 올려다 보았다.
"전궁신개 낙구천?"
늙은 거지는 누런 이를 한껏 드러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바로 노부일세."
하나 노독행은 그 이름을 듣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뜻밖이라는 표정도 없었고, 의외라는 빛도 없었다.
낙구천은 공연히 머쓱해져서 애꿋은 머리만 박박 긁고 있었다.
하나 이이름을 들은 중인들은 다시 한 번 놀랐다.
전궁신개 낙구천은 천하무림에 산재해 있는 십만(十萬)에
달하는 거지떼들의 우두머리였다. 당대의 개방 용두방주가
이토록 지저분하고 초라한 몰골의 노인일 줄이야....
하나 중인들의 놀람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이번에는 지금까지 말없이 노독행을 응시하고 있던
금의중년인이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나는 철력파라고 하오. 내 이름도 들은 적이 있소?"
철력파!
강북무림의 초절정고수이며 철모방의 방주인 광룡 철력파가
바로 눈앞의 금의중년인이었던 것이다.
노독행은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예전에."
예전에 들은 적이 있다는 뜻이었다.
광룡 철력파는 현재의 강북에서는 가장 막강한 실력자중 한
사람이었다. 그런 철력파가 별로 대단치 않은 삼류인물 같은
취급을 받고 있었다.
철력파는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입가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영광이오. 천하의 냉혈무정이 내 이름을 알고 있다니."
철력파의 이 말은 당금 무림에서 노독행이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개방의 용두방주인 낙구천과 철모방의 방주인 철력파.
두 절대고수가 나타나자 중인들은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이 좁고 허름한 주루안에 당대 무림에서 명성이 자자한 인물이
세 사람이나 와 있는 것이다.
철력파는 주위를 힐끗 돌아보다가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엽동에게서 귀하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소. 어떻소?
자리를 바꿨으면 하는데..."
철력파가 엽동의 이름을 꺼낸 것은 노독행에게 악의(惡意)를
품고 있지 않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자신들이
노독행을 찾아온 것에 엽동이 연관되어 있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었다.
노독행은 원래 이곳을 떠나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먼저 성큼성큼 주루밖으로 걸어나갔다.
주위에 늘어서 있던 사람들이 허겁지겁 비켜서며 그에게 길을
만들어 주었다.
철력파는 낙구천을 돌아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정말 만만한 인물이 아니로군. 그렇지 않소?"
낙구천은 노독행의 뒷 등을 빤히 바라보다가 히죽 웃었다.
"그거야 이미 알고 있는 사실 아닌가? 그나저나 냉혈무정의
솜씨나 좀 구경하려고 했는데 망신만 당한 꼴이 되고 말았군
그래."
철력파는 소리없이 웃으며 노독행의 뒤를 따라 몸을 움직였다.
선성에서 북쪽으로 이리쯤 가면 하나의 산(山)이 나온다.
산은 그리 높지 않았으나 계곡이 울창하고 수림이 우거져서
아름다운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이곳이 천하에 이름높은 경정산(敬亭山)이다.
경정산은 달리 소정산(昭亭山)이라고도 하며
사산(査山)이라고도 불리운다.
주위에 어둑어둑 땅거미가 짙어갈 무렵에 노독행은 경정산이
코앞에 보이는 얕으마한 구릉위에 올라 섰다.
그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철력파와 낙구천이 나란히
걸어오고 있었다.
이백은 경정산을 두고 아무리 보아도 싫증나지 않는다고
노래했지만, 붉은 노을에 잠겨 있는 경정산은 정말로 보는
사람을 취하게 만들 정도로 아름다웠다.
하나 노독행은 경정산의 경치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그는 구릉의 정상에서 우뚝 선 채 뒤를 돌아보았다.
철력파와 낙구천은 그에게서 이 장 떨어진 곳에 걸음을
멈추었다.
노독행은 짤막하게 물었다.
"나를 찾아온 이유는?"
단도직입적인 질문이었다.
노독행은 언제나 이렇게 직접적으로 물었다. 그는 말을 빙빙
돌려서 하는 사람을 제일 싫어했다.
그의 말에 대답한 사람은 낙구천이었다.
"한 사람이 자네를 만나려고 하네."
노독행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낙구천은 조금전의 희희덕거리던 모습이 어디론가로 사라지고
진지한 표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가 자네를 만나기 전에 자네는 반드시 노부에게 한 가지
약속을 해 주어야 하네."
그 말을 할 때의 낙구천의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엄숙했다.
대체 노독행을 만나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그리고 낙구천은 왜 이런 말을 하는가?
노독행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낙구천은 섬광이 번득이는 눈으로 노독행을 응시하며 무거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가 무어라고 하든 자네는 결코 그와 싸워서는 안되네. 그와
싸우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게."
노독행은 냉정한 음성으로 물었다.
"내가 왜 그런 약속을 해야하지?"
낙구천은 약간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나는 그와는 별로 안면이 없네. 그러니 그자를 설득할 수도
없지."
노독행의 얼굴에 싸늘한 웃음이 떠올랐다.
"나는 다르단 말이지?"
낙구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라면...."
"왜 그렇게 생각하지?"
낙구천은 잠시 침음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네가 노일환의 아들이니까."
"그래서?"
"노부는 과거에 자네의 부친에게 한 가지 도움을 준 적이
있지. 그때 자네의 부친은 언제고 노부의 한 가지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했네."
이어 낙구천은 품속에서 하나의 물건을 꺼내들었다.
그것은 한 뼘 정도되는 단도였다.
단도는 고색 창연한 무늬가 수놓아진 검집에 들어 있었다.
단도의 끝에 매어진 유난히 붉은 수실이 보는 사람의 시선을
끌었다.
낙구천은 그 단도를 노독행의 눈앞에 내밀었다.
"이것을 알아보겠나?"
노독행의 눈은 그 단도를 볼 때부터 기이한 빛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노독행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단혈비(丹血匕)."
단혈비는 노독행의 아버지인 노일환의 애물(愛物)이었다.
노독행은 단혈비에 얽힌 내력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작은 단도에는 두 남녀의 절실한 사랑이 담겨 있었다.
노독행의 어머니는 무가(武家)와는 거리가 먼 선비집안의
후손이었다.
노일환이 우연히 그녀를 만나 사랑을 느꼈고, 그녀도 노일환의
사내다움에 반해 장래를 약속했다. 그때 그녀는 노일환에게
금가락지를 선물했고, 노일환은 자신이 가장 아끼고 있던
단혈비를 정표(情表)로 주었다.
하나 그가 정식으로 그녀의 집안에 그녀와 결혼하겠다고
청혼하러 갔을 때, 그녀의 집안에서는 무림의 가문에 시집보낼
수 없다며 맹렬하게 반대를 했었다. 특히 그녀의 아버지가 더욱
심했다.
노일환은 오 일 동안 그집의 대문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래도 고집불통의 그녀 아버지는 결혼을 승낙하지 않았다.
육일 째 되는 날 노일환이 거의 탈진지경에 이르렀을 때,
그녀가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녀의 손에는 섬뜩한 빛을
발하는 단혈비가 들려 있었다.
사람들이 놀라 지켜보는 사이에 그녀는 단혈비를 자신의
가슴에 꽂았다.
노일환은 고함을 지르며 그녀에게 달려갔고, 그녀의 아버지도
눈물을 뿌리며 맨발로 달려나왔다.
단혈비는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심장옆을 뚫고 들어왔다.
결국 그녀의 아버지는 두 사람의 결혼을 승낙했고, 그녀는
한달 간의 요양 끝에 어느 정도 몸을 회복하고 노가살수문으로
시집을 오게 되었던 것이다.
하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나 할까?
그녀는 노독행을 낳다가 그때 입은 상처가 재발하여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 후로 단혈비는 노일환의 손에서 떠난 적이
없었다.
금가락지와 단혈비는 노일환에게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를
떠올려주는 단 두 개의 물건이었다.
그중 하나인 단혈비가 지금 낙구천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이다.
노독행은 무슨 일이 있어도 단혈비를 회수해야만 했다.
그것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의 정표이며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물건이었다.
낙구천은 노독행의 표정을 살피며 입을 열었다.
"자네가 그자와 싸우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이 단혈비를
자네에게 돌려 주겠네. 그리고 그것으로 자네 아버지와 노부는
서로 아무것도 빚진게 없게 되는 걸세."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면 단혈비를 회수할 수 있다.
아버지가 남긴 유일한 빚을 청산(淸算)할 수 있다.
노독행은 당연히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다.
하늘의 별을 따오라고 해도 따오겠는데 그런 부탁쯤이야 듣지
못하겠는가?
하나 그는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때 하나의 담담한 음성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그 제안은 마음에 들지 않는구료, 낙방주(洛幇主)."
동시에 두 명의 인영이 장내에 나타났다.
그리고 마침내 운명적인 만남이 시작되었다.
3
일남일녀(一男一女).
남자는 눈부신 백의를 입었고, 여자는 검은 흑의를 걸쳤다.
남자는 훤칠한 키에 관옥(冠玉) 같은 얼굴을 지닌 절세의
미남자였고, 여자는 별빛보다 찬란한 눈동자를 지닌 아름다운
미녀였다.
두 남녀가 나타나자 주위가 온통 환해지는 것 같았다.
누구라 해도 그들이 너무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노독행은 그중 한 사람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언제 보아도 사람을 매혹케 하는 기이한
매력을 담고 있었다.
흑의망사녀는 바로 사마표향이었다.
하나 노독행의 시선은 그녀의 옆에 서 있는 준수한
미남자에게로 향해 있었다.
백의미남자는 노독행과 시선이 마주치자 빙긋 웃었다.
같은 남자가 보아도 정신이 아찔할 정도로 매력적인
웃음이었다. 하물며 여자가 보았다면 제아무리 싸늘하고
콧대높은 여자라 할지라도 방심(芳心)을 끓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한동안 두 사람은 서로를 응시한 채 미동도 않고 있었다.
처음 본 순간부터 두 사람은 상대에 대해 무언가
숙명(宿命)적인 것을 느꼈다.
마치 그들은 너무도 오랫동안 서로를 기다려온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주위의 사람들은 마주 보고 있는 두 사람에게서 풍기는
분위기에 짓눌린 듯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특히 낙구천은
단혈비를 든 채로 낭패에 가까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백의미남자는 한동안 노독행을 응시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드디어 만나게 되었군."
이어 그는 자신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는 장록번이오."
장록번!
이 절세의 미남자가 바로 소림사상 최고의 고수이며
우내제일(宇內第一)의 기재(奇才)라는 무적수사 장록번이었던
것이다.
노독행은 짤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소."
물론 알고 있었다.
아직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었지만 노독행은 그를 본 순간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기도를 풍기는 인물이 장록번외에 누가 있겠는가?
한쪽은 소림사가 배출해 낸 당대무림의 제일고수(第一高手)!
다른 한쪽은 천년동안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다는 무쌍류의
유일한 후계자!
영원히 양립(兩立)할 수 없는 두 절대고수가 서로 마주보고 서
있자 중인들은 터질 듯한 긴장감에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심지어는 사마표향 조차도 망사 너머로 혜성 같은 두 눈을
반짝이며 말없이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장록번의 입가에는 훈훈한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무쌍류가 다시 무림에 나타났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나는
사실 별로 믿지 않았었소. 백 년이란 공백(空白)이 있다는 건
무쌍류의 무예가 절전(絶傳)되었음을 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오."
장록번이 그렇게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무쌍류의 무예는 구결이나 비급으로는 전할 수 없다.
반드시 직접 가르쳐야만 하는 것이다.
백 년동안 무쌍류의 무예가 강호에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백
년동안 누구도 무쌍류를 배우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무쌍류의 전인이 후계자를 얻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독고무정이 아니었다면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장록번은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말을 계속했다.
"시체들의 상흔(傷痕)을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고서야 비로소
나는 강호무림에 무쌍류가 다시 나타난 것을 깨달았소. 나는
그때처럼 기쁜 적이 없었소. 왜인지 아시오?"
노독행은 외눈을 번뜩이며 장록번을 보고 있다가 짤막하게
말했다.
"외롭지 않아서."
장록번의 눈에서도 노독행처럼 번쩍이는 빛이 감돌고 있었다.
"그렇소. 드디어 나는 제대로 된 적수(敵手)를 가지게 된
것이오. 그건 정말 무인(武人)으로서의 가장 큰 기쁨이지."
예로부터 정상에 선 자는 고독한 법이다.
한 사람이 낮은 곳에 있을 때는 그저 높은 곳만 향해서
올라가게 된다. 하지만 높이 올라갈수록 함께 올라갈 수 있는
사람은 적어져서 마침내 정상에 섰을 때는 비로소 오직 자신만이
홀로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법이다.
그때의 고독감은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알 수 없다.
절대로 알 수 없다.
장록번은 다시 웃었다.
"그때부터 나는 당신을 찾아 헤메게 되었던 것이오."
노독행의 차가운 입가에도 언제부터인지 희미한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한동안 두 사람은 서로를 응시한 채 미소짓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낙구천이 버럭 소리치며 두 사람 사이로
뛰어들었다.
"안돼! 자네들은 절대로 싸워서는 안돼!"
낙구천의 얼굴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잔뜩 찌푸려지고 긴장된
모습이 역력했다.
"정말 모르겠나? 자네들이 서로 맞부딪치면 어떤 일이
벌어질것인지를...?"
낙구천의 음성에는 절실한 빛이 담겨 있었다.
"자네들은 강호무림에서 실로 오랜만에 등장한 최고의
인재들일세. 자네들이 부딪쳐 누가 이긴다해도 강호무림은 실로
아까운 인재를 잃게 되는 거란 말이야. 그건 무엇으로도 상쇄될
수 없는 엄청난 손실일세."
두 사람은 아무 말없이 그대로 서 있었다.
그들이 전혀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 같지 않자
낙구천의 얼굴에는 초조한 빛이 가득 떠올랐다.
"자네들 정도의 고수들이 서로 싸우면 그 결과는
명약관화하네. 틀림없이 양패구상(兩敗俱傷)하고 말거야. 누가
이기든 두 번 다시 치유하기 힘든 처참한 신세가 되고
말거라구."
두 사람은 여전히 서로를 응시한 채 아무런 말이 없었다.
낙구천의 이마에는 진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정말 답답한 친구들이군. 이렇게 앞뒤가 꽉 막힐 수 있나?"
낙구천은 문득 생각난 듯 사마표향을 돌아보았다.
"사마영주(司馬令主). 영주가 좀 말해 보게."
사마표향의 눈빛은 여전히 차고 맑았다.
그녀는 조금도 흐트러짐 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남자는 자신을 책임지는 거에요. 군사(軍師)께선 굳이 그들을
말리려고 하지 마세요."
낙구천은 그녀가 이런 식으로 말할 줄은 몰랐는지 일시지간 할
말을 잊은 듯 멍하니 서 있었다.
낙구천은 표향령에서 군사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엽동이 표향령을 떠나기 전에 자신을 대신할 인물로 낙구천을
지목해서 그를 설득해 군사로 앉혔던 것이다.
낙구천은 사마표향과 장록번이 보통 사이가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어째서 장록번이 이토록 위험한 줄타기를
하려는 것을 막으려 하지 않는 것일까?
그녀는 장록번이 노독행에게 패할 리 없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하나 낙구천은 그들이 싸운다면 누가 이길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하늘마저도 승부(勝負)를
예측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 정도의 고수들이라면 일반인들의 예측을 벗어나는 일들이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는 것이다.
낙구천이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그녀는 냉정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들의 인생은 그들 스스로가 정하는 거에요. 아무도 그들의
인생을 대신할 수 없어요."
마침내 낙구천은 그녀를 설득하는 것을 포기했다.
아마도 그녀의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한 산(山)에 두 마리의 호랑이가 있을 수 없듯이 그들은
애초에 도저히 공존할 수 없는 존재들일지도 몰랐다.
그들의 인생 자체가 끊임없는 투쟁(鬪爭)의 연속이며, 그런
투쟁속에서만 삶의 보람을 찾는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들의 인생은 찬란한 유성(流星)과도 같다.
두 개의 유성이 서로 부딪친다면 그 빛은 어느 때보다도
찬연히 빛나겠지만, 결국은 상대방을 태우고 자기 자신을 태울
것이다.
그리고 그 후에 아무리 유성의 찬란함을 떠들어 보았자 그것은
한낮 부질없는 짓이 아니겠는가?
낙구천은 다시 그들에게 다가가 무어라고 말하려 했다.
그때 노독행이 불쑥 입을 열었다.
"장록번과 나와의 승부를 방해하면 가만두지 않겠어."
그 음성에 실린 냉혹함은 낙구천으로서도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낙구천은 노독행이 정말로 그렇게 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나 낙구천은 몇 번을 망설이다가 결국은 입을 열고 말았다.
"자네들은 싸워서는 안돼. 적어도 지금은...."
노독행은 천천히 낙구천을 돌아보았다.
그의 번뜩이는 시선은 그의 마음속에 무서운 살심(殺心)이
꿈틀거리고 있음을 여실히 나타내는 것이었다.
낙구천은 그 무서운 안광을 피하지 않았다.
"자네는 잊었나? 노가살수문의 혈겁을 주도한 진정한 흉수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네."
낙구천이 조금만 더 늦게 그 소리를 내뱉었으면 아마도 그의
턱은 노독행의 주먹에 의해 가루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노독행의 오른쪽 어깨가 아주 조금 움직이려다가 다시
멈춰섰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은 낙구천은 모골이 송연해
졌으나 노독행이 멈춰선 것에 안도할 겨를도 없이 다시 입을
열었다.
"조향령은 단지 그들의 하수인(下手人)일 뿐일세. 자네의
집안을 피로 씻고 천상회를 전복시킨 진정한 흉수는 아직도
건재해 있단 말일세."
노독행은 낙구천을 뚫어지게 응시하다가 느릿느릿 물었다.
"그가 누구지?"
낙구천은 노독행의 마음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고 급히
말했다.
"그건 노부도 아직 모르네. 하지만 조향령을 데리고 사라진
복면인을 추적하다 보면 반드시 그들의 배후에 숨은 진정한
흉수의 정체를 알 수 있을걸세."
노독행은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
그때 장록번의 음성이 들려왔다.
"나도 지금은 당신과 승부를 겨루고 싶은 생각이 없소."
노독행의 시선이 장록번에게로 향했다.
장록번은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당신의 몸은 아직 완전한 상태가 아니지. 우리의 승부는 아주
공정한 상태에서 가려져야 하오."
장록번의 지적은 날카로웠다.
노독행의 상처는 비록 거의 아물었으나 과거의 상태를
되찾으려면 아직도 약간의 시일이 필요했다. 무엇보다도 어느
정도의 반복되는 수련을 거쳐야만 냉혈무정 본연의 상태로
되돌아 올 수 있을 것이다.
노독행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그의 말을
부인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의 팽팽한 긴장이 조금 늦추어지자 그제서야
낙구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일단 최악(最惡)의 상태는 면한 것이다.
하나 그는 언제까지고 두 사람의 승부를 늦출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머지않은 장래에 두 사람은 반드시 맞부딪칠 것이다.
그리고 그때는 무슨 일로도 그들을 떼어놓지 못할 것이다.
낙구천으로서는 단지 그 시일이 최대한 늦추어지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떠나가는 노독행의 뒷모습을 장록번과 사마표향, 낙구천,
철력파는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 네 사람의 가슴속에는 각기 다른 상념이 떠오르고
있었다.
철력파에게는 놀라움의 연속이었고, 낙구천은 침통한
마음이었다.
장록번은 무엇이 그리도 흥겨운지 입가에 미소를 그치지 않고
있었다.
그들중 가장 표정의 변화가 없는 사람은 사마표향이었다.
망사 너머로 반짝이는 사마표향의 눈빛은 처음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하나 그런 사마표향의 마음속에도 한 줄기 격동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 장록번은 과연 그를 이길 수 있을까?
아직까지는 아무도 그것을 알 수 없을 것이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첫댓글 즐감하고갑니다.
ㅈㄷㄳ
감사해요~~~^~
즐독
즐감~!
줄독
ㅎㅎㅎ
천적
즐감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즐겁게 보고갑니다!
잘읽었습니다
즐독요
즐감
즐독했습니다~~감사합니다.
즐독!!!!!!!!!!!1
잘읽었음니다
즐독 감사합니다^^^
감사...
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