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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 16,1-15.60.63
1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2 “사람의 아들아, 예루살렘에게 자기가 저지른 역겨운 짓들을 알려 주어라.
3 너는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예루살렘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의 혈통과 태생으로 말하자면, 너는 가나안 땅 출신이다.
너의 아버지는 아모리 남자고 너의 어머니는 히타이트 여자다.
4 네가 태어난 일을 말하자면, 네가 나던 날, 아무도 네 탯줄을 잘라 주지 않고, 물로 네 몸을 깨끗이 씻어 주지 않았으며, 아무도 네 몸을 소금으로 문질러 주지 않고 포대기로 싸 주지 않았다.
5 너를 애처롭게 보아서, 동정심으로 이런 일을 하나라도 해 주는 이가 없었다.
오히려 네가 나던 날, 너를 싫어하여 들판에 던져 버렸다.
6 그때에 내가 네 곁을 지나가다가, 피투성이로 버둥거리는 너를 보았다.
그래서 내가 피투성이로 누워 있는 너에게 ′살아남아라!′ 하고 말하였다.
7 그러고 나서 너를 들의 풀처럼 자라게 하였더니, 네가 크게 자라서 꽃다운 나이에 이르렀다.
젖가슴은 또렷이 드러나고 털도 다 자랐다.
그러나 너는 아직도 벌거벗은 알몸뚱이였다.
8 그때에 내가 다시 네 곁을 지나가다가 보니, 너는 사랑의 때에 이르러 있었다.
그래서 내가 옷자락을 펼쳐 네 알몸을 덮어 주었다.
나는 너에게 맹세하고 너와 계약을 맺었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그리하여 너는 나의 사람이 되었다.
9 나는 너를 물로 씻어 주고 네 몸에 묻은 피를 닦고 기름을 발라 주었다.
10 수놓은 옷을 입히고 돌고래 가죽신을 신겨 주었고, 아마포 띠를 매어 주고 비단으로 너를 덮어 주었으며,
11 장신구로 치장해 주었다.
두 팔에는 팔찌를, 목에는 목걸이를 걸어 주고,
12 코에는 코걸이를, 두 귀에는 귀걸이를 달아 주었으며, 머리에는 화려한 면류관을 씌워 주었다.
13 이렇게 너는 금과 은으로 치장하고, 아마포 옷과 비단옷과 수놓은 옷을 입고서, 고운 곡식 가루 음식과 꿀과 기름을 먹었다.
너는 더욱더 아름다워져 왕비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14 네 아름다움 때문에 너의 명성이 민족들에게 퍼져 나갔다.
내가 너에게 베푼 영화로 네 아름다움이 완전하였던 것이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15 그런데 너는 네 아름다움을 믿고, 네 명성에 힘입어 불륜을 저질렀다.
지나가는 아무하고나 마구 불륜을 저질렀다.
60 그러나 나는 네가 어린 시절에 너와 맺은 내 계약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계약을 세우겠다.
63 이는 네가 저지른 모든 일을 내가 용서할 때, 네가 지난 일을 기억하고 부끄러워하며, 수치 때문에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9,3-12
그때에
3 바리사이들이 다가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4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읽어 보지 않았느냐?
창조주께서 처음부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나서,
5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하고 이르셨다.
6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7 그들이 다시 예수님께, “그렇다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려라.’ 하고 명령하였습니까?” 하자,
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는 자는 간음하는 것이다.”
10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아내에 대한 남편의 처지가 그러하다면 혼인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모든 사람이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허락된 이들만 받아들일 수 있다.
12 사실 모태에서부터 고자로 태어난 이들도 있고, 사람들 손에 고자가 된 이들도 있으며, 하늘 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된 이들도 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받아들여라.”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그리스도의 신부’인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예수님께서 공동체 설교를 마치시고, 갈릴래야를 떠나 유다지역으로 가시자, 그곳에서도 많은 군중이 따랐고 그들을 고쳐주셨는데, 당신을 시험하려는 바리사이의 질문, 곧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마태 19,3)라는 질문을 받고, 결혼과 이혼과 독신에 대한 말씀을 해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이혼을 허락해준 이유가 이혼이 정당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이 완고하였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는 창조의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내 자신을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엄마와 아버지를 선택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분의 고유한 작품일 뿐, 내 자신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그분으로부터 건네진, 당신의 형상이 새겨진 까닭입니다.
서로가 부족하기에, 서로를 위하고 껴안아 주어야 하고, 내어주어야 하고, 서로 한 몸을 이루어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남자와 여자로, 똑같은 권리와 의무를 지닌 서로의 동반자 만드셨습니다.
사실 모세가 이혼을 허락한 것은 이미 이혼당한 여성들을 그대로 놔두면 오히려 더 큰 피해를 보기 때문이었습니다.
곧 '이혼장'이라는 서류도 없이 버림을 받게 될 경우, 여성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사회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생활하다 붙잡히면 간통죄로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마태 19,5)
교부들은 이 말씀을 단순히 남자와 여자와의 관계를 말하는 것만이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 나아가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로운 관계로 해석해 왔습니다.
<이사야서>에서는 이 관계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정녕, 총각이 처녀와 혼인하듯 너를 지으신 분께서 너와 혼인하고, 신랑이 신부로 하여 기뻐하듯 너의 하느님께서는 너로 하여 기뻐하시리라.”
(이사 62,5)
이는 하느님과 인간은 떨어질 수 없는 관계로 한 몸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하느님은 영원에서부터 인간의 신랑이시고 인간은 하느님의 신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세례를 받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남편으로 맞이하고, 그분의 아내가 되는 혼인성사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과의 이러한 깊은 관계가 우리를 가장 품위 있는 존재로 부각시켜줍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신부’인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것은 먼저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곧 그리스도와 사랑으로 하나를 이루며 '한 몸'이 되어 사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마태 19,5)
주님!
받아들여야 살 수 있음은 제가 부족해서 만이 아니라 당신을 사랑한 까닭입니다.
함께 있어야 살 수 있음은 당신이 필요해서만이 아니라 당신이 소중한 까닭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이 바라보는 곳을 바라보게 하소서.
제 자신을 떠나 당신께 나아가게 하소서.
당신 안에서 모든 것이 되고 모든 것 안에서 당신을 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서로 다른 점을 인정하자>
남성은 결혼을 통해 정신적 안정을, 여성은 경제적 안정을 얻으려 한다고 합니다.
한 결혼정보업체가 미혼 남녀 56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결혼을 통해 보완하고 싶은 것으로 남성의 54.6%가 ‘정신적 안정 및 풍요’를 꼽았고, 12.1%는 ‘가사에 도움’이라고 답했습니다.
반면에 여성들은 47.2%가 ‘경제적 안정’을 꼽았고, 정신적 안정 및 풍요가 25%, 사회적 지위가 8.3%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남성의 지향과 여성의 지향이 다르다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서로 다른 점을 인정하고 살겠다며 결혼합니다.
그러나 초호화 결혼식을 올린 부부도, 잉꼬부부로 알려진 부부도 쉽게 헤어지는 모습을 봅니다.
많은 경우 ‘성격 차’ 때문에 도저히 같이 살 수 없다며 각자의 길을 갑니다.
성격이야 서로 다른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닐까요?
상대의 성장 과정이나 환경이 다를진대 어찌 성격이 똑같겠습니까?
쌍둥이로 태어난 사람도 같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서로를 인정하고 부족함을 채워주는 가운데 더 깊은 사랑을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너무도 쉽게 너와 내가 다른 것을 ‘네가 틀렸어’로 밀어붙이고 맙니다.
그래서 마침내 ‘참는 것도 한계가 있다’고 하며 등을 돌립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마태 19,6)
혼인을 하느님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헤어질 수 없지만, 단순히 사람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혼을 쉽게 하게 됩니다.
혼인할 때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하거나 병들거나 일생 사랑하고 존경할 것”을 하느님과 일가친척 앞에서 서약합니다.
남녀는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존재이지, 욕심을 채우는 수단이 아닙니다.
서로는 동반자이면서 서로 사랑을 주고받으며 존경받아야 할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이러한 관계는 단순히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과 우리 자신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영원에서부터 인간의 신랑이시고 인간은 하느님의 신부입니다(예레 31,3).
하느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경우에도 하느님을 향한 믿음의 관계를 지켜야 합니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문제가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부부간에 크고 작은 고민거리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러나 참고 견디면 성공하는 것이요, 인내하지 못하면 좋은 결과를 맺을 수 없습니다.
“남편된 사람은 자기 아내를 자기 몸같이 사랑하고, 아내된 사람은 자기 남편을 존경해야 합니다.”
(에페 5,33)
“결혼한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이것은 내 말이 아니라 주님의 명령인데 아내는 남편과 헤어져서는 안 됩니다.
만일 헤어졌거든, 결혼하지 말고 혼자 지내든지 그렇지 않으면 자기 남편과 다시 화해해야 합니다.
또 남편은 자기 아내를 버리면 안 됩니다.”
(1고린 7,10-11)
서로 간의 관계 안에서 신의를 지키고 부족함을 가슴에 담을 수 있는 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무던히 참아주고 변화를 기다려주는 넉넉함이 우리를 풍요케 할 것입니다.
헤어지자는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전쟁터에 나갈 때는 한 번 기도하고, 바다로 항해를 나갈 때는 두 번 기도하며, 결혼할 때에는 세 번 기도한다.”(러시아 속담)고 했습니다.
결혼해서 일생을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나 풍랑이 몰아치는 험한 바다보다도 더 어렵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매일 매 순간 기도하며 애쓰지 않으면 서로의 다른 점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상대의 부족함이 보일수록 더 많이 기도하고 사랑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왜 핑계를 발견하는가? 사명이 아니라 꿈으로 살기에>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은 모세의 법을 우선시하여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맺어주셨다면 절대로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누구는 핑계를 찾고, 누구는 핑계 대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차이는 어디서 올까요?
누구는 꿈을 살고 누구는 사명을 살기 때문입니다.
아래 이야기는 ‘세이노의 가르침: 가난한 사람들은 선량한가?’를 짧게 편집해서 올린 글입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일가족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던 상황에서 가장에게 그런 평가를 어떻게 내릴 수 있는가?’라고 인상 찌푸리며 불평할 수 있지만, 욕먹을 각오를 하고 이 글을 쓴 세이노의 생각도 들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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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십 몇 년 전인 1990년 봄, 서울 천호동의 반지하 셋방에서 살던 엄 모 씨(40세)와 부인(38세), 그리고 아들(8세), 딸(6세) 모두가 연탄불을 피워 놓고 동반 자살한 일이 있었다.
엄 씨 가족은 4년 전부터 이 셋방에서 보증금 50만 원 월세 9만 원을 내고 살아왔는데 집주인이 집을 수리하여야 하므로 방을 비워 달라고 해 이사 갈 집을 물색했으나 오른 방값을 마련하지 못해 고민하다가 결국 자살하고 만 것이었다.
서울에서 고교를 나온 엄 씨가 처음 택한 직업은 군에서 배운 운전이었다.
그는 결혼 후 서너 군데 직장에서 차를 몰았으며 모 국회의원의 자가용 운전사로 월 60만 원을 받고 일하다 차를 망가뜨린 실수 때문에 그만두었고, 몇 개월 전부터 친구가 경기도 부천에서 하는 부동산 소개업을 도와줬으나 벌이는 한 달에 삼십만 원 선에 불과했고 일정치 않았다.
엄 씨는 2남 1녀의 맏이였다.
그래서 서울 변두리에서 동생과 함께 사는 부모를 모실 수 없는 상황을 늘 괴롭게 여겼지만, 죽기 며칠 전에도 노모에게 생활비로 15만 원을 부쳤다.
부인은 집에서 자수 미싱을 하며 생계를 꾸렸으나 죽기 얼마 전 전세 목돈을 만들고자 재봉틀마저 팔았다.
그러나 이때 받은 76만 원은 옮겨 갈 방을 구하는 데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했던 것 같다.
대신 어린 아들은 그날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엄마가 미싱을 팔았다. 그래서 기분이 좋았다.
오늘은 TV 소리가 잘 들렸기 때문이다. 방 안도 참 깨끗해졌다.”
명성교회 신자였던 엄 씨는 유서에 이렇게 적었다.
“주님께서 현숙한 처녀를 어머님 눈에 띄게 하셔서 좋은 아내를 주셨고 귀여운 남매까지 선물로 주시는 축복을 허락하셨다.
얼마나 행복할 수 있는 가족인가.
그러나 한 가지, 다만 한 가지 나에게 물질의 축복, 남들처럼 돈 잘 버는 재주만은 주지 않으셨다.
… 집을 비워 달라는 얘기를 들은 후부터 고민에 빠져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 집 문제 하나 해결 못 하는 무능한 가장.
이런 남편을 하늘처럼 섬기며 불평 한마디 해 본 적 없이 늘 쾌활한 아내, 당신은 정녕 천사이리라.
나쁜 짓을 하면 하나님께 혼난다는 말을 종알거리는 아이들, 너희도 정녕 천사이리라.
… 전세금 마련을 위해 추진했던 일들이 모두 제대로 안 돼 이젠 방법이 없다.
나 혼자 세상을 떠나려고 했지만.
… 이 살벌하고 각박한 세상에 떨어진 처자식의 앞날이 얼마나 고생스러울 것인가.
… 아버지 때부터 시작되어 오고 있는 가난이 나에게 물려졌고, 기적이 없는 한 자식들에게도 물려지게 될 것이다.
빈익빈, 부익부의 악순환이 끝날 조짐도 없다.
폭등하는 부동산 가격에 내 집 마련의 꿈은 고사하고 매년 오르는 집세도 충당할 수 없는 서민의 비애를 자식들에게는 느끼게 하고 싶지 않다.
… 정치하는 자들, 특히 경제 담당자들이 탁상공론으로 실시하는 경제정책마다 빗나가고 실패하는 우를 범하여 가난한 서민들의 목을 더 이상 조르지 않도록 그들에게 능력과 지혜를 주시어서 없는 자들의 절망과 좌절이 계속되지 않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엄 씨는 죽기 전 장례비용이라고 적은 봉투에 10만 원짜리 자기앞수표 9장과 1만 원권 지폐 10장 등 1백만 원을 담아 방안 책상 위에 놓아두었으며, 부동산 소개일을 하면서 고객을 태우고 다니고자 월부로 산 프레스토 승용차를 팔아 장례 비용에 보태 달라고까지 했다.
(당시의 거의 모든 신문 기사들을 모아 재편집한 것이다)
당시 어느 경제학 교수는 모 일간지에서 다음과 같이 성토했다.
“경제가 성장하더라도 잘못된 분배 구조가 고쳐지지 않으면 서민들의 생활이 더욱 어려워진다.
… 오늘날 우리 사회의 비참과 혼란은 비인간적 이기심에 상당 부분 기인한다.
… 공정한 분배를 위한 제도 개혁들이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 우리 국민들이 모두 하나가 되어 가난한 집의 아이들이 다시는 가난하기 때문에 죽는 일이 없도록 다 함께 생각하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국민들이 자신에게 손해가 되더라도 사회적으로 필요한 공정한 제도 개혁이면 반대하지 않으며, 집주인이라고 마음대로 집세를 올리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는 그날로 살기 좋은 사회가 될 것이다.”
나는 다르게 생각하느냐고?
그렇다.
첫째, 나는 ‘듣기 좋은 멋진 말’을 하는 그 교수가 세를 놓고 있는 집이 있다면 당연히 시세에 따라 세를 받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둘째, 집주인들이 마음대로 집세를 올리지 못하게 되면 가난한 사람들이 살기 좋은 나라가 된다는 것은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아무도 임대 주택을 구입하려고 하지 않기에 셋집의 수는 대폭 줄게 되고 임대 가격은 대폭 올라 버리게 된다.
가난한 사람들이 더더욱 살기 힘들어지게 된다는 말이다.
이것은 상가임대차보호법이 시행되는 과정에서 증명된 바 있다.
셋째, 거의 모든 기자, 소설가, 방송작가, 교수, 종교인 등이 자살한 엄씨를 ‘착하고 효자인 데다가 가족도 사랑하였고 성실하였으나, 가난하였기에 갑자기 오른 집세 때문에 절망하여 어쩔 수 없이 자살한 사람’으로 묘사하였지만 실제 상황을 좀 더 파악하여야 한다.
그는 군 제대 후 무려 15년 이상 운전을 하였음에도 저축이 없었다.
국회의원 자가용 기사를 하면서는 월 60만 원의 봉급을 받았는데 1990년 당시는 근로자 최저임금이 16만 5천6백 원이었고 월급 100만 원 이상을 받은 근로자가 전체 근로자의 5~6%에 불과하였음에 비추어 볼 때 적은 봉급은 결코 아니었다.
넷째, 그는 친구가 하는 부동산중개업소에 나가면서 고객 접대용이라는 명분으로 프레스토 승용차를 월부로 샀지만 집은 천호동이었고 일터는 부천이었다.
그 먼 거리를 자가용으로 출퇴근하였다는 것은 그의 처지로 볼 때 정말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게다가 차를 월부로 산 것을 보면 신차였다는 말이며 프레스토보다 더 싼 차들도 있었는데 월부로 그 차를 구입하였다.
보증금 50만 원 월세 9만 원짜리 사글세 집에서 사는 처지에 도대체 어디서 그런 배짱이 생겼을까?
다섯 째, 1990년은 이미 산업계에서 3D 업종 전체에 대한 근로 기피 현상이 나타나 일당 3~4만 원에도 사람을 구하기 힘들었던 시기였다.
그가 다른 일을 하고자 하려고 했다면 얼마든지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음에도 잘 알지도 못하는 복덕방 사무실에 나간 이유가 도대체 뭘까?
돈도 잘 벌고 편해 보였기 때문 아닐까?
능력과 지혜가 필요했던 사람은 우선은 그 자신이었다.
아버지 때부터 시작된 가난이 자기에게 물려진 원인은 그의 소비생활과 일하는 태도 때문이지 피할 수 없는 유전인자를 물려받았기 때문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때문에 나는 그를 ‘착하고 선량한 사람’으로 여기기보다는 ‘자기 분수를 모르고 소비생활을 제대로 통제하지도 않으면서도 자기 자신은 열심히 살고 있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절망을 초대한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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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있는 자들은 말을 막 하는 것 같습니다.
빌 게이츠도 “가난하게 태어난 것은 죄가 아니지만, 가난하게 죽는 것은 자기 잘못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말할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가난한 나라에 태어나서 어렸을 때부터 혹독한 노동 착취를 당해봐야지 이런 말을 하지 못한다고.
그러나 세이노는 가난으로 세 번이나 자살 시도를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최하층민으로 몇 년간 살면서 자금을 모아 1,000억 대의 자산가가 되었습니다.
빌 게이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이들은 그렇게 말할 자격이 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 가정환경이나 정치인들 탓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자기 합리화, 곧 핑계는 너무도 무서운 일입니다.
그것을 통해 자신이 죄를 짓고 게을러서 안 되는 것들을 합리화하며 그런 삶에 자신과 자녀들까지 고착시킵니다.
이렇게 여러 핑계를 대며 절망하거나 포기하는 이유는 그 사람이 사명을 쫓은 것이 아니라 꿈을 좇았기 때문입니다.
꿈이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결혼하는 것도 꿈이고 자녀를 낳는 것도, 재산을 얼마 모으겠다는 것도 꿈입니다.
꿈은 내가 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언제든지 꿈이 이뤄지지 않으면 스스로 핑계를 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명은 다릅니다.
사명은 주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꿈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셨다면 전능하신 분께서 그 일이 이뤄지도록 모든 도움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포기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능력과 자비를 믿지 못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황소를 훔친 도둑이 경찰서에 끌려와 말했습니다.
“저는 고삐를 하나 훔쳤을 뿐입니다.
고삐를 들고 오니까 소가 따라 오더군요.
소까지 훔칠 생각은 없었는데 말입니다.”
그러자 경찰서장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우리도 자네 손을 잡아왔을 뿐이네.
손만 오지 자네는 왜 따라왔나.
우리는 자네를 형무소에 넣지 않겠네.
자네 손만 집어넣을 걸세.”
*최승호의 [황금털 사자] 중에서
성인들은 핑계를 대지 않는 연습을 하였습니다.
수많은 핑계가 있더라도 결국 죄는 자신의 선택에 의해 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핑계는 사명을 찾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뜻만 이루려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다면 그 목적이 있을 것이고 그 사명을 찾아 삶의 의미로 삼는다면 결코 핑계 대고 무너지는 일은 없습니다.
꿈을 좇지 말고 사명을 삽시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의 주권부터 믿어야 합니다.>
1)
여기서 ‘시험하려고’는 ‘시비를 걸려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산상설교에서 이혼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 가르치셨습니다.
"‘자기 아내를 버리는 자는 그 여자에게 이혼장을 써주어라.’ 하신 말씀이 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를 제외하고 아내를 버리는 자는 누구나 그 여자가 간음하게 만드는 것이다.
또 버림받은 여자와 혼인하는 자도 간음하는 것이다."
(마태 5,31-32)
바리사이들은 산상설교의 가르침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만일에 예수님께서 ‘버려도 된다.’고 대답하시면 산상설교와 다른 말을 한다고 공격했을 것이고, ‘버리면 안 된다.’고 대답하시면 신명기 24장 1절에 있는 율법을 거스르는 말을 한다고 공격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도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버려도 된다.’고 대답하시면, 헤로데 편을 들었다고 백성을 선동했을 것이고, ‘버리면 안 된다.’고 대답하시면, 세례자 요한처럼 헤로데를 비난했다고 헤로데에게 가서 고자질을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신명기 율법이 아니라 창세기의 천지창조 부분을 말씀하신 것은 바리사이들의 함정을 피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혼인에 관한 근본적인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2)
사람이 남자와 여자로 태어나는 것과 혼인하여 한 몸이 되는 것은 모두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이 가르침은, ‘일부일처제’와 ‘혼인불가해소성’은 모두 ‘하느님의 법’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할 때, “내가 선택하고, 내가 결정한 일”이라고, 즉 ‘내가 한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신앙인은, 세상의 모든 일은 전부 다 주님이신 하느님의 주권과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습니다.
특히 ‘성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일들은 하느님께서 직접 하시는 일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성사의 은총’에 대한 믿음은 바로 그 신앙이 즉 하느님의 주권과 섭리에 대한 신앙이 출발점입니다.
3)
세례성사의 경우, ‘내가’ 종교와 신앙을 선택하고, ‘내가’ 결정해서 세례를 받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를 부르시고, 그 부르심에 응답해서 세례를 받게 됩니다.
신품성사의 경우에도 ‘내가’ 사제직을 선택하고, 사제가 되겠다고 ‘내가’ 결정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를 부르시고, 그 부르심에 응답해서 사제가 됩니다.
만일에 자기가 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내가 한 일이니, 중간에 그만두는 것도 내 마음이다.” 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은 대단히 오만하고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혼인성사의 경우에도 똑같습니다.
“배우자를 선택한 일도 내가 한 일이고, 결혼하겠다고 결정한 것도 내가 한 일이다. 그러니 이혼하는 것도 나의 권한이고 권리다.” 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큰 죄가 되고, 그것도 역시 대단히 오만한 생각입니다.
지금 말하는 혼인성사는 세속 사람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만났다가 헤어지는, 그런 결혼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혼인성사로 이루어지는 혼인에서는 배우자는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이고, 혼인 자체도 은총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을 잘 간직하고 끝까지 지켜서 구원이라는 열매를 맺는 것은 신앙인의 본분입니다.
4)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라는 말씀은 “모세가 그런 율법을 정한 것은 혼인성사에 대한 믿음이 아직 미숙하던 시절의 과도기적 조치였을 뿐이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라는 말씀은 “그 율법은 모세가 정한 것이지 하느님의 법은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지금 이 말씀은 이혼에 관한 모세 율법을 예수님께서 폐지하신 말씀입니다.
9절의 “불륜을 저지른 경우 외에” 라는 말은 예수님의 원래 말씀이었는지, 마태오 사도가 속해 있던 교회의 관습이 반영된 말인지, 아직도 논란이 많은 말인데, 우리 교회는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라는 대원칙은 불륜을 저지른 경우에도 적용되어야 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문제 때문에 부부생활이 크게 손상되고 원상복구가 불가능한 상황이라면, 억지로라도 함께 살아야 한다고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혼은 인정하지 않지만 별거는 인정합니다(1코린 7,11).
- 전주교구 상지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지배하고 소유하려고 한다면 혼인하여 사는 것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며칠 전 가슴을 움직이는 글을 읽었습니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한다.”입니다.
비슷한 말 같은데 결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생각하는 대로 사는 사람은 삶을 주도하게 됩니다.
사는 대로 생각하는 사람은 시행착오를 겪게 됩니다.
꿈을 이루는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생각은 인생의 내비게이션과 같습니다.
문명은 생각의 탄생으로 열렸습니다.
철학은 생각하는 법을 배우는 학문입니다.
인문학은 생각이 드러나는 통로입니다.
예술은 생각의 열매입니다.
윤동주의 ‘십자가’는 제 가슴을 뛰게 하였습니다.
조정래의 ‘아리랑, 태백산맥, 한강’은 우리 민족의 근대사를 장엄하게 보여주었습니다.
봉준호의 ‘기생충’은 우리 영화의 힘을 보여주었습니다.
BTS의 음악은 K Culture의 우수함을 보여주었습니다.
생각은 진화의 과정일 수 있지만, 생각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상(模像)’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능력으로 인간은 진리와 거짓을 식별할 수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의지의 자유를 누리는 인간은 선과 악 중에서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영적 본성과 지적 인식능력과 선택과 행위의 자유 덕분에 인간은 처음부터 하느님과의 특별한 관계 속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모상'은 무엇보다도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 속에 나타납니다.
“생각하는 대로 믿지 않으면, 믿는 대로 생각한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비슷한 말 같은데 결과는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올랐을 때입니다.
제자들은 빵이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그러자 제자들은 이렇게 수군거렸습니다.
“우리가 빵을 적게 가져왔다는 말씀인가?”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내가 빵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 빵 조각을 몇 광주리나 가득 거두었느냐?”
제자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열둘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누룩은 빵을 많게 하는 효소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누룩은 바리사이의 교만과 헤로데의 욕망이었습니다.
생각이 없는 믿음은 미신이 되고, 광신이 되고, 사이비 종교가 되는 것입니다.
생각이 없는 믿음은 폭력과 전쟁을 하느님의 뜻으로 포장하기도 합니다.
생각이 없는 믿음은 공동선의 가치를 무시하기도 합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과 자비를 베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잘 돌보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과 맺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다른 신들을 섬기곤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오도록 기다려 주시고 용서를 해 주신다고 하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혼인에 대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혼인은 하느님 앞에서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서로에게 책임을 다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혼인의 약속은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일치하고,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혼인하여 가정을 이루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독신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가끔 이런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신부님은 왜 결혼을 하지 않습니까?”
독신생활의 참된 이유는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 때문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독신으로 사셨고 우리를 위해 당신을 온전히 내놓으신 주님을 갈림 없는 마음으로 따르기 위한 것입니다.
사제나 수도자들의 독신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그 근거를 두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관계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입니까!
예수님은 나를 따르려면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혈연관계보다 예수님을 더 따라야 한다고 합니다.
단순히 독신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과 가르침을 먼저 생각하고 따라야 한다고 이야기하십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를 마음의 준비가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지배하고 소유하려고 한다면 독신으로 사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이웃을 비난하고, 원망하는 삶의 자세를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버릴 수 있는 무소유의 자세가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그리스도와 일치하고,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혼인하여 가정을 이루는 것도 같습니다.
지배하고 소유하려고 한다면 혼인하여 사는 것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네가 저지른 모든 일을 내가 용서할 때, 네가 지난 일을 기억하고 부끄러워하며, 수치 때문에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의 의도를 모르니, 과거의 잘못된 관습에 매여 있었던 것입니다>
책에 관한 관심은 많은데, 영화에는 영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극장에 가본 지가 벌써 10년이 넘었습니다.
동창 신부가 어떤 영화를 말하면서 반드시 봐야 할 영화라고 말합니다.
이 말에 오랜만에 이 영화를 보려고 했지만, 이제까지 제 모습을 보면 극장에 가서 잠들고 말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의 원작 소설을 구해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결론은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워낙 관심이 없는 분야인 SF 소설이고, 도대체 그 내용을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동창에게 이 점을 이야기하니 배경지식이 없어서라고 말합니다.
배경지식을 알아야 창작자의 의도도 이해되고 감동도 깊어진다는 것입니다.
즉, 알면 보이고, 보이면 더 큰 감동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책 내용에 관심이 없어서 배경지식을 알려고 노력하지 않았고, 또 관심이 없어서 대충 읽으니 더 모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동창의 이 말을 떠올리며 주님도 그렇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주님을 제대로 알려면, 성경 안의 배경지식을 알아야 합니다.
이 배경지식이 있어야 주님의 의도가 이해되면서 지금 삶 안에서도 충분히 감동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전혀 알지 못하고 또 그런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막연하게만 자기 필요를 청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의도를 모르니 불평불만만 늘어날 뿐입니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마태 19,3)
사실 이혼에 관한 율법은 십계명 안에 들어 있지 않습니다.
단지 신명기(24,1-4)에 이유만 닿기만 하면 여자를 내몰 수 있었고 그때 이혼장을 써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유배 생활을 거치면서 결혼을 일종의 매매 계약으로 여깁니다.
여자는 남자의 소유물이 되었고, 여자는 재산 소유권과 상속권이 없었습니다.
이혼할 수 있는 권리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과연 하느님의 뜻일까요?
아닙니다.
태초에 하느님께서 만드신 남녀 결합의 근본이념에도 어긋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잘못된 혼인법을 없애고 하느님의 원래 뜻으로 되돌리기 위해 혼인의 불가해소성, 즉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의도를 모르니, 과거의 잘못된 관습에 매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요?
우리도 잘못된 관습만을 따르면서 정작 주님의 의도인 사랑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던 것이 아닐까요?
주님을 아는 데 집중하는 우리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알면 보이고, 보이면 더 큰 감동을 얻게 될 것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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