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익숙해져 버린 것에 대하여 / 이기철
아서라, 너는 왜 노란색에다 네 잠언을 매달려고 하느냐
누가 검정 색은 어둠이라고, 붉은색은 열정이라고 말했느냐
오늘 다음 올 날을 내일이라고 명명한 사람은 누구냐
누가 네 침대에 함께 자는 사람을 아내라고 말했느냐
아서라, 너는 왜 세상을 네 말의 상자 속에 집어넣고
그것을 시라고 말하느냐
소년이 아이를 낳으면 왜 안 되느냐
뿌리가 하늘을 쳐다보면, 새가 거꾸로 날면 왜 안 되느냐
들판에는 가끔 오는 편지처럼
가끔 피는 꽃
장롱의 성은 남성이냐 여성이냐, 집의 내역을 잘 알면서도
장롱은 왜 온종일 함구해야 하느냐
풀들이 자아도취의 꽃을 피울 때 흙들이 내는 소리를 너는 듣느냐
아서라, 수요일은 왜 한 주일에 두 번 오면 안 되느냐
그만 먹어라, 아무리 먹어도 배부르지 않은 음악을
단층은 너무 단정해 눕기가 거북해
발들을 이 층으로 길어 올리는 계단은 그래서 바빠
주문처럼 불길한 말은 쓰지마
너무 익숙해져 버리면 타성이 와
봄이 일찍 떠나면 나무의 눈물이 보여
그 때 너는 무슨 자세로 돌 위에 앉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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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존재의 불완전성에 대한 긍정, 시집 <정오의 순례>
이기철 시인 (영남대 국문과 교수)이 펴낸 열두 번째 시집
<정오의 순례>는 사유의 깊이를 보여주는 마흔네 편의 연작시로
구성되어 있다. 사유와 철학에 빗댄 연작시를 선보이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감각적인 시풍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요즘 시단의
흐름에 역행하는 인문주의자의 고집을 읽을 수 있다.
"내 사색의 바구니가 무인도에 닿는 동안/ 흉금 속에 펄럭이는
말의 폭풍/ 채광의 의지로 번쩍이는 언어의 곡괭이/ 불모지를
경작하는 만 고랑의 삽날/ 무한을 꿈꾸는 영혼의 아침 식사//
그리하여 내 시는 내 사유의 자동 기술/ 태양의 전언을 받아
쓰는 속기록" (- 태양이 남긴 것)
인간에게 사유가 없다면 신도 없고 양심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사유가 없다면 도덕도 법률도 음악도 비행기도 있을 수 없다.
사유는 인간 존재의 근거가 된다. 그러나 사유를 전복하는
힘도 역시 사유에 있다. 이기철 시인은 사유의 명료성마저도
오래된 종이처럼 부스러져 내리고 만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차라리 그는 사유의 불명료성을 적극적으로 옹호한다.
"내 사유가 햇살을 만질 수 있는가/ 내 사유가 무지개를 끌고
올 수 있는가/ 사유는 고통인가 안식인가/ 생각은 꽃송이를
만지다가도 지폐를 만지고/ 보석의 길을 걷다가도 진흙속에
발을 담근다" (- 생각에 대한 의문)
'사유가 무지개를 끌고 올 수 있는가'라는 의문문은 일견
사유의 한계를 의심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그것은 사유를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불완전성을 긍정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제언이기도 하다.
"사유는 내 사유의 그릇이지요. 내 뇌리 속에서 등불 켠 생각들,
회오리치며 지나간 감정의 폭풍들. 나는 이 연작에서 고뇌하고
사색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긍정적으로 그리려 했습니다.
'정오'는 삶을 밝히려는 인간 의지의 대명사인 셈이지요."
하계 방학을 이용해 대구 근교 비슬산 자락에 있는 자그마한
글방에서 시를 다듬었다는 그는 "요즘 시들이 이해할 수 없는
쪽으로 흘러가거나 사유를 피해가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며
"이번 시집을 통해 사색하는 면모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정오는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은 여행/ 출렁이는 파도, 흐르는
물,부는 바람/ 정오가 아니면 아무도 꽃을 들판에, 첨탑을
도시에 애드벌룬을 고공에, 은익(銀翼)을 하늘에 날릴
수 없다/ 그리하여 우리는 정오의 예찬자" (- 정오의 순례)
2008년 정년을 앞둔 그가 유독 '정오'를 호출하고 있는 것 자체가
사유의 소산이 아니겠는가.
(필자 미상)
[출처] 이기철 시인 5|작성자 동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