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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깔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감촉과 법도 없다 하십니다. 눈의 경계로부터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다고 긴 부정의 말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많은 분들께서 당혹스러우셨을 것입니다. 앞에서는 공과 색이 둘이 아니라 하셨는데. 이번에는 색도 없고 눈도 없고 귀도 없다 하시는 자리였습니다. 같은 말씀의 반복인지 전혀 새로운 이야기인지 가늠이 어려우실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를 분명히 짚어 드리려 합니다. 이 부정의 말씀은 우리 눈에 보이는 눈이 없어졌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귀에 들리는 소리가 사라졌다는 말씀도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뜻은 이러합니다. 공의 눈으로 보면 그 어디에도 고정된 실체로서의 눈도 고정된 실체로서의 소리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흐름은 이되 굳어 있는 틀은 없다는 자리를 다시 한번 각도를 바꾸어 비추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반야 심경은 여기서 멈추지 않으십니다. 한 걸음 더 들어가십니다. 무무명 영무무명진 내지 문호사 역무노 사진 무고진멸도 무지역무득 이무소 듣고 우리말로 옮겨드리면 이렇습니다. 무명도 없고 무명이 다한 자리도 없습니다. 늙음과 죽음도 없고 늙음과 죽음이 다한 자리도 따로 두지 않으십니다. 고진멸도도 없으며 얻을 지혜도 얻을 깨달음도 없다 하십니다. 이 말씀을 처음 들으시면 불교 전체가 무너지는 것처럼 들리실 수 있습니다. 무명과 늙음과 죽음은 부처님께서 오랜 세월 설에 오신 12년기에 처음과 끝입니다. 고집멸도는 부처님께서 첫 범문에서 설하신 네 가지 거룩한 진리 사성제이십니다. 그런데 반야 심경은 그 모두마저 공화다 하십니다. 평생 저를 다니며 사성제를 배우고 십이연기를 외워오신 분께는 이 한 줄이 마음에 걸리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부처님의 깊은 자비가 숨어 있었습니다. 반야심경은 사성제나 십이연기가 틀렸다고 하시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 가르침을 부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가르침에도 집착하지 말라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가르침은 병을 낫게 하는 약입니다. 병이 났기 전에는 약을 정성스레 복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병이 낳은 뒤에도 약을 손에서 놓지 못하면 그 약이 도리어 또 다른 병이 되어 버립니다. 바냐 심경은 바로 이 자리를 짚어주고 계십니다. 사성제도 12연기도 지혜도 깨달음도 모두 소중한 가르침이지만 그것에 매달리는 마음 자체는 이미 집착이 되고 맙니다. 가르침을 부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가르침에 집착하지 않으시도록 그 매듭까지 풀어주시는 마지막 자비의 한 구절이었습니다. 이 오해 한 자리만 걷어내시면 뒤에 이어지는 말씀이 놀랍도록 가볍게 들어옵니다. 그러면 이제 그 이어지는 말씀으로 가보시겠습니다. 이무소 듣고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고 신문가에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우리말로 풀어드리면 이러합니다. 얻을 바 없기 때문에 보살은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합니다. 마음에 걸림이 없습니다. 걸림이 없기에 두려움도 함께 사라지는 자리입니다. 뒤바뀐 헛된 생각을 멀리 여의고 마침내 열반에 이르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바냐 심경의 가장 큰 보배가 바로 이 한 줄에 담겨 있습니다. 신무가에 마음에 걸림이 없다는 자리부터 풀어 드리겠습니다. 가해란 걸림이라는 뜻입니다. 못에 옷이 걸리듯 마음이 어디엔가 걸려 있는 모습을 말합니다. 우리 마음은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곳에 걸리고 있으며 지난 일에 걸려 뒤척이기도 하고 앞일에 걸려 잠을 이루지 못하기도 합니다. 사람에게 걸리고 돈과 건강과 자식에게 마음이 묶여 있곤 합니다. 걸린 자리가 아프고 걸린 자리가 뜨끔거립니다. 평생을 이 걸림 속에서 사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한 보살의 마음에는 그 걸림이 없다 하십니다. 걸림이 없어지는 것은 세상일이 사라지기 때문이 아닙니다. 세상일은 그대로 있으나 그 일을 고정된 것으로 붙들던 마음의 틀이 풀어진 까닭입니다. 앞서 공의 여섯 글자를 건너오신 까닭이 바로 여기에 놓여 있습니다. 고정되지 않음을 아시면 어디에도 깊이 걸릴 수가 없습니다. 한 가지 비유를 들어. 보겠습니다. 바람이 대숲을 지날 때를 떠올려 보십시오. 바람은 대나무 사이를 지나가되 대나무에 붙들리지 않습니다. 바람이 지나가면 대숲은 잠시 흔들리다가 이내 본래의 고요로 돌아가게 됩니다. 만일 대숲이 바람을 붙들려 한다면 대숲도 바람도 모두 괴로워질 것입니다. 걸림없는 마음이 이 바람과 같습니다. 세상일이 우리를 스쳐 지나가도록 두시는 마음. 그것이 신무가의 자리였습니다. 이것은 방편의 비유이니 비유에 머물지 마시고 마음으로 그 결만 잡아 주십시오. 다음은 무유 공포 두려움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밤 이 자리에서 꼭 한 가지 짚어 드리려 합니다. 평생 반야 심경을 입으로만 외우시며 그런데도 여전히 밤마다 두려움에 잠을 이루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그것은 공을 한 번도 제대로 비추어 본 적이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걸림이 풀어지는 그 자리에 서시면 두려움은 저절로 자리를 잃습니다. 걸림이 있어야 두려움도 설 자리가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노년의 두려움을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몸이 더 무너질까 두려우실 수 있습니다. 병이 깊어질까 두려우시고 혼자 남게 될까 두려우실 것입니다. 그 두려움 하나하나가 모두 어디엔가 걸려 있는 마음이었습니다. 건강이라는 한 틀에 걸리고 관계라는 한 틀에 걸리며 내일이라는 아직 오지 않은 한 틀에 걸려 있었던 것입니다. 바냐 심경은 그 걸림의 틀이 본래 비어 있는 바탕이라 가르쳐 주십니다. 바탕이 비어 있음을 아시면 그 위에 걸려 있던 두려움도 스르르 풀려갑니다. 원리전도몽상 뒤바뀐 헛된 생각을 멀리 여인다는 말씀도 같은 결 위에 있습니다. 전도몽상이란 앞뒤가 바뀐 꿈 같은 생각이라는 뜻입니다. 고정되지 않은 것을 고정되었다. 여깁니다.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이라 여기십니다. 허물어질 것을 허물어지지 않을 것처럼 붙드는 마음. 이러한 자리가 전도 몽상이었습니다. 걸림이 풀리면 이 꿈 같은 생각도 자연이 넓어집니다. 그리고 마침내 도일 최고의 일체의 괴로움을 건너는 자리에 이르시게 됩니다. 바니아 심경의 첫 구절에서 관자재보살께서 모든 고통을 건너셨다 하신 그 자리가 이 긴 여정 끝에서 다시 한번 우리 앞에 열립니다. 고정된 나를 붙들던 손이 풀렸습니다. 가르침에 메이던 마음의 매듭도 풀렸고 세상일에 걸려 있던 자리 또한 고요히 놓여 갔습니다. 걸림이 풀리니 두려움이 놓이고 두려움이 놓이니 마침내 괴로움을 건너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입으로만 외우는 바냐. 심경이 아닌 몸으로 살아내는 반야 심경의 자리였습니다. 그러니 오늘 이 자리에서 진짜 수행 한 가지를 함께 드리려 합니다. 무가애라는 세 글자를 가만히 입 안에 굴려 보십시오. 오늘 하루 가장 깊이 걸렸던 일 하나를 떠올리시고 그 위에 무가에 세 글자를 얹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 일을 잊어버리시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 일을 고정된 틀로 붙들지 마시라는 뜻입니다. 며칠만 이렇게 해 보셔도 오래 걸려 있던 자리가 한결한결 풀리는 것을 느끼실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반야 심경이 헛수행이 아닌 참 수행이 되는 길이었습니다. 걸림이 풀리고 두려움이 놓이는 이 자리를 반야. 심경은 구경 열반이라 부르십니다. 구경이란 마침내 이르는 끝을 말하고 열반이란 번뇌가 고요해진 자리를 뜻합니다. 그런데 이 열반은 먼 곳에 따로 있는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이 걸림없는 마음이 그 자체로 열반의 자리였습니다. 바니야 심경은 우리를 아득히 먼 어딘가를 보시는 경전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고요한 본래 자리로 돌아오게 하시는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바냐 심경은 한 걸음을 더 옮기십니다. 이 바냐 바라밀다가 어떤 힘을 지니고 있는지 그리고 이 자리가 과연 누구에게 열리는지를 마지막으로 밝혀주시는 것입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부처님이 함께 의지해 오신 자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올려 퍼지는 한 줄의 진언이 다음 걸음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냐 심경의 마지막 걸음에 이르시게 되었습니다. 관자 재보살께서는 긴 설법의 끝자락에 반야바라밀다가 어떤 힘을 지닌 가르침인지를 밝혀 주십니다. 이 자리를 놓치지 마시고 가만히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원부는 이렇게 이어지십니다. 고집안 야바라밀다. 시대 신조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 등등주 능제일체고 진실불허 우리말로 풀어드리면 이러합니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반야바라밀다는 크게 신묘한 주문이며 크게 밝은 주문이고 위없는 주문이며 견줄 데 없는 주문이다. 능이 일체의 괴로움을 없애고 진실하여 헛되지 않다는 말씀이셨습니다. 한 구절씩 결을 풀어 드리겠습니다. 대신주란 크게 신묘한 힘이 담긴 주문이라는 뜻입니다. 대명주는 크게 밝은 지혜의 주문을 가리키며 무상주는 그 위에 다른 가르침이 없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무등등주란 어디에도 견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결의 이름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여기서 한 가르침을 매번 거듭 이름 지어 부르십니다. 위는 반야바라밀다가 지닌 힘이 한 방향에서만 보아서는 다 보이지 않는 까닭이셨습니다. 신묘한 힘이면서 동시에 밝은 지혜이며 위없는 가르침이면서 또한 견줄 데 없는 자리 네 가지 이름이 결국 한 자리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마치 큰 산을 여러 방향에서 바라보며 그 자태를 한 번씩 불러들이는 모습과 같습니다. 동쪽에서 보는 산의 이름과 서쪽에서 보는 산의 이름이 다를 수는 있으나 그 산은 본래 하나의 산이었습니다. 반야바라밀다. 또한 그러한 하나의 자리였습니다. 이어 따라오는 능제일체고 진실불어 이 여섯 글자도 가볍게 넘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능이 일체의 괴로움을 없애고 진실하여 헛되지 않다는 말씀이십니다. 바냐 심경의 첫머리에서 관자재보살께서 도일 최고의 모든 고통을 건너셨다 하신 그 자리가 여기서 한 번 더 확인되고 있습니다. 헛되지 않다는 말씀은 이 가르침에 의지하신 분들의 자리가 단 한 번도 어긋난 적이 없었다는 뜻이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가 궁금하실 수 있습니다. 이토록 큰 힘을 지닌 가르침이 왜 어떤 이에게는 열리고 어떤 이에게는 닫혀 있는 것처럼 보일까 하는 물음입니다. 반이야 심경은 그 답을 바로 앞에 놓여 있는 한 구절로 건네주십니다. 3세 재불 의반야바라밀다고 그간엽따라 삼막 삼보리 우리말로 풀어드리면 이러합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부처님께서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위없이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을 얻으셨다는 말씀이셨습니다. 2한 9절이 반야 심경이 건네시는 가장 큰 약속입니다. 3세 제불이란 이미 깨달음을 이루신 과거의 부처님을 가리킵니다. 지금 이 순간 법을 설하시는 현재의 부처님 그리고 앞으로 오실 미래의 부처님을 함께 아울러 부르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많은 부처님께서도 이 한 가지 자리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신 까닭에 깨달음을 이루셨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삼세 재벌도 특별한 자격이 따로 있으셔서 부처가 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남다른 태생이나 유별난 재주로 그 자리에 오르신 것이 아니라 모두 같은 법에 의지하신 까닭이셨습니다. 바냐바라밀다라는 같은 나룻배에 오르셨기에 같은 언덕에 닿으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자리에서 평생 저를 다니며 반야 심경을 외워 오신 이들에게도 같은 길이 열려 있다는 뜻이 됩니다. 답은 이미 분명하십니다. 같은 법에 의지하시면 같은 길이 열리는 까닭입니다. 이것이 반야 심경이 말씀하시는 누구나 부처되는 길이었습니다. 특별한 이에게만 열려 있는 좁은 문이 아니라 반야의 지혜에 의지하는 모든 이에게 열려 있는 큰 길입니다. 한 가지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깊은 산을 오르는 여러 사람을 떠올려 보십시오. 나이와 걸음의 속도는 다 다를지라도 정상에 오르는 길은 같은 한 길입니다. 먼저 오르신 분은 먼저 정상에 닿으셨을 뿐 그 길이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앞선 분이 걸으신 그 길을 뒤에 오시는 분도 같은 걸음으로 올라가십니다. 반야의 길이 그러합니다. 이것은 방편의 비유이니 비유에 머물지 마시고 마음으로 그 결만 잡아 주십시오. 그러니 혹시라도 나는 이미 나이가 많아. 너무 늦었다는 마음이 서성이셨다면 오늘 이 자리에서 그 걱정 하나를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바냐 심경은 나이를 묻는 경전이 아닙니다. 지나간 세월의 길이를 재는 경전이 아니라 지금 이 한 호흡에서 반야의 지혜로 돌아오시라 권하시는 가르침입니다. 지금 이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계신 그 자리가 이미 그 길이입니다. 그 이어서 반야심경은 한 줄의 진언으로 경전 전체를 거두어 주십니다. 이 한 줄은 현장 스님의 역본에서도 한문으로 번역하지 않고 소리 그대로 남겨 두셨던 자리입니다. 옛 경전 번역의 법도에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진언은 그 소리 자체에 힘이 담겨 있기에 함부로 뜻풀이를 하지 않고 원음 그대로 둔다는 뜻입니다. 아재아제 발아아제 발아승아제 모지사바 이 16 글자가 반야. 심경이 우리에게 손수 건네시는 마지막 선물입니다. 이 진언의 결을 가만히 풀어드리면 이러합니다. 아재아제 가자 가자. 바라재 저 언덕으로 가자 바라승아제 저 언덕으로 함께 건너가자. 모지사바 깨달음이 온전히 이루어지이다. 이것이 반야심경 260자 전체의 심장에 놓여 있는 한 걸음의 노래였습니다. 여기서 바라승아제 함께 건너가자는 한 구절을 특별히 마음에 두시기 바랍니다. 대승불교의 결이 바로 2 한 9절 안에 응축되어 있습니다. 나 혼자 건너가는 길이 아니라 함께 건너가는 길입니다. 먼저 깨달으신 분이 뒤에 오시는 분께 손을 내밀어 주시고 뒤에 오시는 분이 또 그 뒤에 분께 같은 손을 내밀어 주십니다. 그렇게 손과 손이 이어져 마침내 모두가 같은 언덕에 닿게 되는 까닭입니다. 평생 저를 다니시며 가족을 위해 기도하셨던 그 걸음이 사실은 이미 파라승아제의 길이었습니다. 내 복을 빌면서도 늘 가족과 이웃을 함께 품어 주셨던 그 마음. 그것이 반야 심경이 말씀하시는 함께 건너는 길의 모습입니다. 그 오랜 정성이 경전의 마지막 한 줄과 이미 하나로 이어져 있었던 까닭입니다. 한 번도 엉뚱한 길을 걸어 오신 것이 아니었다는 말씀을 이 자리에서 분명히 받아 가시기 바랍니다. 이 진언을 수행하시는 한 가지 방법을 얹어드리려 합니다. 반이야 신경 독성을 마치신 뒤 마지막 진환 부분에 이르시거든. 호흡을 한번 더 고르십시오. 아재아재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 이 16 글자를 세 번 조용히 되뇌어 보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오늘 하루 지친 내 마음을 위해 두 번째는 오늘도 무탈하시길 바라는 가족을 위해 세 번째는 어딘가에서 함께 이 경을 읽고 계실 다른 이들을 위해 한 번씩 소리를 놓아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 세 번의 진언이 내 것이면서 또한 모두의 것이 되어 갑니다. 이것이 대승의 회향입니다. 조금 더 정성을 드리고 싶으시다면 이 16 글자를 한지에 사경하셔도 좋습니다. 한자 한 자 정성껏 붓을 내려 쓰시는 동안 글자가 나의 호흡과 하나가 되어 갑니다. 다 쓰신 종이는 불단 앞에 올려두시거나 손 닿는 자리에 두시고 아침 저녁으로 한 번씩 눈길을 주시기 바랍니다. 종이에 적힌 글자가 어느 날 문득 가슴 한가운데에서 피어나는 것을 느끼실 수 있습니다. 이 한 줄의 진언에 이르신 이 자리는 반야 심경의 문 앞이 아니라 그 안에 들어와 계신 자리입니다. 색즉시공에서 시작하여 무과회와 무유공포를 건너오신 긴 걸음이 이제 한 줄의 지난으로 고요히 모아지고 있습니다. 부처되는 길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바로 이 소리 이호흡 이한 걸음에 이미 함께 놓여 있었습니다. 260자의 짧은 경전이 평생을 담을 수 있는 지도였던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제 긴 여정의 끝자락이 남았습니다. 오늘 밤 함께 걸어온 모든 걸음을 거두어 한 송이 조용한 꽃으로 가슴에 내려놓아 드리는 자리입니다. 마지막 자리에서 반야심경 260자 전체의 결을 한 줄로 여며 보시겠습니다. 그 긴 걸음을 이제 한 호흡으로 조용히 마무리해 드리려 합니다. 바냐 심경은 단 260자의 짧은 경전이었으나 그 안에 고통에서 깨달음까지의 완전한 지도가 담겨 있었습니다. 그 지도의 결을 처음부터 한번 조용히 짚어드리려 합니다. 첫걸음은 조겨 놓은 계공이었습니다. 관자 재보살께서 다섯 가지 흐름이 모두 공함을 비추어 보시고 모든 고통을 건너셨다는 그 한 문장이 곧 반야. 심경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되어 줍니다. 이어 색즉시00즉시색 8 글자 안에 공의 진짜 뜻이 열려 있습니다. 공은 허무함이 아니라 고정되지 않음입니다. 고정되지 않은 자리이기에 오히려 세상이 이렇게 살아 움직이고 있는 까닭입니다. 그다음 걸음이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중불감이었습니다. 6 글자 앞에서 평생 우리를 가로막던 세 가지 잣대가 조용히 풀려갔습니다. 믿음과 없음 더러움과 깨끗함 늘어남과 줄어든 그 분별이 풀리니 그 잣대에 매여 있던 마음의 매듭도 함께 놓이게 됩니다. 이어 신문가의 무유공포 마음에 걸림이 없기에 두려움도 없어졌고 마침내 독일 최고의 일체의 괴로움을 건너는 자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한 걸음 아재아제 발아아제 발아승아제 모지사바 가자 가자. 저 언덕으로 가자 함께 건너가자는 이 진언이 반야 심경 전체를 한 줄로 거두어 주십니다. 삼세 재불께서 걸어가신 그 길이 특별한 이의 길이 아니라 같은 법에 의지하시는 모든 이의 길이었습니다. 누구나 부처되는 길 이것이 오늘 밤 반야 심경이 마지막으로 건네주신 약속입니다. 이긴 여정을 다시 한 호흡으로 여며 드리며 이러합니다. 조견으로 시작하여 공으로 열렸고 분별이 풀어지며 걸림이 놓였습니다. 두려움이 사라지고 마침내 함께 건너가는 길에 이르렀습니다. 그것이 260자 안에 접혀 있던 반야심경 전체의 결이었습니다. 짧은 경전이었으나 평생을 담을 수 있는 지도였습니다. 오늘 밤 이 자리에 끝까지 귀 기울여 주신 것만으로도 이미 그 길 위에 서 계신 까닭입니다. 반야 심경은 듣는 자리에서 끝나는 경전이 아니라 듣는 자리에서 비로소 시작되는 경전입니다. 오늘 밤의 이한 걸음이 내일 아침의 한 호흡으로 이어집니다. 내일의 한 호흡이 모레 한 걸음으로 이어져 갑니다. 그렇게 조용히 그러나 끊기지 않고 이어지는 걸음이 곧 진짜 수행이었습니다. 평생 반야 SIM경을 외워. 오신 그 정성이 헛되지 않았습니다. 공을 몰랐던 것이 아니라 아직 비추어 보는 법을 만나지 못하셨을 뿐이었습니다. 그 만남이 오늘 밤 이 자리에서 조용히 이루어졌다면 긴 여정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뜻이 됩니다. 이제부터는 입으로만 외우시던 바냐. 심경이 아니라 마음으로 비추어 보시는 바냐 심경이 되어 가실 것입니다. 한 가지 담보를 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밤 들으신 이 결을 하루나 이틀 안에 몽땅 얻으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반야의 지혜는 단숨에 들어오는 번쩍이는 빛이 아니라 오래 우러나는 차 한 잔과 같습니다. 매일 저녁 한 구절씩 한 호흡식 가슴에 내려놓으시면 어느 날 문득 그 결이 스스로 깊어진 것을 느끼실 수 있습니다.
어떤 모습으로 오시는지 살펴보았던 까닭입니다. 다음 자리에서는 그 이름을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를 짚어 드립니다. 평생을 한 가지가 오늘 밤 마지막으로 마음에 새기셔야 할 자리 있습니다. 먼저 하나를 분명히 짚어 드립니다. 경전에서 부처님께서는 이름을 부르는 횟수에 대해 까다로운 조건을 달지 않으셨습니다. 1000번을 불러야 한다 하지 않으셨고 만 번을 불러야 한다 하지도 않으신 까닭입니다. 다만 일심으로 그 이름을 부르라 하셨을 뿐이며 이 한마디가 모든 가르침의 핵심이십니다. 일심 측명 한 마음으로 부른다는 뜻이십니다. 여기에 올바른 구름의 첫 번째 열쇠가 담겨 있습니다. 1심이 무엇인가? 관세음 보살하고 부르시는 그 짧은 순간 다른 생각이 끼어들지 않는 자리이십니다. 호흡이 고요해지고 소리가 또렷해지며 구름 하나에만 마음이 가닿는 자세가 곧 일심이십니다. 이름은 많이 올리는데 정작 마음은 걱정과 서운함을 붙들고 계시면 그 구름은 숫자로는 한 번이어도 일심이 아닌 까닭입니다. 반대로 단 한 번을 부르셔도 그 한 번의 마음이 온전히 실리시면 그것이 곧 일심 측명이 됩니다. 부처님께서 횟수가 아니라 일심을 보신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100번의 흐릿한 구름보다 한 번의 맑은 구름이 더 멀리 가닿는 원리이십니다. 그래서 처음 시작하시는 분들께는 이렇게 권해 드립니다. 많이 부르려 하지 마시고 바르게 부르시기 바랍니다. 하루에 7번이어도 좋고 21번이어도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몇 번을 부르시는 동안 마음이 한 곳에 모이느냐는 점이십니다. 두 번째 열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관세음 보살을 부르실 때 구하는 마음에만 메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무엇을 바라고 부르는 부름과 무엇도 바라지 않고 부르는 부름은 전혀 다른 길이십니다. 자식의 병이 낫기를 바라며 부르시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닙니다. 사업이 잘 되기를 바라며 부르시는 것도 부처님께서 막으신 길은 아니었습니다. 경전 자체가 구하는 바에 따라 응해 주신다. 하셨기에 바라는 구름 또한 부처님께서 받으시는 부름이십니다. 그러나 그 부름에는 한 가지 한계가 있는 까닭입니다. 바라는 마음으로만 부르실 때는 그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믿음이 흔들리게 됩니다. 반대로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부르실 때는 부르는 그 자체가 이미 완성입니다. 이 이름을 내가 부를 수 있다는 사실 그 사실 하나가 그대로 공덕이 되시는 까닭입니다. 오래 수행하신 분들이 이르신 경지가 바로 여기이십니다. 젊은 시절에는 무엇을 이루려고 부르셨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그냥 부르게 되시는 자리입니다. 바라는 바가 없어도 부르는 이 자리가 관세음의 이름이 가장 깊이 가닿는 자리이십니다. 세 번째 열쇠는 꾸준함이십니다. 부처님께서 상념 공경 관세음 보살이라 하셨으며 상념이란 늘 생각한다는 뜻이십니다. 특별한 날에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아무 일 없는 평범한 날에도 부르시는 것 이것이 관세음의 이름을 진짜 자기 것으로 삼는 길이십니다. 크게 괴로운 날에만 부르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병이 들었을 때 자식에게 큰일이 났을 때 집안의 변고가 생겼을 때에만 관세음을 찾으시는 경우이십니다. 이것도 물론 나쁜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불운만으로는 부처님께서 약속하신 평생의 번뇌 녹임이 오지 않는 까닭입니다. 평안한 날에도 부르셔야 합니다. 아침에 눈을 뜨시며 한번 식사 전에 한 번 잠자리에 드시며 한 번 이렇게 하루에 세 번씩만 이어가셔도 1년이면 1000번이 넘는 구름이 쌓이시는 까닭입니다. 그 천 번이 우리 마음에 보이지 않는 길을 내시게 됩니다. 그 길이 깊어질수록 정작 큰일이 닥쳤을 때 관세음의 이름이 저절로 튀어나오는 경험을 하시는 까닭입니다. 네 번째 열쇠는 몸과 마음이 함께 가는 구름이십니다. 입으로만 부르시는 것은 반쪽이며 십시오. 처음에는 관세음 보살 이 6 글자만 하루에 한 장씩 써 보시기 바랍니다. 한 줄 한 줄 써 내려가시는 동안 마음이 저절로 고요해지는 경험을 하시게 됩니다. 눈이 어두우신 분들은 크게 쓰셔도 좋고 손이 불편하신 분들은 짧게 쓰셔도 좋으십니다. 형식보다 꾸준함이 더 소중한 까닭입니다. 백팔염주도 같은 원리이십니다. 손으로 알을 넘기시는 동작이 있고 입으로 이름을 내는 소리가 함께 갑니다. 거기에 마음으로 그 이름을 따라가는 움직임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수행법이십니다. 몸이 거들어주시면 마음이 흩어지기 어려워지는 원리입니다. 처음에 집중이 잘 안 되시는 분들께는 이 염주 수행법이 큰 도움이 되십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 열쇠를 드립니다. 부르신 뒤에는 반드시 회항하시기 바랍니다.
회향이란
내가 부른 공덕을 나 하나에만 두지 않고 널리 돌려 드리는 수행이십니다.
짧은 회항문 한 줄이면 충분합니다.
이 공덕이 모든 중생에게 두루 미치기를 바라옵니다.
이 한 줄로 혼자 쌓은 공덕이 온 세상의 공덕으로 바뀌는 까닭입니다.
회향이 없는 수행은 내 그릇에만 물을 담는 일과 같습니다.
회향이 있는 수행은 그 물을 온 들판에 뿌리는 일이 되시는 까닭입니다.
부처님께서 바라신 중생이 곧 나이고. 내가 곧 중생인 뜻이기도 합니다. 회향 한 줄이 수행을 완성해 주시는 까닭입니다.
바로 수행 끝에 올리신 회항문 한 줄이 그날 부르신 모든 이름을 온 중생에게 흘려보내는 물길이 되시는 원리입니다. 여기까지가 관세음 보살을 올바로 부르는 다섯 가지 열쇠이셨습니다. 일심으로 부르실 것 구하는 마음을 내려놓으실 것 꾸준히 이어가실 것 그리고 몸과 마음이 함께 가게 하실 것 마지막에 회향을 올리실 것 이 다섯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돌이켜 보면 오늘 밤 우리가 함께 걸어온 길이 멀었습니다. 처음에 관세음의 이름에 담긴 약속을 만났습니다. 그 다음에 일곱 가지 재앙이 녹아내리는 자리를 보았으며 마음속 세 뿌리가 여이어지는 원리를 들여다보았습니다. 32 가지 응신의 모습을 통해 관세음이 얼마나 가까이와 계시는지도 살펴보았던 것입니다. 그 모든 이야기가 결국 하나의 자리로 모여듭니다. 바로 오늘 밤부터 우리 입에서 나오실 관세음. 보살 이 이름 하나이십니다. 이 이름이 불려지는 자리마다. 부처님의 약속이 작동하시고 번뇌가 한꺼풀씩 벗겨지시며 응신이 뜻밖의 얼굴로 찾아오시는 까닭입니다. 이제 짧은 발언을 올리며 이 자리를 마무리 짓습니다. 오늘 이 법문을 듣고 계신 우리 모두와 우리 가족과 우리가 떠올리는 모든 인연들 그분들 모두의 마음에서 탐과 진과 치 세뿌리가 조금씩 여이어지기를 일곱 가지 재앙이 그 이름 하나로 흩어지기를 평생 불러오신 그 이름이 마침내 한 분의 큰 자비 속으로 돌아가 쉬게 되기를 바란합니다. 이 공덕이 모든 중생에게 두루 미치기를 바라옵니다. 오늘 이 시간 법문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가닿으셨다면 채널 구독과 좋아요로 이 자리를 함께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한 번의 클릭이 또 다른 분께 이 법문이 닿기 하시는 인연이 되시는 까닭입니다. 더 깊은 법문으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오늘 밤 관세음보살의 이름과 함께 평안이 주무시기 바랍니다. 나무 관세음 보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