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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 18,1-10ㄱ.13ㄴ.30-32
1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2 “너희는 어찌하여 이스라엘 땅에서,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는데, 자식들의 이가 시다.’는 속담을 말해 대느냐?
3 주 하느님의 말이다.
내가 살아 있는 한, 너희가 다시는 이 속담을 이스라엘에서 말하지 않을 것이다.
4 보아라, 모든 목숨은 나의 것이다.
아버지의 목숨도 자식의 목숨도 나의 것이다.
죄지은 자만 죽는다.
5 어떤 사람이 의로워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6 곧 산 위에서 음식을 먹지 않고, 이스라엘 집안의 우상들에게 눈을 들어 올리지 않으며, 이웃의 아내를 더럽히지 않고 달거리하는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으며,
7 사람을 학대하지 않고 빚 담보로 받은 것을 돌려주며, 강도 짓을 하지 않고 굶주린 이에게 빵을 주며, 헐벗은 이에게 옷을 입혀 주고,
8 변리를 받으려고 돈을 내놓지 않으며, 이자를 받지 않고 불의에서 손을 떼며, 사람들 사이에서 진실한 판결을 내리면서,
9 나의 규정들을 따르고 나의 법규들을 준수하여 진실하게 지키면, 그는 의로운 사람이니 반드시 살 것이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10 이 사람이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폭력을 휘두르고 남의 피를 흘리게 하면,
13 아들이 살 것 같으냐?
그는 살지 못한다.
이 모든 역겨운 짓을 저질렀으니, 그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그가 죽은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
30 그러므로 이스라엘 집안아,
나는 저마다 걸어온 길에 따라 너희를 심판하겠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회개하여라. 너희의 모든 죄악에서 돌아서라.
그렇게 하여 죄가 너희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게 하여라.
31 너희가 지은 모든 죄악을 떨쳐 버리고, 새 마음과 새 영을 갖추어라.
이스라엘 집안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으려 하느냐?
32 나는 누구의 죽음도 기뻐하지 않는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그러니 너희는 회개하고 살아라.”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9,13-15
13 그때에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에게 손을 얹고 기도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14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15 그리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주시고 나서 그곳을 떠나셨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어린이들이 꼭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은 어린이를 데리고 와서 축복해주기를 청하는 사람들을 제자들이 꾸짖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전해줍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작심하시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 벌어진 상황에 따라 하신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 이어지는 부자청년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두 이야기를 다 같이 ‘하느님 나라’에 관련하여 이끌어갑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앞장(18장)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마태 18,3)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마태 18,3)
“너희들은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마태 18,10)
그런데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오는 것을 가로막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친구로 여기건만 제자들은 그들을 업신여기며, 그들이 예수님께 가는 길을 가로막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마태 19,14)
이처럼 “하느님 나라”가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어린이’는 성경에서 무력하고 힘없는 사람, 스스로의 힘으로는 살 수 없어 돌보아주지 않으면 곧 죽게 되는 무능하고 약한 이를 표상하며, 동시에 사회에서 미천하고 버려진 이, 천대받고 소외된 이를 대변합니다.
무엇보다도 오늘 복음의 뒷 장면에서 자기 주장을 하는 부자청년(19,16-22)과 자신들의 성과에 목소리를 높이는 제자들(19,27)과 대조를 이룹니다.
사실 어린이들에게 우리가 필요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우리에게 어린이들이 꼭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다가가면 그들이 오히려 우리를 복음화 시켜주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를 받아들이면, 그들이 오히려 우리를 ‘회개하여 어린이 같이’ 되게 해 주고, ‘작은 자’ 되게 하고, 복음화 시켜주기 때문입니다.
‘가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가난한 이에게 다가가면, 우리가 그들에게 시혜를 베풀기보다 오히려 우리가 복음화 됩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단지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나 혹은 가난한 이를 위한 교회가 아니라, ‘가난한 교회가 되어라’고 하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단지 ‘어린이에게 다가가라’ 혹은 ‘어린이를 돌보라’고 하지 않으시고 ‘어린이처럼 되어라’ 곧 ‘어린이가 되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의 것이고 작은 이들의 것>
오늘 복음에 어린이에게 축복을 청하는 것을 보고 제자들이 꾸짖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왜 꾸짖었을까 생각이 되었습니다.
축복 청하는 것이 꾸짖음을 들을 만큼 그렇게 잘못한 것인지.
제자들이 터무니없이 꾸짖은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 잘못인지.
주님께서 쉬시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기에?
주님께서 많은 사람을 가르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기에?
이중 어떤 하나가 그 이유일 수 있지만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제자들이 어린이를 업신여겨서 그런 것이 아닌지 추측이 됩니다.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런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태 19,14ㄹ) 라고 말씀하심으로, 어린이를 데리고 온 사람들을 꾸짖는 제자들을 도리어 주님께서 꾸짖으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곱씹어 보면 제자들은 아직도 세상의 사고방식을 갖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힘 있는 사람들만 최고 권력자 가까이 갈 수 있고, 무엇을 갖다 바칠 것이 있는 사람들만 최고 권력자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힘없는 사람이나 갖다 바칠 것이 없는 사람은 가까이 갈 수 없겠지요?
달라고만 하고 귀찮게 구는 사람도 가까이 갈 수 없음은 말 하나마나입니다.
이에 대해 주님께서는 그런 건 하느님 나라의 짓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런 짓이 교회 안에도 있으면 주님은 마찬가지로 꾸짖으실 겁니다.
예를 들어 10년 전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한국교회 주교들이 교회 안의 힘 있는 이들은 교황을 만나게 하고 그 당시 세월호 희생자 가족이 교황을 만나러 오는 것은 막았다면, 교황은 힘없는 “어린이들을 놓아두어라. 내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마태 19,14ㄴㄷ)라는 오늘 주님 말씀을 가지고 한국교회 주교들을 꾸짖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 우리 교회가 하느님의 나라라면, 세상에서 내몰린 사람들이 도와달라고 찾아오면 결코 막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을 환영할 것이고 그래서 그들의 마지막 피난처가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주권이 오로지 하느님께 있고, 하느님의 주권 아래 힘이 있는 자와 없는 자의 구별이 없으며, 모두가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이고 형제들이기에 차별도 배제도 없는 나라입니다.
마태오복음 23장에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같은 마태오복음 25장에서 주님께서는 이런 말씀도 하였지요.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제대로 믿는 신자라면, 신자 중에서도 작은 이들인 프란치스칸이라면,
어린이나 작은 이들을 환대할 것이고, 인간으로 환대할 뿐 아니라 예수님으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우리의 순교자 중에 황희광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당시 사람들이 상종도 하지 않는 사회 최하층의 백정 출신이신데, 배교하라는 말에 다음과 같은 말을 하며 배교를 거부하였다고 합니다.
당신에게는 두 개의 천국이 있는데 하나는 저 하늘나라이고, 다른 하나는 양반과 백정이 같은 형제라고 하는 이 천주교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우리는 지금 우리의 교회를 진지하게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이 환영받는 가난한 이들의 교회인지.
우리 교회마저 돈 있고 힘 있는 사람이 자기들의 교회인 양 차지하고 가난한 사람, 아쉬운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을 밀어내고 있지는 않은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것인데, 하느님마저 밀어내고 내가 차지하고 있지는 않는지.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어린이들과 같은 모습>
오래전의 일입니다.
구역 미사를 봉헌하러 갔더니 어린이들은 따로 한 방을 차지하고 자기들만의 놀이에 열중했습니다.
'어른들 미사에 시끄럽게 굴지 말아라.' 하면서 특혜를 준 것입니다.
그러니 미사참례는 어른이나 하는 줄로 압니다.
시끄러우면 좀 어떻습니까?
좀 더 거룩한 분위기에서 미사 봉헌하기에 앞서 어린이들에게서 거룩한 미사참례의 기회를 빼앗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 하느님의 나라는 이런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태 19,1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이들을 통해 그들의 순수성을 배우려면 그들 곁에 있어 봐야 합니다.
시끄럽고 철없고 교회의 거룩함의 수준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진득하게 오래 견디지는 못할지라도 ‘기도손’한 모습이 아름답고 십자성호를 긋는 동작이 기특합니다.
진정 어린이들로부터 하느님의 은총을 빼앗을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미새의 소리를 듣고 노래를 배우는 어린 새들과 같이, 어린아이들도 세상에서 그들을 가르치기로 되어 있는 아주 열심한 부모 곁에서 하느님 사랑의 숭고한 노래와 덕행의 지식을 배워야 합니다.”
(성녀 소화 데레사)
또한 우리도 어린이의 단순함과 의존성을 배워 자기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선뜻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어린이가 부모의 가르침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듯이 우리도 주님의 가르침을 그렇게 받아들일 때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예수님께 다가오는 것을 막아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막는 것입니다.
오히려 누구라도 예수님께 데려와야 합니다.
그리하면 그는 예수님의 능력을 만나게 됩니다.
어린이는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어른의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젖 떨어진 어린 아기, 어미 품에 안긴 듯이”(시편 131,2) 주님의 품에 안겨 평온함을 누릴 수 있길 희망합니다.
주일학교 미사 때 가장 신나고 크게 성가를 부르는 이들은 저학년 유치부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그들은 이미 지상에서 천국을 살고 있습니다>
요즘은 어린이들에 대한 인식이나 처우가 과거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좋아졌습니다.
이곳 태안에서는 아기 한 명이 태어나면 마을 입구에 큼지막한 플래카드까지 내겁니다.
가정에서건, 학교건, 성당이건, 아동양육시설이건, 어디든지 아이들을 금이야 옥이야 하며 상전 모시듯이 정성껏 양육하고 동반합니다.
사실 이게 정상인데...그간 너무한 부분이 참 많았습니다.
예수님 시대 유다 사회는 남자 성인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유아나 어린이 사망률이 높던 시절, 일단 성인이 되어야 비로소 한 인간 존재로 취급받았습니다.
이런 연유로 사도들은 예수님께 축복을 청하러 오는 어린이들과 부모들을 꾸짖었던 것입니다.
안 그래도 과도한 사목활동으로 몸에 과부하가 걸린 예수님이신데, 별 도움도 안 되는 어린이들에게 할애할 시간이 없다는 생각에 사도들은 언짢아하며, 그들을 물리친 것입니다.
그때 보여주신 예수님의 태도가 놀랍습니다.
어린이들을 무시한 사도들을 크게 꾸짖으십니다.
어린이들도 하느님께서 손수 창조하시고 생명의 숨결을 불어 넣어 주신 소중한 존재임을, 그들 안에도 하느님께서 굳건히 현존하심을 강조하십니다.
그러니 그들을 무시하거나 외면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있는 그들을 존중하고 사랑해야 한다고 외치십니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여름 내내 많은 어린이들, 청소년들을 만나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우리 어른들처럼 속이 구리지 않습니다.
겉과 속이 다르지도 않습니다.
노회하지도 복잡하지도 않습니다.
단순하고 솔직합니다.
순수하고 반짝반짝 빛납니다.
들은 이미 지상에서 천국을 살고 있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소외와 차별은 큰 죄입니다>
1)
'손을 얹고 기도해 달라고 하였다.' 라는 말은 ‘안수기도’를 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뜻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는 중이었거나, 아니면 휴식을 취하고 계시는 중이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은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중단시키지 말라는 뜻이었거나, 아니면 예수님의 휴식을 방해하지 말라는 뜻이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위해서’ 사람들을 막은 것인데, 그것은 예수님을 위한 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었습니다.
마르코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언짢아하시며' 라는 말이 더 있습니다(마르 10,14).
‘언짢아하시며’를 원문대로 직역하면 ‘화를 내시며’입니다.
제자들이 사람들을 막은 일은 예수님께서 화를 내시면서 그들을 꾸짖으실 정도로 크게 잘못한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2)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라는 말씀은 어린이들이 오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 말고 내버려두라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인도해 주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만나기를 바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당신에게 오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은, 또는 교회는, ‘모든 사람’을 예수님에게로 인도해 주는 일을 해야 하고, 원한다면 누구든지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사람들을 도와주는 ‘연결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사실 교회의 가장 크고 중요한 사명인 ‘복음 선포’는 바로 그 ‘연결 통로’가 되는 임무를 수행하는 일입니다.
‘복음 선포’를 하지 않는 교회는 존재할 이유가 없는 것처럼, ‘연결 통로’의 임무를 수행하지 않는 교회는 교회로서 존재할 이유도 없고, 자격도 없습니다.
산상설교에 있는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마태 5,16) 라는 말씀과 최후의 만찬 때에 하신 말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요한 13,35) 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을 당신에게 연결해 주는 통로가 되라는 임무를 주신 말씀입니다.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라는 말씀은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사람들만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라는 뜻이기도 하고, “하늘나라에는 소외와 차별이 전혀 없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늘나라에 없는 소외와 차별이 지상의 교회에 있다면, 그 교회는 큰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3)
이 이야기에서 ‘어린이들’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과 작은 이들, 즉 소외계층에 속해 있는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교회는 ‘작은 이들’에게 특별히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하고, ‘작은 이들’이 한 사람도 소외당하지 않고, 차별 당하지 않고, 기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적극 도와주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을 예수님께서 바라고 계시니, 신앙인들은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실제 현실을 보면, 교회 안에 ‘소외’와 ‘차별’이 분명히 있고, 그 소외와 차별 때문에 신앙생활 하기를 어려워하거나 포기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연결 통로’가 되기는커녕 예수님과 사람들 사이를 가로막는 ‘장벽’이 되는 경우가 실제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일은 목소리가 큰 사람들, 즉 교회 내부의 기득권층 사람들의 죄이기도 하고, 공동체 전체의 죄이기도 합니다.
4)
사도들은 그 소외와 차별을 대단히 엄하게 꾸짖었습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영광스러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가령 여러분의 모임에 금가락지를 끼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누추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온다고 합시다.
여러분이 화려한 옷을 걸친 사람을 쳐다보고서는 ‘선생님은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당신은 저기 서 있으시오.’ 하거나 ‘내 발판 밑에 앉으시오.’ 한다면, 여러분은 서로 차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악한 생각을 가진 심판자가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야고 2,1-4)
"여러분이 한데 모여서 먹는 것은 주님의 만찬이 아닙니다.
그것을 먹을 때, 저마다 먼저 자기 것으로 저녁 식사를 하기 때문에 어떤 이는 배가 고프고 어떤 이는 술에 취합니다.
여러분은 먹고 마실 집이 없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하느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입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을 칭찬해야 하겠습니까?
이 점에서는 칭찬할 수가 없습니다."
(1코린 11,20-22)
가난한 이들이 교회 안에서 소외당하고 차별당하는 일은 사도시대 때부터 있었던 일이고, 사도들은 그것을 대단히 심각한 문제로 생각했습니다.
소외와 차별은 사랑의 정반대 쪽에 있는 일이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화를 내시면서’ 아주 엄하게 말씀하신 가르침을 마음속에 깊이 새겼고, 그래서 교회를 다스릴 때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어린이와 같이 되라 - '회개의 여정'>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제 안에 굳건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시편 51,12)
어제 저녁식사 중 찐 계란이 담긴 작은 잔마다 깨알같이 작은 영문 글자가 있어 자세히 읽어봤고 반가워 옆 수도형제와 나눴습니다.
“Happiness is enjoying the little things in life”
(행복은 삶에서 작은 것들을 즐기는 것이다)
항상 기뻐하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도 생각났습니다.
바로 이것이 어린이같은 단순함의 특징입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에서도 어린이같은 단순함이 빛납니다.
“공자의 진정한 뜻은 문장과 글자가 아니라 일을 이룸에 있다.”
<다산>
“‘아름다운 옥이 여기에 있다면 간직하겠습니까, 아니면 팔겠습니까?’
공자가 답했다.
‘팔아야지! 팔아야지!
나는 좋은 상인을 기다리는 사람이다.’”
<논어>
이런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단순함 역시 어린이같음의 특징입니다.
천의무봉天衣無縫, 천진무구天眞無垢, 마음의 순수는 어린이다움은 나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단한 진리 추구의 열정에 있음을 봅니다.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에 나오는 '아이들에 대하여'도 어제 결혼에 대한 잠언처럼 통찰과 지혜가 가득합니다.
제가 50년 전 20대 후반 초등학교 교사 시절 함석헌 선생님이 번역한 <예언자>를 읽었을 때의 신선한 충격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공부하는 마음, 배우는 마음으로 독수리 타법으로 '아이들에 대하여' 일부를 옮겨 봅니다.
“너희의 아이는 너희의 아이가 아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자신의 삶을 갈망하는 큰 생명의 아들딸이니
그들은 너희를 거쳐서 왔을 뿐 너희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그들이 너희와 함께 있을지라도 너희의 소유가 아니니라
너희는 아이에게 사랑을 주라
너희의 생각까지 주려고 하지 마라
아이들에게는 아이들의 생각이 있으므로
너희는 아이들에게 육신의 집을 줄 수 있으나
영혼의 집까지 주려고 하지 마라
아이들의 영혼은
너희는 결코 찾아갈 수 없는
꿈속에서 조차 갈 수 없는
내일의 집에 살고 있음으로
너희가 아이들과 같이 되려고 애쓰는 것은 좋으나
아이들을 너희와 같이 만들려고 애쓰지는 마라
큰 생명은 뒤로 물러가지 않으며
결코 어제에 머무는 법이 없으므로”
비단 어린이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이런 경외의 마음으로 대할 때 어린이같은 아름다운 겸손한 영혼입니다.
분명코 어린이들을 사랑하신 예수님은 어린이같음의 최정상에 있는 분이라 단언합니다.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손을 얹고 기도해 달라고 했을 때 사람들을 꾸짖은 제자들의 완고함은 꼰대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반응은 과연 달랐습니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어린이같음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단순성, 개방성, 배움의 정신, 편견으로부터 자유, 변화와 적용에 준비되어 있는 유연성일 것입니다.
오직 이런 이들이 온전히 복음의 메시지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어린이같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손을 얹어 어린이들을 축복하신 다음, 미련없이 홀가분하게 바람처럼 구름처럼 물처럼 유유히 떠나시니 뒷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즉시 연상되는 앞서의 예수님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마태 18,4)
하느님 앞에 회개와 겸손은 함께 갑니다.
역시 기도와 회개도 함께 갑니다.
끊임없는 기도에 끊임없는 회개요 어린이같음의 순수와 진실, 그리고 겸손입니다.
어제 교황님은 기도와 평화의 복음을 강조하셨습니다.
“기도는 변형의 시작이다.
기도는 역사를 변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도구이다.
오늘날은 어느때 보다 인류는 평화의 복음을 필요로 한다.
모든 신자는 평화의 복음을 선포하고 나누라 불림 받고 있다.”
평화의 복음 선포에 앞서 기도와 회개가 전제되어야 함을 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에제키엘은 회개의 구체적 내용을 적시합니다.
공정과 정의의 의로운 사람들이요 어린이와 같은 좋은 사람들입니다.
대부분 우리의 모습을 거울처럼 비춰줍니다.
1. 산 위에서 음식을 먹지 않고, 이스라엘 집안의 우상들에게 눈을 들어 올리지 않으며,
2. 이웃의 아내를 더럽히지 않고 달거리하는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으며,
3. 사람을 학대하지 않고 빚 담보로 받은 것을 돌려주며
4. 강도짓을 하지 않고, 굶주린 이에게 빵을 주며,
5. 헐벗은 이에게 옷을 입혀주고,
6. 변리를 받으려고 돈을 내놓지 않으며,
7. 이자를 받지 않고 불의에서 손을 떼며,
8. 사람들 사이에서 진실한 판결을 내리면서,
9. 주님의 규정들을 따르고 법규들을 준수하여 진실하게 지키면, 그는 의로운 사람이니 반드시 살 것이다.
이런 삶의 현장에서 회개의 구체적 실천에 충실한 자들이야말로 어린이와 같은 좋은 심성의 사람들입니다.
죄지은 자만 죽습니다.
위에서처럼 역겨운 짓을 한 이들은 살지 못합니다.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그가 죽은 책임은자신에게 있습니다.
참으로 끊임없는 회개와 선행의 선택과 훈련, 습관화가 어린이와 같은 삶에 얼마나 결정적 역할을 하는지요!
기도와 회개를 일상화하는 '기도와 회개의 시스템' 같은 수도원 일과표가 자랑스럽고 고맙습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한 주님의 충고 말씀이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에게 깊은 깨우침이 됩니다.
“나는 저마다 걸어온 길에 따라 너희를 심판하겠다.
회개하여라.
너희의 모든 죄악에서 돌아서라.
너희가 지은 모든 죄악을 떨쳐 버리고, 새 마음과 새 영을 갖추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죽으려느냐?
나는 누구의 죽음도 기뻐하지 않는다.
그러니 너희는 회개하고 살아라.”
회개의 여정과 어린이와 같은 삶은 함께 갑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회개와 더불어 날로 어린이와 같은 마음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주님, 구원의 기쁨을 제게 돌려주시고, 순종의 영으로 저를 받쳐주소서.”
(시편 51,14)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
철학 시간에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을 배웠습니다.
영국 경험론의 석학 프랜시스 베이컨은 경험을 바탕으로 사람을 3가지 유형으로 구분하였습니다.
첫 번째는 ‘거미형’ 인간입니다.
거미는 실로 그물을 만들어 놓고, 먹이가 들어오면 유유히 잡아먹습니다.
예수님에게 십자가라는 그물을 던져서 죽음으로 몰았던 대사제와 빌라도가 그렇습니다.
사기꾼들이 그렇습니다.
독재 시대에 ‘공산주의자’라는 그물을 던져놓고 민주화 운동을 하는 젊은이들을 감옥에 가두었던 세력이 그렇습니다.
조작과 회유, 별건 수사와 압박으로 거짓 증언을 시켜놓고 무고한 사람을 감옥으로 보내는 세력이 그렇습니다.
진퇴양난, 사면초가의 궁지에 몰아놓고 사냥하는 세력이 그렇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당한 그는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였다.
남들이 그를 보고 얼굴을 가릴 만큼 그는 멸시만 받았으며 우리도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은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 받은 자, 하느님께 매 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성서는 그런 고난과 고통 속에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체험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두 번째는 ‘개미형’ 인간입니다.
개미는 누구를 해치지 않고, 열심히 일합니다.
'이솝우화'에서 개미는 배고픈 베짱이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이런 개미형 인간들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그들이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후 그들이 사회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후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후 그들이 유대인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후 그들이 가톨릭교도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가톨릭교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후 그들이 나를 덮쳤을 때,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인간은 혼자서 살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공동선을 위한 연대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 이제 너희에게 새로운 계명을 준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 중에 가장 헐벗고, 가장 가난하고, 가장 병들고, 감옥에 갇힌 이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지구 온난화, 환경 파괴, 전쟁과 폭력은 개미형 인간들이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개미형 인간이었던 제자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세 번째는 ‘꿀벌형’ 인간입니다.
꿀벌은 나무가 열매 맺을 수 있도록 꽃가루를 수분(受粉; pollination)시켜 줍니다.
꿀벌은 꿀을 얻는 대신에 나무의 번식을 도와줍니다.
남는 꿀은 사람이나 다른 동물들이 먹을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은 좋은 땅에 떨어진 씨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 물었던 율법 학자에게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이야기하셨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외면했던 레위와 사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가 어려웠습니다.
라자로를 외면했던 부자는 하느님의 나라에 가지 못했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치료해 주고, 여관에 데려다준 사마리아 사람이 이웃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사람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아침이슬'과 '상록수'의 주인공 김민기 선생님의 부고를 들었습니다.
그분은 ‘꿀벌형’ 인간이었습니다.
그분의 노래는 암울했던 시대에 맞서 투쟁했던 이들에게 귀한 ‘꿀’이었습니다.
그분이 만들었던 소극장 ‘학전(學田)’은 젊은 연극인들에게 ‘꿀’이었습니다.
그분이 연출한 작품은 많은 젊은이들에게 ‘꿀’이 되었습니다.
김민기 선생님이 천상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를 기원합니다.
그분은 달릴 길을 다 달렸기 때문입니다.
고인이 꿈꾸었던 ‘이 세상 어딘가에’를 나누고 싶습니다.
“이 세상 어딘가에 있을까 있을까
분홍빛 고운 꿈나라 행복만 가득한 나라
하늘빛 자동차 타고 나는 화사한 옷 입고
잘생긴 머슴애가 손짓하는 꿈의 나라
이 세상 아무데도 없어요 정말 없어요
살며시 두 눈 떠봐요 밤하늘 바라봐요
어두운 넓은 세상 반짝이는 작은 별
이 밤을 지키는 우리 힘겨운 공장의 밤
고운 꿈 깨어나면 아쉬운 마음 뿐
하지만 이제 깨어요 온 세상이 파도와 같이
큰 물결 몰아쳐 온다 너무도 가련한 우리
손에 손 놓치지 말고 파도와 맞서 보아요
손에 손 놓치지 말고 파도와 맞서 보아요”
- 미국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자기를 낮추고 끊임없이 하느님께 매달리는 사람>
기도는 어떤 것일까요?
나의 바람이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곧바로 ‘안 되는 것’으로 간주하고 포기하는 것일까요?
당연히 전자가 우리의 기도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사실 기도를 특별한 장소에서만 하는 것이라면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시간적, 장소적 제약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도는 어디에서나 가능합니다.
심지어 화장실에서 일 보면서도 할 수 있는 것이 기도입니다.
완벽한 장소, 완벽한 시간에서만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완벽한 장소와 시간이 아니더라도 언제 어디서나 상관없이 기도하는 사람만이 그 맛을 알고 또 기도의 즐거움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이를 위해 계속 기도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자기 엄마에게 매달려서 계속 칭얼거리는 아이를 보았습니다.
아이는 엄마에게 무엇을 부탁했고, 엄마는 안 된다고 거절한 상황인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아이의 끈기가 대단합니다.
저 정도 했으면 포기할 만도 한데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결국 엄마는 아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었습니다.
이 아이를 보면서 저도 저럴 때가 있었음을 생각해 봅니다.
맞으면서도 원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어른이 되어서는 쉽게 포기했던 것이 떠올려졌습니다.
그냥 쉽게 ‘안 되는 것’으로 간주하면서 포기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어린이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또 한 가지, 기도하는 사람은 자기가 얼마나 부족한지 쉽게 깨닫습니다.
한 시간도 되지 않는 기도를 하면서도 얼마나 많은 분심이 빠집니까?
이 분심에 빠지지 않기 위한 어떤 노력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 모습에서 자기 삶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것도 당연함을 알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어린이를 가리켜서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이 아닐까요?
자기를 낮추고 끊임없이 하느님께 매달리는 사람, 바로 어린이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쉽게 포기하고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드러내서도 안 됩니다.
끝까지 매달리는 우리이지만, 그 매달림은 겸손과 사랑의 마음으로 임해야 했습니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야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린이는 많은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엄마, 아빠’입니다.
우리 역시 많은 것을 찾는 삶이 아닌 주님 곁에 머무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늘 나라가 멀리에 있지 않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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