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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독립군 영웅 홍범도(洪範圖)의
인생 최대 오점은 자유시 참변
독립군사 가장 큰 사건 자유시 참변 관여
자유시 참변, 독립군 통합 과정 발생 비극
무장부대 통합의 주도권 놓고 분란 발생
홍범도 공산진영 편입 후 잔류세력 학살
홍범도, 참변 후 재판 참여해 원성 잦아
참변 후 충격을 받은 홍범도 재기 못해
[시사주간=박건우 기자]
지난 2021년 8월 15일
유해로 귀환한 홍범도 장군은
대표적인 평민 출신 의병장이자
독립군 대장이다.
홍범도는 항일무장투쟁 과정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전설적인 활약을 한 인물이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 등
그의 업적이 집중 조명되고 있지만
사실 그에게는
독립군 역사에 가장 참혹한 사건인
'자유시 참변'{흑하사변, 黑河事變,
1921년 러시아령 자유시에서
대한독립군단이
레닌의 적군(赤軍)과 교전한 사건}을
막지 못했다는 아픔이 있다.
자유시 참변은
홍범도가 독립군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비극이었다.
1919년 11월
통합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취임한 이동휘가
간도와 연해주 지역
한인 무장부대들을 통합해
단일한 독립군단을 창설하려는
계획을 수립했다.
간도 현지에서
홍범도가 실행을 맡았다.
그러던 중 통합을 위한
여건이 마련됐다.
간도에 있던 독립군 부대들은
1920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의 승리에도
계속 증원되는 일본군 간도토벌대의
공세에 밀려
러시아 영토로 넘어갔다.
각지에 흩어져있던
홍범도 부대를 비롯한 독립군들은
1921년 1월
통합 독립군단을 조직하기 위해
북만주 밀산(密山)으로 집결한다.
이후 독립군은
시베리아에 있는 자유시에 모여
대규모 통합부대를 결성하기로
뜻을 모았다.
연해주 이만을 거쳐
최종 목적지인 아무르주 자유시로
이동하는 작전이 시작됐다.
자유시는 러시아 지명
스보보드니(Svobodny,
Snobodnyj라고도 씀.
옛 이름은 Alekseyevsk)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러시아 혁명세력 볼셰비키가 만든
'붉은군대', 즉 적군(赤軍)은
반혁명세력인 백군(白軍)이 점령한
알렉세예프스크
(Alekseyevsk)를 함락해
해방구로 선포하며
도시 이름을 '자유'란 뜻의
스보보드니로 고쳤다.
당시 자유시는
러시아 적군(赤軍, 볼셰비키파)과
백군(白軍, 차르파) 간의
묵시적 완충지대였다.
1917년에 일어난 10월 혁명 후
3년이 흘렀지만
러시아는 여전히 내전 중이었다.
내전의 마지막 전장이
연해주 흑룡강과 우수리강,
그리고 송화강이 만나는
삼강평원 일대였다.
이동휘가 기획하고
홍범도가 조력했던 통합 계획은
소비에트 정부의 도움으로
성사되는 듯했다.
하지만 독립군 안에서
무장부대 통합 주도권을 둘러싸고
분란이 일어났다.
기존 연해주 한인사회를 대표하던
'국민의회'와
'이르쿠츠크파'의 지원을 받는
'고려혁명군',
그리고 임시정부와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지원을 받는
'대한의용군 총사령부'가 충돌했다.
이 와중에 소비에트 정부는
독립군 부대들에 자유시 이동 시
무장을 해제하라고 조건을 달았다.
이 요구는 독립군들의 반발을 샀다.
김좌진·김규식·이범석 등은
소비에트 정부의 요구를
수용할 수 없었다.
이들은 소비에트 정부의 요구가
러시아내전에 참여해 싸우라는 것과
다름없다고 판단했다.
게다가 무장해제는
무기를 장만해준 동포들에 대한
배은망덕이기도 했다.
김좌진·김규식·이범석 등은
소비에트 정부의 의도를 의심했다.
이들은 소비에트 정부가
백군과의 내전에
무장력과 전투력을 지닌
독립군을 활용하려 한다고 봤다.
홍범도는 이 대목에서
결정적인 선택을 했다.
대한의용군 소속이었던 홍범도 부대가
고려혁명군으로 넘어간 것이다.
이를 계기로
힘의 균형이 무너지고
고려혁명군이 승기를 잡았다.
홍범도가 고려혁명군으로 넘어간 이유는
무장부대 통합이라는 명분과
소련의 권위에 대한 인정,
그리고 무기와 식량의 원활한 공급이라는
현실적 조건 등으로 풀이된다.
홍범도와 함께 지청천·안무·최진동 등이
'그래도 믿을 데는 소비에트 정부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무장을 해제한 채
자유시로 떠났다.
지난 2021년 8월 16일 오전
대전 유성구 국립대전현충원
현충문 앞에 마련된
홍범도 장군 국민분향소에서
시민들이 참배를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반면 자유시로 이동을 거부한
대한의용군은 학살을 당했다.
1921년 6월 28일 오후 4시께
장갑차 2대에
기관총 30여 문으로 중무장한
소비에트 적군 29연대와
코사크 기병 600여 명 등이
독립군 부대 주둔지를
무차별 공격했다.
독립군은 1시간여 만에
전사자 272명,
익사자 31명,
행방불명 250여 명,
포로 917명 등 피해를 입었다.
대한의용군이
사방으로 흩어짐에 따라
독립군의 투쟁 역량이 크게 훼손됐다.
이 사건이 자유시 참변이다.
자유시 참변 후
홍범도의 행보는 논란거리다.
홍범도는 참변 후
재판 과정에서 위원으로 선임됐다.
고려혁명군은
항일의병장으로서 명성이 높은
홍범도를 위원으로 선임해
재판이 정당하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 것으로 풀이된다.
홍범도는 이 재판에
위원으로 참가했다는 사실 때문에
이후 주위로부터
많은 원성을 들어야 했다.
홍범도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상해파 인사들에게는
일종의 배신으로 여겨졌을 수 있다.
1923년 8월
하바롭스크에 간 홍범도는
자유시 참변 당시
적군에 맞서 싸우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할린부대 출신
김창수와 김오남으로부터
불시에 공격을 당해
이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다.
홍범도는 레닌에게서 받은 권총으로
이들을 사살하고
감옥에 갇혔다가
레닌의 증명서 덕에 석방됐다.
이후 홍범도는
자유시 참변의 충격으로
독립군 장군직에서 물러났고
끝내 재기하지 못했다.
그는 이만으로 가서
3년 동안 농사를 짓고
양봉알쩨리(협동조합)를 조직해
2년 동안 운영하는 등
1937년까지
연해주의 집단농장에서 일했다.
무장투쟁을 접고
농민층의 생활 향상과
한인동포들의 권익 보호에 힘썼다.
그러다 1937년 9월
스탈린의 한인 강제 이주 정책에 따라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 당했다.
이 대목에서 만주를 호령하던
'백두산 호랑이'의 기백은
찾아보기 어렵다.
윤상원 전북대 사학과 교수는
'홍범도의 러시아 적군 활동과
자유시 사변' 논문에서
'홍범도는 자유시 참변 재판에
위원으로 참가했다는 사실 때문에
이후 주위로부터
많은 원성을 들어야 했다.
심지어 테러를 당하기까지 했다'며
'자유시 사변 재판과정에서
위원을 맡은 일은
홍범도 개인에게는 무척 불행한 일이었다.
이후 홍범도는
장군으로서의 긴 여정을
끝마치게 된다'고 설명했다.
옮겨온 글 편집
첫댓글 자유시 참변이후 소련군 대위 계급장을 달고 레닌이 하사한 권총을 차고 다녔다는 소문도 있던데 사실인지요? 동족 그것도 독립군을 그렇게 사살하는데
직간접으로 간여한 인간을 독립군 영웅?으로 대접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중공군, 인민군 군가를 짓고 6.25에 참전하여 동족을 살해한 정 아무개라는 인간을
영웅으로 대접하려는 광주 사람들도 제 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