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무산-혜산진 공격전의 개요 원산 탈환 작전을 성공리에 끝낸 아군 제 3사단(사단장 준장 이종찬)은 후퇴하는 적을 완전히 몰아내기 위해 혜산진을 목표로 진격하였다.
이는 적을 한만 국경까지 몰아내기 위한 것으로 아군은 혹한과 험준한 산악지대의 악조건을 극복하고, 마침내 혜산진에 입성하였으나, 당시 중서부 전선은 침공한 중공군에 의해 위기에 놓여 있었다.
2. 무산-혜산진 공격전의 주요 지휘관
*아군
제 1군단장 소장 김백일
제 3사단장 준장 이종찬
제 3사단장 준장 최 석(11. 12 교대)
제 22연대장 대령 김응조
제 1대대장 대위 김상균
제 2대대장 소령 오정록
제 3대대장 소령 정순민
제 23연대장 대령 김종순
제 1대대장 소령 김우영
제 2대대장 소령 문태준
제 3대대장 소령 최상준
제 26연대장 중령 서정철
제 1대대장 소령 권용성
제 2대대장 소령 한주홍
제 3대대장 소령 은석표
제 3대대장 소령 박철수(11. 19 교대)
배속부대
제 11포병대대장 중령 송찬호
제 3야전공병대대
병력 : 약 11,000명
장비 : 60mm 박격포 52문
81mm 박격포 34문
3.5″ 로켓포 23문
57mm 대전차포 11문
105mm 곡사포 12문
*적군
적의 지휘관 및 사단 정면의 적 단대호는 상고할 수 없으나 대개 북한군 패잔병, 내무서 요원, 지방노동자, 당원, 학생 등으로 혼합, 편성된 아래와 같은 부대병력들과 접적하였다.
-합수독립대대(905명), 백암독립연대(250명), 무산사단(10,000명), 원흥독립중대(200명), 송경독립여단(5,000명), 원흥독립사단(7,000명), 청낙산독립중대(200명)
이상과 같은 적의 병기는 대개 다발총, 소총 경기였으며, 그밖에 무전기 등의 기재로 장비된 것으로 판단되었다.
3. 무산-혜산진 공격전의 진행과정 가. 전투 전의 개황
원산탈환작전이래, 제 3사단은 축차적으로 원산-함흥지구로 이동하면서 미 제 10군단의 상륙과 수도사단의 진격을 엄호하였다. 그러다가 11월 5일까지 이 임무를 완수한 다음, 8일까지는 전 병력을 홍원-신포-신북청으로 전진시켜 군단작전지역 내의 후방경계에 임하게 하였던 것이다.
나. 작전계획
사단의 무산 및 혜산진공격전에 관한 작전계획은 다음과 같은 요지의 군단작명 제121호에 의거 수립되었는데, 군단장 김백일 소장은 예하 2개 사단으로 하여금 현진출선에서 좌측의 미 제 10군단과 전선을 유지하며 담당지구 내의 한만, 한소 국경선까지 북진케 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명령하였다.
●작전명령
『① 수도사단은 2개 연대로써 회령을, 1개 연대로써 웅기를 점령, 확보하라. 그리고 예하 제 1연대의 장병 특공대대를 길주에 주둔시켜 백두산남지구 전투부대에 배속하라.(이동은 별도로 명)
② 제 3사단은 최단시간 내에 1개 연대로써 나남-무산 가도를 따라 무산을 점령, 확보하며, 1개 연대의 예비대를 나남에 보유하라. 이 예비대 사용은 나의 승인을 얻어야하며 이동은 별도로 명한다.
③ 제 26연대(미 제 7사단 배속)는 1주일 이내로 함흥-단천-혜산진으로 전진할 것이다.』
다. 무산-혜산진지구의 공격전
11월 27일
합수-백암을 거점으로 험준한 산악을 이용하여 아군의 진격을 저지하여 왔던 적 노동여단 1,000여명(노동당 극렬분자로 편성)은 연일 아군의 치열한 공격으로 동 방어선을 지탱하지 못하고, 그 주력은 무산 연수동방면으로 철수하는 한편, 잔여 200여 병력은 신덕리(백암-혜산진 간)방면으로 퇴각하고 있었다.
작명에 따라 제 23연대(연대장 대령 김종순)의 본부는 이날 09:00에 열차로 백암을 떠나 16:00에 길주로 전진하였고, 남계의 제 3대대(대대장 소령 최상준)를 선두로 백암의 제 1, 제 2대대도 09:00에 도보로 출발하여 재덕에 집결 중이었으며, 기차로 길주로 이동할 예정이었다.
이리하여 백암지구의 작전임무는 완전히 제 22연대에 인계되었다. 동 연대가 이날 현재까지 백암지구 전투를 통하여 거둔 전과는 적 15명을 사살하고 다발총 3정을 노획하는데 그쳤으나, 길주에서 혜산진과 무산으로 연결하는 이 지역의 확보는 아군의 작전상 중대한 의의를 갖는 것이었다.
따라서 제 22연대(연대장, 대령 김응조)의 본부와 제 1대대(대대장 대위 김상균)의 3개 중대는 백암에 위치하여 부근일대를 경계하였고, 제 3중대(중대장 중위 송병준)는 이날 혜산진을 목표로 북진하였으며, 제 2대대(대대장 소령 오정록)는 남계에 위치하여 그중 제 5중대를 재덕에, 제 6중대를 합수에 각각 배치하였다. 제 3대대(대대장 소령 정순민)는 여전히 군단경비에 임하고 있으며, 제 26연대(연대장 중령 서정철)도 사창리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
11월 28일
전날에 이어 이날 제 23연대의 본부는 길주를 떠나 나남으로 향하였고, 제 1대대(대대장 소령 김우영)의 본부 및 제 4중대는 재덕을 출발하여 17:00에 길주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제 1대대의 주력과 제 2대대(대대장 소령 문태준) 및 제 3대대의 2개 중대는 적설로 이동이 곤란하여 재덕에 주류하였으며, 제 3대대의 나머지 2개 중대는 이날 22:50에 열차 편으로 길주를 떠나 나남으로 향하였다.
이와 반면 제 22연대의 본부와 제 1대대의 3개 중대는 백암에 주둔하였고, 제 3중대는 전날에 이어 혜산진을 목표로 북진 중, 이날 15:00에 남중리(백암 서북쪽 20km)를 통과하였다. 그리고 제 2대대는 남계에 주둔하고 제 5중대는 재덕에, 제 6중대는 합수에 각각 배치되어 있으며, 제 3대대는 계속 성진에서 군단사령부를 경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포병대대의 본부 및 제 1, 제 3중대는 길주에 주둔하였고, 제 2중대는 성덕에서 제 22연대를 지원 중 17:00에 길주로 복귀하였다.
11월 29일
이날 제 23연대의 본부는 나남에 설치되었고, 제 1대대와 제 2대대는 재덕으로부터 05:00에 길주에 도착하였으며, 다시 제 2대대는 12:00에, 제 1대대는 15:00에 각각 길주를 출발하여 나남으로 전진하였다. 그리고 제 3대대의 나머지 2개 중대도 재덕에서 길주를 경유하여 나남으로 전진 중이었다.
또한 제 22연대의 본부 및 제 1대대의 3개 중대는 전날에 이어 백암에 위치하고 있으며, 제 3중대는 06:00 심포에서 출동하여 혜산진을 향해 전진하였고, 제 2대대의 2개 중대는 남계에, 제 5중대는 재덕에, 제 6중대는 합수부근에 배치, 경계 중이었다.
한편 사단사령부는 길주에서 나남으로 전진하였으며, 홍군리에 위치한 제 26연대의 본부와 제 2대대(대대장 소령 한주홍)는 풍산으로 진격하고, 제 1대대(대대장 소령 권용성)는 혜산진으로, 제 3대대(대대장 소령 박철수)는 삼수로 각각 전진하였다.
11월 30일
이날 제 23연대의 본부와 제 3대대는 나남에 위치하고 있었고, 제 2대대는 이날 07:00에 제 1대대는 16:10에 각각 나남에 집결하여 제 6중대와 제 7중대는 어유동(나남 서북쪽 16km)으로 진출시켰다.
제 22연대의 본부와 제 1대대의 3개 중대는 백암에 위치하였고, 제 2대대의 2개 중대는 남계에, 제 5중대는 재덕에, 제 6중대는 합수부근을 점령하고 있었으며, 제 3대대는 성진에 집결하여 군단경비를 담당하였다. 특히 이날 제 1대대의 3중대는 09:00 적의 경미한 저항을 격퇴시키면서 혜산진에 돌입하여 13:00까지 읍내에 잠복하고 있던 잔적을 완전히 섬멸한 후 시민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면서 시가행진을 하였던 것이다.
4. 무산-혜산진 공격전의 결과 제 3사단 병력의 길주-백암-혜산진 진격전은 11월 7일 이후 2주간에 걸쳐 험준한 산악고원지대의 혹한과 폭설을 무릅쓰고 전개되어 마침내는 적을 한만국경지대로 축출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 중서부전선의 제 2군단 정면에서는 중공군 제 121 및 122사단이 11월 26일 새벽부터 덕천-군우리 선에서 맹산-북창-포평리 선으로 급속히 남하함으로써 중서부전선은 일대 위기에 봉착하였고, 사단 좌측의 미 제 7사단과 제1해병사단도 역시 중공군 대부대의 포위작전으로 작전상의 전이가 불가피하게 되었다.
그리고 우측 수도사단 정면에도 적 제 41사단과 제 507여단 및 해안경비대 10,000여명이 청진 북쪽 30km지점에서 새로운 방어진지를 구축하여 공세로 이전할 준비를 갖추었고, 회령에도 10월에 신편한 제 8군단 5,6,7사단이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