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의 남자
영의정 자리가 한 달 넘게 비어 있었것다.
이 자리 채우는 게 왜 그리 힘든지 공주는 이해하기 어렵다.
다섯 명 중에 세 명이 제수도 되지 않은 채 말에서 떨어졌고
사직서 쓴 영의정을 그만두게 했다가 사람이 없어 다시 써야 했으며
둘째로 제수한 영의정 한 달도 안 돼서 뇌물 사건으로 그만두니
공주 영의정 제수만 생각하면 머리에서 쥐가 날 지경
사실 공주 생각으로는 영의정이라는 게 뭐 하는 일이 있나
그저 공주가 하라는 대로 하면서 대신해서 교지나 읽으면 되는 것
그런데 그런 것 할 사람이 그렇게 찾기 어렵다니
그 사연을 자세히 보게 되면 공주가 누구 탓할 일도 아닌데
지금부터 그 야그를 좀 해 보자.
공주가 왕이 되자마자 제수하려던 영의정
왜 노인네를 택했냐고 말들이 많은데 모르고 하는 소리다.
도승지까지 늙어서 공주는 노인네 취향이라는 말까지 나왔지만
공주는 사실 늙어서 지 몸만 간신히 가누는 그런 영의정을 필요로 했는데
알고 보니 이 노인네가 투기꾼으로 전국적으로 땅을 사들이고
두 아들까지 군역을 피했다고 한다.
공주 노발대발하여 승지들에게 왜 진작 검증 못했느냐 야단을 쳤지만
007작전하듯 사람을 고르는 공주 스타일에 이런 누수는 뻔한 일
다음에 고른 비교적 노인네도 투기 의혹이 있고 아들이 군역을 기피했다는데
그 정도가 좀 약한지 유생들이 덜 떠들어서 무사히 제수를 했는데
이 인간 마음에 드는 것이 의금부 출신답지 않게 조용하고 부드러운 거라
그저 시키는 대로만 하고 영의정입네 행세하지 않아서 끝까지 그 자리 지키기를 바랐는데
아 글쎄 남쪽 바다에서 배가 침몰하는 사건이 일어나 버렸으니
결국 영의정이 책임을 지고 그만두었는데 다음에 제수한 영의정 후보
의금부 출신 중에 강성이면서 지 나름대로 깨끗하단 소리를 들었다는데
공주 사실 내심으로는 강성이란 것이 조금 꺼림칙했지만
이 사람을 쓰면 유생들도 크게 반대 안 할 거라는 말에 그러자 했는데
아 이 인간이 의금부 그만두고서 전관예우라는 걸로 어마어마한 돈을 받았다는 거라
공주는 이런 인간이 문제가 없는 편이라면 의금부가 참 썩기는 썩었다 싶으면서
지가 그만두어 주기를 바랐는데 그래도 자존심 있는지 지가 스스로 말에서 떨어졌것다
다음으로 고른 영의정 후보는 공주와 코드가 정말 맞았는데
공주가 말로 하지 못한 것을 종종 대신 하던 유생이라지
섬나라 오랑캐한테 우리가 나라를 빼앗겼던 것은
조물주가 우리에게 준 시련이었다고 말했다는데
공주가 부왕에게서 자주 들었던 말이 바로 그것이라
그저 우리는 섬나라 오랑캐 따라서 하면 된다는 게 부왕의 말씀
백성들, 유생들이 알지도 못하면서 섬나라 오랑캐를 무조건 싫어하는지라
그렇지 않아도 그런 생각이 못마땅하다고 공주는 생각했었는데
아뿔싸 그런데 이번에는 이게 문제가 될 줄이야
여기저기서 상소가 올라오고 신문고가 요란히 울리면서 난리가 나는 판이라
버티고 버티던 그 인간 결국 말에서 떨어졌것다
공주 할 수 없이 비교적 노인네를 다시 영의정으로 불렀는데
아니 정확히 말하면 받은 사직서를 몇 달만에 돌려주었것다
남쪽 바다에서 배가 침몰한 사건은 누가 책임지느냐고
일부 유생들이 떠들어대기는 했지만 시간이 흘러 백성들도 어느 정도 잊어버린 일
그럭저럭 넘어가고 있는 듯 없는 듯 영의정 일을 하게 하다가
나랏일을 쇄신한다며 다음 번 영의정으로 장난감을 하나 골랐는데
이 인간은 공주더러 폐하라고 하면서 노골적으로 아부를 떠는 인간
이 인간 역시 투기 등으로 부패의 종합세트지만
공주가 내심 염두에 두어 영의정으로 임명했는데
이 인간이 영의정 되자마자 벼슬아치들 군기 잡으면서 까부는 거라
그렇지 않아도 눈에 거슬렸는데 치부책에 명단까지 나오고
자기는 아니라고 우겨댔지만 결국 물러나게 되고 보니
공주 조금은 암담한 심정이 된 것이다
이 놈 저 놈 다 해봐도 자기 수첩에 있는 놈 중에는 할 만한 놈이 없는데
문고리 잡은 승지에게 물으니 공주의 남자를 뽑으란다
공주의 남자라... 공주는 무슨 말인지 몰라서 어리둥절했는데
사실 공주에게 남자라면 부왕이 최고이다 얼마나 강인하고 카리스마 있느냐
하지만 그건 부왕일 뿐이고 그런 남자를 갖고 싶지는 않다
물론 공주에게도 남자라고 할 사람이 없지는 않았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공주를 도와주던 남자
아 그런데 그를 영의정에 앉힐 수는 없는 일 아니더냐
남자 하면 남동생도 떠오른다 공주를 모르는 곳에서 도와주는 남자를 싫어하던 남동생
아마 부왕이 살아계셨으면 이 자리는 남동생 차지가 되었을 건 뻔한 일
어찌 보면 딱하고 불쌍하지만 괘씸할 때도 많다
지가 사내라고 이 누나에게 감히 도전하려 하다니
이런 생각들을 해도 문고리 잡은 승지가 말하는 공주의 남자가 누구인지
공주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는데
문고리 승지 왈 형조판서를 생각하시란다
그가 왜 과인의 남자인고 하니
그에 대해서 좔좔 말해쌓는데
부자들이 의금부 사헌부에 뇌물 먹인 사건이 있었는데
엑스 파일이라나 뭐라나 하는데 그때 수사 담당을 했던 인간이라
그들을 모두 풀어 주고 오히려 고발한 사람을 가둬 버렸으니
부자들을 위해 벼슬을 하는 것이 공주와 코드가 맞고
공주가 왕이 될 때 의금부에서 댓글을 써서 부정을 했다는데
그 책임자인 의금부 대장을 구속하는 것을 한사코 반대했으며
그를 잡아넣으려는 포도대장의 사생활을 캐내어 물러나게 하였고
공주가 부왕의 비밀금고에 있던 돈을 꿀꺽했다는 것을 만천하에 공개한
자그마하지만 사사건건 덤벼드는 붕당을 강제로 해산시켜 버렸으며
지금도 공주 뜻에 따라 치부책을 수사하니 이 아니 예쁜가
앞으로도 공주 말만 듣고 공주만 바라보며
공주 말 안 듣는 놈 잡는 데 온 힘을 기울일 터
공주 듣고 보니 그야말로 자기의 남자임에 틀림없는지라
하지만 영의정 후보들이 하도 문제가 많아서 그는 문제가 없는가 물으니
문고리 승지 왈 군역을 두드러기가 나서 안 갔으며
의금부 벼슬을 그만두었을 때 전관예우라는 이름으로 돈을 많이 벌었다는 점은 있지만
여기까지 말하니 공주 군역, 전관예우라는 말에 갑자기 두드러기가 나는 듯
공주의 남자들은 문제가 많고, 쓸 만한 놈들은 공주의 남자가 아니니
공주의 고민은 깊어만 가는데 그래도 일단 이 인간을 밀어야
공주가 바라는 조용한 세상이 이루어진다니 공주 그렇게 하기로 했것다
아니 그런데 이 인간이 세금도 안 냈다는 거라
그러다가 영의정 제수 소식을 듣고는 부랴부랴 냈다는데
게다가 아들, 딸에게 증여한 세금도 떼먹었다가 뒤늦게 낸 모양
법과 원칙을 중시한다는 형조판서가 이래도 되느냐는 아우성이 들렸지만
공주는 9억냥을 꿀꺽하고도 세금 한 푼 안 낸 사람
그까짓것 뭐가 대수냐 나중에라도 냈으면 나보다 나은데 라는 마음으로
영의정 제수를 밀어붙이기로 했것다
그 후 공주의 남자는 어찌 되었는지
유생들 백성들이 한사코 반대해서 말에서 떨어졌다는 말도 있고
제수는 됐지만 곧 쫓겨났다는 야그도 있고
공주 말만 듣고 무리수를 두면서 조정을 온통 의금부처럼 움직이다가
공주가 왕을 그만 둔 뒤 지가 부리던 의금부 벼슬아치 손에 끌려
쇠고랑을 찼다는 이야기도 전해지는데
아주 먼 옛날의 먼 나라 이야기 믿거나 말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