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립현충원 뒷쪽에 자리한 고즈넉한 산사,
호국신의
극락왕생을
책임지는 서달산 호국지장사(西達山 護國地藏寺)
▲ 국립현충원 호국지장사 입구 |
국립현충원의 꼬리
부분인 공작봉(서달산) 북쪽 자락에는 호국지장사(지장사)가
포근히 둥지
를 틀고 있다.
처음에는 현충원 호국신의 극락왕생을 위해 20세기 중반 이후에 지어진 절로 여기고 거의
관
심도 두지 않았다. 그러다가 2005년 이후 겉보기와 달리 문화유산을 넉넉히 품은 오래된 절임
을 알게 되면서 구미가 확 올랐고 그 이후 현충원을 찾을 때마다 꼭 발걸음을 하고 있다.
호국지장사(이하 지장사)는 신라 끝 무렵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670년
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설도 있으나 서로 시기가 틀려먹음)
부동산 전문가인
도선은 북쪽으로 가다가 한강
언덕에 이르러 사방을 둘러보니 어디선가 서기
(瑞氣)가 흘러나와 자신을 유혹하고 있었다. 하여 그 서기를 추적하니 그 기운이 나오는 곳에
칡덩굴이 엉켜있고 약수가 나오고 있었다. 하여 자리를 살펴보니 아주 기가 막힌 명당인지라
토굴(土窟)을 짓고 갈궁사(葛弓寺)라
했다고 한다.
허나 이는 어디까지나 지장사에서 내세우는 설화일 뿐이다. 봉은사(奉恩寺)에서
작성한 '봉은
본말사지(奉恩本末寺誌)'에는
'1577년
선조가 창빈묘역 부근 산기슭에 절을
창건하고 원찰을 삼으니 갈궁사가 바로 이 절이
다' 내용이 있으며 고려 공민왕(恭愍王) 시절에 보인(寶印)이 중창<또는 창건>하고 화장암(華
藏庵)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덩달아 전해오고
있어
이르면 고려 후기, 늦어도 1577년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절의 내력이 구체적으로 윤곽을 보이는 것은 16세기 말이다. 명종(明宗) 시절 창빈안씨묘역이
양주에서 절 부근으로 이장되었는데 1577년 선조가 친할머니인 창빈의 묘역을 동작릉으로 높
이면서 화장암을 창빈묘역을 지키는 원찰(願刹)로 삼았다. 이때 화장사(華藏寺)로 이름이 갈
렸다고 하며, 그 인연으로 오랫동안 왕실의 지원을 받았다. 또한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이
항복(李恒福)과 이덕형(李德馨)이 10대 시절 공부를 했던 곳으로도 전해진다.
1663년 절을 중수했으며, 영조 시절에 신경준(申景濬)이 작성한 '가람고(伽藍考)'에 '동작리
에
화장암이 있다'는 내용이 있어 그때까지도 꾸준히 법등을 지키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1862년 운담(雲潭)과 경해(鏡海)가 중건했으며, 1870년에 경파루(鏡波樓)를 지었고
1878년에
주지 서월(瑞月)과 경해가 대방(大房)을 수리했다. 1893년에는 경운(慶雲), 계향(戒香)이
불
상을 개금하고 구품탱, 지장탱, 현왕탱, 독성탱, 산신탱을 봉안했으며,
1896년에
칠성각을
새
로 지었다. 그리고 1906년에는 풍곡(豊谷)이 약사전의 불상을 개금 단청하고
후불탱과 신중탱
, 감로탱, 신중탱, 칠성탱 등을 봉안했다.
1911년 왜정(倭政)의 사찰령(寺刹令)으로 봉은사의 말사(末寺)가 되었으며, 1920년에 대방을
수리했고, 1936년 주지 유영송(劉永松)이 능인전(能仁殿)을 중수했다.
1954년 이후 절 밑에 국립묘지가 들어서면서 자연히 호국신을 책임지는 사찰이
되었다. 하여
지장도량(地藏道場)을 칭하게 되었는데 1983년
주지 혜성(慧惺)은 호국신들이 지장보살의 원
력으로 모두 극락왕생이 되도록 기원하는 뜻에서 호국지장사<줄여서 '지장사'>로 이름을 갈았
다. 그야말로 현충원 사찰에 아주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이름이다.
경내에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능인보전과 삼성각, 극락전, 지장전, 심우당, 청심당 등 10동 가
까운 건물이 있으며 대웅전과 삼성각 등은 동남향(東南向)을 취하고 있다. 경내 남쪽에는 약
수가 나와
주민들이 많이 물을 뜨러 오며 지장보살입상을 중심으로 3,000좌의 조그만 지장보
살을 봉안해 절 이름 값을 톡톡히 한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철불좌상과 괘불도(掛佛圖,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3호), 극락9품도, 독
성도, 약사불도 등 무려 지방문화재 10여 점을 지니고 있으며, 한강에서 건져 올렸다는 철불
좌상과 목조여래좌상을 제외하고는 모두 조선
후기 탱화들이다. 그 외에 멀리 경주에서 왔다
는 신라 후기 3층석탑이 있는데 그것이 경내에서 가장 늙은 존재이다.
서울 도심과 무척 가깝지만 삼삼한 숲에 감싸여 있어 산사(山寺)의 분위기를 여실히 간직하고
있으며
고즈넉하고 아늑한 분위기로 현충원에 발을 들였다면 꼭 둘러보길 권한다. 또한 짙은
숲에 가려 보이는 범위는 적으나 현충원 일대와 한강, 용산구 지역이 시야에 들어와 경치도
그런데로 괜찮다. 하여 이승만 전대통령도 꽤나 군침을 흘렸던 곳이기도 한데, 그가 국립묘지
를 둘러보고 잠시
절에 들려 사람들에게
'만일 이곳에 절이 없었다면 내가 묻히고 싶은 땅이오~' 했다고 전한다. 그만큼 자리가 좋은
곳이다.
이곳은 절의 마르지 않는 샘이자 든든한 후광(後光)인 현충원이 있는 한 배를 굶거나 문을
닫
을 일은 절대로 없다. 현충원의 일원으로 그와 운명을 함께 하도록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만
약 현충원이 없었다면 인근 상도동의 사자암(獅子庵, ☞
관련글
보기)처럼
숲과 주거지의
경
계가
되거나 주거지에 거의 둘러싸여 지금과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석가탄신일과 현충일에는 중생들에게 공양밥이나 국수를 제공하는데, 맛이 제법 괜찮다.
(현충일에는 보통 13시 이전에 공양을 제공함)
* 호국지장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305 (현충로 210 ☎ 02-814-5257)
* 호국지장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 지장사로 인도하는 오르막길에서 바라본 국립현충원
현충원은 물론 그 너머로 용산구와 남산 등이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 지장사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20-5호 |
지장사 입구에서 절로 인도하는 각박한 오르막길을 오르면 커다란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시원
한 그늘을 베풀며 마중을 한다.
그는 350년 정도<1985년 10월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약 315년> 묵은 나무로 높이
15m, 둘레 4.5m에 이른다. 오랜 세월 지장사의 이정표 및 정자나무의 역할을 해왔던 그는
아
무리 먹어도 마르지 않는 세월이란 양분과
지장사의 보살핌으로 무럭무럭 자라나 현충원에서
가장 장대하고 늙은 자연물이 되었다.
지장사에는 일주문(一柱門)이나 천왕문(天王門) 같은 문이 없다. 대신 삼삼한 숲이 일주문의
역할을 대신한다. 숲에서 불어오는 산바람과 절에서 낭랑하게 흘러나오는 염불소리는
천근만
근 무겁다는 번뇌를 참교육시키며 마음 바깥으로 쫓아낸다. 하지만 멀리 가지 않고
절
입구에
서 우두커니 나를 기다리고 있고, 나 또한 그 번뇌를 찾으니 해탈이니 성불이니
하는 것은 그
저 먼 세상의 이야기인 모양이다. |
▲ 지장사 경내로 인도하는 숲길
▲ 석등을 한복판에 띄운 네모난 연못
▲ 조촐한 모습의 능인보전(能仁寶殿) |
경내로 들어서면 정면에
지장보살입상을 중심으로 한 지장전이, 오른쪽은 대웅전 구역, 왼쪽
에는 단출한 모습을 지닌 능인보전이 있다.
능인보전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겉으로
보면 그저 작은 건물로 여기고 지
나칠 수 있다. 허나 그 안에 철불좌상과 신중탱 등
오래된 문화유산이 자리를 채우고 있으니
꼭 둘러보기 바란다. |
▲ 능인보전에 봉안된 철불좌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75호
능인보전 약사불도(藥師佛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3호 |
능인보전 불단에
홀로 자리한 철불좌상은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경내에서 3층석탑 다음으
로 늙은 존재이다. 철불(鐵佛)이란 이름 그대로 철로 만든 불상으로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잠깐 등장을 하는데, 그가 원래부터 이곳에 있었다면 도선국사가 세운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고려 초에
창건된 것을 흔쾌히 입증해 줄 수 있을 것이다.
허나 아쉽게도 그는 다른 곳에서 온
불상으로 이곳에 들어온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다음과 같
은 전설이 아련하게
전해온다.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인 어느 옛날, 한강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어부의 꿈에 이 불상
이 나타나 제발 빛 좀 보게
해달라며 자신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어부는 혹시나 싶어 한강으
로 달려가 그물을 치니 녹슨 채로
버려진 그 불상이 걸려들었다. 하여 그를 가져와 깨끗하게
목욕을 시키고 집에 봉안했다.
그런데 그 이후로 이상하게도 고기도 잡히지 않고 나쁜 일만 연이어 생기는 것이다. 보통 이
런 전설에선 고기가 잘 잡혀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로 끝을 맺기 마련인데, 불상이 좀 심성
이 고약한지
그게 아닌 것이다. 그래서 어부는 골똘히 생각하다가 화장사(지장사)에 넘겼다고
하며
그 이후부터 비로소 잘 먹고 잘살았다고 한다.
이 전설을 통해 절이 파괴되거나 도난, 배 침몰 등으로 강에 버려진 불상을 수습해왔음을 알
수 있는데
그의
고향은 현재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고향을 잃은 이 철불은 높이 98cm로 얼굴은 동그랗고 이목구비가 뚜렷하다. 눈이 유난히
길고
가는데 보는 위치에 따라 날카롭게 보이기도 하며 머리는 꼽슬인 나발(螺髮)이다. 눈썹은 무
지개처럼
살짝 구부러졌으며, 굳게 다문 입에는 엷게나마 미소가 드리워져 환하게
웃음짓는
표정 같다.
어깨는 꽤 단련을 한 듯 당당하며,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이른바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
법
의(法衣)는 주름선이 선명하다. 또한 왼손에는 약합이 들려져 있어 그가 약사여래불임을 알려
주고 있으며, 고려 초에 조성된 천하에 몇 없는 철조약사여래상으로 그 당시 약사여래 신앙에
중요한
자료로 판단되어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철불 뒷쪽에 걸린 약사불도는 1906년에 봉감(奉鑑), 정운(禎雲), 긍법(肯法), 경조(敬照) 등
이
그린 것이다. 간략한 아미타존상의 형태와 음영법의 구사, 적색과 녹색의 탁한
색감이나
어두운 군청색을 많이 쓴 점, 불화의 횡적인 구도와 그림에 나타난 상을 간략하게 나타낸
점
등,
조선 후기 불화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철불 좌우에는 조그만 금동불(金銅佛)이 각자의 작은 공간을 지니며 빼곡히 들어앉아 철불을
받쳐주며 건물
내부를 환하게 밝혀주고 있다. 이들은 중생들의 돈과 소망을 담아 만든 원불(
願佛)로 약 400기
정도 된다.
|
▲ 능인보전 신중도(神衆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4호 |
능인보전 좌측 벽에
걸린 신중도는 약사불도와 같은 시기(1906년)에 같은 화승이 그렸다.
그
림은 수평 3단의 정연한 구도를 보이며, 범천(梵天), 제석(帝釋), 위태천(韋太天) 등 신중탱
의 대표적인 존재들이 모두 묘사되어 있다. 균형이 잡히지 않은 인체나 경직된 자세, 무겁고
탁한 색채 등은 전체적으로 불화의 품격이 떨어지던 20세기 초에 많이 나타난다. |
▲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7호 |
1893년 금호약효(錦湖若效) 등 14명의 화승이 그린 것으로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권속들을 계
단식으로 배치했고 화폭 상단으로 갈수록 존상을 작게 묘사하여 원근법의 효과를 살렸다. 원
만한 인물의 형태는 18세기 후반 양식이지만 오색 광선으로 표현된 광배와 도식(圖式)적인
천
의, 단조로운 구름의 묘사는 19세기 불화 양식을 보여준다. 전반적으로 많이 변색되긴 했으나
일부 적색과 녹색은 비교적 밝게 채색되었다. (지장시왕도의 봉안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
|
◀ 범종각(梵鍾閣)
범종각은 1975년에 지어진 것으로 저 안에 같
은 해에 조성된 범종이 담겨져 있다.
국립현충
원과
절의 이름에 걸맞게 그 종을 호국범종이
라 부르며 애지중지한다. |
|
◀ 고색의 무게가
짙어보이는 돌판
대웅전 옆구리에는 고색이 자욱한 네모난 돌판
이 놓여져 호기심을 자극시킨다.
그의 피부에는 한문 여러 자가 새겨져 있는데,
눈이 침침해 제대로 확인은 못했다. 건물 주춧
돌이나 상석(床石)으로 여겨지나 정체가 아리
송하며, 돌판에 화분이 여럿 놓여져 그의 허전
한 머리를 달래주고 있다. |
▲ 멀리 경주(慶州)에서 왔다는 3층석탑 |
범종각 옆에 자리한 이
석탑은 멀리 경주 남산(南山)에서 가져온 신라 후기 석탑이라고 한다.
이승만 시절에 국립묘지를 조성하면서 강제로 소환해 경상도를 상징하는 탑으로 삼았다고 하
는데, 이후 오랫동안 방치되어 버려진 것을 지장사에서 수습해 보수했다.
지장사에서 가장 늙은 존재라고는 하나 겉모습은 완전 20세기 석탑 같으며, 지붕돌과 석재
일
부에만 오래된 티가 보일 뿐, 머리장식과
탑신(塔身) 상당수는 지장사에서 새로 손질을
하여
늙은 돌과 새 돌이 서로 어색한 조화를
보이고 있다.
그는 현충일 기념으로 소원지를 가득 머금고 있는데, 그 앞 탁자에는 소원지와 볼펜, 조그만
불전함이 깨알처럼 놓여져 있다. 탑과 주변 줄에 달아놓은 소원지는 나중에 불에 태워버리는
데, 그래야만 소원지에 쓰인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과연 얼마나 이루어졌을까??) |
▲ 지장전(지장보살입상) 좌측에 자리한 삼성각(三聖閣)
산신과 독성, 칠성 등 삼성(三聖)의 공간으로 1칸짜리 팔작지붕 집이다.
▲ 칠성도(七星圖,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5호)와 석가여래상 |
삼성각 가운데를 장식하고 있는 석가여래상은 근래에 조성된 것으로 동그랗게 표현된 풍만한
가슴과 가슴선이 제법 눈길을 부여잡는다. 그의 두툼한 얼굴에는 미소가 살짝 깃들여져 있고
물레방아처럼 생긴 법륜(法輪)을 왼손에 소중히 쥐고 있는데, 법륜의 8개의 바퀴살은 팔정도
(八正道)를 나타내며, 동그란 모양은 부처의 가르침인 담마(蕁麻)가
완전하다는 것을 뜻한다
고 한다.
그런 석가여래상 뒤에 자리한 칠성도는 1906년 보암긍법(普庵肯法)이 그린 것이다. 화면은 화
폭의 좌우대칭으로 권속들을 배치하고 상하 2단으로 나눈 수평 구조로 경직된 형태와 선, 탁
한 색채 등은 20세기 초 불화 기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
▲ 독성도(獨聖圖,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6호)와 독성상(獨聖像) |
독성<나반존자(那畔尊者)>은 천태산(天台山)에서
몸을 일으킨 나한이다. 승려 비슷한 복장으
로
앉아있는 모습이 안방 마님처럼 편안해
보이는데 머리털이 없어 허전하기만 한 그의
머리
에는 혹 같은 것이 두툼하게 솟아있다.
독성상 뒤쪽에 깃든 독성도는 소나무 밑에서 바위에 기댄 채 동자(童子)의 공양을 받고 있는
독성 할배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
전형적인 19세기 독성도로
폭포와 나무, 꽃 등의 표현이나
늘어진 옷자락의 묘사는 다소 서투르나 독특한 자세와 온화한
얼굴의 표정이 인상적이다. 그
리고 그림의 깊이를 살려준
투명한 광배의 표현 등이 눈길을 끈다. |
▲ 산신도(山神圖,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7호)와 산신상 |
길쭉한 흰 수염을 지닌 산신 할배는 왼손에 붉은 지팡이를 들고 오른손으로 그의 애완동물인
호랑이를 쓱쓱 쓰다듬고 있다. 호랑이가 아무리 무섭다한들 산신 앞에서는 그저 꼬랑지를 살
랑거리는 고양이에
불과하며, 산신 옆에 있는
동자는 무척 앳돼 보여 마치 할배와 손자처럼
다정해 보인다.
산신상 뒤에 걸린 산신도는 1893년에 금호약효(錦湖若效)가 그렸다. 민화(民畵, 속화)풍의 나
무와 폭포, 호랑이의 모습은 19세기 말 산신도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원색적이고 장식적
인
당시의 산신도와는 달리 은은한 중간 색조를 사용한 점이 특징이다. 그리고 위엄과 격이
담긴
산신의 얼굴 묘사도 제법 돋보인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