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서 -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
<지혜서의 말씀 2,1ㄱ.12-22>
악인들은 옳지 못한 생각으로 저희끼리 이렇게 말한다.
“의인에게 덫을 놓자.
그자는 우리를 성가시게 하는 자,
우리가 하는 일을 반대하며 율법을 어겨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나무라고,
교육받은 대로 하지 않아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탓한다.
하느님을 아는 지식을 지녔다고 공언하며
자신을 주님의 자식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든 우리를 질책하니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짐이 된다.
정녕 그의 삶은 다른 이들과 다르고
그의 길은 유별나기만 하다.
그는 우리를 상스러운 자로 여기고
우리의 길을 부정한 것인 양 피한다.
의인들의 종말이 행복하다고 큰소리치고
하느님이 자기 아버지라고 자랑한다.
그의 말이 정말인지 두고 보자.
그의 최후가 어찌될지 지켜보자.
의인이 정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께서 그를 도우시어 적대자들의 손에서 그를 구해 주실 것이다.
그러니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그러면 그가 정말 온유한지 알 수 있을 것이고
그의 인내력을 시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자기 말로 하느님께서 돌보신다고 하니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
이렇게 생각하지만 그들이 틀렸다.
그들의 악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한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신비로운 뜻을 알지 못하며
거룩한 삶에 대한 보상을 바라지도 않고,
흠 없는 영혼들이 받을 상급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 복음 -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 7,1-2.10.25-30>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를 돌아다니셨다.
유다인들이 당신을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유다에서는 돌아다니기를 원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마침 유다인들의 초막절이 가까웠다.
형제들이 축제를 지내러 올라가고 난 뒤에 예수님께서도 올라가셨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게 남몰래 올라가셨다.
예루살렘 주민들 가운데 몇 사람이 말하였다.
“그들이 죽이려고 하는 이가 저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저 사람이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는데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최고 의회 의원들이
정말 저 사람을 메시아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 故 유광수 신부님의 묵상글 *
<나는 내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내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 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요한7,25-30)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바로 아는 것이다.
이것이 지혜의 근본이다.
그래서 희랍 사람들은 델포이의 아폴로 신전의 하얀 대리석 벽에
"너 자신을 알라"는 유명한 금언을 아로새기고
생활의 좌우명으로 여기고 행동의 지표로 삼았다.
자아의 발견, 자아의 확립처럼 중요하면서 어려운 일은 없다.
"전세계를 알면서 자기 자신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고
프랑스의 문필가 라 퐁떼느는 말하였다.
역사도 알고, 법률도 조예가 깊고, 문자에도 일가견이 있고, 시사에도 밝으면서,
자기 자신에 관해서는 무지하고 무식한 사람이 있다.
너 자신을 알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
내 자신의 처지를 알고, 형편을 알고,
실력을 알고, 사명을 알고, 분수를 아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바로 알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노자는
"남을 아는 것은 지(智)요,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은 명(明)이다"라고 말했다.
명은 지보다 높고 어려운 경지다.
왜 우리는 자기 자신을 알기가 어려운가?
이기심으로 눈이 가려지기 때문이다.
자애심으로
자기에 대한 판단이 흐려지기 때문이다.
남의 일에 총명하면 재판관이 되기는 쉽지만
자기 자신의 일에 슬기로운 판단자가 되기는 어렵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 관하여 세 가지의 이미지를 생각할 수 있다.
즉 세 개의 자아상을 그릴 수 있다.
첫째는 내가 보는 나의 이미지요,
둘째는 남이 보는 나의 이미지요,
셋째는 나 본연의 나의 이미지이다.
이 세 개의 자아상 중에서 가장 옳은 것은 세 번째 뿐이다.
우리는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어떤 관념을 가지고 어떤 분석과 평가를 내린다.
그러나 그것은 대개 빗나가는 수가 많다.
어떤 이는 자기 자신을 너무 과대 평가하여 교만과 허영심의 노예가 되기 쉽고,
어떤 이는 자기 자신을 너무 과소 평가하여 비굴해지기 쉽다.
과대 평가도 잘못이지만,
과소 평가도 틀린 것이다.
우리는 정당한 자기 평가를 해야 한다.
남이 보는 나의 이미지는
첫째 것보다는 비교적 공정하고 객관적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것도 왕왕 오판하는 수가 허다하다.
우리는 가끔 "그 사람이 그럴 줄은 정말 몰랐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생각했던 그 사람의 이미지와 그 사람의 현실의 행동이 어긋날 때에
참으로 뜻밖이다 하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나 본래의 나의 이미지,
나의 본연적 자아상,
이것만이 진정한 나의 모습이다.
우리는 먼저 자기 자신을 바로 알고 자아를 옳게 확립해야 한다.
자아란 무엇인가?
자아는 나다.
나 아닌 너를 우리는 타아라고 한다.
그러면 나는 무엇이냐?
나는 정신 작용의 통일체다.
우리는 의식하고 감정하고 의욕하고 행동한다.
이러한 정신 작용을 통일하는 최고의 주체를 우리는 자아라고 일컫는다.
생각하는 나, 느끼는 나, 욕구하는 나, 행동하는 나, 여러 개의 나가 있다.
그 여러 개의 나를 통일하는 주재자가 곧 자아다.
만일 이러한 주재자나 주체가 없을 때
정신병 환자의 경우처럼 자아의 분열이 생긴다.
분열된 자아는 진정한 자아가 아니다.
자아는 정신 작용의 통일이다.
이 통일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종적 통일이요, 또 하나는 횡적 통일이다.
종적 통일은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작년의 나와 금년의 나 사이에 의식의 통일이 있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없다면
우리는 서로 약속을 할 수가 없고,
과거의 행동에 대해서 책임을 질 수가 없다.
어제 내가 한 일을 전혀 모른다고 하고,
작년의 나의 행동에 대해서 내가 책임을 질 수 없다고 하면,
그것은 건전한 자아가 아니다.
자아는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사이에
자기 동일성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자아의 종적 통일이다.
자아는 동시에 횡적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
내가 생각하는 것과 감정하는 것과 의욕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 사이에
일관된 횡적 통일, 내용적 통일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지(智), 정(情), 의(意) 상호간에 내용적 통일이 없으면 자아라고 할 수는 없다.
말하는 나와 행동하는 내가 완전히 다를 때
나는 이중 인격, 이중 자아로 전락한다.
이중 인격, 이중 자아는
늘 분열된 병적 자아다.
내가 한 말에 대해서 내가 책임을 진다는 것은
말하는 나와 행동하는 나 사이에 자기 동일성이 있기 때문이다.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나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내가 나를 보는 것은
심리학이나 철학에서는 자아관이라고 일컫는다.
인간의 자아관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부정적 자아관이요,
또 하나는 긍정적 자아관이다.
부정적 자아관은
자기가 자기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다.
나를 마이너스의 측면에서 보는 것이다.
나는 지방 출신이다,
나는 일류 학교를 못 나왔다,
나는 머리도 신통치 못하고 재주도 빈약하다,
집안도 볼 것이 없다,
나는 인생의 패배자요 무능력자다,
나같은 거야 사회의 버림받은 존재다,
나는 무슨 일을 하여도 성공할 수가 없다....
이와 같은 부정적 자아관은
자기를 과소 평가하고, 자기의 미래에 대해서 절망하고,
자포자기에 가까운 어두운 심정이 된다.
인생에서 자신과 희망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무서운 것이 없다.
그는 생의 의욕을 잃고 전진의 기력을 상실한다.
그는 할 수 있는 일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될 일도 안 된다고 믿는다.
"해가 비치면 먼지도 빛난다."고 괴에테는 말했다.
먼지는 더러운 것이지만
밝은 햇빛을 받으면 빛을 발한다.
희망을 가질 때
우리의 얼굴은 밝아지고 눈에는 광채가 생기고 걸음걸이는 활기를 띠고 태도는 씩씩해진다.
"내일 세계에 종말이 온다고 하더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어떤 사상가는 말했다.
희망을 갖는 자는
설사 내일 이 지상에 파멸이 온다고 할지라도
그는 낙심하지 않고 사과나무를 심는다.
그러나 절망하는 자는
슬퍼하고, 저주하고, 모든 것을 포기한다.
희망과 절망은 그만큼 다른 것이다.
부정적 자아관의 노예가 되는 것처럼 불쌍한 것이 없다.
우리의 가슴 속에
희망의 등불이 있고, 우리의 정신에 자신이 있고, 우리의 몸에 용기가 있으면,
우리는 어려운 역경도 돌파하고, 커다란 고난도 극복하고, 무서운 시련도 이겨낼 수 있다.
희망은 언제나 우리에게 속삭인다.
힘있게 전진하라고...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누구이신지, 어디에서 왔고, 무슨 사명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
뚜렷한 자아관이 성립되신 분이시기 때문에
흔들림 없이 살아가셨고, 언제 어디에서나 당당하게 말씀하셨고, 행동하셨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 前 성바오로수도회 관구장
* 양승국 신부님의 묵상글 *
<허깨비 같은 몸만 왔다갔다...>
또 다시 판공성사의 계절이 다가왔습니다.
고백소 앞에 줄지어선 수많은 형제 자매님들의 얼굴에서
다시 한 번 따뜻한 하느님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고픈 간절한 갈망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많은 신자 분들의 내적인 방황도 손에 잡힐 듯 다가와 안타깝기도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제대로 된 하느님을 체험을 한번 해보고 싶지만,
그게 정말 여의치 않습니다.
마음은 하느님에 대한 굶주림으로,
하느님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 갈증을 채울 길 없어 아쉬워하십니다.
세례를 받은 지 5년, 10년, 20년, 30년 세월은 흘러가는데,
이제 남들이 볼 때 연륜이 지긋한 성숙한 신앙인으로, 봉사 전문가로, 단체장으로 교회 안에서 활약은 대단한데,
뭔가 허전합니다.
아쉽습니다.
미사 시간이 다가오면 발길은 자동적으로 성당을 향하는데,
별 의미가 없습니다.
미사에 대한 은혜도 없습니다.
별 감흥도 없습니다.
그저 의무감에서, 안 나가면 죄라고 하니,
남들이 우르르 가니 나도 따라갑니다만,
마음은 다른 데 가 있고, 그저 허깨비 같은 몸만 왔다 갔다 합니다.
이처럼 신앙 생활의 무미건조함,
더 나아가서 신앙의 위기가 다가오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인지 고민해 봅니다.
보다 근원적인 곳에,
보다 근본적인 곳에 문제가 있지 않을까요?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그분의 정체에 대한 정확한 파악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한 신앙 생활은
대체로 순식간에 위기를 체험하더군요.
하느님 그분이 누구인지 알아야,
그분을 만나야,
그분과의 내밀한 인격적 만남이 선행되어야,
비로소 우리는 그분을 제대로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분과의 절절한 사랑에 빠져보지도 못한 상태에서 시작한 그분과의 신앙 여정,
정녕 고단하기만 할 것입니다.
가톨릭 신자들은 선교에 대한 열정이 부족하다고 자주 야단 맞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단 한 번도 제대로 만나지도 못한 하느님,
그래서 그분이 어떤 분인지를 잘 모르는데,
어떻게 확신을 갖고 그분을 이웃에게 전할 수 있겠습니까?
세례를 받았다 하더라도, 세례 받은 지 30년이 지났다 하더라도,
하느님 체험이 아직 부족하다면,
그분과의 1대1의 만남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다시 한 번 다시 태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 안에 거듭 날 필요가 있습니다.
지속적인 하느님과의 만남,
그분과의 친밀한 인격적인 사랑을 나누고 있는 형제들의 얼굴은
잔잔한 호수처럼 평화롭기만 합니다.
거듭되는 시련 속에서도 자신만만합니다.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담담합니다.
참된 영적 예배, 제대로 된 하느님 체험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그들의 순수한 봉사 활동은 빛을 발합니다.
하느님과의 제2의 인생이 시작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서든 우리 신앙 생활 안에서도
예수님처럼 하느님 아버지의 정체성에 대한 정확한 파악이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어떻게 해서든 ‘그분’을 제대로 알아야
‘진한 사랑’이 오갈 수 있습니다.
그분을 만나야
아낌없이 자신을 봉헌할 수 있습니다.
그분을 체험해야
그분께 투신할 수 있습니다.
남아있는 사순절 동안,
어렵겠지만 깊은 내적 침묵 속으로 한번 들어가 보시기 바랍니다.
말씀에 깊이 몰입해보시기 바랍니다.
성체 앞에 오래 머물러보시기 바랍니다.
침묵하고 계시는 성령께서
다시 한 번 우리 안에 활동하시도록 간절히 기도해보시기 바랍니다.
- 살레시오수도회 수련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
이제 성지에 웬만한 공사는 모두 다 끝났습니다.
약간의 정리와 나무에 칠만 하면 마무리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지 공사를 하면서
봉헌초 함을 기존의 위치에서 바닷가 쪽으로 옮겼답니다.
그곳에 위치시키는 것이 훨씬 깔끔하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다른 사람들도 그곳이 가장 좋은 자리라고 말들을 합니다.
‘그래, 네가 있을 곳은 바로 이곳이야.’라는 말을 할 정도로
가장 적합한 자리임에 분명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는 것이에요.
그것도 보통 큰 문제가 아닙니다.
가장 적합한 자리이고, 성지를 더욱 더 예쁘게 만들어줄 위치이지만,
아주 결정적인 단점이 하나 있었는데요.
바로 바닷가에 위치하다 보니
바람이 너무 세게 불어서 촛불을 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봉헌초라는 것은 타서 없어져야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바람 때문에 켜는 것조차도 쉽지 않으니 봉헌초의 의미가 있을까요?
이 자리 외에는 다른 자리가 없을 정도로
딱 보기에 정말로 적합한 자리였습니다.
하지만 바람에 의해서 켤 수가 없는 자리라면
최악의 자리가 아닐까요?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늘 보이는 것이 진리인 듯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보아도 이 선택은 옳은 것이라고 큰 소리를 칠 지 모릅니다.
하지만 누가 보아도 올바르다고 했던 그 선택이
최악의 선택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봉헌초를 보면서 깨닫게 되네요.
하긴 예수님을 거부했던 이스라엘 사람도 그렇지 않았을까요?
그들이 자신의 선택에 대해서 틀리다고 생각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 모두가 예외 없이 자신의 선택이 올바르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느님과 동격이라고 말하는 예수님은 신성 모독을 하고 있는 큰 죄인이었고,
또한 사람의 병을 치유해주는 것은 마귀 두목의 힘을 빌어서 하는 것이라고 큰 소리로 주장했습니다.
더군다나 자신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었던 종교 지도자인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의 판단에 대해서 전혀 의심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예수라는 사람은
제거 대상 1호에 올라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이러한 판단이 옳은 판단일까요?
아니지요.
가장 최악의 선택이며
최악의 판단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도 계속 기회를 주고 계시지요.
그래서 오늘 복음에도 나와 있듯이,
당신의 신원에 대해서 다시금 말씀하시면서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눈이 가려졌습니다.
대신 사랑이 담겨져 있지 않은 대다수의 판단을 더 올바른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예수님을 잡아넣을 기회만을 엿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의 모습을 잘 보면,
계속해서 우리들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토록 사랑하라고 했는데
대신 철저히 남을 미워하고 있습니다.
또한 제대로 판단을 내리라고 겉으로 보이는 것만을 진리라고 착각하지 말라고 했는데,
끊임없이 그릇된 판단으로 내 이웃을 단죄하고 있습니다.
이제 2000년 전의 이스라엘 사람과 같은 그런 죄를 또다시 반복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예수님처럼 철저한 사랑으로 무장을 해야 합니다.
그때서야 더 이상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게 될 것입니다.
- 강화 갑곶성지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
<영혼의 창(窓)>
여러분의 영혼의 창은 깨끗합니까?
혹시 닫혀 있지는 않습니까?
하느님 향해 영혼의 창 활짝 열려 있어야
비로소 자유롭고 평화로운 삶입니다.
이심전심,
마음 통하면 말 잘 안통해도 살 수 있지만,
말 통해도 마음 안 통하면 살기 참 힘듭니다.
짧은 외국 생활에서 절감한 사실입니다.
말 잘 안 통해도 하느님 찾는 순수한 마음만 있다면
마음 서로 통해 편하니 사는 것은 거의 문제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새삼 하느님 찾는 순수한 마음,
세상 어디서나 통하는 보편 언어임을 깨닫습니다.
같은 말을 써도 마음 서로 안 통해 단절되어 사는 경우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유대인의 경우가 바로 그러합니다.
기회만 되면 예수님을 죽이려 하는 유대인들과
이들에 드러나지 않게 남몰래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예수님을 통해
둘 사이의 단절의 골이 얼마나 깊은지 단박 알아챌 수 있습니다.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유대인들,
하느님을 안다 하나 실상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 그분을 알았다면
하느님으로부터 온 예수님을 결코 죽이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단적으로 영혼의 눈이 멀었음을,
영혼의 창이 닫혀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예수님 영혼의 눈은, 영혼의 창은 활짝 열려 있어
하느님 그분께로부터 와서
하느님 그분께로 가는 순례 여정임을 환히 내다보고 있습니다.
하느님 향해 영혼의 창 활짝 열려 있어야 무욕의 자유로운 삶입니다.
세속의 육적 욕망에 노예 되지 않습니다.
영혼의 창이 닫혀
온통 세속의 육적 욕망에 중독되어 사는 이들 얼마나 많습니까?
영혼 없이 육신만으로,
참 자기를 잊고 사는 사람들 점점 늘어나는 추세 같습니다.
영혼의 창 밖 하느님을,
영적 아름다운 진리들을 내다보지 못하면,
참 기쁨도 없고 보이는 육신의 현실이 전부가 되어 버립니다.
본의 아니게 1독서 지혜서에 나오는 악인들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의 악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한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신비로운 뜻을 알지 못하며
거룩한 삶에 대한 보상을 바라지도 않고,
흠 없는 삶에 대한 상급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영혼의 눈 멀면, 영혼의 창 닫히면,
저절로 무신론자나 회의주의자, 불가지론자가 되기 마련이며,
자연히 현실의 육적 삶에 빠져들게 됩니다.
이 거룩한 미사 시간,
주님은 우리 영혼의 창을 활짝 열어 주시어
오늘도 주님을 뵈오며 영적 삶을 살게 해 주십니다.
아멘.
- 성요셉수도원 원장
* 한창현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
대구에서 어떤 자매가 겪은 일입니다.
그는 경산에 있는 영남대학교에 다닙니다.
그 학교를 줄여서 영대라고 합니다.
대구 사람들은 다 그렇게 부릅니다.
영대는 대구 시내에서 많이 벗어난 곳,
경산에 위치합니다.
그리고 캠퍼스도 무지 넓고요.
하여튼 학교가 그러하니
카풀 제도가 꽤 정착되어 있습니다.
그 자매는 영대 다닙니다.
학교에 갈려고 버스를 기다리는데
짜증나게 버스가 안 왔습니다.
그리고 강의 시간도 촉박하고, 고민하던 중에
어느 멋진 남자가 차를 슥 몰고 오더니 “영대!”라고 외쳤습니다.
그는 갈등을 했습니다.
“강의 시간이 촉박하지만 모르는 사람의 차를 어떻게 타지?
그리고 난 예쁘니깐 혹시 잡아서 팔아버리면 어쩌지?”
그렇게 갈등을 하고 있는데
모범 학생으로 보이는 한 남학생이 쪼르르 뛰어 가더니 그 차에 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자매도
“저렇게 모범 학생처럼 보이는 사람이 탔으니 설마 나쁜 사람은 아니겠지”라면서
그 차 뒷좌석에 탁~ 탔습니다.
그 뒷좌석에는 아까 그 남학생이 타고 있었습니다.
어쨌든 차는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그 차는 영대 방향으로 가지 않고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운전하는 사람도 룸미러로 힐끔힐끔 그를 쳐다보고 있었고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으면서...
또한 옆에 있는 모범 학생으로 보이는 남자도
계속 그 자매에게 곁눈질을 했습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그는 눈물이 났습니다.
“이렇게 팔려가는구나. 이쁜 것이 화근이 될 줄이야.”
훌쩍~훌쩍~ 그러자 운전하는 남자가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영대야, 니 여자 친구 왜 우는데?”
무엇인가를 정확히 알 수 없을 때 우리는 갈등합니다.
이쪽을 택해야 하나, 저쪽을 택해야 하나...
오늘 복음과 그 이후의 내용을 보면,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즉 예수님은 당신을 두고
하느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 그리스도라고 말하지만
사람들은 갈등을 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 군중, 바리사이와 대제관들 그리고 유다인들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예루살렘 주님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가 정말 메시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말씀하시는 것이 다른 예언자들과는 달리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메시아가 오면 어디서 오는지 알지 못하는데,
알고 있기 때문에 아니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게 갈등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들 인생이 다 갈등의 연속이지만
그분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하느님에게서 왔고 하느님께서 나를 보내셨다고요.
그리고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요.
영국 속담에
“벌은 물을 마셔서 꿀을 만들고, 뱀은 물을 마셔서 독을 만든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같은 처지에 있어도
주님께 확고한 믿음을 두고 사는 사람은
물을 마셔도 꿀을 만들어내는 벌과 같은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 예수성심시녀회
* 조윤제 토마스 데 아퀴노 신부님의 묵상글 *
어떤 사람이 길에서 아주 큰 소리로 웃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그 사람에게 뭐가 그렇게 재미있냐고 물으니까..
"저기 돌이 보입니까?
저 돌에 벌써 10명이나 걸려 넘어졌습니다." 하고 말하면서 또 웃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지나가던 사람이
"남이 잘못되는 게 그렇게 좋으냐고, 이 사람 아주 몹쓸 사람"이라고 말을 하니까
그 사람이 말을 합니다.
"아니, 사람들이 넘어지는 것이 우스운 것이 아니고,
자신이 넘어지고 난 뒤에 뒷사람이 넘어지지 않도록 치워놓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이 너무 우스워서 웃는다"
고 말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걸림돌을 만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자신들이 어설프게 알고 있는 지식이라는 걸림돌 때문에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스도가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무도 모를 터인데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다 알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이 어디에서 왔는지 사실 다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은 나를 보내셨다"는 그 말씀을 다 믿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나에게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데에 어떤 걸림돌이 있는지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게으름, 세상에 대한 걱정, 부족한 믿음...
이런 것들이 정말 예수님께 나아가는 데에 걸림돌이 된다면,
그런 걸림돌은 나를 위해서도 또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치워야 할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예수님을 향해 나아가는 길.
그 길에 걸림돌이 있다면 걷어내야
나도 내 이웃도 함께 그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 대구가톨릭대학교(한티영성관)
* 홍성만 신부님의 묵상글 *
<사랑이신 하느님께 대한 인식의 정도가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정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 당신을 죽이려는 유다인들 때문에
가능한 한 남의 눈에 띄지 않게 명절을 지내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주님을 뵙게 됩니다.
그러나 그러는 중에도
대중 앞에 서면 가차없이 말씀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들이 죽이려고 하는 이가 저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저 사람이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는데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최고 의회 의원들이 정말 저 사람을 메시아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이제는 군중들 사이에서도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거부하는 분위기가 만연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어디에서 왔는지 다 알고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 사실이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거부하는 최초의 동기가 되면서,
거기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군중들입니다.
~ 성경은 이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나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내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보내신, 따로 계신 그분,
예수님께서 알고 계신 그분,
마음이 굳어진 유다인들은 결코 알아보지 못하는 그분,
우리는 바로 그분을 올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분의 정체를 깊이 있게 알아보아야 합니다.
그분의 정체는 다름 아닌 사랑이십니다.
세상 만물을 향한,
나를 향한 사랑이십니다.
이러한 하느님을 향한 깊고 깊은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사랑이신 하느님을 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세상과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가없는 사랑 때문에 보내어진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사랑이신 하느님께 대한 인식이
나의 마음속에서 한층 더 깊어지는 하루가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 가톨릭교육원
* 조성호 신부님의 묵상글 *
오늘 복음에서는 생략되어 있지만,
예수님의 형제들은 예수님의 뛰어난 능력을 보이지 않게 썩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올라가 세상에 드러내라고 권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드러나지 않게 남몰래”(요한 7, 10) 올라가십니다.
당신께서 오신 것은
모든 이를 구원하기 위한 것이지만,
그것으로 당신을 드러내고픈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당신의 메시지가 중요한 것이지
밖으로 드러나 보이는 명예, 과시는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형제들이 예수님을 꼬드기듯 보이는 이 상황도
다음 기회를 엿보면서 물러갔던 사탄의 모습이 아닐까요?
누군가가 사탄이 아니라
사탄이 그 자리에 들어가 다른 사람으로 만듭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할 때에도
혹 곁에서 그것을 드러내라고 유혹하거든
그 안에 사탄이 작용하는 것임을 알고 과감히 뿌리쳐야 할 것입니다.
왜?
선업은 이 세상에서 쌓는 것이 아니고
숨은 일도 보시는 그분의 나라에 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당신의 가르침을 주시는 것에는 당당합니다.
보이지 않게 예루살렘으로 오르셨던 예수께서
성전에서는 “큰 소리로 말씀하시며 가르치십니다.”(요한 7, 28)
“나는 그분을 안다”(요한 7, 29)
아는 것을 안다고 하는 것,
주님을 믿는 사람이 본받아야 할 모습입니다.
주님을 알기 위해 애쓰면서 주님을 잘 모르는 이들에게,
주님을 왜곡되게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주님은 이런 분이시다’라고 당당하게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전하는 데에는 위축됨이 없어야 합니다.
숨어서 주님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 놓고 내가 알고 있는 주님께서는 이런 분이라고 큰 소리로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보이지 않게,
그러나 주님은 완전히 드러나도록!
세례자 요한이 가르친,
나는 작아지고 주님은 커지셔야 한다는 성서의 진리를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께서도 그것을 가르쳐 주시고 계십니다.
- 서울대교구 중계본동 본당
* 김태환 신부님의 묵상글 *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번 주간에 우리는 요한 복음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생명으로서 우리 생명의 원천이심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이렇게 강조합니다.
생명이요, 빛이신 예수님을 세상이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십자가에 처형하였으나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부활시키시어 영광스럽게 하셨다.
오늘 복음 끝부분에서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전해 줍니다.
예수님의 때, 예수님의 시간은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달리 표현한 말입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점점 예수님께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분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분명 그분께는
십자가의 치욕적인 죽음의 때가 있고
영광스러운 부활의 때가 있습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뜻이 성취될 때까지의 인내로운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 자체가
바로 이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이 기다림의 바람직한 자세는
외적, 내적인 침묵을 통한 고요한 상태라고 합니다.
자 그럼 조용히 묵상하겠습니다.
평소 본당에서 강론할 때는 이러고 앉으면
시간이 지나고 때가 되어서 성찬의 전례를 거행하면 됩니다.
헌데 오늘 전 왠 유리벽 속에서 혼자 놀고 있습니다.
침묵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닙니다.
제가 생각해도 참 불쌍한 때입니다.
이 불쌍한 때를 맞이하기 전에
전 쫌 멀리 있는 수녀원을 방문했었습니다.
이박 삼일 여유로운 시간을 가지면서
저한테 주어진 요 나흘간의 숙제도 풀 겸 해서 떠났습니다.
갈 땐 좋았습니다.
뭔가 될 것 같고 가는 길에 보이는 경치도 멋있었습니다.
멀리 높은 산 그늘에는 아직 눈이 보이는데
차 안은 더워서 창문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하는 묘한 상황을 즐기며 도착했습니다.
행복 끝 불행 시작이었습니다.
거기서 머문 이틀 동안 죽다가 살아 났습니다.
외가쪽의 친지분이 계셔서 이전엔 시간 날 때 자주 들렀었는데
그동안 발길이 뜸하면서 저도 그곳 상황을 까먹었습니다.
후회 억수로 했습니다.
간 곳은 봉쇄 수녀원입니다.
그래서 봉쇄 구역 안과 밖은 차단되어 있고
안엔 수녀님들, 밖에는 저, 그리고 관리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뭔 말이냐면,
혼자 놀아야 됩니다.
지금의 상황과 똑같습니다.
거기다 건물을 계곡 한 복판에 지어 놓아서
모든 전파가 비켜 갑니다.
휴대폰 라디오 몽땅 꽝입니다.
기도 시간이 돼서 성당에 갔습니다.
시편을 진짜 거룩하게 노래합니다.
쉽게 말씀 드려서 글자 한자 한자를 읽을 때마다
쉼표가 하나씩 있는 것처럼 느리게 음미하십니다.
가뜩이나 지루했는데 성당에서 기도하고 나니
시간이 멈춘 듯 모든 게 느려집니다.
시계도 덩달아 느리게 갑니다.
제 머리도 느리게 굴러 갑니다.
숙제 해야 하는데, 포기 했습니다.
그리고 이리 저리 돌아댕겼습니다.
거긴 아직 추워서 개미도 없습니다.
어디 붙어 있는지 모를 딱따구리 한 마리만 제 친구입니다.
제가 이곳을 출입한 지 십년도 넘습니다.
헌데 삥둘러도 변한 게 없습니다.
희한하게 안 변했습니다.
헌데 제가 변했습니다.
별 기다림 없이 때가 되고 지나고 또 뭔가 닥치고 치루고 하면서
을씨년스러움을 버텨내는 기다림을 까먹었습니다.
집에 돌아왔습니다.
개나리 다 폈습니다.
목련은 봉우리를 터뜨릴까 말까 갈등중입니다.
꼴랑 이틀 기다림을, 느림을 경험하고 본 개나리, 목련,
작년에 본 거 하고 다릅니다.
뭐가 다른지는 표현이 안됩니다.
지금 바쁘신 분, 시끄러운 한 복판에 계신 분.
또 일이 막 닥쳐서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이어가시는 모든 분들에게
억수로 지겨운 기다림의 시간에로 초대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죽이려고 눈을 부라리는 그 사람들 사이를 쓱 지나가십니다.
그리고 나선 하느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온전히 드러나는 그 때를
예수님은 묵묵히 기다리십니다.
오늘 동네라도 한바퀴 휘 도시면서
우리들에게 닥치는 시간 말고,
간절히 기다리는 때를 조용히 기다리는 연습을 해 봅시다.
- 물금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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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 묵상 - 사순 제4주간 금요일(3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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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바로 아는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누구이신지, 어디에서 왔고, 무슨 사명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 뚜렷한 자아관이 성립되신 분이시기 때문에 흔들림 없이 살아가셨고, 언제 어디에서나 당당하게 말씀하셨고, 행동하셨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 유광수 신부
"어떻게 해서든 우리 신앙 생활 안에서도 예수님처럼 하느님 아버지의 정체성에 대한 정확한 파악이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어떻게 해서든 ‘그분’을 제대로 알아야 ‘진한 사랑’이 오갈 수 있습니다. 그분을 만나야 아낌없이 자신을 봉헌할 수 있습니다." - 양승국 신부
"지금 우리들의 모습을 잘 보면, 계속해서 우리들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토록 사랑하라고 했는데 대신 철저히 남을 미워하고 있습니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예수님처럼 철저한 사랑으로 무장을 해야 합니다." - 조명연 신부
"하느님 향해 영혼의 창 활짝 열려 있어야 무욕의 자유로운 삶입니다. 세속의 육적 욕망에 노예 되지 않습니다. 영혼의 창이 닫혀 온통 세속의 육적 욕망에 중독되어 사는 이들 얼마나 많습니까? 영혼의 눈 멀면, 영혼의 창 닫히면, 자연히 현실의 육적 삶에 빠져들게 됩니다." - 이수철 신부
"영국 속담에 “벌은 물을 마셔서 꿀을 만들고, 뱀은 물을 마셔서 독을 만든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같은 처지에 있어도 주님께 확고한 믿음을 두고 사는 사람은 물을 마셔도 꿀을 만들어내는 벌과 같은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 한창현 신부
"나에게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데에 어떤 걸림돌이 있는지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게으름, 세상에 대한 걱정, 부족한 믿음... 이런 것들이 정말 예수님께 나아가는 데에 걸림돌이 된다면, 그런 걸림돌은 나를 위해서도 또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치워야 할 것입니다." - 조윤제 신부
"하느님을 향한 깊고 깊은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사랑이신 하느님을 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세상과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가없는 사랑 때문에 보내어진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 홍성만 신부
"“나는 그분을 안다”(요한 7, 29) 아는 것을 안다고 하는 것, 주님을 믿는 사람이 본받아야 할 모습입니다. 주님을 알기 위해 애쓰면서 주님을 잘 모르는 이들에게, 주님을 왜곡되게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주님은 이런 분이시다’라고 당당하게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 조성호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죽이려고 눈을 부라리는 그 사람들 사이를 쓱 지나가십니다. 그리고 나선 하느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온전히 드러나는 그 때를 예수님은 묵묵히 기다리십니다. 우리들에게 닥치는 시간 말고, 간절히 기다리는 때를 조용히 기다리는 연습을 해 봅시다." - 김태환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