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윤희 姜允熙 (1868 ~ 1909)】 "13도창의군 의병대장의 부장"
1868년 11월 11일 경기도 가평군 외서면(外西面, 현 청평면) 대성리(大城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이명은 강성집(姜聖集), 강선집(姜善執)이다.
1905년 서울에 설치된 대한13도유약소(大韓十三道儒約所)에 참여하여 김동필(金東弼)·경현수(慶賢洙) 등과 함께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상소를 고종에게 올렸다. 또 각국 공사에게 을사늑약의 부당성과 일제의 침략성을 알리는 공개장을 발송하는 활동을 하였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의병을 일으켜 무력으로 투쟁할 것을 계획하였다.
강원도 원주에서는 이인영(李麟榮) 의병장을 중심으로 한 관동창의진이 1907년 9월 창설되었다. 관동창의진은 강력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의병 세력을 통합할 능력을 지닌 핵심 부대였다. 그해 10월 관동창의진에 참여하여 이인영 의병장의 부장(副將)이 되어 의병 활동을 시작하였다.
관동창의진은 원주를 떠나 경기도 지평(砥平)의 삼산리(三山里, 현 양평군 양동면 삼산리)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부대 이동에 따라 삼산(三山)·석실(石室)·주천리(舟川里)·산매실동(山梅實洞) 등지에 주둔하면서 군용금을 징수하거나 군사력을 보강하였다. 지평에 주둔하고 있을 때 일본군 원주수비대의 공격을 수시로 받으며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특히, 10월 28일 둔촌에 주둔하고 있을 때 일본군 원주수비대의 기습 공격을 받아 35명의 사상자를 내는 피해를 입었다. 지속적인 일본군과의 충돌은 이 무렵 허위(許蔿)의 경기의병, 이강년의 호좌의진 등과 추진되고 있던 전국적인 연합 의병에 대한 논의를 가속화하였다. 그렇게 창설된 연합 의병이 13도창의군이다.
13도창의군은 편제 개편을 거쳐 1908년 1월 최종적으로 13도창의대장 이인영, 군사장(軍師將) 허위, 관동창의대장(關東倡義大將) 민긍호, 호서창의대장(湖西倡義大將) 이강년, 교남창의대장(嶠南倡義大將) 박정빈(朴正斌), 진동창의대장(鎭東倡義大將) 권중희, 관서창의대장(關西倡義大將) 방인관, 관북창의대장(關北倡義大將) 정봉준으로 개편되었다. 이때부터 13도창의대장의 부장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3도창의군은 연합 의병부대의 편제를 갖춰가는 동시에 서울에 있는 반민족 행위자를 제거하고 일제의 통감부를 해체하여 종래의 굴욕적인 조약을 파기하고 대한제국의 독립을 이루기 위해 연합 작전으로 서울진공작전을 추진하였다. 서울진공작전의 목표는 관동창의진을 비롯한 13도창의군에 참여하는 각 의병부대가 동대문 밖 30리 지점에 집결하여 일시에 서울로 공격해 들어가는 것이었다. 특히, 가장 우수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던 관동창의진이 제때 도착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따라서, 양주 집결지까지 안전하고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치밀한 작전을 세워 이동할 필요가 있었다. 이인영은 양주까지 먼저 이동하는 작전을 수립하고 11월 초 지평의 주둔지를 떠나 양주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이 주요 교통로를 장악한 후 의병에 대한 수색 및 공격을 가하였기 때문에 관동창의진의 이동은 원활하지 못하였다. 결국, 12월까지 강원도 원주·횡성·평창·영월·정선 등지를 우회하면서 틈을 엿보았지만 끝내 강원도 일대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인영은 일본군의 포위망을 뚫으면서 교전을 최소화하고 신속하게 이동하기 위해 부대를 나눠 여러 지역으로 분산하여 이동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이인영의 결정에 핵심 참모로 참여하였으며, 이인영과 함께 관동창의진 본대를 이끌고 횡성 등지를 거쳐 양주의 집결지로 이동하였다. 그런데 관동창의진이 도착하기 직전에 먼저 집결지에 도착한 허위의 경기의병이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게 되었다. 일본군을 상대로 장시간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지만 허위의 경기의병만으로 일본군을 이겨내기에는 역부족이어서 패퇴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1908년 1월 이인영을 보좌하여 양주 집결지에 도착하였다. 도착한 직후인 1월 28일 관동창의진과 경기의병을 중심으로 서울진공작전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연합 의병인 13도창의군이 집결한 것을 인지한 일본군은 전력을 강화해 공격해 들어왔다. 그 결과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지만 일본군의 방어막을 뚫지 못하고 후퇴하였다.
일본군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13도창의대장인 이인영이 부친의 부음(訃音)을 접하게 되었다. 이인영은 모든 권한을 군사장인 허위에게 넘기고 의병부대에서 이탈하였다. 그는 이인영이 안전하게 문경으로 귀향할 수 있도록 호위하고 의병을 시작한 강원도에서 의병 운동을 지속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인영을 보좌하고 이구채·정봉준 등과 8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강원도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이동하는 중에 지평의 동북쪽 약 30리 지점에서 일본군 양근(楊根) 수비대를 만나 치열한 교전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아군의 사상자 40여 명이 발생하는 큰 피해를 보고 후퇴하였다.
의병부대를 재편성하고 스스로 의병장으로 취임하여 30여 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강원도 화천, 양구 일대에서 의병운동을 이어갔다. 이후 지방위원 등 일제에 협조하는 부일배(附日輩)를 처단하는 한편, 일본군 수비대와도 수차례 전투를 전개하여 성과를 올렸다. 1909년 5월 15일, 부대원들과 함께 양구군 지방위원인 이규명(李奎明)을 처단하기 위해 양구군 수입면(水入面)의 면장집을 기습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규명을 사살하지 못하고 총상만 입혔다. 이후 도주한 이규명의 신고를 받은 화천분견소와 양구분견소의 일본 헌병으로 구성된 일본군의 추격을 받게 되었다. 5월 19일 오전 8시경 화천군 남면(南面) 완강리(莞江里) 남방 약 10리의 산속에서 추격해 온 일본군과 치열한 교전을 치렀다. 이 전투에서 화승총(火繩銃) 2정, 군도(軍刀) 2점을 빼앗기고, 부상자 3명이 발생하는 피해를 입고 양구 천미산(天尾山) 방면으로 패퇴하였다.
천미산 방면으로 이동하던 20일 아침 화천군과 양구군 경계인 완강리 깊은 산중에 위치한 가옥에서 아침 식사를 하던 중 추격해 온 일본군의 공격을 재차 받게 되었다. 일본군은 19일 전투 이후 완강리 일대에 대한 대대적인 수색 작업을 벌인 끝에 그 위치를 파악하고 기습 공격에 나선 것이었다. 일본군의 기습 공격에 즉각적으로 대응하였으나 이겨내지 못하고 부하 1명이 전사하고 2명이 부상하는 피해를 보고 일본군에 체포되었다. 경성지방재판소 춘천지부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경성공소원에 항소하였으나 곧 항소를 취하하여 형이 확정되었다. 1909년 11월 30일 경성감옥에서 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