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96 노벨문학상 폴란드의 쉼보르스카 선정 폴란드의 여류 시인 비스와바 심보르스카(Szymborska, Wisława, 1923~ )가 1996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스웨덴 한림원은 1996년 10월 3일 "그녀 시에 나타난 정확한 풍자는 역사적이고 생물학적인 상황을 인간 현실의 단편속에서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선정이유를 밝혔다. 심보르스카는 1923년 폴란드 서부의 작은 마을 브닌에서 태어났으나 크라코프의 야기에보 대학에서 폴란드 문학과 사회학을 수학했다. 꾸며진 감상이나 시인의 인도주의적 치료 기능 따위의 감상에 늘 거리를 유지해온 그는 철학적인 명상의 세계에 가까운 시를 써왔다. 일상적인 언어도 자주 사용하지만 언어의 단편적인 나열의 효과에 기대는 일이 없이 철학적 문제를 극화하는 시적 구조를 만드는 것이 전형적인 그의 시적 스타일이다. 스탈린주의는 물론 정치세력에 비판적인 내용이나 존재의 의미, 철학적 관조, 사랑의 고통에 이르기까지 실로 폭넓은 작품세계를 유지해온 심보르스카의 일부 시는 사회주의 시대의 폴란드에서 금지된 적도 있다. 초기의 시를 제외하면 중기 이후로는 철학적인 시로 일관했다. 시인으로서 창조의 힘에 긍정하면서도 인간 소외의 한 구석을 응시하는 냉철한 시각은 늘 '여성의 입장'이라는 시점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조선
[1991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소설가 나딘 고디머, 노벨문학상에 선정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소설가 나딘 고디머(Gordimer, Nadine, 1923~ )는 1923년 11월 20일 요하네스버그에서 출생하였다. 섬세한 감수성, 선명한 이미지, 암시에 넘치는 문체가 특징이다. 《사탄의 달콤한 목소리》(1952), 《금요일의 발자국》(1960) 등 5권의 단편집과 장편 《낯선 자의 세계》(1958) 등이 있다. 인종차별 문제를 다룬 작품이 많은데, 정면으로 항의하지 않고 인종간의 협조와 이해를 촉구하고 있다. 심리묘사에 뛰어난 서정적 사실주의 문학으로서 예술성이 높다. 1991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리투아니아에서 13세에 이민한 유대인이고 어머니는 잉글랜드인이다. 네이딘 고디머의 부모는 그를 기독교인으로 키웠다. 15세에 첫 소설을 잡지에 발표했다. 많은 독서를 통해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차별정책(apartheid)이 백인이 아닌 아프리카 흑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알게 되었고 차츰 그 정책에 정치적으로 강한 반대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비트바테르스란트대학에서 1년간 공부했으며,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작품활동뿐만 아니라 미국의 여러 학교에서 강의하기도 했다.
[1990년] 동독ㆍ서독 통일 1945년 2차대전에서의 패배로 인해 동서로 나뉘었던 독일이 마침내 하나로 통일됐다. 서독이 1990년 10월 3일 오전0시를 기해 동독을 흡수통합하는 형식으로 독일연방공화국이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미ㆍ영ㆍ불ㆍ소 등 2차대전 전승 4개국은 이 날짜로 베를린을 포함한 독일에 대한 모든 권리를 공식포기, 기존의 관할권을 독일에 이양했다. 통일을 주도한 헬무트 콜 서독총리는 12월2일 실시된 전 독일 총선에서 승리, 초대 독일총리가 됐다. 독일통일은 단순히 게르만 민족의 통일차원을 넘어서 유럽내 독일의 위상은 물론, 기존의 국제질서에도 엄청난 변혁을 몰고 왔다. 통일의 순간은 독일인은 물론 전 세계를 감동시켰다. 옛 제국의회 건물 앞 공화국 광장에는 1백만명이 운집해 폭죽을 쏘아대는 가운데 흑-적-황의 대형 독일 국기가 서서히 올라갔고 "통일, 정의, 자유를 조국 통일에 ..."로 시작되는 독일 국가가 장엄하게 연주되고, 단상에 선 헬무트 콜 총리는 감동과 흥분으로 얼굴이 벌겋게 상기돼 있었다. 이윽고 3일 0시. 군중들은 일제히 '도이칠란트'를 외쳐댔다. 그 순간 독일 전역의 교회와 성당은 일제히 종을 울려 통일 독일의 탄생을 전세계에 알렸다. /조선
[1990년] 한국-베냉 국교 수립 아프리카 서부의 국가. 베냉 만에서 북쪽 내륙지대로 약 675km 파고들어간 길고 좁은 형상을 하고 있으며, 남쪽 끝 대서양으로부터 북쪽 끝 나이저 강까지 뻗어 있다. 공식 수도는 포르토노보이나 사실상의 수도는 코토누이다. 서쪽은 토고, 북서쪽은 부르키나파소(옛 이름은 오트볼타), 북동쪽은 나이저 강, 동쪽은 나이지리아와 접하고 있다. 동서 최대너비가 320km 정도이고, 남쪽 해안선길이는 120km에 지나지 않는다. 면적 112,622㎢, 인구 7,687,000(2006 추계). 베냉은 1973년 북한과 단독수교, 1961년 한국과 수교했으나 1975년 단교했다가 1990년 재수교하였다. 1992년 6월 대통령 소글로, 1993년 8월 와무차관 올로고우도우가 내한하였다. 1992년 경제과학 기술협정, 외교관광용 사증면제 협정이 체결되었다. 2000년 현재 대한(對韓) 수입은 1386만 달러이고 수출은 없다. 주요 수입품은 인조섬유, 의류, 직물, 자동차, 보일러 등이다. 2001년 6월 현재 한국 교민가족 1세대가 거주하고 있다. /naver
[1970년] 북한의 조류학자 원홍구(元洪九, 1888~1970) 사망 평안북도 삭주(朔州) 출생. 1910년 수원농림학교를 마친 다음 일본 가고시마고등농림학교[鹿兒島高等農林學校]로 유학하였다. 수원농업시험장 기사를 거쳐 1920년 개성의 송도고등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박물학(생물학)을 가르치는 한편 식물학에 뜻을 두어 국내는 물론 타이완에까지 원정하여 식물채집을 하였다. 그 후 조류채집 및 분류에 전념하였다. 1931년 평안남도 안주공립농업학교로 옮긴 이래 자신이 채집한 조류의 목록을 학술지에 발표하기 시작하였고, 수원고등농림학교 25주년 기념논문(1934)에 조선조류목록을 발표하였다. 전국을 채집여행하여 한국산 미기록 조류를 포함하여 10여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1929~1941). 1940년에 함경남도 영생여자고등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였고, 함흥의학전문학교에서 생물학을 강의하였다. 1945년 평안남도 덕천공립농업학교 교장으로 옮겼다가 강서농업학교 교장을 거쳐, 1947년 김일성종합대학교 생물학부 부교수로 취임하였으며, 이후 북한의 조류학 분야에서 활약하였다. 생물학 박사학위의 수령과 함께 과학원생물학연구소장으로 재직하였다. 저서에 《조선조류원색도설》(1958) 《조선조류지 1~3》(1963~1965) 《조선짐승류지》(1968) 등과 30여 편의 학술논문이 있다. /naver
[1967년] 포항제철 기공식 거행 1967년 10월 3일 포항시 교외 영일군 대송면에서 포항종합제철(현 포스코) 기공식이 거행됐다. 황량한 모래벌판을 세계 굴지의 제철공업단지로 탈바꿈시키는 '영일만 드라마'의 제1막이 오른 것이다. 이듬해인 68년 3월 20일 포항제철은 재무부와 대한중석이 각각 출자한 3억 원과 1억 원을 자본금으로 해 주식회사로 공식 출범했다. 창설 요원은 박태준 사장 등 임원 8명과 직원 31명이었다.. 1973년 조강 103만 t의 1기 설비가 준공된 이래, 네 번의 확장 끝에 1983년 조강 910만 t 체제의 포항제철소를 완공했다. 이어 1985년 광양 1기 착공을 시작으로 1992년 제선-제강-압연 공정을 직결하는 최신예 제철소를 건설하는 등 발전을 거듭, 1998년 조강생산 기준 세계 1위의 철강회사로 발돋움했고, 2000년 포스코란 이름으로 민영화됐다./국제신문
[1935년] 이탈리아, 에티오피아 침공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가 에티오피아와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 접경에서 일어난 충돌을 구실로 에티오피아를 침공했다. 에티오피아(아비시니아)는 유럽인들이 지배하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1934년 당시 몇 안 되는 독립국 가운데 하나로 1890년대에 이탈리아가 정복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1934년 12월 에티오피아와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 접경지대에서 충돌이 일어나자 이탈리아는 모든 중재 제의를 거부하고 1935년 10월 3일 에티오피아를 침공했다. 이탈리아 침공군은 빈약한 장비에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에티오피아 군대를 밀어붙여 1936년 4월 9일 아샹기 호수 근처에서 대승을 거두고 5월 5일 수도 아디스아바바를 점령했다. 에티오피아의 지도자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가 국외로 망명하자, 무솔리니는 이탈리아의 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를 에티오피아 황제로 선언하고 피에트로 바돌리오를 총독으로 임명했다. 에티오피아의 호소에 따라 국제연맹은 1935년의 이탈리아 침략을 비난하고 경제제재를 결의했지만 지지가 부족해 제재조치는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 전쟁은 이탈리아 제국주의의 발판을 마련해 줌으로써 국제적 긴장을 증대시켰다. /브리태니커
[1929년] 바이마르 공화국의 총리, 외무장관 슈트레제만(Stresemann, Gustav, 1878~1929) 사망 베를린 출생. 제1차 세계대전 전 작센지방의 공업을 크게 발전시켜 공업가단체의 조직가로서 두각을 나타내어 국민자유당의 국회의원이 된 후, 타고난 웅변술과 활동적인 수완으로 정치지도자로 부상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중 국민자유당의 지도자, 독일혁명 후에는 독일인민당을 조직하여 온화한 군주주의를 내세웠다. 1923년 8월 인플레의 대혼란 중 수상에 선출되자, 프랑스군에 대한 저항을 중지하고 통화의 안정을 꾀하였다. 1923년 11월~1929년 10월 죽을 때까지 역대 공화국의 외무장관으로 있으면서 정계의 중심인물로 활약하였다. 그는 전승국(戰勝國)과 협조하여 독일의 국력을 회복시키는 정책을 폈으며, ‘로카르노조약’을 맺어 국제연맹 가입에 성공하였다. 또한 미국이 제안한 도스안(案:Dawes Plan)과 영안(案:Young Plan)에 의하여 배상금액을 경감시키고, 라인란트로부터의 점령군 철수를 확약받았다. 한편, 소련과의 친선에 노력하면서 독일을 다시 유럽의 패자(覇者)로 만들기 위해 동유럽으로 진출을 꾀하는 등 정치가로서의 야망을 보이기도 하였다. 1926년 ‘로카르노조약’ 체결에 노력한 공로로 프랑스의 외무장관 브리앙과 공동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naver
[1928년] 허버트 후버, 미국 대통령에 당선 1874. 8. 10 미국 아이오와 웨스트브랜치~1964. 10. 20 뉴욕 시. 1928년 10월 3일 미국의 제31대 대통령으로 허버트 후버(Hoover, Herbert Clark, 1874~1964)가 당선됐다. 당선된 후버는 1874년 8월에 아이오와주 웨스트브랜치에서 출생했다. 1895년 스탠퍼드대학을 졸업하고 미국과 호주에서 광산기사로 일하던 중 금광채굴에 성공하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중에는 런던에서 미국구제위원회, 벨기에 난민구제위원회를 조직하여 활동하기도 한 후버는 1921년부터 1928년까지 상무장관으로 있으면서 농업구제와 고율보호관세를 주창했다. 1929년 공화당후보로 대통령에 당선된 후 당시의 심각한 경제불황을 타개할 대책을 수립하고 군비축소를 추진하는 한편,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와의 우호관계 유지를 위해 노력했다. 그는 1932년에 대통령후보로 다시 지명되었지만, 프랭클린 D. 루스벨트에게 참패하고 말았다. 1930년대가 끝날 때까지 후버는 워싱턴에서 '급진주의자의 영향'을 공격하면서 불경기 구제를 위한 어떠한 구체적 조치에도 반대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그는 2개의 연방위원회(1947~49, 1953~55)를 이끌었는데, 하나는 정부의 낭비를 없애기 위한 위원회였고 또 하나는 정부의 비능률을 없애기 위한 위원회였다. 저서로는 〈회고록 Memoirs〉(1951)과 〈미국의 개인주의 American Individualism〉(1922)가 있다.
[1900년] 경기고등학교 개교 우리나라 최초의 관립 정규 중등교육기관인 경기고가 1900년 10월 3일 개교했다. 경기고의 역사는 곧 한국 중등교육의 역사였다. 경기고는 처음 중학교에서 출발해 한성고(1906년), 경성고보(1910년), 경성제1고보(1921년), 경기중(1938년), 화동중-장안중(1952년), 경기중고(1952년), 경기고(1971년)를 거쳤다. 1974년 고교 평준화정책이 실시된 이후 위상이 약화됐지만, 1954년 고교입시가 실시되면서 경기고는 전국의 수재들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1970년에는 졸업자의 81.8%가 서울대에 진학하기도 했다. 경기고는 정-관-재계를 망라해 수많은 파워엘리트를 배출했지만 반작용으로 반(反)경기 정서가 심화되고 입시병폐가 사회문제화되면서 평준화정책을 불러오기도 했다. /조선
[1900년] 미국의 소설가 울프(Wolfe, Thomas, 1900~1938) 출생 노스캐롤라이나주 애슈빌 출생. 아버지는 묘비(墓碑)의 석재 조각사였다. 노스캐롤라이나대학교 졸업. 하버드대학교의 대학원에서 G.베이커 교수의 지도로 희곡을 전공, 극작가를 지망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뉴욕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여러 차례 유럽을 방문하는 사이에 J.조이스, M.프루스트의 영향을 받고 시정이 넘쳐흐르는 독특한 문체로 소설을 쓰기 시작, 1929년 《천사여 고향을 보라 Look Homeward, Angel》로 작가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1935년에는 그의 최대 장편인 《때와 흐름에 관하여 Of Time and the River》를 발표하였으며, 38세의 젊은 나이로 죽을 때까지 경탄할 만큼 많은 원고를 썼다. 앞의 두 작품과 그가 죽은 뒤에 출간된 《거미줄과 바위 The Web and the Rock》(1939)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 You Can’t Go Home Again》(1940)가 그의 4대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이들은 셋째 번 작품부터 주인공의 이름이 바뀌기는 하나 대체로 ① 저자의 유년시절부터 대학시절, ② 하버드대학과 유럽 방랑, ③ 번스타인 부인과의 사랑, ④ 문단생활을 내용으로 한, 본질적으로는 연작으로 구상한 자전소설(自傳小說)들이다. 그것은 자신의 잃어버린 시절에 대한 탐구인 동시에 위대한 미국의 서사시이기도 하다. 이 밖에도, 단편집에 《죽음에서 아침으로》(1935) 《머나먼 산들》(1941), 희곡에 《매너하우스》(1948), 에세이에 《어떤 소설 이야기》(1936) 등이 있다. /naver
[1897년] 프랑스의 시인, 소설가, 평론가 아라공(Aragon, Louis, 1897~1982) 출생 ← 아라공의 책 Feu de Joie et Autres Chansons(2002년 출간) 의학을 배워 제1차 세계대전에 군의관으로 출전하였으나, 전후인 1919년 A.브르통, F.수포 등과 함께 전위적인 잡지 《문학 Litt rature》을 창간하여 다다이즘 운동에 참가하였다. 처녀시집 《축화(祝火) Feu de joie》(1920), 소설 《아니세 또는 파노라마 Anicet ou le panorama》(1921)를 발표하였다. 브르통이 쉬르레알리슴(초현실주의) 운동을 시작하자 그에 가담하였고, 소설 《파리의 농부 Le Paysan de Paris》(1926), 평론 《문체론(文體論) La Trait 》 등의 걸작을 썼다. 이 무렵부터 그는 자기의 사상과 쉬르레알리슴의 교의와의 모순에 번민하기 시작하여 1928년 여름에는 자살을 꾀할 정도로 창작상의 절박감을 느끼고 있었으나, 그해 가을에 러시아의 시인 V.V.마야코프스키를 만나고 또한 그의 의누이[義妹] E.트리올레트를 알게 되자 괴로운 역경을 벗어나 1928년에 결혼한 트리올레트와 함께 1930년 소련으로 가서 공산주의에 빠졌다. 귀국한 후에는 쉬르레알리슴에서 떨어져 나와 좌경 작가로 전향, 평론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위하여 Pour un r alisme socialiste》(1935) 《발의 종(鐘) Les Cloches de B le》(1934)으로 시작하는 연작소설 《현실 세계 Le Monde r el》를 내놓았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단장 Le Cr ve-cœur》(1941) 《엘자의 눈 Les Yeux d’Elsa》(1942) 《프랑스의 기상나팔 La Diane fran aise》(1944) 등의 뛰어난 시편을 발표하며 레지스탕스운동에 참가하였다. 전후에도 《레 코뮈니스트 Les Communistes》(1949∼1951) 《성주간 La Semaine Sainte》(1958) 등의 걸작을 발표하였다. /naver
[1895년] 러시아의 시인 예세닌(Yesenin, Sergei Aleksandrovich, 1895~1925) 출생 ←Sergei Yesenin. 랴잔 출생. 빈농 집안에 태어나, 17세 때는 모스크바에서 상점 ·인쇄소의 직공으로 일하면서 틈틈이 시를 썼다. 첫시집 《초혼제(招魂祭) Radunitsa》(1916) 이후 혁명기에는 《변용(變容)》 《오 루시여, 활개쳐라》 《동지》(1917) 등 혁명에 관한 작품을 발표하였다. 1919∼1921년, 시의 인상과 이미지를 강조하는 ‘이미지니스트’ 그룹의 대표적 시인이 되었다. 그 시작(詩作)의 초기부터 러시아 농촌의 자연과 생활을 노래한 섬세한 서정시와 러시아 민중의 역사를 취재한 반역적 서사시 등으로 유명하여 ‘마지막 농촌시인’이라고도 일컬어졌다. 그의 시에는 단순한 목가나 노스탤지어를 넘어선 조국애가 깃들어 있고, 사회주의화가 진행됨에 따라 변용되어 가는 조국의 모습 속에서 옛농촌을 사랑하는 시인의 고뇌가 담겨 있다. 그는 음주벽과 신경증이 겹쳐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한 여관에서 마지막 시 《잘 있거라, 벗이여》를 남기고 자살하였다. 선시집 《주정뱅이의 모스크바》(1921∼1924), 서사시 《26인의 발라드》 《소비에트 루시》(1924) 《안나 스네기나》(1925) 등의 대표작이 있으며, 그 서정성 ·민중성 ·내면성 등이 높이 평가된다. /naver
[1886년] 프랑스의 작가 알랭 푸르니에(Alain-Fournier, Henri, 1886~1914) 출생 셰르주(州) 출생. 시골의 소학교 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행복한 소년시절을 보내고 파리의 리세(고등중학교)에 진학하여, 거기서 급우 J.리비에르(후에 평론가)와 사귀어 평생의 친교를 맺었다. 고등사범학교 재학 중에 군에 소집되었고, 제대 후 곧 문필생활을 시작하였다. 1905년에는 한때 런던 근처에서 일하였고, 1910년에는 《Paris Journal》지(紙)의 문예란을 담당하고, 또 여러 잡지에 평론을 기고하며, 시인·평론가인 C.P.페기와도 친교를 맺었다. 1913년 《NRF》지(誌)에 소설 《몬대장 Le Grand Meaulnes》을 발표하여 유명해졌다. 이것은 아름다운 전원을 배경으로, 청년의 사랑과 모험으로의 동경을 추억 속에 그린 청춘문학이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 출정하여, 베르댕 근처의 생 레미 숲의 전투에서 부상하여 행방불명되었다. 시·평론 등의 유고집 《기적 Miracles》(1924), 친구 리비에르와의 1905∼1914년에 걸친 《서신 왕래 Correspondance》(4권, 1926)와 《가족에의 편지》 등을 남겼다. /naver
[1871년] 벨기에의 소설가 스트뢰벨스(Streuvels, Stijn, 1871~1969) 출생 본명은 Frank Lateur. 코르트레이크 근교 할레 출생. 시인 G.게젤레의 조카이다. 독학으로 여러 외국어를 공부하는 한편, 문학에 전념하여 유럽 사실주의 작가, 자연주의 작가의 주요한 소설을 독파하고, 20세기의 플라망어(語)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가 되었다. 1895년 잡지 《현재와 미래》에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하면서, 명쾌하고 발랄하기가 마치 태양과 같다는 평을 받는 등 북방 네덜란드 문단에서도 유명해졌다. 우주적인 비전 아래, 플랑드르의 농민생활을 자연의 리듬과 결합시켜 섬세한 필치로 표현한 걸작 《아마(亞麻) 밭 De Vlaschaard》(1907), 세 편의 중편소설을 모은 《일하는 사람들 Werkmenschen》(1927) 등이 있다. /naver
[1867년] 프랑스의 화가 보나르(Bonnard, Pierre, 1867~1947) 출생 ← Model in Backlight, 1907 1867. 10. 3 프랑스 교외 센현(縣) 퐁트네오로즈~1947. 1. 23 르카네. 나비파에 가담했다가 후에 앵티미슴의 대표 화가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현대 미술사에서 가장 뛰어난 색채화가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햇살이 비쳐드는 가정의 실내와 정물을 그린 그림들이 독특한 친근감을 주는데 〈식당 The Dining Room〉(1913)·〈과일 그릇 Bowl of Fruit〉(1933경)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특별한 재능을 보였던 고전문학을 전공하여 학사학위를 딴 후 부친의 주장에 따라 다시 법률을 공부했으며, 1888년 잠깐 동안 정부기관에서 일했다. 한편 국립미술학교에 들어갔으나 로마상(로마의 프랑스 아카데미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상)을 타는 데 실패하자 줄리앙 아카데미로 옮겨 거기에서 새로운 미술 세대의 주요인물들인 모리스 드니와 케르자비에 루셀, 폴 세뤼지에, 에두아르 뷔야르, 펠릭스 발로통과 사귀었다. 1년 동안 군대에 복무한 뒤 1890년 드니·뷔야르와 함께 몽마르트르에 화실을 마련했다. 이들은 뒤에 연극 연출가인 오렐리앙 마리 뤼녜 포와 파리의 드 뢰브르 극장에서 공동으로 연극 연출을 맡기도 했다. 이무렵 그는 일찍이 인상파 화가들의 관심을 끌었던 일본 판화로부터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1890년대의 그는 당시 아르 누보 운동의 화가들처럼 장식적인 곡선 구성을 사용하거나 친근감을 주는 실내를 주로 그리는 나비파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램프 빛에 빛나는 황홀한 실내, 호화로운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누드 및 몽마르트르의 풍경을 그려 프랑스 회화의 신기원을 이루었다. 그의 매부인 클로드 테라스가 쓴 〈친근감을 주는 사소한 장면들 Petites scènes familières〉·〈삽화가 들어 있는 작은 발성 연습책 Petit solfège illustré〉(1893)에 삽화를 그려넣은 것이나 1895년에 유명한 화상 앙브루아즈 볼라르에 의해 발행된 일련의 석판화들 〈파리 생활의 모습들 Quelques aspects de la vie de Paris〉을 제작한 것은 그무렵의 도시 생활에 대한 그의 재치와 취향을 전형적으로 나타낸다. 그는 또한 유명한 아방가르드 평론지인 〈르뷔 블랑슈 La Revue blanche〉에 삽화를 기고했다. 1900년 볼라르가 펴낸 폴 베를렌의 상징주의 시집 〈평행 Parallèlement〉에 그가 그려넣은 것들은 삽화의 새로운 단계를 제시했다. 그외에도 1900년대의 여러 책에서 그의 삽화를 볼 수 있다. 비교적 차분하고 가정적인 앵티미슴 양식의 그림들로 인해 장식가로서의 그의 재능은 때때로 간과되곤 한다. 그러나 1906년경 그는 〈르뷔 블랑슈〉지 편집자의 아내인 미지아 나탕송의 객실을 장식하기 위해, 태피스트리와 비슷하게 4개의 연작으로 된 〈기쁨, 공부하기, 놀기 그리고 여행 Pleasure, Study, Play, and the Voyage〉을 그렸다. 이 그림들은 루이 14세 시대의 모든 예술 활동을 감독한 샤를 르 브룅과 18세기 중반에 가장 유행한 화가인 프랑수아 부셰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프랑스의 중요한 회화적 전통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1908년경에는 이미 그의 앵티미슴 시기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빛을 등지고 있는 누드 Nude Against the Light〉(1908, 브뤼셀의 벨기에 왕립미술관)와 같은 그림은 큼직한 규모로서 대담하고 더욱 풍부한 색채의 효과를 주고 있다. 풍경화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프랑스 북부의 풍경들을 그리기 시작했으나 1910년 프랑스 남부에 가본 이후로는 그곳의 신비에 매료되었다. 당대의 사람들은 지중해를 프랑스 문명의 발상지로 여겼다. 보나르는 자신의 미술과 프랑스의 고전적 전통 사이의 연관성을 강조하고자 했다. 이것은 고대 헬레니즘 조각에서의 인물의 특정한 자세가 그의 몇몇 그림에 나타난 점에서 더욱 뚜렷해진다. 그는 또한 16세기 베네치아파의 채색 전통에도 매료되었다. 예를 들어 〈에우로파의 유괴 The Abduction of Europa〉는 티치아노의 작품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그의 그림의 주제는 단순하지만, 과일을 올려놓은 탁자나 햇볕이 내리쬐는 풍경과 같은 평범한 주제들을 표현한 방법은 그가 당대의 가장 뛰어난 대가의 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후기인상주의 화가인 폴 세잔과 마찬가지로 특히 원근법에 매료되었다. 예를 들어 〈식당〉에서 그는 여러 단계의 원근법을 사용하면서 따뜻한 색조에서 차가운 색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톤의 변화를 나타냈다. 1915년경 보나르는 여태껏 그가 색채를 위해 형태를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었음을 깨닫고, 그때부터 1920년대 후반까지 색채의 중요성을 고려하면서도 구조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반영한 누드화를 그렸다. 1920년대에는 그의 가장 유명한 주제의 하나인 목욕하는 여인에 관한 연작을 그렸다. 1920년대말 이후로는 그림의 주제를 거의 바꾸지 않고, 정물과 자화상, 코트다쥐르에 있는 생트로페의 바다, 칸 근처의 르카네(30년 동안 그의 모델 겸 동료였던 마리아 부르쟁과 결혼한 뒤 1925년 이곳으로 옮겼음)에 있는 자신의 정원 풍경 등을 강렬한 색채로 그렸다. 그의 그림들은 제작연대의 순서를 정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연필이나 물감으로 밑그림을 그린 뒤 여러 그림들을 한꺼번에 그릴 때 그것들을 사용하곤 했기 때문이다. 그는 화실에서 그림을 그릴 때 주제에 관한 기억에 의존하여 끊임없이 표면을 손질했기 때문에 그의 작품의 상당수는 대략적인 연대로 다룰 수밖에 없다. 1944년 보나르는 〈편지, 형태와 색채 Correspondances, Formes et couleurs〉라는 그럴 듯한 제목으로, 원래 상태의 초기 편지들에 간간이 삽화를 그려 넣은 책을 출간했다.(D. Sutton 글)
[1853년] 아이슬란드의 시인 스테판손(Stephansson, Stephan G., 1853~1927) 출생 작품활동은 주로 북아메리카에서 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성서와 여러 영웅담을 들으면서 자랐으며, 20세 때 미국으로 이주했다. 농장과 철도건설 현장 노동자로 일한 뒤 36세에 이르러 앨버타에서 작은 농장을 갖게 되었다. 아이슬란드 이주민들의 문학 지도자로 활동했다. 대가족을 거느린 개척지 농민으로서 힘들게 살았으며, 대부분의 시는 하루 종일 일한 뒤에 쓴 것이었다. 6권으로 된 주요시집 〈잠 못 이루는 밤 Andvokur〉(1909~38)은 이러한 자신의 상황에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스테판손은 사회의 경제적·종교적 규격에 맞서 싸웠으며 아이슬란드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시에 담았으나, 새로운 조국에 대해서도 그에 못지않은 뜨거운 사랑을 글로 표현했다.
[1889년] 독일의 언론인, 평화주의자 오시에츠키(Ossietzky, Carl von, 1889~1938) 출생 1889. 10. 3 함부르크 ~ 1938. 5. 4 베를린. 오시에츠키는 독일의 언론인이자 평화주의자이다. 독일평화협회 및 '니 비더 크리크'('전쟁은 이제 그만'이라는 뜻) 조직에서 활동했다. 1927년 자유주의적 정치잡지 <벨트뷔네 Weltbuhne>의 편집장이 되었고 이 잡지를 통해 독일 군부지도자들의 비리를 폭로했다. 1931년 <벨트뷔네>에 "군인은 살인자다(Soldaten sind Morder)... 모든 나라의 헌병들은 탈영병을 처형했고 처형한다. 그들은 살인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라는 전쟁 비판 기사가 실리자 오시에츠키는 신성한 군대를 모독한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고 18개월의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히틀러 집권 하에서도 독일을 떠나지 않고 다시 편집장을 맡았다가 결국 체포되어 파펜부르크 수용소에 감금되었다. 혹독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나치 독재에 맞서 싸운 공로를 인정받아 1936년 11월 24일 그는 1935년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이 수상은 나치즘에 대한 전세계적인 탄핵의 표현으로 해석되었다. 히틀러는 이에 대해 독일인의 노벨상 수상을 금지하는 포고령으로 대응했다. 1938년 오랜 수용소 생활 끝에 결핵으로 사망했다.
[1226년] 聖프란체스코(Francesco d'Assisi, 1182~1226) 선종 1182년 이탈리아 옴브리아주(州)의 고대도시 아시시. 예수처럼 말구유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그는 부유한 상인을 아버지로 둔 덕에 젊어서는 쾌락을 즐겼으나 곧 좌절과 고통을 겪어야했다. 이웃 도시와의 전쟁에 참전했다가 포로로 잡히고 병까지 얻은 것이다. 27세때인 어느날, “무너져가는 나의 집들을 다시 세우라”는 예수의 목소리를 듣는다. 가족을 떠났고 재산과 명예를 버렸다. 성(聖) 프란체스코로 새롭게 탄생한 것이다. 이때부터 갈색의 농민복장에 ‘청빈ㆍ순결ㆍ순종’을 상징하는 세 겹의 밧줄을 허리에 매고 가난한 자, 병든 자와 하나가 됐다. 몇명의 제자와는 수도회를 시작했다. 탁발(托鉢) 수도회였다. 그 수가 3000명에 달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들었다. 자신은 무소유의 길을 걸었어도 물질세계를 부정하지 않았고 철저하게 사회속으로 파고들었다. 학문연구도 소홀히 하지 않아 많은 신학교수들을 배출했다. 1224년 9월 라 베르나산(山)에서 40일간 금식할 때였다. 새벽이 밝아올 무렵 양팔을 벌린 채 십자가 모양을 한 예수와 마주친 순간, 그의 손과 발목, 옆구리에 참을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 손과 발에 못자국이 생기는 신비체험을 한 것이다. 이때 얻은 상처에 눈까지 멀어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늘 미소를 잃지 않았던 그였지만 결국 1226년 10월3일, 고향에서 눈을 감았다. 2000년 기독교 역사상 예수를 가장 많이 닮은 성인이었고, 중세 최고의 지성이었다. /조선
그밖에 2005 상주 가요콘서트장 압사 사고 1999 소니 창업자 모리타 아키오(盛田昭夫) 타계 1994 집권연정의 사회민주당 소속 엔리케 카르도소 후보, 브라질 대통령 선거에 당선 1975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국교 수립 1972 전략무기제한협정(SALT 1) 발효 1969 서독, 기민-사민 연립정권 수립 1969 국제통화기금 특별인출권 창출 승인 1967 상공부, 석유류 자유판매제 실시 1966 간호보조원 114명 독일 파견 1966 튀니지, 아랍공화국과 단교 1965 파월 청룡부대 부산항 출발 1963 온두라스군 쿠데타, 모라레스 대통령을 축출 1963 동학혁명기념탑 제막 1962 미국 3번째 인공위성 시그마7호 지구 6회 선회 1954 서방 9개국, 런던에서 서독재군비협정 조인 1953 신형법 공포 1952 영국 몬테헬로섬에서 첫 원폭실험 1950 국군, 38선돌파, 양양 탈환 1948 페루의 마누엘 아폴리나리오 장군 군사쿠데타 1944 연합군, 그리스에 상륙 1932 이라크, 영국으로부터 독립 1932 228개의 소행성을 발견한 독일의 천문학자 볼프 사망 1918 독일 수상에 막시밀리안공 취임 1910 청(淸) 자정원 개원식 거행 1904 모로코에 관한 프랑스-스페인협정 성립, 모로코 독립을 승인 1900 손문의 흥중회(興中會) 혜주에서 거병, 실패(혜주사변) 1886 프랑스, 초등교육법 성립 1886 프랑스의 작가 알랭 푸르니에 출생 1867 미싱 발명가 에라이아스 하우 사망 1274 고려-원 연합군 제1차 일본정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