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8주년 영암대첩 기념식 개최...참여로 영암의 역사 충효정신 계승하자
영암성대첩 기념식 5월 25일 영암공원 충혼탑 개최
영암성 지켜내고 왜구 물리친 양달사 장군 활약상 기려
“조상들의 충효의 정신을 계승하고, 자랑스러운 영암의 역사에 대해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많은 분들이 ‘영암성대첩 기념식’ 에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주길 바랍니다.”
1555년 을묘년, 조선 명종 10년에 영암성을 향해 파죽지세로 밀고 쳐들어오던 6,500여명의 왜적을 맞아 단 하루 만에 영암성에서 대승을 거두었던 영암성대첩은 우리 영암사람들에게는 자랑으로 여길만한 영암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공적을 올린 일이다. 영암성을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왜적들과 싸웠던 전투는 영암사람들이 잊혀서는 안 될 사건이다.
왜적들의 공략에 많은 주민들이 희생을 당했던 ‘영암성대첩’ 은 임진왜란 이전 가장 큰 전투이자 가장 큰 승리였다.
해남현감을 하다가 관직을 내려놓고 시묘살이를 위해 집으로 온 조선 최초 양달사 장군은 시묘살이 중에 왜구들의 영암읍성을 함락하기 위해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시묘살이를 멈추고 마을사람들을 소집해 영암읍성으로 가 성 밖에서 왜적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었다. 대승을 거둬 영암읍성함락을 막은 큰 공적을 올린 양달사 장군은 영암의 성웅(聖雄)으로 역사에 남게 됐다.
그런데 이런 자랑스러운 역사에 대해 우리 군민들조차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어서 안타깝다. 조상들의 구국정신(救國精神)을 모르거나 잊혀져가는 것이 매우 애석하고, 부끄러운 일이 되고 있다.
영암의 자랑스러운 역사인 영암성대첩에 대해 제대로 학습하고, 널리 알리고 심어주고 자긍심을 키워주기 위해 영암성대첩 기념사업회(회장 이순오)는 영암을 사랑하는 영암사람들이 모여 ‘영암성대첩 기념사업회’ 를 조직하여 그 첫 기념식을 갖겠다고 한다.
이 훌륭한 영암성대첩, 역사적인 가치에 대한 중요성을 알면서도 실천에는 인색했었다. 오랜 시간 흘렀지만 과거 우리 조상들의 충효의 정신을 계승하고, 자랑스러운 영암의 역사에 대해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많은 분들이 영암성대첩 기념식에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주길 바라고 있다.
제468주년 영암성대첩 기념식은 ‘영암성대첩 기념사업회’ 가 주관하여 5월 25일(목) 오전 10시 30분 ‘영암공원 충혼탑’ 앞에서 진행되며, 이날 ‘영암성대첩 의의’ 주제로 발표를 한다. 기념식은 ‘영암군, 농협중앙회, 영암농협, 낭주농협, 신협, 성실새마을금고, 산림조합, 양달사헌창사업회’ 등이 후원한다.
영암읍성대첩, 450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1518년 2월 12일, 전라남도 영암 도포 봉호정에서 양승조의 4남 2녀 중 2남으로 태어난 양달사 장군을 기억할 수 있다. 어려서부터 힘이 담력이 남달랐던 양달사 장군은 말 타기와 활쏘기 등에 재주가 뛰어났다. 양달사 장군은 형 양달수와 더불어 화순에 사는 기묘명헌이자 삼종숙인 학포 양팽손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하지만 왜구의 침입이 잦고 주민들의 피해가 막심하자 그는 과거에 뜻을 두고 열심히 병법과 무예를 연마하여 19세인 1537년(중종 32년) 9월 10일 한양 모화관에서 열린 전시에서 28인 중 병과로 무과에 급제하였다. 지금의 사관학교 교관인 훈련원습독관으로 재임하던 명종 1년(1546년) 11월 10월에는 10년에 한 번씩 당하관(정 3품 이하 문무관)들을 대상으로 차러지는 일종의 승진시험인 중시에서 합격자 35명 중 5위의 성적을 거둬 진해.해남 현감 들을 지냈다. 공작에 있어서는 항상 첨렴하고 근검하였고, 집에서는 형제들과 우애가 좋았다.
1553년 2월 4일 어머니(청주한씨)가 돌아가자 시묘살이를 위해 해남현감을 그만두고 고향 봉호정에 머물던 중 1555년 5월 11일 왜구가 침입했다. 5월 13일 달랑진(현 해남군 북일면 남창) 전투에서 절도사 원적과 장흥부사 한온이 죽고, 영암군수 이덕견이 항복하였다.
인근의 성들도 함락되면서 서남해안은 왜구들의 살인과 약탈도 잇달아 자행되면서 서남해안은 왜구들의 살인과 약탈과 방화로 끔찍한 전쟁터로 변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직감한 관찰사 김주는 전주부윤(현 전주시장) 이윤경에게 빨리 가서 영암을 지키라고 하였다. 조정에서도 6월 16일 호조판서 이준경(전주부윤 이준경의 친동생)을 도순찰사로, 김경석을 우도방어사로, 남치근을 좌도방어사로 내려 보냈다. 하지만 이준경은 나주성에 머물렀고, 김경석과 남치근도 왜구의 기세에 겁을 먹고 성안에 들어앉은 채 성벽을 보수하기에만 급급했다. 이윤경 마저 성을 지키기에만 몰두할 뿐 성 밖에는 신경을 쓰지 못했다.
이런 상황을 본 주민들은 원성이 커졌고, 결국에는 어쩔 수 없이 성 밖의 영암 백성들과 인근 군현에서 도망 나온 피난민들은 자구책으로 시묘살이를 하고 있던 전 해남현감 양달사를 좌수(의병장)로 추대하였다. 의병장으로 추대된 영달사 장군은 곳곳에 격문을 보낸 후 각지에서 달려온 정정들을 모아 훈련을 시키면서 왜구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왜구와 전투를 하기 위한 전략을 세워놓고 있을 때 5월 24일 새벽 왜구가 전격적으로 영암성을 포위하고 동문 밖에 있던 향교에 진을 친 후 백성들을 무참하게 마구 죽이기 시작했다.
그날 밤 양달사 장군은 야음을 틈타서 은밀하게 영암읍으로 이동했다. 향교 뒷산(현 망호리 뒷산)에 은둔한 채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1555년 5월 25일 오전 미리 분장시킨 남사당패인 창우대(倡優隊)로 하여금 향교 앞에서 굿판을 벌이게 하여 왜구들을 방심시킨 후 왜구들이 굿판을 즐기면서 웃고 떠드는 사이에 일시에 급습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격분한 왜구들을 군더리 방죽(현 공설운동장) 진흙 구덩이로 유인하여 참혹하게 죽임을 당하는 등의 참살(慘殺)하는가 하면 관군과 함께 잔당을 몰아내는 등 혁파한 전과를 올렸다.
영암성 방어에 나선 양달사 장군의 뛰어난 군사력과 지략으로 결국 영암성을 함락시키고자 했던 왜구들은 그만 양달사 장군 군사들로 인해 섬멸되거나 도망쳤다. 강진 병영성, 장흥성을 함락해 기세등등했던 왜구들은 그 여세를 몰아 영암성마저 손 안에 넣고자 6,000여명의 군사들을 몰고 쳐들어왔지만, 그만 대패했다. 양달사 장군의 강력한 방어에는 속수무책 당하고 말았다.
영암성대첩에 대해 당시 김경석의 종사관으로 참전한 양사준(조선의 3대 명필 중 한사람인 양사언 동생)은 이 날의 승리에 대해 정왜대첩(征倭大捷)이라는 시로 기록하였으며, 1799년 고경영의 후손 고정현이 편찬한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에도 이 때 양달사 의병장이 거둔 승리를 섬멸한 적의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대첩이었다(大捷屠殲不可勝數))고 기록하고 있다.
1555년 5월 25일 영암성애서의 승리를 이 지역의 지명을 넣어 ‘영암성대첩(永巖城大捷)’ 이라 부른다.
강진(병영성), 장흥(장흥성) 등 주변 고을의 성(城)은 함락됐다. 영암성은 양달사 장군의 탁월한 기지(奇智)와 뛰어난 전략(戰略)으로 함락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드높이 받들어 존경할만한 영웅으로 추앙될 '조선 최초 의병장' 이라는 칭호가 따라붙는 영암의 성웅인 양달사 장군의 활약상에 대한 그 업적을 기리기 위한 영암성대첩 기념사업회가 추진한 일들에 대해 우리는 동참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 왜군을 물리쳐 나라를 지켜 영웅이 된 성웅 이순신 장군마냥 영암성대첩에서 대승을 거둔 성웅 양달사 장군에 대해서 우리는 그 업적에 대한 공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영암대첩에 대한 역사적인 의미를 깊이 새기고, 그 가치를 높이 사 그 정신을 본받아 영암인에 대한 자긍심을 갖고 영암을 빛내줘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널리 자랑할 만큼 훌륭한 일에 대해 역사적인 일로만 취급하고 말 것이 아니라 영암성대첩에 대한 의미도 새기고 기릴 겸 ‘축제(영암성대첩 축제)’로 승화시켜야한다. 매년 5월 25일을 기해 그때 양달사 장군이 왜구를 물리쳤던 그 장면을 재현하는 전승 기념일로 정하고 기리는 축제를 개최, 전승을 올려 외쳤던 그때의 함성을 다시 울리게 해야 한다.
양달사 장군의 후손인 양백근씨는 “선조가 영암성을 지켜낼 만큼 왜구를 물리친 것에 대해 영암의 자랑이 아닌가본다” 며 “이것은 영암은 물론 호남 나아가 대한민국을 지켜내는 일이라고 그 의미를 넓게 크게 생각하고 싶다” 면서 “영암성대첩은 영암 역사상 가장 기릴만한 사건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일은 한 가문의 자랑스러운 일로만 취급할 것이 아닌 하나의 역사적인 대사로 봐야하고, 우리는 그런 큰일에 대해 그때 그랬었더라고 때 되면 기념한답시고 잠깐 반짝 가볍게 꺼낼 것이 아니라 영암의 역사적인 전승기념 일로 여겨 하나의 축제성으로 영암성대첩을 기려야한다” 고 강조했다.
김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