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먹긴 먹은 모양이다.
일찌감치 잠이나 자려고 자리에 누웠는데 잠은 오지 않고 쓰잘 데 없는 잡념이 꼬리를 문다.
뒤척이던 끝에 기어이 일어나서 티브이를 켰다.
민혜경인가 하는 이제는 나이가 좀 먹어 보이는 가수가 오래 전, 잘 나가던 시절에 유행시켰던 노래를 부르고 있다.
‘모든 것이 다 지나가 버려도 내 마음은 당신 곁으로’
노래를 듣다 보니 문득 개사를 하고 싶다.
‘모든 것은 다 없어져 버리고 내 마음은 고향 앞으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해서 마음 먹은 대로 돌아 갈 수가 없는 형편이다 보니, 그저 서서히 잊혀져 가는 고향을 추억하는 것 외에 도리가 없을 것 같다.
나는 공부하는 머리는 별로 신통하지 않았던 게 분명하지만, 소소한 걸 기억하는 머리는 그런대로 괜찮은 것 같다. 그걸 딱 증명 할 수는 없지만 어쩌다 아주 어렸을 때 보고 들었던 (들었던 건 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걸 기억해내고 이야기를 하게 되면 나이 많은 우리 식구들-어머니, 이모 혹은 고모가 놀란 듯이 내게 물어 본다.
“그 때 네 나이가 몇 살이었는데 그 걸 알고 있나?”
그렇게 물어 볼 수 밖에 없었던 사연을 늘어 놓는 것을 시작으로 아주 어렸을 때의 고향을 추억한다.
그때, 내가 살던 동네 이름이 삼문동인지도 몰랐다.
대문이랄 것도 없었지만, 대문을 열고 나가면 바로 신작로였다. 포장이 되지 않은 신작로의 한쪽은 읍내와 이어져있었고 반대편은 역으로 이어져 있었다. 신작로는 항상 먼지가 펄펄 날렸으므로 신작로 변에 사는 사람들은 먼지가 나지 않게 할 작정으로 도로의 군데 군데에 물을 뿌리는 게 수시로 하는 일이었다. 더운 날씨 탓에 뿌린 물은 금방 말라 버렸고, 그 물이 마르면서 내 뿜는 열기로 신작로는 집 안 보다 더 더웠다. 그렇긴 했지만 사람들은 가로수 한 그루 없는 신작로에 나와 있는 걸 좋아했던 것 같았다.
신작로와 이어진 골목 같은 데, 그늘진 곳에는 가마니 같은 걸 깔고 앉은 노인들이 졸음이 오는 걸 참아가며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하기도 하면서 사는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을 것이다.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으므로 어쩌면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혹시 피난이라도 가야 하는 게 아닐까 하고 걱정도 했을 것이다.
동네 노인네들이 걱정했던 것처럼 실제 우리 식구들은 피난을 갔다.
아버지의 사촌 누님, 즉 종고모네 식구들과 함께 겁에 질려서 피난을 갔다.
그런데 ‘똑똑한 사람이 제 꾀에 속는다.’ (이런 말이 있는지 모르겠다만) 고, 기껏 피난이라고 간 곳이 읍내에서 이십여리 밖에 떨어지지 않은 시골 외갓집이었다.
읍내에는 그나마 특선이니 일반선이니 하면서, 살림살이에 따라 사람 괄시는 했지만 어두워지면 전기 불이라도 들어 왔는데, 외갓집은 어두워지면 오로지 호롱불만이 어둠을 밝힐 수 있는 도구였다.
저녁을 먹기가 무섭게 대청 마루 기둥에다 호롱불을 넣은 등을 내다 걸었지만, 그나마 기름을 아낀다고 금방 호롱불도 끄고 제각기 잠자리로 찾아가는 게 일상이었다.
초저녁에 피워두었던 모깃불도 사그라졌는지 가물대는 쑥 타는 냄새를 흐릿하게 느끼면서 어른들 틈에 끼어 초저녁부터 잠을 자게 되면 한밤중에는 소변이 마려워서라도 잠이 깨기 마련이었다.
덥다고 방문을 열어 놓았지만, 별빛인지 달빛인지 방안 보다 밝은 바깥의 빛에 모기장 그물의 그림자가 희미하게 내려 앉아 어른대는 걸 보게 되었고, 그 그림자가 무슨 귀신 형상 같은것으로 연상이 되어 더럭 겁이 나서 금방 나올 것 같았던 소변은 쑥 들어가고 말았다.
바람이 부는지 건너편 사랑채 앞에 서있는 감나무의 이파리가 떠는 소리에 머리털이 삐쭉 곤두서기도 했다.
무서움에 어른들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보지만 어느새 잠은 사라져 버리고 가만히 엎드려 있어 봐도 주위의 가느다란 소리에 온 신경이 예민해졌다.
참고 있던 소변이 다시 마려워지고 도저히 참을 수가 없게 되어서야 어머니를 깨웠다.
잠결에 어머니는 사랑채에 잇닿은 헛간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소변을 보게 했다.
헛간은 말 그대로 지붕 아래 기둥만 받치고 있는 빈 공간이다. 아궁이에서 긁어 낸 재와 외양간의 쇠똥과 오줌 범벅인 짚 따위가 썩으면서 뿜어내는 지리고 시큼한 냄새가 내 소변 방울에 묻어 났다.
그냥 소변만 보면 될 것을, 냄새를 피하고자 고개를 들고 헛간 너머, 담 너머 멀리 떨어져있는 높다랗게 버티고 서있는 산 봉우리에 시선을 보냈다.
푸르스름한 하늘 아래 시커머티티한 몰골로 웅크리고 있는 산의 자태에서 시선을 거두려는 순간 나는 기겁을 할 뻔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끝을 보지 못한 오줌 줄기가 뚝 멎었을 정도로 그 광경을 본 나는 식겁을 했다.
시커멓게 엎드려 있던 산 봉오리에서 하늘이 환하게 비칠 정도로 밝고 큰 횃불이 불쑥 밝혀진 것을 본 것이었다.
횃불은 마주 보이는 산 봉우리 한 군데에서만 솟아 오른 것이 아니었다.
길게 웅크리고 있는 산봉우리 여기저기에서 잇달아 횃불이 솟아 오르는 걸 보고 놀란 내가 어머니 품을 파고 들었다.
어머니 역시 횃불이 솟아 오르는 광경을 보게 되었고 이내 놀라고 겁이 나서 큰 소리로 안방을 향해 크게 외쳤다.
한 밤중에 어머니의 놀라서 지른 고함 소리에 잠이 깬 사람들은 외가댁에 있던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이웃 집 사람들도 한밤중의 소동에 모두 잠자리에 일어났고 그들도 건너편 산봉우리의 횃불을 보게 되었다.
모두 겁에 질려 있는 중에 외할아버지께서 횃불의 정체를 설명하셨다.
빨갱이들이 봉화로 신호를 보내는 것이 분명하다면서 여기도 안전한 곳이 아니니 날이 밝으면 읍내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다.
이때가 1950년 8월초 국군과 연합군이 낙동강선 까지 물러나서 ‘부산 교두보’라고 불리는 남부 방어선을 설치하고 북한 공산군의 남진을 막아 내던 때라고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내가 1948년 4월 생이니까 우리 나이로 세 살 조금 지났을 때였다.
그 어린 나이에 외갓집에서 보았던 봉화를 기억하고 있으니 나는 과연 천재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첫댓글 나는 지난밤 9시에 잠자리에 들었더니 새벽 5시에 눈이 떠 져서
먼저 우리들의 카페에 창을 열고 들어오는게 이제는 편한 순서가 되었다.
성화의 기억력 만 두 살의 나이로 주위 사람들로부터 녹음기을 대행 할 정도면
대단한 천재로 봐진다.그리고 성화의 글솜씨는 맛깔스런 문장력에
지난번 국제시장 영화처럼 좋은 영화를 만드는데 영화감독들에게
자네의 글이 큰자료가 되지 않을까 싶다.
밀양초등학교 51회 우리들의 친구들 반촌에서 자랐지만 똑똑 하고
인정많은 친구도 많았다.우리에게는 이 나이에
인터넷으로 이렇게 함께 멀리서나마 공유하는게 얼마나 좋은가!
생활에 전혀 보탬이 되지 않는 것만 기억한다.
그리고 사는 것에 급급하다 보니 정작 내가 하고 싶었던 걸 해 보지 못하고
이 나이 먹은 걸 한번씩 한탄하기도 한다.
정작 하고 싶은 걸 하고 살았으면 어떻게 되었을지 알 수도 없을거면서...
성화친구 친구는 진정 천재임이 분명하다.
글 솜씨가 프로의 경지에 들었다.
존경한다.
과찬의 말씀이다.
정작 쓰고 싶은 건 변죽만 울리고 있고
쓸데 없는 잡문만 끄적이는 내가 한심하다.
대단한 기억력이다
너로 말미암아 네 잊혀진 기억도 재생되길 바라며 고향유정이 계속 이어지길 기대한다
어줍잖은 것만 기억하고 사는 내가 웃긴다.
정작 생활에 보탬이 되는 건 하나도 없는 줄 모르고 그냥 깨춤만 추는 느낌이다.
모든 게 다 하고 싶은 걸 못하고 다른 동네에서 얼쩡거린 결과인 것 같아 씁쓸하다.
와~~성화는 기억력이 대단하다
난 그런기억은 하나도 없는데...
고로 나는 바보인가보다 ㅎㅎ
국민학교 입학해서 부터의 기억은
생생한데 성화가 보고 기억하는건
하나도 모르겠으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