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25일 평화목 교회 성탄메시지
<어떤 성탄>
모든 크리스천은 교회에 다닌 햇수만큼 성탄절을 경험하였습니다. 어릴 적에는 성탄전야 예배 후에 교회학교 2부 순서에 나와서 찬양과 율동을 한 기억, 그리고 중고등부 때에는 연극으로 성탄메시지를 전했던 적도 있을 것입니다. 아동부나 중고등부 교사를 한 경우에는 이런저런 발표들을 지도하는 시간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즐거운 성탄을 맞았습니다.
집은 가난해서 아무런 성탄추억이 없다 해도, 교회에 가기만 하면 늘 풍성한 메리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 핑계로 친구들을 교회로 데려간 때도 성탄절이고, 교회에서 밤새 놀고 난 뒤에 새벽에는 동네 집집마다 다니며 새벽송을 불렀던 추억도 생각나실 것입니다.
성가대원들은 10일 전부터 매일 밤 모여서 칸타타 연습을 했습니다. 집사님들은 성가대원들을 위해서 정성스럽게 저녁을 준비해주시곤 했습니다. 제가 다니던 교회에서는 매년 성탄절 칸타타가 끝나면 온 교우가 다 일어나서 함께 헨델의 메시아에 나오는 <할렐루야>를 합창했습니다. 그렇게 성탄절은 언제나 메리, 해피 크리스마스였습니다. 당연히 그렇게 느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성탄은 마음이 무겁습니다. 2023년 통계로 전 세계 난민의 숫자가 1억 1,730만 명이라고 합니다. 난민이란 어떤 이유에서든지 자기 나라에서 살 수 없어 떠난 나그네 인생을 뜻하는 말입니다. 피난민입니다. 우리나라도 6.25전쟁으로 인해 북쪽에서 남쪽으로 피난 내려온 피난민 역사를 안고 있습니다. 민간인을 포함한 전쟁 사망자와 부상자가 수백만이고 전쟁으로 남편을 잃거나 고아가 된 사람들도 수십 만 명에 이릅니다. 거의 전체 국민이 피난길에 올랐으니 온 나라가 난민이었습니다. 결국 약 370만 명이 북쪽 고향을 떠나온 피난민이고 이산가족의 수는 1000만 이상이라고 합니다.
아직도 76년 전 역사는 반복되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난민들, 가자지구(170만), 미얀마(130만), 등등 약 880만 명의 난민이 새로 발생한 숫자입니다. 그중 아동이 40%라고 합니다. 하지만 잘사는 나라는 난민 유입을 막으려고 애를 씁니다. 자국의 안전과 자국의 경제만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실이 2024년을 맞이하는 우리들의 성탄절 모습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무거운 성탄절입니다.
아기 예수는 부모가 살던 나사렛이 아니라 먼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습니다. 성경은 여관에 방이 없어서 마구간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날 것이라는 구약의 예언을 기초로 기록한 성경이지만, 결국 예수 가족들은 피난민의 길에 들어섰던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예수 가족이 헤롯의 살육을 피하려고 이집트로 이주하였다고 기록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예수 가족도 피난민 경험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난민들에게 우리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지난 세월 한국교회의 부흥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손꼽히는 대형교회는 가히 세계적이라고 할 만합니다. 성경반포나 선교사 파송 그리고 후원금 액수 등등 한국교회가 물질적으로 하는 사역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제 사회는 교회를 정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런 저런 잘못들을 언급하는 것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교회가 자신만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외부를 향하여 도움을 주는데 무슨 말씀이냐고 묻는다면, 위기의 상황에 교회가 어떻게 했는지 살펴보면 답이 나옵니다. 함께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상생이 아니라, 교회가 먼저 살고 보자는 독생을 향하여 걸었기 때문입니다. 1997년 외환위기 때 그랬습니다. 그리고 코로나 19의 영향으로 교인감소와 동시에 어려움에 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2019년 말에 시작된 코로나 19 집단감염 사태가 약 4년 계속되다가, 2024년에 이르러 거의 회복이 되었지만, 그 후유증은 사회의 도처에 남아있습니다. 한국사회의 뿌리에 위치한 소상공인들의 경제활동은 코로나 시기에 거의 망가지고 말았습니다. 그 와중에 거의 사기에 가깝게 전세 보증금 돌려 임대사업을 하다 부도를 맞으니, 그 여파 또한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힘든데 더 힘들게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희망을 품어야하는 이유는 예수가 자신의 삶을 통하여 방향을 제시하였기 때문입니다. 떠돌이 난민에게 마구간 자락이라도 내준 집주인이 있었기에 예수는 그나마 안전하게 태어날 수 있었던 것처럼, 오늘의 난민들도 어딘가에서 오는 도움의 손길 덕분에 살 수 있습니다. 예수는 자신의 출신과는 다르게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고 많은 제자들을 두었습니다. 그의 삶과 가르침을 본 제자들이 그 길을 같이 걸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오늘 탄생하는 예수의 여정은 십자가의 길로 이어지지만, 그 과정에서 남긴 예수의 발자국을 우리는 잊지 말고 기억해야합니다. 그 길이 우리가 동행해야할 길이기 때문입니다. 성탄을 맞으면서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우리가 나와 다른 사람들을 혐오하거나 배제하지 않고 인식하고 얼마나 공감하며(empathy) 살 수 있을지 깊이 생각할 기회를 얻는 것입니다.
2024 성탄은 우리에게 공감과 환대에서 오는 기쁨을 누리게 하는 메리 크리스마스가 되기를 바랍니다.
2024년 12월 25일
홍지훈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