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곳(안동)의 풍속은 가문마다 각기 한 분의 조상을 모시고 하나의 장원(莊園)을 점유하여 같은 일가끼리 살면서 흩어지지 않으므로 공고하게 유지하여 뿌리가 뽑히지 않았다. 그 예를 들면, 진성 이씨(眞城 李氏)는 퇴계(退溪:李滉)를 모시고 도산(陶山)을 점유하였고, 풍산 류씨(豊山 柳氏)는 서애(西厓:柳成龍)를 모시고 하회(河回)를 점유하였고, 의성 김씨(義城 金氏)는 학봉(鶴峰:金誠一)을 모시고 천전(川前)을 점유하였고, 안동 권씨(安東 權氏)는 충재(沖齋:權橃)를 모시고 계곡(鷄谷)을 점유하였고, 의성 김씨는 개암(開巖:金宇宏)을 모시고 호평(虎坪)을 점유하였고, 풍산 김씨(豊山 金氏)는 학사(鶴沙:金應祖)를 모시고 오미(五嵋)를 점유하였고, 예안 김씨(禮安 金氏)는 백암(栢巖:金玏)을 모시고 학정(鶴亭)을 점유하였고, 재령 이씨(載寧 李氏)는 존재(存齋:李徽逸)를 모시고 갈산(葛山)을 점유하였고, 한산 이씨(韓山 李氏)는 대산(大山:李象靖)을 모시고 소호(蘇湖)를 점유하였다.245)
고 하여 각지의 대표적 양반가문들이 동족부락을 형성하고 있음을 전하고 있다. 이는 안동지방의 동족부락이 대부분 그들 조상 가운데 조선시대 사림에 명망이 높은 대표적 인물이 정착한 이래 그 후손들이 경제적 기반을 확대하여 그것을 매개로 형성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영가지』의 각리조(各里條)에는 그같은 동족부락 형성의 전제가 되는 촌락과 입향조의 상관관계를 보여주는 사례들이 나타나고 있기도 하다. 다소 장황하지만 그것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영가지』에서 소개하고 있는 특정 촌락과 긴밀한 관련을 갖는 인물들 대부분은 전통적인 안동지방의 토성이긴 하나 주로 조선시대 인물을 주축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촌락에서 태어나거나 정착•우거 등을 통해 관련을 갖는다고 해서 곧바로 동족부락으로 성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시 말해 동족부락의 형성이란 입향조(入鄕祖)가 처음 입거(入居)한 시기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손들이 대대로 같은 장소에 계속 살게 됨으로써 동족의 세거지로 정착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본격적인 동족부락의 형성은 그보다 훨씬 뒤의 시기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같은 의미의 동족부락이 본격적으로 형성되는 시기는 대체로 17세기 이후인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입향조로부터 시작해서 자손들이 같은 촌락에 살면서 동족부락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우선 경제적 기반이 갖추어져야만 했다. 이러한 점에서 재산상속의 관행상 동성동본이 같은 부락에 대대로 거주하는 경우가 드물었던 고려말 이래 조선전기에는 동족부락이 형성될 수 있는 여건이 제대로 마련되지 못했던 것이다. 당시에는 아들•딸, 또는 친손(親孫)•외손(外孫)의 구별이 엄격하지 않았기 때문에 재산의 상속은 자녀균분(子女均分)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는 친가(親家)를 중심으로 하여 외가(外家)와 사위가 같은 부락에 거주하거나 양자(養子)가 일반화하지 않아 남자가 장가를 가서 처가살이하는 경우도 허다하였다. 따라서 사위가 부모의 터전을 이어받는다거나 외손봉사(外孫奉祀)의 경우가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풍산 류씨의 동족부락으로 알려진 하회(河回)마을도 처음부터 동족부락으로서의 기반을 다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녀균분 상속제라는 관행으로 인해 여러 성씨가 함께 거주하는 이성잡거촌(異姓雜居村)의 면모를 띠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