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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空)과 무(無), 그리고 0의 관계>
공(空)과 무(無)는 다르다.
중생들은 견해에 집착하고, 그 견해의 가장 큰 두 줄기는
있다(有)와 없다(無)이다.
중생의 사고방식과 고정관념의 특징은 있다(有)와 없다(無),
이 두 가지에 박혀 있는 것이다. 공(空)의 이치를 모르기 때문이다.
불교의 핵심 진리를 한마디로 말하면, 공(空)이다.
공(空)이 곧 불교적 지혜이며, 공(空)이 곧 깨달음의 근본 핵심이다.
그리고 깨달음이 곧 공(空)이다.
그래서 깨닫지 못한 중생들은 공(空)을 들으면
공(空)을 아무 것도 없는 무(無)로 여긴다.
깨달음이 없어 공(空)이 뭔지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공(空)은 비었다, 무(無)는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 둘은 완전히 다르다.
우리 인간은 몸과 마음으로 구성돼 있다.
몸이 무(無)일까. 몸은 없지 않다. 몸은 아주 없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몸이 영원히 있는가(有). 중생들은 영원하다고 여긴다.
영원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몸에 집착한다. 먹고 바르고,
그것도 모자라서 성형을 하고 문신을 하고,…
몸이 영원하지 않다고 확실히 안다면, 이렇게 몸에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몸은 변한다. 몸은 항상 변해간다.
그래서 몸이 병들고, 늙어간다. 몸과 마음이 변해가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게 중생의 어리석음이다.
몸은 아주 없는 무(無)가 아니다.
그렇다고 영원한 실체가 있는(有)도 아니다.
이러한 몸의 존재방식이 바로 공(空)이다.
즉, 몸은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며, 몸은 공한 것이다. 이게 진실이다.
몸은 아주 없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실체가 있는 것도 아니니
몸은 허깨비와 같다.
그래서 <금강경>에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이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 했다.
이 몸은 꿈ㆍ허깨비ㆍ거품ㆍ그림자와 같은 것이다.
꿈ㆍ허깨비ㆍ거품ㆍ그림자는 아주 없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그렇다고 실체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게 바로 공의 뜻이다.
이와 같이 몸의 존재방식은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며, 바로 공한 것이다.
이렇게 공과 무는 완전히 다르다.
유는 상주론(常住論), 무는 단멸론(斷滅論), 공은 중도(中道)이다.
중도란 유무 양쪽에 치우치지 않고, 거기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또한 중도의 아주 중요한 의미는 그 어떤 견해(見解)를 가지지 않는다는 걸 의미하고,
모든 견해에 집착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견해는 주관이다. 따라서 견해를 가지면 중도가 될 수가 없다.
- 공(空)과 연기(緣起)의 관계를 보자 -
‘공(空)’은 인연(因緣)을 말한다.
인연으로 태어난 것이기 때문에 실체가 없다.
공은 인연이기 때문에 실체가 없다. 공은 곧 인연에 대한 해석이다.
공이라는 말은 실체가 없다는 말이고,
실체가 없다는 말은 인연이라는 말이다.
왜 인연은 실체가 없는가?
돌을 조각해서 미륵님 모습을 만들면 돌이 미륵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그냥 된 것이 아니라
석수가 미륵으로 다듬었기 때문에 미륵이 된 것이다.
그래서 인연이라는 말은 의지해서 나타난다는 말이다.
그것을 연기(緣起)라고 한다.
인연 연(緣)자 일어날 기(起)자이다.
연(緣)은 의지한다는 뜻으로 석수에 의지해서 돌이 미륵이 됐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의지해서 조성된 것이고, 석수가 없으면 미륵이 될 수가 없다.
<춘향전> 가사에 “미륵님 살찌는 것은 석수쟁이 솜씨에 매였다.”
이런 말이 있다.
돌이 미륵이 되는데 돌미륵도 그냥 미륵이 되는 게 아니라
석수가 다듬는 대로 되는 것이다.
이렇게 미륵님이 석수에 의지해서 된다.
이렇게 의지해서 되는 것을 연기라 한다.
이 ‘연기’를 여러 다른 분야에 적용해도 다 들어맞게 돼 있다.
그리고 의지해서 되기 때문에 실체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다. 저것이 있음으로 이것이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이것으로 말미암아서 저것이 있고
저것으로 말미암아서 이것이 있기 때문에
이것은 이것의 실체가 아니고, 저것은 저것의 실체가 아니다.
이게 공(空)이다.
이러한 논리가 바로
불교적 본질관이자 현상관이고 세계관이자 우주관이다.
이런 중요한 연기론을 소승불교에서는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다.
공이란 말도 없다.
그러면서 대승불교를 비불이라고 폄하한다.
「연기⋅공」을 모르면서 큰소리친다.
그러니 소승이다. 대승은 소승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위치에
이미 와 있다. 이게 바로 부처님 법의 확장이다.
대승불교에서는 모든 것은 인연이니까 현상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
그래서 「색즉시공(色卽是空)」이다.
색(色)은 현상, 곧 물질인데, 물질이니 돌이 곧 색이다.
돌(색)은 말하자면 석수를 잘 만나면 예쁜 미륵으로 다듬어지고
고약한 석수를 만나면 고약한 모양으로 다듬어지며,
석수 나름으로 모양이 된다. 돌은 아무 힘이 없다.
그래서 돌(색)을 공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색즉시공(色卽是空)이다.
그리고 연기법에 의하면, 어떠한 존재도 우연히 생겨나거나
또는 홀로 독자적으로 생겨나는 법은 없다.
모든 존재는 그 존재를 성립시키는 다른 모든 존재와
여러 원인, 조건에 의해 생겨난다.
그렇기에 정신적, 물질적 모든 것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원인이 되기도 하고 조건이 되기도 하면서
상호의존적으로 함께 성립하고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말은
존재하는 모든 것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분리할 수 없는 깊은 관계 속에 있다.
서로 의지해 있다는 말이다.
삶이 있기 때문에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기 때문에 삶이 있다.
죽음을 떠나서 삶의 실체가 없고 삶을 떠나서 죽음의 실체가 없다.
실체가 없으니 공이다. 이 말을 어려운 말을 써서 자성(自性)이 없다고 한다.
실체가 자성이다. 그래서 실체가 없다는 말을 무자성(無自性)이라고 한다.
그 무자성의 내용이 연기이다. 그리고 무자성은 바로 공이다.
따라서 이 공이라는 말은 모든 것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일어남을 말한다.
즉, 인연법을 말한다.
『불교에서 "실체(實體)가 없다"고 하는 설명이
공(空)에 관해 행해지는 것은 역사적으로 보면
부파불교인들이 이 ‘실체’라는 개념을 중요시해서
이 실체라는 것에 어떤 의미로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설일체유부에서 삼세실유 법체항유(三世實有 法體恒有)를
주장한 것이 바로 이 말이다.
그래서 용수(龍樹) 보살이 이 실체라는 사고를 부정하고 파괴함으로써
어떤 대상을 실체화하는 것을 타파하는 도구로
순야(Sunya-공)라는 말을 사용하게 됐다.
이 "실체가 없다"고 하는 것을 다른 각도에서,
즉 실천적인 면에서 말하면, 실체라는 사고는 실천의 경우에는 "사로잡힘(집착)"이라는 것이 된다.
실체라는 것은 사로잡힘으로써 개물(個物)로부터 추상돼 성립된다.
예컨대 시계라는 것은 시각을 표현한다는 개념을 추구해나감으로써
개개의 시계로부터 시계의 실체가 탄생한다.
그래서 공(空)이란 것을 실천적인 의미로 보면
사로잡힘을 없애는, 사로잡히지 않는다는 것이 된다.
공을 설명하는데 실체가 없다는 것은 하나의 논리적인 표현이다.
그리고 사로잡히지 않는다는 것은 실천적인 표현이다.
부파불교시대의 사람들은 논리적으로 실체를 생각하고
또는 실천에서도 어떤 제약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런 자세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고 그것을 배척하며
나아가서는 부처님의 원음으로 돌아오라고 하는 슬로건으로서
대승불교 <반야경>에서 공이 설해졌다.
<반야경>을 보면 거기에 많이 나오는 공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설명이 전혀 돼있지 않으므로 어떤 의미에서 곤혹스럽기까지 하다.
실천적으로 사로잡히지 않음(無執着)이라는 표현,
이것은 간단한 듯, 하나 막상 그것을 실천하려면 매우 어렵다.
사로잡히지 않으려고 그 일에 열중하면
그것은 거꾸로 사로잡히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것은 전혀 설명할 수 가 없다.
그러므로 <반야경>은 거듭 거듭 공(空)이라는 것으로도 부족해
다시 한 번 공이라고 말하고 마침내 "공은 역시 공이다"라고 말했다.
"사로잡히지 않는다" 또는 "실체가 없다"고 하는 것을
어떠한 형태로 논리적으로 또 실천과 결부시켜 훌륭하게 설명하느냐 하는 문제는
초기 <반야경> 시기에는 적지 않는 무리가 따랐다.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해서는
나가르주나(Nagarjuna, 龍樹)라는 뛰어난 학승이 나오기를 기다려야 했다.
공(空)의 논리는 마침내 용수라는 사람에 의해서 우수한 이론으로 성립됐다.
용수(龍樹, AD. 150~250?)는 <중론(中論)>에서
공(空)의 이론에 "연기(緣起)"라는 것을 도입해 설명했다.
연기는 불교 중심사상이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인연에 의해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것이 원인이고 이것이 결과라든가 이것이 이유이고
이것이 귀결이라든가, 그러한 관계를 나타내는 개념으로서
초기불교에서부터 연기가 논해졌다.
또한 인연이란 말도 마찬가지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관계성이라는 것이다.
원인과 조건, 그리고 결과라는 것을 포함한 개념으로서의 연기(緣起)는
초기불교시대를 지나 점점 발전돼 왔다.…
여기 한 여자가 있다고 하면, 그는 어머니이며, 딸이며, 아내이다,
그밖에도 다른 모든 것들과의 관계에 서 있다.
즉, 넓게는 국민이고 유권자이기도 하고, oo시 시민이기도 하고,
oo학교 동문이기도 하다. 이처럼 다양하기 때문에
한 여자를 하나의 고정된 존재로서 볼 수 없다.
용수는 <중론(中論)>이라는 책에서 이것을 거듭 거듭 강조하고 했다.
그러함으로써 어떤 고정된 견해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게 했다.
이런 용수의 학설에 따라 앞에서 말한
"논리적으로 실체를 부정한다"는 것과 "실천적으로 사로잡히지 않는다"는 것
두 가지가 성립이 되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중론>은 대승불교에서 지극히 중요한 책이다.
이 책은 전부 450송의 시로 돼있고, 그것이 27장으로 나누어져 있다.…
<중론>은 공을 연기설로 설명했고, 그때까지 <반야경>을 설했던 사람들은
이로 인해 공(空)의 참뜻을 바로 이해하게 됐다.
뿐만 아니라 공(空)에도 사로잡히지 않게 됐다.』- 실론섬
공은 연기의 법칙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연기는 상호의존성 상호관계성이다.
제석천(帝釋天)의 인다라(因陀羅) 그물처럼 연관돼 있다는 말이다.
같은 밀가루인데 빵도 되고 수제비도 되고 칼국수도 되고 범벅도 된다.
이게 전부 인연이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본질을 무자성이라 한다.
곧 스스로의 본성이 없고 인연에 의지해서 이루어짐을 말한다.
그래서 연기법을 ‘관계성의 법칙’, ‘상의성(相依性)의 법칙’
혹은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이라고도 한다.
불교사상은 모든 존재의 연기적 상호관계성에 대한 통찰을 핵심으로 한다.
삼라만상은 인드라 그물망처럼 서로 연결돼 있다는 연기론은
나와 남이 둘이 아니라는 불이(不二)의 자각으로 이어지고,
여기서 동체대비(同體大悲)라는 철학적 지평이 확립된다.
----이번에는 공(空)과 제로(0)의 관계를 보자----
『불교에서는 유(有)와 무(無) 이외에 또 하나의 사고방식을 만들어
이를 체계적으로 발전시켜 왔다. 그것이 공(空 = 0, Sunya)이다.
예를들어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수학적으로 말해 숫자의 가장 기초 단위는 1이라는 숫자이다.
여기에 대응되는 것은 마이너스 1이라는 숫자이다.
그런데 인도에서 수는 1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0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십이라고 할 때는 1 다음에 0을 붙인다.
백일 때는 1 다음에 0을 두 개 붙여 100이라 쓴다.
그 뒤 101, 102로 써 나간다.
인도인들은 1과 0이라는 문자를 나란히 놓고 자리에 따라
수를 포현해가면서 101, 102… 또는 그 이상의 어떤 큰 수도
모두 그것만으로 처리할 수 있게 돼 있다.
여기에는 인도에서 발견한 0이 교묘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것을 기초로 해서 숫자의 자리 잡기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제로(0)란 플러스 1과 마이너스 1의 중간에 위치한다.
(논리적으로 그런 것이지 실체는 없다).
그리고 그 0에 대응하는 숫자는 없다.
1에는 반드시 마이너스 1이라는 식의 대응하는 것이 있는데,
0에는 플러스 0도 마이너스 0에 대응하는 숫자가 없다.
이 0이라는 숫자는 인도인이 발견하고 아라비아인들이
인도로부터 배워서 유럽에 전했다.
그런데 이 0이야말로
<반야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순야(sunya), 즉 공이다.
‘순야’라는 말 자체가 숫자의 0을 뜻한다.
0이라는 것은 대단히 재미있는 숫자이다.
우리가 흔히들 102라고 할 때 십 자리를 차지하는 수는 없으므로 0을 쓴다.
그런데 없다고 해서 떼어 버리면 12가 된다. 전혀 다른 수가 돼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도무지 제거할 수가 없는 것이 0이라는 숫자이다.
이처럼 0은 실은 없지만 그러나 없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하면, 그 실물에 상당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없는데도 그것을 제거할 수가 없다.
이른바 아무것에도 대응하지 않고 또한 실물이 없다.
그렇지만 그것이 없는 것이 아니고,
없어서는 안 된다는 그러한 것이 0이라는 숫자이다.
이것이 범어에서 말하는 순야(Sunya)라는 것이다.』 - 실론섬
중국에 一, 二, 三, 四, 五, 六, 七, 八, 九, 十 … 百, 千, 万이라는 숫자가 있는 것처럼,
바빌로니아, 이집트, 그리스, 인도… 각 문명권마다 고유의 숫자가 있었다.
이것이 영(0)이 발견됨으로써 1, 2, 3… 8, 9, 0 열 개의 숫자로 통일돼
수학은 저마다의 문명권을 벗어나 세계수학으로 비약하고
오늘날 과학기술의 기초가 됐다.
같은 인도에서 나온 철학으로써 공(空) 사상과 수학의 영(零)이 함께
세계로 비약한 것이다.
그런데 수학에서도 1+1=2가 아닌 1+1=1의 논리를 받아들일 때가 있다.
두 개의 불씨를 합할 때, 두 개의 강물이 합쳐질 때,
전기의 흐름이 합쳐질 때는 1+1=1 이다.
수학에서는 이처럼 물, 전기, 불같이 분리할 수 없는 대상은
나눌 수 없다고 한다. 우리 속담의 ‘칼로 물 베기’의 세계이다.
공(空)은 대승불교의 근본사상이다.
모든 존재와 현상이 연기의 결과이므로 실체가 없는 공이 실상이다.
또 역으로 빈 그릇에 무엇이든 담을 수 있고,
백지에는 어떤 그림도 그릴 수 있는 것처럼
공(空)한 까닭에 모든 존재와 현상이 성립할 수 있다.
이것을 용수(龍樹)는 중관론(中觀論)에서
‘일체법(一切法)은 「무자성(無自性) - 공(空)」
즉 자성(自性)이 없어 모든 존재와 현상이 성립할 수 있다고 했다.
이 공사상이 수학에 투시돼 0(零)의 개념이 됐다고 한다.
인도에서 영이 발견된 까닭은 이 공사상 때문이었음이 수학사의 정설이다.
현대인은 초등학교 1학년에서부터 1+0=1, 2+0=2……라는 식으로 0을 배운다.
분명히 0은 수(數) 세계의 한 멤버이다.
그러나 처음 인간이 수를 발견한 것은 물건의 집합 요소의 개수를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사과 한 개, 돌멩이 두 개, 양떼 세 마리가 있다 ….
이것을 1, 2, 3…으로 표시했다.
돌멩이 두 개, 양떼 두 마리라고 하면, 겉보기에는 두 개의 돌멩이와
두 마리의 양떼 사이에는 “돌”, “양”만 보일 뿐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는 하나씩 대응이 성립한다.
이 사실을 인식한 인간은 “2”라는 수를 추상해 냈다.
이와 같이 계속해서 인간은 1, 2, 3…을 알아냈다.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은 이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인류문명은 새로운 단계로 비약했다고 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0을 추상해내는 데는
더 많은 지적 단계를 밟아야 했다.
2는 두 개의 물건의 집합에 대한 숫자이다.
마찬가지로 0은 아무것도 없는 물건의 집합에 대한 수다.
이때 “아무것도 없는 것이 존재한다.”
또는 “없는 것이 있다.”라는 언뜻 모순에 가까운
논리적 인식이 전제돼야 한다.
이것은 단순한 셈(수)의 문제가 아니라
공을 실제로 인식하는 철학과 관련된다.
그것이 불교에 있어서
‘일체 법(一切法)은 「무자성(無自性) - 공(空)」이라는
사상으로 발전한 것이다.
영(0), 즉 제로(zero)에 주목한 재미있는 이론이 있다.
흔히 “제로섬(zero sum) 게임”이라고 불리는 것인데,
제로섬 게임은 여러 사람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상황에서,
거기에 관련된 모든 이해(利害)의 총합이 “항상 제로(zero)”로
나타난다는 논리로 출발한다.
즉, 두 사람이 게임을 할 때, 한 사람이 게임에 이겨서
어떤 하나의 몫을 얻으면, 다른 한 사람은 필연적으로
그 하나의 몫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걸 좀 더 확대해 나가다보면, 우리 인생의 셈법과 비슷해진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내가 얻은 행복과 불행까지도,
나중에 이승을 떠날 때 전부 합쳐보면 사실 누구나
다 “제로(zero)”가 된다는 것이다.
아니 지금 이 순간, 이 지구상에 벌어지고 있는 “행복과 불행”을
모두 다 합쳐놓고 보면, 그것 역시 제로(zero)가 되지 않을까 한다.
물론 지나친 비약이지만,
그래도 그걸 유심히 살펴보고 있으면 그 “제로섬(zero sum)”이
현대물리학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질량보존의 법칙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때로는 질량불변의 법칙이라고도 불리는 질량보존의 법칙에 의하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은 완전히 소멸되거나
또는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상태에서 새로운 물질이 생겨나지
않는다고 한다. 불생불멸(不生不滅)이란 말이다.
<반야심경>에서도 공을 불생불멸(不生不滅), 부증불감(不增不減)으로 설명한다.
불생불멸이라는 사실은 현대물리학에서도 일찍이 규명한 이론이다.
비눗방울 하나도 아예 없던 것을 새롭게 만들어 낼 수 없으며,
그렇게 허망하게 보이는 비눗방울도 아주 없애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어디엔가 어떤 또 다른 형태로 변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형태는 변하더라도 그 질량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예컨대, 종이가 있다고 하자, 그것을 태우면 외형은 사그라지지만
종이를 태운 에너지와 재는 완전히 없어지지 않는다.
어떤 모양으로든 우주공간에 존재하고 있다.
이와 같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으니 불멸이다.
그리고 어떤 작은 물질도 새로 만들어낼 수 없으니 불생이다.
이처럼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연기 - 가합(假合) 해서
잠깐 그러한 모습으로 나타났을 뿐, 종이 한 장도 완전히 없애지 못하고,
새롭게 생기게 하지도 못하는 이것이 불생불멸의 진리이다.
이것을 공이라 한다.
지금 우리 눈에 보였던 것이 비록 어떤 작용에 의해서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그 물질을 구성하는 성분만이 변화될 뿐, 그 게 영원이 소멸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아인슈타인은 그 유명한 상대성이론의 방정식에서, 질량이 에너지로
변환될 수 있다고 풀이했다. 이른바 질량보존의 법칙이
에너지 보존법칙과 연결되는 것이다.
사실, 에너지 보존법칙이라는 것도 별 게 아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숱하게 많은 에너지가 새로 생기거나 없어지는 것 같지만,
그 에너지는 새로 생겨나지도 않고 아주 없어지지도 않는다고 한다.
에너지란 그저 형태가 바뀌거나 한 물체에서 다른 물체로 상태만 옮겨질 뿐,
그 전체 에너지 총량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마, 새로 생기지도 않고, 완전히 사라지지도 않는 불생불멸이,
이 지구와 우주 자체의 본성(本性)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는 이 물질세계는
숫자 “0”이 잘 대변하고 있는 것 같다.
‘+’영역과 ‘-’영역이 제각각 독립해서 따로따로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두 영역은 상보(相補)관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대칭점이 다름 아닌 바로 원점, ‘0’이다. 영(零)의 의미가 새삼스럽지 않을 수 없다.
위에서와 같이 숫자의 근본인 ‘0’은 불교에서 공(空)과 어울린다.
공사상은 일체만물에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불교의 근본교리이다.
현상계에 나타나는 모든 사물은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 생멸하는 존재일 뿐,
고정불변하는 자성(自性)이 없다.
사물은 단지 원인과 결과로 얽힌 상호의존적 관계에 있기 때문에
무아이며 공이다.
이때의 공은 고락(苦樂)과 유무(有無) 양극단을 떠난 중도(中道)이며
부처님이 깨달은 내용이다.
공을 허무주의로 곡해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공이라는 개념에 집착한 병폐다.
공사상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그릇된 생각을 부수면서[파사(破邪)] 동시에
올바름을 드러내는[현정(顯正)] 데 목적이 있다. 이것이 용수의 지론이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현상계에 집착하면 그것에 대해 공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또 열반에 집착하면 열반 또한 공이라고 한다.
요컨대 ‘+’로 치우친 사람에게 ‘-’라는 약을, ‘-’에 치우친 사람에게는
‘+’라는 약을 투여해서 ‘0’이라는 건강과 균형을 유지하게 하는 셈이다.
<대품반야경>에서는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시작해 관념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온갖 집착의 대상이 공함을 밝히고 끝내는
이 공 또한 공임을 설한다.
일체가 공이라고 관하는 것을 공관(空觀)이라 한다.
공은 허무가 아니고 공을 관하는 것은 진실한 가치의 발견이므로
진공(眞空) 그대로가 묘유(妙有)이다.
이에 반해 공을 허무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을
악취공(惡取空)이라 해서 경계한다.
이렇게 해서 공은 언어적 사고 혹은 개념적 사고에서 비롯되는 세상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바로 잡아준다.
모든 존재는 서로 연기에 의해 나타나므로 우열을 따질 수 없으나,
나와 나 아닌 것으로 나눠 갈등과 대립을 부추긴다.
그러나 공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것이 진실하고 평등하다.
또한 부증불감은 불생불멸과 더불어 현대물리학의 등가원리(等價原理)에 의한
질량불변의 법칙에 비유되며, 증가와 감소를 동시에 부정한다.
이와 같이 대립되는 개념 전체를 동시에 부정함으로써 공은 새로운 차원의 철학으로 전개된다.
대립과 갈등에서 벗어나서 절대평등의 세계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드러나는 것이다.
[출처] 블로그 아미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