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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분 / 청소년 관람불가>
=== 프로덕션 노트 ===
1979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
1980년 영국아카데미 최우수 감독상, 남우조연상 수상.
1980년 골든글로브 최우수 감독상, 남우조연상, 음악상 수상.
1980년 아카데미 8개 부문 노미네이트, 최우수 촬영상과 음향상 수상.
2001년 칸느 국제영화제 비경쟁부문 초청(지옥의 묵시록 : 리덕스)
총 5시간의 초판, 6개월의 디지털 편집과 사운드 믹싱
테크놀로지가 이룩한 사운드와 영상의 완벽한 복원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말대로 [지옥의 묵시록 : 리덕스]는 디렉터스 컷이 아니다. 감독과 편집자는 단지 1979년의 원작에 삭제된 몇 장면을 덧붙이는데 그친 것이 아니라, 상영 판이 아닌 원래 필름을 디지털로 재편집하고 사운드를 디지털로 리마스터링 했으며 Dye Transfer 작업을 통해 필름의 색감 또한 다시 손질했다. 새로운 장면들을 재녹음하기 위해 여섯 명의 배우들을 불렀는데, 1979년 개봉 당시 자신이 등장했던 장면이 삭제되는 것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던 록산느 역의 배우 오로르 클레망은 누구보다도 먼저 감독과 편집자에게 달려가 도움을 주었다. 길이 125만 피트, 총 5시간이라는 거대한 분량의 필름을 새로 편집한다는 것은 처음에는 불가능해 보였지만 결국 6개월 간의 작업을 통해 완성되었다.
코폴라 감독은 몇 해 전 [지옥의 묵시록]을 TV로 보면서 당시엔 매우 난해했던 영화가 20여 년이 흐른 후에는 관객이 따라갈 수 있는 영화로 변모했다는 사실에 놀랐고, 주제가 확실히 드러날 수 있는 방식으로 영화를 새롭게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험난한 과정을 거쳐 완성되었고 관객과 평론가들의 극찬을 받았지만 아쉽게도 개봉 당시 부득이하게 잘려 나갈 수 밖에 없었던 [지옥의 묵시록]은 테크놀로지의 힘과 새로이 덧붙인 53분의 에피소드로 인해 더욱 풍부하고 명료해진 주제의식과 이야기, 깊고 웅장한 영상과 사운드를 가진 영화로 회귀(Redux)했다.
베트남 전에 참가하고 있던 윌라드 대위는 정신이 이상해져 캄보디아 정글에 숨어 자신을 신으로 섬기는 마을을 만들었다는 커츠 대령을 찾아나서는 특수 임무를 맡게 된다. 서핑 광과 사진사로 이루어진 팀을 이끌어 커츠의 행방을 찾던 윌라드 대위는 참혹한 전쟁의 참모습과 커츠 대령의 행적을 추적하는 사이 심리적인 혼란에 빠지게 된다. 점점 광기가 서려가는 대원들과 함께 마침내 커츠의 마을을 찾아내지만 그의 임무는 커츠를 찾아내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데...
=== 참고자료 === <2012년 11월 29일 네이버캐스트 / 진회숙 글>
영화 속 클래식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
지옥의 묵시록
일반인들이 잘 이해하기 힘든 길고 어려운 영화가 있다. 베트남 전쟁을 배경으로 한 [지옥의 묵시록]이 그런 영화가 아닐까 싶다. 비교적 주제 의식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일반적인 전쟁 영화와 달리 이 영화는 인간의 본성과 관련된 매우 복잡하고 심오한 문제를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다루고 있다. 굳이 주제를 말하자면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발현되는 인간의 악마적 본성과 광기에 대한 이야기라고나 할까. 여하튼 그 방식이 너무 기괴하고 비현실적이어서 영화 자체가 마치 거대한 밀교 의식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지루하게 이어지는 전쟁에 회의를 느끼고 있던 미 특수부대 소속의 윌라드 대위는 어느 날 상부로부터 비밀스러운 살인 지령을 받는다.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미국의 전설적인 군인 커츠 대령을 찾아내 그를 제거하는 것이다. 커츠 대령은 명분 없는 전쟁에 회의를 느끼고 일찌감치 군의 통제를 벗어나 지금은 캄보디아에서 자기 부대를 거느리고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해 살고 있다.
그를 제거하라는 지령을 받은 윌라드 대위는 아직 전쟁의 실체를 경험해 보지 못한 네 명의 애송이 병사들을 데리고 커츠 대령을 찾는 험난한 여정을 시작한다. 그들은 우선 캄보디아로 가는 강을 타기 위해 킬고어 대령 부대를 찾아간다. 킬고어 대령은 윈드서핑 마니아인데, 그에게 전쟁은 윈드서핑만큼이나 사소하고 가벼운 일상에 불과하다. 전투도 중요하지만 최대한 짜릿하게 윈드서핑을 즐기는 것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윌라드 대위 일행은 밀림을 헤치며 우여곡절 끝에 커츠 대령을 찾아낸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점차 이성을 잃어가는데, 영화는 그것을 매우 충격적이고 섬뜩한 장면으로 보여준다. 미군 병사들이 플레이보이 걸들의 공연장에서 집단적으로 광기를 분출하는 장면이라든가 머리를 빡빡 깎은 커츠 대령이 밀림 속에서 사교의 교주처럼 등장하는 장면, 그리고 윌라드가 커츠를 살해한 후 환각 상태에서 강물을 거슬러가는 마지막 장면 등 전쟁의 살육보다 더 끔찍하고 기괴한 장면들이 펼쳐진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지옥의 묵시록]에서 가장 냉혹한 장면은 킬고어 대령이 이끄는 헬기 부대가 베트콩 마을을 무차별적으로 습격하는 장면이 아닐까 싶다.
날씨가 화창한 어느 날, 킬고어 대령 일행은 헬리콥터를 타고 평화로운 베트콩 마을을 공격하러 간다. 하지만 이들의 얼굴 어디에서도 공격을 앞둔 군인의 살기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마치 소풍을 가는 듯 표정이 가볍다.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서로 음담패설을 주고받으며, 윈드서핑 하기에 파도가 좋다는 식의 일상적인 얘기를 나누며 마치 장난하듯 살육의 현장으로 출동한다.
이때 킬고어는 심리전의 일환으로 베트콩들이 혼비백산해서 달아날만한 것을 준비했다고 자랑한다. 그것은 바로 바그너의 음악극 [니벨룽의 반지]에 나오는 [발퀴레의 기행]. 바그너 음악을 심리전의 무기로 삼은 것이다.
킬고어의 헬기 부대가 몰려오고 있지만, 처음에 마을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어린 꼬마들은 보모의 손에 이끌려 줄지어 걸어가고, 학교에서는 어린 학생들이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 완벽한 평화는 멀리서 들려오는 헬리콥터 소리와 함께 깨진다. 당황한 마을 사람들은 아이들을 서둘러 대피시키고 자기들도 안전한 곳으로 몸을 피하려 한다. 하지만 몸을 미처 피하기도 전에 미군의 총과 포탄이 불꽃을 내뿜기 시작한다. 이와 동시에 울려 퍼지는 [발퀴레의 기행]. 그 음악에 맞추어 미군들이 무지막지하게 총질을 해댄다. 비명과 울음, 고함 그리고 피 흘리며 죽어가는 사람들...
비록 전쟁 중이라고 하지만 여기서 미군의 행동은 거의 무차별적인 테러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 장면에 나오는 [발퀴레의 기행]은 그 테러의 잔혹성을 더욱 부각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공격을 당하는 쪽에는 공포심을 유발하고, 공격을 감행하는 쪽에는 스스로 구국의 영웅이 된 듯한 환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냉소적인 시각으로 살육의 참혹함을 부각시킨 이 장면에서 [발퀴레의 기행]이 발산하는 극적 효과는 그야말로 압권이다.
[발퀴레의 기행]은 바그너의 음악극 [니벨룽의 반지]의 제2부 [발퀴레]에 나오는 전주곡이다. 모두 4부로 이루어진 [니벨룽의 반지]는 [니벨룽엔의 노래]라는 중세 독일의 민중 서사시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여기서 ‘니벨룽엔’은 ‘니벨룽’의 복수형으로 ‘죽은 사람들의 나라’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네벨하임’에서 유래된 말이고, ‘니벨룽’은 이 나라에 사는 사람들을 말한다.
작품의 기본 줄거리는 민중 서사시에 기초하고 있지만 바그너는 여기에 온갖 잡동사니들을 다 쏟아부었다. 북방 게르만 민족의 전래 신화와 라인 지방에서 발생한 게르만 민족의 영웅신화, 중세 기사의 사랑과 도덕관념, 그리고 바그너 자신이 자주 다루었던 여인의 헌신적인 사랑에 의한 구원 이야기가 주된 줄거리를 이루고 있다.
[니벨룽의 반지]는 나흘에 걸쳐서 공연하도록 되어 있다. 제1부 서야(序夜)는 [라인의 황금]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으며, 그 후 [발퀴레]와 [지그프리트] 그리고 [신들의 황혼] 순으로 이어진다. 제일 짧다고 하는 [라인의 황금]의 공연 시간이 약 2시간 반 정도이며, [발퀴레]는 3시간 40분, [지그프리트]는 3시간 50분, 그리고 [신들의 황혼]은 무려 5시간 20분이나 걸린다. 시간도 엄청나게 길지만 무대 장치도 어마어마하게 크고 웅장하다. 일단 사이즈로 사람을 압도하려는 허장성세의 총결판이라고 할만하다.
[니벨룽의 반지]의 이야기 구조는 장황하다. 그래서 게르만 신화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은 줄거리를 외우기도, 그 내용에 공감하기도 힘들다. 이 점에 대해서는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도 한 마디 했다. 모스크바에서 공연된 [니벨룽의 반지]의 둘째 날 공연을 관람한 그는 공연을 보러 온 공작을 비롯한 귀족들과 상인계급, 학자, 중산층 시민들이 하나같이 각본을 손에 들고 이야기 줄거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내려고 애쓰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바그너가 중산층은 물론 상류층도 이해하지 못할 작품을 마치 진정한 예술 작품인 것처럼 꾸며 인간들의 헛된 허영심을 조장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발퀴레의 기행]의 주인공인 발퀴레는 신들의 주신(主神) 보탄이 지혜의 여신 에르다를 통해 낳은 아홉 명의 아가씨들을 말한다. 이들은 날개 달린 말을 타고 전쟁터를 날아다니며 부상당한 전사들을 방패에 태워 발할성으로 옮겨야 하는 임무를 띠고 있다. [발퀴레의 기행]은 이 음악극에서 3막이 시작되기 전에 연주되는 전주곡인데, 하늘을 날아다니는 발퀴레의 기이한 모습을 연상시키는 금관악기 소리가 인상적이다.
이미 얘기한 것처럼 발퀴레는 날개 달린 말을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신의 딸들이다. ‘날개 달린 말’과 ‘날아다니는 신의 딸’들이라는 비현실적인 설정이 이 장면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을 무한대로 증폭시킨다. 이 곡의 우리말 제목이 말을 타고 다닌다는 의미의 기행(騎行)이지만 사실 이것은 기행(奇行)이기도 하다. 이런 비현실적인 공간에서는 음악도 기존의 것과는 다른 기이하고 신비로운 것이어야 하는데, [발퀴레의 기행]은 이런 기대를 충족시켜 줄 만큼 충분히 기이하다. 금빛 광채로 빛나는 금관악기의 팡파르는 이 지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어떤 세계의 소리인 것처럼 들린다. 어느 누구도 이 이야기의 비현실성을 이렇게 효과적으로, 그리고 이렇게 생생하게 음악으로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이 곡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그 음악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이 곡이 현실성 없는 신화적 공간에 인적(人的), 음악적 물량 공세를 퍼부음으로써 관객들을 놀라게 하고 감탄하게 하려는 바그너의 허장성세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바그너의 기고만장한 음악은 매우 강렬하고 최면적인 효과를 유발하는데, [지옥의 묵시록]의 킬고어는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영화 속 인물이 아닌 실존 인물 중에서 바그너 음악이 주는 심리적 효과에 주목했던 사람이 있다. 바로 히틀러이다. 히틀러는 바그너의 열렬한 추종자였다. 그래서 유태인에게 강제로 바그너의 음악을 듣도록 했다. 나치즘이 한창 기승을 부리고 있을 때, 수용소에 잡혀 온 유태인들은 매일 죽음의 공포와 싸우며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바그너 음악을 지겹도록 들어야 했다. 그것을 들으며 얼마나 무서웠을까. 그 트라우마가 얼마나 컸던지 이스라엘에서는 오랫동안 바그너 음악이 연주되지 못했다. 그것을 들으면 악몽 같은 수용소 시절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지난 2001년,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이 오랜 금기를 깨고 이스라엘에서 바그너의 음악을 연주했을 때, 엄청난 저항이 있었다.
“우리가 이 꼴을 보려고 유태인의 나라를 건설했습니까? 만약 바그너의 음악을 듣고 싶다면 자기 집에서 들으라고 하세요. 아니면 외국으로 나가든지. 이 나라에 살면서 바그너 음악을 듣고 싶은 사람들은 모두 외국에 나가서 듣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페스티벌에서 이런 짓을 하다니요. 감히 이 예루살렘에서요. 독일 오케스트라가 바그너를 연주하다니 말이 됩니까?"
흥분한 이스라엘 노인은 이렇게 외쳤다. 그에게는 바그너의 음악과 더불어 떠오르는 끔찍한 수용소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다니엘 바렌보임이 바그너의 음악을 연주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이스라엘 의회의 교육문화위원회는 바그너 음악 연주를 ‘비민주적 비문화적 폭거’라 규정하고 만약 바렌보임이 공식적으로 사과하지 않을 경우, 향후 그의 이스라엘 연주를 거부할 것임을 분명히 밝혔다. 하지만 당사자인 바렌보임은 특정 음악을 반대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민주주의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자신의 입장을 천명한 바 있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오늘날에도 바그너 음악에 대한 평가는 극한의 대립을 보이고 있다. 소위 음악에 대해 어느 정도 감식안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바그너 숭배자이거나 비판자이거나 했다. 바그너의 음악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어정쩡한 입장에 있지를 않다. 그의 음악은 늘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으며, 그 논쟁은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애증으로 점철되어 있다.
반인륜적인 학살과 구국(救國)의 영웅적인 행위 사이에 어떤 차이점이 있는 것일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바그너의 음악은 반인륜적인 학살조차도 영웅적인 행위로 바꾸어놓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발퀴레의 기행]은 그 뒤에 숨어 있는 이데올로기를 더욱 그럴듯한 것으로 믿게 만드는 고도로 승화된 음악적 트릭이다. 그의 장황한 대본은 물론 그 속에 숨어있는 게르만적인 모든 것들도 이 음악적 트릭을 거치면 금세 지고의 가치를 지닌 것이 되어 버린다. 그런 의미에서 바그너의 음악은 세상의 어떤 무기보다 더 위험하다. 바그너와 그의 추종자들이 사용하고 있는 무기는 인간의 마음을 가장 효과적으로 요리할 수 있는 바로 그 ‘음악’이기 때문이다.
이제 바그너도 세상을 떠나고 그의 추종자인 히틀러도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 음악만큼은 지금도 바그너 축제 극장이 있는 독일의 바이로이트에서 천년왕국을 구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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