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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崔瑩)은 평장사(平章事) 최유청(崔惟淸)의 5세손이다. 아버지 최원직(崔元直)은 벼슬이 사헌규정(司憲糾正)에 이르렀다. 최영은 용모가 건장하였고 완력이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났다. 처음에는 양광도도순문사(楊廣道都巡問使) 휘하에 있으면서 여러 번 왜적을 사로잡아 무용(武勇)으로 알려지자 우달적(于達赤, 우다치)에 보임되었다.
최영이 안우(安祐)·최원(崔源) 등과 함께 협력하여 〈일당을〉 모두 죽이고 호군(護軍)에 제수되었으며, 〈공민왕〉 3년(1354)에는 대호군(大護軍)에 임명되었다. 유탁(柳濯)과 함께 원(元) 승상(丞相) 탈탈(脫脫, 톡토) 등을 좇아 고우(高郵)를 정벌하였다. 전후 27번의 전투에서 성이 장차 함락되려는데 탈탈이 참소를 당해 군사를 파하게 되었다. 다음해에 회안로(淮安路)에서 적을 방어하면서 팔리장(八里庄)에서 여러 번 싸웠다. 또 사주(泗州)와 화주(和州) 등에서 적선 8,000여 척이 회안성(淮安城)을 포위하니 밤낮으로 힘써 싸워 그들을 물리쳤다. 적이 다시 쳐들어오자 최영이 몸에 여러 번 창에 찔리고도 분전하여 싸우니 적을 거의 다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귀국하고 나서 인당(印璫)과 함께 압록강 서쪽의 8참(站)을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공민왕〉 6년(1357)에는 서해(西海)·평양(平壤)·니성(泥城)·강계(江界)의 체복사(體覆使)가 되어 나갔다.
다음해에 왜선 400여 척이 오차포(吾叉浦)를 침략하니 최영이 매복하였다가 싸워서 이겼다. 또 다음해에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가 되었는데, 홍건적(紅巾賊)이 서경(西京)을 침략하자 최영이 여러 장수들과 함께 생양(生陽)·철화(鐵和)·서경·함종(咸從) 일대에서 싸웠고 자못 공로가 있었다. 또 다음해에 평양윤 겸 서북면순사(平壤尹 兼 西北面巡使)에 임명되었는데, 당시 〈전쟁의〉 상처가 아직 복구되지 않아 굶어 죽는 사람이 계속 이어지자 최영이 진제장(賑濟場)을 널리 설치하여 양식과 종자를 주면서 농사를 권장하고 전사자의 유골을 묻어주었다. 〈이후〉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로 전임되었다.
〈공민왕〉 11년(1362)에 〈최영(崔瑩)이〉 안우(安祐)·이방실(李芳實) 등과 함께 경도(京都)를 수복하니, 공훈을 기려 1등으로 삼고 벽상(壁上)에 초상을 그리고 토지와 노비를 하사하였으며 부모와 아내에게도 작위를 내리고 전리판서(典理判書)를 제수하였다. 〈공민왕〉 12년(1363)에 김용(金鏞)이 난을 도모하여 그 일당을 보내어 흥왕사(興王寺) 행궁(行宮)을 침범하게 하였다. 최영은 변란이 일어났다는 것을 듣고 우제(禹磾)·안우경(安遇慶)·김장수(金長壽)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가 적을 쳐서 그들을 모두 죽였다. 〈이에〉 공훈을 논하여 1등으로 삼고 또 토지와 노비를 하사하였으며,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로 승진시켰다가 진충분의좌명공신(盡忠奮義佐命功臣)의 칭호를 하사하고 평리(評理)로 전임시켰다. 어떤 사람이 김용이 간직하였던 묘아안정주(猫兒眼精珠)를 얻어 도당(都堂)에 헌납하니 모든 사람들이 돌아가며 구경하였다. 최영이 혼자 돌아보지 않고 말하기를, “김용의 지조가 이러한 물건으로 상하였는데, 여러 공들께서는 어찌 구경을 하십니까?”라고 하였다. 곧이어 찬성사(贊成事)로 승진하였다.
〈공민왕〉 13년(1364)에 적신(賊臣) 최유(崔濡)가 덕흥군(德興君)을 받들고 압록강을 건넜다. 우리 군사가 싸워 패배하자 적이 승승장구하여 선주(宣州)에 들어가 주둔하니 온 나라가 흉흉해졌다. 최영을 도순위사(都巡慰使)로 삼아 정예 병사를 거느리고 급히 안주(安州)로 가서 여러 군대를 지휘하게 하였다. 최영이 명령을 듣고 즉시 가서 장졸들을 독려하였고 반드시 적을 섬멸할 것을 맹세하니 조야(朝野)가 믿고서 겁내지 않았다. 최영이 도중에 도망하는 군사를 만나면 번번이 참수하여 조리를 돌리니 군령(軍令)이 비로소 엄숙해졌다. 여러 장수들과 함께 군사를 나누어 적을 달천(獺川)에서 공격하여 크게 패배시켰으며, 병마부사(兵馬副使) 안주(安柱)를 보내어 승리를 보고하니 왕이 기뻐하며 안주에게 말 1필과 은 2정(錠)을 하사하였다. 동녕로만호(東寧路萬戶) 박백야대(朴伯也大, 박바이에타이)가 연주(延州)로 들어와 노략질하니 최영이 그의 장수를 보내어 공격하여 물리쳤다. 나중에 왕이 풍저창사(豐儲倉使) 정득년(丁得年)에게 명령하여 환관[閹人]들에게 쌀을 내려주라고 하니, 정득년이 양부(兩府)를 거치지 않은 명령이라고 하여 교지를 받들지 않았다. 왕이 노하여 매를 치고 유배 보내려고 하자 최영이 말하기를, “책임은 신 등에게 있는 것이고 정득년의 죄가 아닙니다.”라고 하니, 이에 〈왕이〉 그를 석방하였다.
〈공민왕〉 14년(1365)에 왜적이 교동(喬桐)과 강화(江華)를 침략하니 최영이 동서강도지휘사(東西江都指揮使)로서 군사를 거느리고 동강(東江)을 지켰다. 최영이 일찍이 밀직(密直) 김란(金蘭)이 딸을 신돈(辛旽)에게 주었음을 꾸짖어 신돈이 그를 미워하였다. 이때에 최영이 고봉현(高峯縣)에서 사냥하니 신돈이 왕에게 참소하여 왕이 이순(李珣)을 보내 꾸짖기를, “왜적이 창릉(昌陵)에 들어가 세조(世祖)의 진영(眞影)을 가져가도 경은 동서강도지휘사가 되어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김속명(金續命)으로 경을 대신하게 하였는데, 경은 오히려 군사를 거느리고 시도 때도 없이 사냥하니 어찌된 일인가? 내가 비록 말하지 않더라도 대간(臺諫)들이 그 일을 논박하지 않겠는가? 지금 경을 계림윤(鷄林尹)에 임명하니 빨리 임지(任地)로 가라.”고 하였다. 최영이 명령을 듣고 궁궐을 향하여 탄식하기를, “지금 죄를 얻은 자는 목숨을 보전하기 드문데, 나는 계림윤이 되었으니 임금의 은혜[聖恩]가 두텁구나.”라고 하면서 마침내 떠났다. 신돈이 다시 최영이 이구수(李龜壽) 등과 함께 환관[內宦]들과 결탁하여 왕과 신하를 이간시켰다고 무고하니, 〈왕이〉 그 당여인 이득림(李得林)을 보내어 국문하게 하였다. 최영이 거짓으로 자백하면서 말하기를 “청컨대 빨리 처형하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3품 이상의 작위를 빼앗고 그의 전민(田民)을 적몰하여 유배 보냈다. 이득림이 최영을 국문하면서 반드시 그를 죽이려고 하자 당시 합포(合浦)를 지키고 있던 정사도(鄭思道)가 죽기를 각오하여 불가하다고 하니, 이득림이 신돈에게 호소하여 그도 함께 파직하였다.
〈공민왕〉 20년(1371)에 소환하여 다시 찬성사(贊成事)에 임명하였다. 〈공민왕〉 22년(1373)에 6도도순찰사(六道都巡察使)가 되어 군호(軍戶)를 작성하고 전함(戰艦)을 건조하였다. 장수들을 진급하거나 강등시키고[黜陟] 수령들 가운데 죄 있는 자를 마음대로 단죄하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최영은 본래 조정 신하들의 현부(賢否)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진급과 강등이 정확하지 못하다.”라고 하였다. 또 나이 70이상인 자들에게 명령하여 쌀을 차등 있게 거두어 군수(軍需)에 보충하니 민(民)이 많이 도망하고 원망이 크게 일어났다. 〈공민왕〉 23년(1374)에 경상·전라·양광도순문사(慶尙·全羅·楊廣都巡問使)가 되니 헌사(憲司)에서 말하기를, “최영이 일찍이 도순찰사(都巡察使)가 되어 6도(道)를 소란하게 하였으니 다시 순문(巡問)이 되는 것은 불가합니다.”라고 하였다. 최영이 울면서 호소하기를, “신(臣)이 성심을 다하여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쳐 왔는데, 지금 이와 같이 비방을 듣게 되었으니 청컨대 신을 파직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이 비록 최영을 곧은 사람으로 여겼으나 오히려 대간(臺諫)과 도당(都堂)에게 명령하여 대신할 만한 사람을 천거하게 하였다. 얼마 후에 최영을 논박했던 대사헌(大司憲) 김속명(金續命)을 파직하고 지평(持平) 최원유(崔元濡)를 좌천시켜 연안부사(延安府使)로 삼았으며, 최영에게 진충분의선위좌명정란공신(盡忠奮義宣威佐命定亂功臣) 칭호를 하사하였다.
〈명(明)〉 태조(太祖) 고황제(高皇帝)가 임밀(林密) 등을 보내어 우리나라로 하여금 제주(濟州)의 말 2,000필을 진상하라고 하였다. 합적(合赤, 카치) 석질리필사(石迭里必思, 시데리비스)·초고독불화(肖古禿不花, 샤오쿠투부카)·관음보(觀音保) 등이 300필만 보내니 임밀 등이 노하여 왕도 마침내 제주를 토벌하기로 의논하였다.
〈공민왕 23년〉 7월에 최영을 양광·전라·경상도도통사(楊廣·全羅·慶尙道都統使)로 삼고, 염흥방(廉興邦)을 도병마사(都兵馬使)로 삼고, 이희필(李希泌)과 변안렬(邊安烈)을 양광도원수(楊廣道元帥)로 삼고, 목인길(睦仁吉)과 임견미(林堅味)를 전라도원수(全羅道元帥)로 삼고, 지윤(池奫)과 나세(羅世)를 경상도원수(慶尙道元帥)로 삼고, 김유(金庾)를 삼도조전원수 겸 서해·교주도도순문사(三道助戰元帥 兼 西海·交州道都巡問使)로 삼아 전함 314척과 사졸 25,600명을 거느리고 그들을 토벌하게 하였다. 교지(敎旨)를 내리기를, “탐라(耽羅)는 본래 우리나라에 속하여 대대로 공물을 바친 지가 500년이나 되었다. 근래에 목호(牧胡) 석질리필사·초고독불화·관음보 등이 우리 사신을 죽이고 우리 백성을 노예로 삼았으니 죄악이 가득 찼다. 이제 최영에게 절월(節鉞)을 주고 가서 정벌하게 하였으니, 여러 군사를 독려하여 기일을 정하고 적을 섬멸하라. 명령을 듣는 자에게 상을 주고 명령을 듣지 않는 자는 벌을 주도록 하며 높은 벼슬아치도 꺼리지 말라.”고 하였다. 재추(宰樞)들이 모여 전송하는데 여러 장수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으나 최영과 변안렬만 태연자약하였다.
〈공민왕 23년〉 8월에 군사들이 나주(羅州)에 도착하니 최영이 영산(榮山)에서 열병(閱兵)하고 여러 장수들과 함께 약속하기를, “여러 도(道)의 배들이 서로 뒤섞여서는 안 되니 마땅히 각각의 돛대 위에 깃발을 세워서 식별하게 하라. 배에는 두목관(頭目官)을 두어 행동을 통제하고, 배가 출항하면 각각의 대오를 정돈하여 땔나무와 물을 제때에 공급하게 하라. 만약 왜적을 만나면 좌우에서 협공하고 〈그들을〉 사로잡는 자에게는 관직과 상을 크게 더해주겠다. 제주(濟州)에 도착하고 나면 각각 전함을 거느리고 동시에 같이 진격하며 자리를 잃지 말라.
군사들이 각각 약속한 곳을 점령하면 봉화를 통하여 서로 보고하고, 여러 군사들의 동정(動靜)은 도통사(都統使)의 뿔 나팔 소리를 듣도록 하는데 혹여 어기는 일이 없게 하라. 성을 공격하는 날에는 민(民)들 중에 합적(哈赤, 카치)의 편이 되어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군사를 풀어 모두 죽이고 항복하는 자는 맞받아치지 말라. 적 괴수의 재산은 모두 관아로 실어 나르고, 또 공사(公私)의 계권(契券)·금은패(金銀牌)·인신(印信)·마적(馬籍)을 얻으면 역시 모두 관아로 가져오는데 얻은 자에게는 상이 있을 것이다. 불우(佛宇)·도전(道殿)·신사(神祠)를 지키는 자에게 소란피우지 말 것이며, 보화를 탐내어 힘껏 싸우지 않은 자는 처벌하고 보화를 얻어서 먼저 배를 돌려 도망치는 자는 군법으로 논죄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왕이 신에게 반역자를 토벌하라고 명령하셨으니, 나의 말은 곧 왕의 말씀이다. 나의 명령을 따르면 일이 순조로울 것이다.”라고 하니, 여러 장수들이 모두 모자를 벗고 사례하였다. 행군하여 검산곶(黔山串)에 도착하자 여러 장수들이 말하기를, “배가 출항한지 이미 오래되었고 바람이 또 점점 높아지고 있으니 마땅히 속 행군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최영이 말하기를, “오늘은 바람이 불리하고 서해(西海)의 전함이 100척이나 되는데도 또한 도착하지 않았으니 어찌 먼저 갈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여러 장수들이 울분을 터뜨렸다.
보길도(普吉島)에 도착하여 정박하자 최영(崔瑩)이 또 바람이 없으므로 머무르려고 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말하기를, “병법에서는 신속함을 중요하게 여기는데, 지체하여 나아가지 않았다가 뒤에 만약 의논이 있으면 허물을 장차 누가 받겠습니까?”라고 하였으나 최영이 응하지 않았다. 염흥방(廉興邦)이 말하기를, “여러 장수들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최영이 이를 따랐다. 해가 이미 오시(午時)가 되어도 오히려 유예하고 출발하지 않으니 변안렬(邊安烈) 휘하의 군사가 먼저 배를 출발하였다. 최영이 크게 화가 나서 〈그 군사를〉 돛대에 매달아 조리를 돌렸으나, 갑자기 여러 도(道)의 배들이 돛을 올리며 일제히 출발하니 최영도 어쩔 수 없이 닻을 올리고 배를 출발하게 하였으며, 서해(西海)의 배들도 또한 도착하였다. 도중에 큰 바람을 만나 여러 배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는데, 날이 저물어 장차 추자도(楸子島)에 다다를 즈음에 갑자기 비바람이 크게 몰아쳐서 배가 벼랑의 바위에 부딪쳐 닻줄이 많이 끊어지고 노도 잃어버렸다. 이튿날 제주도에 도착하니 최영이 여러 장수들을 부대별로 편성하여 4면으로 나누어 공격하게 하였다. 석질리필사(石迭里必思, 시데리비스)·초고독불화(肖古禿不花, 샤오쿠투부카)·관음보(觀音保) 등은 3,000여 명의 기병으로 명월포(明月浦)에서 저항하였다. 최영이 전 제주목사(濟州牧使) 박윤청(朴允淸)을 보내어 글로써 회유하기를, “지금 군사를 일으켜 죄를 묻는 것은 부득이한 형편이다. 적의 괴수를 제외하고 성주(星主)·왕자(王子)·토관(土官)·군민(軍民)들은 마땅히 모두 예전처럼 안도할 것이며, 비록 적과 한패가 되었던 자라도 항복해 오면 역시 관대한 처분을 따를 것이다. 만약 혹여 위반하고 거역하여 대군(大軍)이 한 번 다다르게 되면 옥석을 가리지 않고 모두 불태울 것이니 후회해도 소용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여러 장수들과 함께 바닷가에 내렸으나 군사들이 머뭇거리고 진격하지 않자 이에 비장(裨將) 한 명을 참수하여 조리를 돌렸다. 그제야 대군이 일제히 진격하고 좌우로 맹렬히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였으며 이긴 기세를 타고 30리까지 추격하였다. 날이 저물어 명월포로 돌아와 해안가에 군영을 만들었는데, 적이 안무사(安撫使) 이하생(李下生)을 죽였다. 여러 장수들이 한라산(漢拏山) 아래에 주둔하면서 군사들을 쉬게 하였고, 당시 우리 군사들이 적의 말을 많이 획득하여 모두 기병으로 삼았다. 적의 괴수 3사람이 와서 싸움을 걸었다가 거짓으로 패하여 달아나는 척하면서 효성(曉星)·오음(五音) 들판으로 유인하여 기병으로 덮치려고 하였다. 최영이 그들의 꾀를 알고 날랜 군사로 급히 추격하게 하니 적의 괴수가 도망하여 산 남쪽의 호도(虎島)로 들어갔다.
최영(崔瑩)이 전 부령(副令) 정룡(鄭龍)을 보내어 날랜 전함 40척을 거느리고 그들을 포위하게 하였으며 자신은 정예병을 거느리고 뒤따라갔다. 석질리필사(石迭里必思, 시데리비스)가 처자(妻子)와 그의 일당 수십 명을 거느리고 나왔으나 초고독불화(肖古禿不花, 샤오쿠투부카)·관음보(觀音保)는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벼랑에 몸을 던져 죽었다. 최영이 석질리필사와 그의 세 아들은 허리를 잘라 처형하고, 또 초고독불화와 관음보의 머리를 베어 지병마사(知兵馬事) 안주(安柱)를 보내어 바치게 하였다. 동도(東道)의 합적(哈赤, 카치) 석다시만(石多時萬, 시다시멘)·조장홀고손(趙莊忽古孫) 등은 아직도 수백 명을 거느리고 성에 웅거하면서 항복하지 않았다. 최영이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그들을 공격하자 적이 무너져 달아났다. 이를 추격하여 잡고 남은 무리를 찾아 체포하여 모두 죽이니 죽은 자가 줄줄이 이어졌다. 금패(金牌) 9개, 은패(銀牌) 10개, 인신(印信) 30개, 말 1,000필을 획득하였는데 인신은 만호(萬戶)·안무사(安撫使)·성주(星主)·왕자(王子)에게 주고 말은 여러 주(州)에 나누어서 기르게 하였다. 군사들 중에 말과 소를 죽여 잡아먹는 자가 있으면 혹은 참수하거나 혹은 팔을 잘라서 조리를 돌리니, 사졸들이 벌벌 떨면서 추호도 감히 범하는 자가 없었다. 〈신우 즉위년〉 10월에 최영이 여러 장수들과 함께 되돌아오니 왕이 이미 훙서(薨逝)하였으므로 재궁(梓宮)에서 복명(復命)하고 통곡하다가 목이 쉬었다.
신우(辛禑) 원년(1375)에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다. 〈신우〉 2년(1376)에 도당(都堂)에서 신우의 명령으로 폄출(貶黜)되어 있던 강순룡(康舜龍)·정사도(鄭思道)·염흥방(廉興邦)·성대용(成大庸)·정우(鄭寓)·윤호(尹虎)·정몽주(鄭夢周) 등을 용서하고자 하였다. 의논이 결정될 때 최영은 사냥을 나가 그 의논에 참여하지 않았는데, 돌아오자 녹사(錄事)가 그 서류에 서명하기를 요청하였다. 최영이 노하여 말하기를, “나라의 큰일은 반드시 대신(大臣)들이 합의한 연후에 시행해야 하는데, 어찌 예고도 없이 갑자기 서명을 받으려 하는가?”라고 하면서 끝내 서명하지 않았다. 최영의 조카사위인 판사(判事) 안덕린(安德麟)이 함부로 사람을 죽이자 양광도안렴(楊廣道按廉) 양이시(楊以時)가 형틀에 채워 헌사(憲司)로 보냈다. 그때 최영이 판순위부사(判巡衛府事)로 있었는데, 도당(都堂)에서 최영과의 연고 때문에 안덕린의 죄를 가볍게 하려고 순위부로 옮겨서 가두니 최영이 노하여 말하기를, “안덕린이 죄 없는 사람을 죽였으니 헌사가 처결할 것이다. 하물며 내가 순위부에 있으니 어찌 마땅히 추국을 하겠는가?”라고 하면서 마침내 헌사로 돌려보냈다.
왜적이 연산(連山)의 개태사(開泰寺)를 도륙하고 원수(元帥) 박인계(朴仁桂)가 패하여 죽으니 최영(崔瑩)이 이를 듣고 자신이 출격할 것을 요청하였다. 신우(辛禑)가 나이를 들어 말리니 최영이 말하기를, “보잘것없는 왜구들이 이와 같이 방자하고 난폭하니 지금 제압하지 않으면 뒤에 반드시 도모하기 어렵습니다. 만약 다른 장수를 보내면 반드시 이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으며 군사도 평소에 훈련하지 않았으니 역시 쓰지 못할 것입니다. 신이 비록 늙었으나 의지가 쇠퇴하지 않았고 다만 종묘사직을 안정시키고 왕실을 보위하고자 할 뿐이니, 원컨대 빨리 휘하들을 거느리고 가서 격퇴하게 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두세 차례 간청하여 신우가 허락하니 최영은 지체하지 않고 떠났다. 그때 적이 노약자를 배에 태우게 하여 장차 돌아갈 것처럼 보이면서 몰래 용맹하고 날랜 군사 수백 명을 보내어 깊숙이 들어가 노략질을 하였는데, 지나는 곳마다 풍문을 듣고 감히 당할 자가 없었다. 홍산(鴻山)에 이르러 마구 죽이고 사로잡으니 기세가 매우 성하였다. 최영(崔瑩)이 양광도도순문사(楊廣道都巡問使) 최공철(崔公哲), 조전원수(助戰元帥) 강영(康永), 병마사(兵馬使) 박수년(朴壽年) 등과 함께 홍산에 가서 장차 싸우려 하였다. 최영이 먼저 험하고 좁은 곳을 점거하였는데, 3면이 모두 절벽이고 오직 한길만 통할 수 있었으므로 여러 장수들이 두려워하고 겁내어 진격하지 않았다. 최영이 몸소 사졸들 앞에 서서 용맹하게 돌진하니 적이 바람에 쓰러지는 풀[披靡]과 같았다. 적 한 명이 숲속에 숨어 최영을 쏘아 입술을 맞추니 피가 낭자하게 흘렀는데, 태연자약하게 적을 쏘아 활시위를 당겨서 쓰러뜨리고 이내 맞은 화살을 뽑았다. 최영이 더욱 힘쓰니 마침내 적을 크게 격파하여 거의 다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판사(判事) 박승길(朴承吉)을 보내어 승전을 알리니 신우가 크게 기뻐하여 박승길에게 백금(白金) 50냥을 하사하고, 삼사우사(三司右使) 석문성(石文成)을 보내어 최영에게 의복·술·안마(鞍馬)를 하사하였으며, 또 의원 어백평(魚伯評)을 보내어 약을 가지고 가서 상처를 치료하게 하였다. 최영이 개선하여 돌아오자 신우가 재추(宰樞)들에게 교외(郊外)에서 맞이하게 하였는데, 잡희(雜戱)와 의위(儀衛)를 갖춘 것이 〈황제의〉 조서(詔書)를 맞이하는 의례와 같았다. 입궐하여 〈왕을〉 알현하니 신우가 술을 하사하면서 묻기를, “적의 무리가 얼마나 됩니까?”라고 하니 〈최영이〉 대답하기를, “그 수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많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다. 여러 재상들이 다시 물으니 말하기를, “적이 만약 많았다면 이 늙은이는 거의 살지 못하였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공로를 의논하여 시중(侍中)과 맞먹는 벼슬에 임명하려고 하니 최영이 굳이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시중이 되면 가벼이 지방으로 나갈 수 없으니 왜구가 평정된 이후에 받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철원부원군(鐵原府院君)으로 봉하고 장사(壯士)들에게도 상을 차등 있게 내렸다. 유영(柳榮)은 최영의 처조카로 최영이 유영을 아꼈다. 조정에서 그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고 유영을 품계를 뛰어넘어 밀직부사상의(密直副使商議)에 임명하였는데, 유영은 즉 유수(柳遂)이다. 나중에 최영의 휘하가 「홍산파진도(鴻山破陣圖)」를 진상하자 신우가 이색(李穡)에게 명하여 찬(贊)을 짓게 하였다.
〈신우〉 3년(1377)에 최영이 이인임(李仁任)과 함께 지윤(池奫)을 처형하였다. 판서(判書) 문천식(文天式)이 장차 원(元)의 승상(丞相) 나하추(納哈出, 납합출)에게 사신으로 가게 되었는데, 최영이 문천식에게 말하기를, “승상이 만약 지윤의 죽음에 대해 물으면 마땅히 병으로 죽었다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문천식이 말하기를, “바라건대 여러 공들께서는 이와 같은 난리가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십시오.”라고 하니 최영이 부끄러워하며 인정하였다. 곧이어 노환으로 사직하려고 하였으나 신우가 허락하지 않았다.
왜적이 밤을 틈타 착량(窄梁)에 들어와 노략질하여 전함(戰艦) 50여 척을 불태우니 바다가 낮같이 밝았고 죽은 자가 1,000여 명이나 되었다. 만호(萬戶) 손광유(孫光裕)는 날아오는 화살에 맞았으나 검선(劒船)을 타고 겨우 빠져나왔다. 최영이 일찍이 손광유에게 경계하기를, “착량의 강어귀에서 병사를 과시하고 바다로 나가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하였다. 이날에 손광유가 잠시 착량을 나왔다가 크게 취하여 깊이 잠이 들었는데, 적이 돌격해 와서 마침내 패배를 당하였다. 적이 또 강화부(江華府)를 노략질하자 만호 김지서(金之瑞)와 부사(府使) 곽언룡(郭彦龍)이 마니산(摩利山)으로 도망쳐 들어가니, 적이 크게 노략질하고 김지서의 아내를 잡아갔다. 신우가 나세(羅世)·이원계(李元桂)·강영(康永)·박수년(朴壽年)·조사민(趙思敏) 등을 보내어 강화에서 적을 공격하게 하였다. 최영은 도통사(都統使)가 되어 승천부(昇天府)에 머물면서 방비하였다. 왜적이 강화를 버리고 물러가면서 수안현(守安縣)·통진현(通津縣)·동성현(童城縣) 등을 노략질하니 지나는 곳마다 텅 비게 되었다. 〈왜적이〉 동성현에 이르러 말하기를, “아무도 막는 사람이 없으니 참으로 낙토(樂土)로다.”라고 하였다. 최영이 경복흥(慶復興)·이인임 등과 함께 경천역(敬天驛)에 이르러 방어할 계책을 의논하였는데 최영이 탄식하기를, “왜구가 이와 같이 방자하고 잔학하니 원수(元帥)가 무슨 낯을 들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마침내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러나〉 원수 석문성(石文成)은 단지 노래 잘하는 기생이 왔는지 만을 물으니, 사람들은 최영과 석문성의 근심과 즐거움이 같지 않은 모습을 보고 탄식하였다. 최영이 또 말하기를, “손광유가 나의 지시를 어기고 적을 이처럼 함부로 날뛰게 만들었다. 적이 처음 강화를 노략질할 때 조강안집사(祖江安集使)가 적이 물러갔다고 거짓으로 보고하여 내가 늑장을 부려 공격하지 못하게 하였다. 만약 관군(官軍)이 일찍 보고하였다면 적은 우리 속의 범과 같았을 뿐이다.”라고 하면서 이에 안집사를 순위부(巡衛府)에 가두었다. 김지서가 사람을 보내어 최영에게 말하기를, “적이 이미 부녀자들과 옥백(玉帛)을 실어 덕적도(德積島)에 두고 다시 37척의 배로 와서 노략질하니 청컨대 구원병을 보내주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최영이 들어주지 않고 말하기를, “너의 부(府)에 있는 기병(騎兵) 1,000여 명은 어디에 쓸 작정인가? 적이 너의 아내를 빼앗아가도 곧바로 힘껏 공격하지 않고 앉아서 보고만 있다가 강화가 함락되고 말았다. 지금 또 군사를 요청하여 적에게 주려고 하는가?”라고 하였다. 또 여러 재상들에게 말하기를, “먼 지방의 원수(元帥)는 넉넉하지 않은 군사를 거느리고도 조금이라도 기회를 잃으면 오히려 군법(軍法)에 회부됩니다. 하물며 기내(畿內)에 있으면서 큰 전함 50척과 전투병 1,000여 명을 거느리고도 싸우지 않고 패하여 달아난 자를 어찌 하겠습니까? 적이 강화에 들어오자 황급히 군사를 버리고 강을 건너 강화부를 텅 비게 하여 황폐화시킨 자를 어찌 하겠습니까? 이를 놓아두고 죽이지 않으면 어떻게 〈전군을〉 호령하겠습니까? 내가 죄를 처결하고자 하나 다만 함부로 사람을 죽이기 싫어할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신우에게 청하여 이를 다스리게 하니, 이에 손광유·김지서·곽언룡을 옥에 가두었으며 이희춘(李希春)을 강화만호(江華萬戶)로 삼고 김인귀(金仁貴)를 부사로 삼았다.
당시 어떤 어린아이가 적진에서 도망쳐 오자 여러 장수들이 불러 적의 상황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적이 항상 말하기를, ‘두려워할 사람은 오로지 백발의 최만호(崔萬戶)뿐이다. 홍산(鴻山) 전투에서 최만호가 당도하자 곧 사졸들이 앞 다투어 말을 달려 우리들을 차고 짓밟으니 매우 두렵다.’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최영이 말하기를, “교동(喬桐)과 강화는 실로 요충지인데, 권세가들이 다투어 토지를 점유하는 바람에 군수 물자가 조달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사전(私田)을 혁파하여 군량에 보충하십시오.”라고 하니 신우가 옳다고 여겼다. 이에 교동의 노약자들을 내지(內地)로 옮기고 장정들을 머물게 하여 농상(農桑)에 종사하게 하였다. 또 여러 원수들을 시켜 휘하 군사를 각기 10명씩 내게 하고, 또 애마(愛馬)·궁사(宮司)·창고(倉庫)에 속한 사람들을 징발하여 군사로 삼아 강화를 지키게 하였다. 최영이 군대를 점열(點閱)하다가 대오가 정돈되지 않은 것에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요청하기를, “신이 대오의 지휘관[隊伍長]을 목 베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신우가 말하기를, “도통사가 이미 죽이지 않았던가? 〈죄가〉 무거우면 매를 치고 가벼우면 용서하라.”고 하였다.
하루는 신우가 순위부에 교서(敎書)를 내리기를, “손광유·김지서·곽언룡의 죄는 마땅히 군법으로 다스려야 하지만 바야흐로 크게 가뭄이 드니 모두 사형을 감해주고 그들의 집을 적몰한 뒤에 먼 곳으로 유배 보내라.”고 하였다. 이에 앞서 김진(金縝)이 경상도원수(慶尙道元帥)가 되어 도내의 이름난 기생들을 크게 모아 놓고 휘하 장사들과 함께 밤낮으로 술을 마시며 놀았다. 김진이 소주(燒酒)를 좋아하니 군대 내에서 소주도(燒酒徒)라고 불렸다. 군졸과 비장(裨將)들이 조금만 그의 뜻을 거슬러도 번번이 매를 쳐서 욕을 보이자 사람들이 분노하고 원망하였다. 왜적이 합포(合浦) 병영을 불사르고 약탈하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소주도를 시켜 적을 치면 될 것이지 우리들이 어찌 싸울 수 있겠는가?”라고 하며 물러서서 진격하지 않았다. 김진이 혼자 말을 타고 달아나니 마침내 크게 패배하였다. 이에 김진을 폐하여 민(民)으로 삼아 창녕현(昌寧縣)으로 유배 보냈다가 곧 가덕도(嘉德島)로 옮겼다. 〈그리고〉 합포도천호(合浦都千戶) 이동부(李東榑)와 김원곡(金元穀)을 참수하였다. 이에 이르러 최영이 내려진 교서를 보고 탄식하기를, “김진과 손광유 등은 모두 패전하였으니 마땅히 죽여서 조리를 돌려야 했다. 지난번에는 법을 어기면서까지 김진을 용서하더니 이제 다시 손광유 등을 놓아주니 형법을 이와 같이 해서야 어찌 나라를 다스리겠는가?”라고 하였다. 신우가 또 김진에게 옷과 말을 하사하면서 소환하려 하니 최영이 불가하다고 하면서 말하기를, “김진은 사졸들을 돌보지 않고 적을 보고도 머뭇거리다가 패전하였으니 목을 보전한 것만도 다행입니다. 지금 도리어 후하게 하사하고 소환하니 나중에 공을 세운 자가 있으면 어떻게 대우하시겠습니까? 상벌은 왕의 큰 권한이니 선후를 뒤바꾸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니 신우가 이에 그만두었다.
그때 가뭄이 들어 기우제를 지내고 또 여러 절에서 두루 기도하니 최영이 도당(都堂)에서 드러내놓고 말하기를, “지금 형법의 집행이 문란하여 공이 있어도 상을 주지 않고 죄가 있어도 형벌을 주지 않으니 하늘이 어찌 비를 내리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또 승려들이 단오(端午)에 길거리에서 시식(施食) 행사를 하여 처녀총각들이 다투어 모여 들자 최영이 이를 보고 승려들을 꾸짖으며 말하기를, “만약 귀신에게 시식하려면 마땅히 산과 들의 정결한 곳에서 할 것인데, 지금처럼 한여름에 음식을 차려놓으니 길거리에 더러운 냄새를 풍기고 있다. 이는 너희들이 예쁜 여자들을 불러 모아 음탕한 짓을 가르치려는 것일 뿐이니 모두 체포하여 옥에 가두리라.”고 하니 승도들이 두려워하여 사방으로 흩어졌다.
경도(京都)가 바다와 가깝기 때문에 왜적이 노략질할까 두려워하여 내지(內地)로 천도하고자 가부(可否)를 의논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후환을 염려하여 모두 옮기고자 하였으나 최영이 홀로 군사를 징발하여 굳게 지킬 계책을 진언하였다. 신우가 듣지 않고 철원(鐵原)에 궁성(宮城)을 짓도록 명령하니 최영이 말하기를, “지금 천도하면 특히 농사를 방해하고 민(民)을 소란스럽게 할뿐만 아니라 또한 왜적들에게 넘보는 마음을 열게 하여 나라가 장차 날로 궁지에 빠질 것이니 〈올바른〉 계책이 아닙니다. 청컨대 태후(太后)를 받들어 철원으로 거처를 옮기시고 전하께서는 여기에 머물면서 〈민심을〉 진정시키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신우가 말하기를, “태후께서 거처를 옮기시면 내가 어찌 홀로 머물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최영이 말하기를, “태후께서는 연세가 이미 많으시니 만약 뜻밖의 일이 생기면 움직이기가 더욱 어렵습니다.”라고 하니, 신우가 옳다고 여겨서 일이 마침내 그치게 되었다.
최영이 또 말하기를, “경성(京城)은 너무 넓어서 비록 십만의 병력이 있더라도 지키기가 쉽지 않습니다. 청컨대 내성(內城)을 축조하여 뜻밖의 일에 대비하십시오.”라고 하였다. 목인길(睦仁吉)이 말하기를, “동토(動土)는 불가합니다.”라고 하자 신우가 말하기를, “꺼림칙하게 여겨서 축성을 폐하는 일이 옳은 것인가? 여기를 버리고 어느 곳에 도읍하고자 하는가? 마땅히 농한기 때 공역(工役)을 일으키도록 하라.”고 하였다.
〈신우〉 4년(1378)에 왜선이 착량(窄梁)에 대거 모여 승천부(昇天府)로 들어와 소리를 지르면서 장차 경성(京城)을 침입할 것이라고 하였다. 온 나라가 크게 동요하니 계엄을 내렸다. 신우가 여러 군사들을 나누어 동강(東江)과 서강(西江)에 주둔하도록 명령하였고, 위병을 궁문(宮門)에 세워 놓아 적이 오는 것을 기다리게 하였으며, 방리(坊里)의 군사를 징발하여 성에 올라 망을 보게 하였다. 최영은 여러 군사들을 독려하여 해풍군(海豊郡)에 진을 치고 찬성사(贊成事) 양백연(楊伯淵)을 부관으로 삼았다. 적이 염탐하여 이를 알고 말하기를, “최영의 군사만 깨뜨리면 경성을 엿볼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이에 여러 주둔지를 지나치며 싸우지 않고 내버려두면서 해풍군으로 달려가 곧바로 중군(中軍)을 향하였다. 최영이 말하기를, “사직(社稷)의 존망이 이 한 번의 싸움에 달려있다.”라 하고 마침내 양백연과 함께 진격하였다. 적은 최영만 쫓았는데 최영이 달아나니 우리 태조(太祖)가 정예 기병을 거느리고 곧장 나아가 양백연과 함께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최영은 적이 바람 앞에 풀처럼 쓰러지는 것[披靡]을 보고 휘하를 이끌어 측면에서 공격하니, 적들은 거의 다 죽었고 남은 무리들만이 밤에 도망하였다. 밤새 경성 안에서는 최영이 달아났다는 소문을 듣고 더욱 흉흉해져 갈 곳을 알지 못하였다. 신우가 피난을 떠나려고 하니 백관(百官)들도 행장을 꾸려 궁문에 겹겹이 모여서 왕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러 원수(元帥)들의 사자가 와서 승리를 보고하자 경성의 계엄을 풀렸으며 백관들이 모두 하례하였다. 조정에서 최영의 공로를 기려 안사공신(安社功臣) 칭호를 하사하였다.
〈신우〉 5년(1379)에 신정군(新定君) 마경수(馬坰秀)가 그의 아들과 함께 양민(良民)을 점유하여 숨겼다가 일이 발각되어 옥에 갇혔다. 마침 재변(灾變)으로 인하여 죄수들을 사면하게 되자 여러 재상들이 그를 석방하려고 하였다. 최영이 말하기를, “마경수가 노비처럼 양인을 부린 것이 30명에 이르고 널리 토지를 점탈한 것이 100경(頃)이 넘어 악덕 토호[鄕愿]로서 더할 나위 없으니 어찌 마땅히 살아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인임이 당리(堂吏)를 시켜 공문을 작성하여 말하기를, “무릇 민을 숨겨 부렸거나 죽을죄를 범한 자는 그들의 토지를 모두 군수에 귀속시킬 것이다.”라고 하였다. 당리가 최영에게 보고하자 최영이 소리를 질러 꾸짖기를, “이 일은 이미 정해진 법이 있는데도 따르지 않고 반드시 법을 어겨서 민을 숨긴 자를 용서하고자 하며 또 범죄자의 토지를 다투어 점유하니 공문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고 하니 이인임이 부끄러워하였다. 최영이 사평부(司平府)에서 마경수의 죄를 국문하여 도당(都堂)에 보고하였으나 도당에서 보류하고 처결하지 않으니 최영이 노하여 며칠 동안 출근하지 않았다. 결국 마경수에게 107대의 매를 치고 아울러 그의 아들 마치원(馬致遠)과 마희원(馬希援)에게도 매를 쳐서 모두 유배 보냈는데, 마경수는 도중에 죽었다.
경복흥(慶復興)·황상(黃裳)·우인열(禹仁烈)이 최영의 집에 갔는데, 당시 정지(鄭地)가 순천(順天)과 조양(兆陽)에서 왜적과 싸워 패배하였다. 최영이 경복흥 등에게 말하기를, “여러 재상들은 어찌 나라를 걱정하지 않습니까? 왜구가 이처럼 제멋대로 날뛰는데 정지 한 사람이 비록 용맹한들 그 많은 적을 어찌하겠습니까?”라고 하니 여러 재상들이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있었다. 신우가 여러 장수들을 보내어 왜구를 치려고 하니 최영이 말하기를, “신은 집안일에 관심이 없으니 비록 적에게 죽더라도 후회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신의 이름이 다른 나라에 조금 알려져 있으니 만약 적에게 죽는다면 나라의 체면이 상할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왜구가 이처럼 포악하게 침략하니 신은 차마 백성들이 어육(魚肉)이 되는 것을 좌시할 수 없습니다. 나라의 안위가 신의 행동 하나에 달려 있으니 청컨대 휘하 군사를 거느리고 출정하게 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도당에서 여러 장수들을 전송하자 최영은 홀로 나아가지 않고 말하기를, “근래에 문하부(門下府)에서 영접과 전송 행사를 금지하도록 청하였는데 어찌 재상들이 먼저 법령을 어길 수 있습니까?”라고 하였다. 갑자기 봉화(烽火)가 재차 올라오자 신우가 말하기를, “변방을 중요시하고 도성을 가벼이 여길 수 없다.”라고 하면서 최영에게 가지 말라고 명령하였다. 최영의 휘하 군사 이인무(李仁茂)와 박위(朴衛) 등 30여 명이 호소하기를, “승천부와 서해도(西海道)의 싸움에서 공로가 있었으나 벼슬과 상을 받지 못하였습니다.”라고 하니 최영이 지나치다고 하여 모두 사평부에 가두었다. 신우가 용서해주도록 명령하였으나 최영이 불가하다고 고집하였다. 신우가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용서하고자 하는데 경이 어찌 억지를 부리는가?”라고 하니, 최영이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놓아주었다.
정당문학(政堂文學) 허완(許完)과 동지밀직(同知密直) 윤방안(尹邦晏)이 그들의 아내를 시켜 신우(辛禑)의 유모 장씨(張氏)에게 의지하여 내재추(內宰樞) 임견미(林堅味)와 도길부(都吉敷)를 참소해서 제거할 것을 청하였다. 신우가 임견미 등에게 명령하여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가게 하고 궁궐 출입을 금지하였다. 임견미 등이 달려가서 최영(崔瑩) 및 경복흥(慶復興)·이인임(李仁任)에게 고하기를, “허완 등이 우리 두 사람을 죽이려고 하니 여러 공(公)들께도 장차 화가 미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밤에 허완 등이 거짓 교지로 최영을 두세 차례 부르자 최영은 화가 자기에게 미칠까 두려워하여 휘하 군사를 거느리고 경복흥·이인임 등과 함께 흥국사(興國寺)에 모여 무장한 병사들을 대거 늘어세워놓은 채, 양부(兩府)의 백관(百官)들과 기로(耆老)들을 소집하고 장씨를 국문하도록 요청하는 일을 의논하게 하였다. 신우가 최영을 재촉해서 불렀으나 최영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지금 나라 전체가 실망하는 일이 생겼으니 주상께서 만약 많은 사람들의 뜻을 따르신다면 신이 장차 들어가 뵙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신우가 말하기를, “경이 병들어 여러 날 동안 조회하지 않았으므로 한번 만나보려고 생각하였으며, 또 실망했다는 일에 대해 묻고자 한다.”고 하였다. 최영이 입궐하려고 하였으나 여러 재상들이 그를 말리면서 말하기를, “간악한 도적이 〈궁궐〉 안에 있으니 경솔하게 들어갈 수 없습니다. 공이 가면 여기 군사들이 반드시 혼란스러울 것이고, 군사들이 혼란해지면 나라가 조용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최영이 이를 따랐다. 양부와 대간(臺諫)들이 궁궐에 나아가 장씨를 하옥하여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였으나 신우가 듣지 않았는데, 최영 등이 장씨의 족당(族黨) 강유권(康侑權)·원순(元順)·원보(元甫) 등을 가두어 국문하였다. 신우가 노하여 말하기를, “궁중의 일은 양부와 대간이 알 바가 아닌데, 필시 환관[宦寺]을 통하여 누설되었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환자(宦者) 정난봉(鄭鸞鳳)을 옥에 가두고 이득분(李得芬)과 김실(金實)을 자기 집에 억지로 돌려보냈다.
〈신우가〉 최영에게 군사를 해산하라고 명령하여 말하기를, “경은 어떤 적을 막고자 군사를 거느리고 오지 않는가? 경은 일찍이 자신을 누대의 충신이라고 말하였는데, 충성스러운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하였다. 최영이 말하기를, “신이 만약 부름에 〈응하여〉 나간다면 군사들도 반드시 따를 것인데, 군사를 이끌고 대궐에 나아가면 신의 죄는 마땅히 처형되어야 합니다. 또 신이 어찌 나아가 대궐 아래에서 죽으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주상의 뜻이 아닐까 두려워하기 때문에 감히 나아가지 않았을 따름입니다. 신은 비록 보잘 것 없는 몸이지만 매우 큰일을 맡고 있으므로 만약 간악한 자의 손에 죽는다면 나라가 위태롭습니다.”라고 하였다. 신우가 한참 침묵하다가 경복흥과 목인길을 불러 들어오게 하고는 울면서 말하기를, “이 여자가 나를 길렀으니 곧 나의 어머니이다. 아들이 어머니를 어찌 살리고자 하지 않겠는가? 경들이 이미 나를 임금으로 삼았으니 내가 홀로 유모 한 사람도 구할 수 없단 말인가? 그녀를 놓아 보내고 죄를 묻지 말게 하라.”고 하였는데, 경복흥 역시 눈물을 흘렸으나 어찌할 수 없었다. 신우가 사람을 시켜 태후(太后)에게 묻기를, “옛적에도 또한 유모를 내친 자가 있습니까?”라고 하니 태후가 말하기를, “어찌 고금(古今)에 있고 없음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 마땅히 때에 따라 알맞게 할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경복흥과 목인길의 대답 역시 태후의 말과 같았으나 신우가 듣지 않았다. 대성(臺省)과 백관들이 장씨를 국문하도록 청하였으나 또 들어주지 않고 몰래 사람을 시켜 대사헌(大司憲) 우현보(禹玄寶)에게 말하기를, “백관을 거느리고 물러가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우현보가 말하기를, “신이 비록 물러간다고 하더라도 백관들이 반드시 따르지 않을 것이니 청컨대 속히 장씨를 하옥하십시오.”라고 하였다. 백관들이 장씨의 죄를 자세히 태후에게 아뢰니 태후가 말하기를, “어찌 한 여자 때문에 온 나라를 실망시키겠는가? 빨리 장씨를 내보내라.”라고 하였다. 장씨가 신우 앞에 들어와서 나가지 않자 신우 역시 차마 〈내보내지〉 못하였다. 태후가 신우에게 말하기를, “내가 별궁(別宮)으로 옮겨서 이 일을 듣지 않으려고 합니다.”라고 하였으며, 마침내 명령하여 수레를 불러 장차 나가려고 하였다. 신우가 마음을 풀고 이에 장씨를 이인임의 집으로 보내면서 죽이지 말도록 타이르고 국대부인(國大夫人)의 작위를 삭탈하였다. 최영이 대궐로 나아가 사례하기를, “전하께서 간사한 자를 물리치고 의심하지 않으시니 신이 감히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신이 불충하다고 꾸짖으시니 신이 참으로 실망스럽습니다.”라고 하니 신우가 말하기를, “일이 급하여 실언하였음을 깨닫지 못하였으니 깊이 후회하노라.”라고 하였다. 문하평리(門下評理) 김유(金庾)가 최영에게 말하기를, “신하로서 임금에게 항거하였으니 옳지 않은 것 아닙니까?”라고 하니, 최영이 노하여 신우에게 아뢰어 김유를 하옥시켰다가 합포(合浦)로 유배 보냈다. 대간과 중방(重房)에서 상소(上疏)하여 힘써 간쟁하니 이에 장씨를 유배 보내고 허완·윤방안·강유권·원순·원보 및 장씨의 양녀(養女) 남편인 상호군(上護軍) 손원미(孫元美)를 참수하였다. 손원미의 형인 지춘주사(知春州事) 손원적(孫元迪)은 매를 쳐서 유배 보냈고 곧이어 장씨를 참수하였다.
〈신우〉 6년(1380)에 최영(崔瑩)이 해도도통사(海道都統使)를 겸하면서 신우에게 아뢰기를, “신이 맡은 일이 이미 많고 이제 다시 해도(海道)를 지휘하게 되었으니 감당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또 전함(戰艦)이 겨우 100척에 수졸(戍卒)도 겨우 3,000명인데, 신이 만약 군사를 움직인다면 마땅히 군사 10,000여 명을 써야 하나 창고가 고갈되었으니 무엇으로 〈물자를〉 공급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신우가 말하기를, “방어하는 일이 힘들어 부득이 경에게 이를 겸하게 한 것이니 굳이 사양하지 말라. 또 지금의 군수품으로 10,000여 명의 군사를 먹이기는 정말로 어려우니 청컨대 경은 3,000명을 써서 1명이 100명을 당해내게[一當百] 하라.”고 하였다. 최영이 말하기를, “신이 이미 늙어 때때로 주상을 알현하지 못하였으나 이제 다행히 와서 뵙게 되었으니 청컨대 한 가지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마음가짐을 조심하시고 혹여 게을러지지 마시옵소서. 백성의 안위는 모두 주상의 마음이 어떠한가에 달려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최영이 여러 장수들과 함께 출정하여 동강(東江)과 서강(西江)에 주둔하고 왜구를 방비하였는데, 최영이 병에 걸리니 여러 장수들이 말하기를, “공의 병이 심합니다.”라고 하였으나 최영이 말하기를, “장군이 군사를 거느리고 밖으로 나왔으니 어찌 병을 걱정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의원이 약을 올리면 물리치고 말하기를, “내가 이미 늙은 데다 죽고 사는 것은 운명에 있는데, 무엇하러 반드시 약을 먹어 살고자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신우가 천한 하인들을 근신(近臣)으로 삼으려고 최영에게 묻자 최영이 말하기를, “소인이 벼슬을 얻으면 반드시 제멋대로 굴기 때문에 벼슬을 줄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이에 중지하였다.
그때 명[大明]에서 세공(歲貢)으로 금(金)·은(銀)·마필(馬匹)·세포(細布)를 바치라고 독촉하자 시중(侍中) 윤환(尹桓) 등이 의논하여 재상(宰相)으로부터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포(布)를 차등 있게 내어 마련하자고 하였다. 최영이 말하기를, “지금 사민(士民)들이 사고가 많아 생업에 종사할 수 없는데, 또 베를 내게 하면 그 폐해를 헤아리지 못합니다. 또 〈명에서〉 요구하는 것이 끝이 없으니 어찌 모두 따르겠습니까? 마땅히 먼저 사신을 보내어 바칠 액수를 줄여주도록 요청하고 부득이하면 나중에 그렇게 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신우가 최영의 공로를 기려 철권(鐵券)을 하사하면서 교서를 내리기를, “대개 듣건대 〈주(周)의〉 무왕(武王)은 즉위하여 먼저 공로를 보답하는 법전을 반포하였고, 태공(太公)은 봉작(封爵)을 받을 때 공로를 포상한다는 말이 있었다. 하물며 또한 공로가 의심되더라도 중한 상을 생각하였으니, 〈이것이〉 요순(堯舜)의 다스림에 후세가 미칠 수 없는 까닭인가? 생각건대 경은 진실로 나의 세신(世臣)으로 경의 선조들은 나의 선왕(先王)들을 섬겨 문장과 정사에서 모두 볼만한 업적이 있었다. 경의 고상한 자질과 강건한 기세는 당대의 으뜸이 되어 선조[前烈]를 빛나게 하였으므로 그 무공(武功)은 견줄 사람이 없다. 경인년(庚寅年, 1350) 이래로 바다와 육지에서 적을 막아내며 처음으로 지혜와 용기가 온 나라에 퍼졌다. 나의 선친께서 선발하여 시위(侍衛)로 삼아 날마다 가까이 하고 믿었으며 단계를 뛰어넘어 호군(護軍)에 임명하였다. 역적 조일신(趙日新)이 난을 일으키자 경이 제압하여 공로를 세웠다. 〈원(元)〉 천자(天子)가 선친에게 조서를 내려 용사(勇士)를 모집하니 경이 위로 선친의 마음을 살펴 양자강(揚子江)과 회수(淮水) 사이에서 혈전을 벌여 이름을 중국에 떨치고 나라의 위상을 드높였다. 홍건적(紅巾賊)이 서쪽 변방으로 난입하자 경이 선봉이 되어 승리를 거두고 공로를 세웠으며, 또 여러 장수들과 함께 경도(京都)를 수복하여 사직(社稷)을 다시 안정시켰다. 선친께서 흥왕사(興王寺)를 행궁(行宮)으로 삼으니 역적 김용(金鏞)이 몰래 김수(金守)를 시켜 밤중에 행궁으로 쳐들어와 신하들을 살해하였는데, 경이 몸을 돌보지 않고 충성을 떨쳐 흉악한 무리들을 모두 제거하였다. 역적 최유(崔濡)가 〈원〉 천자에게 무고하여 덕흥군(德興君)을 받들고 선친을 폐위하여 군사를 거느려 국경으로 들어오니, 경이 명령을 받들고 가서 여러 장수들을 독려하여 이기고 큰 공로를 이루어냈다. 탐라(耽羅)의 합적(哈赤, 카치)이 관리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자 경이 명령을 받들고 가서 정벌하여 그 괴수를 섬멸하고 추호도 범하지 않으니 민(民)들이 안도하였다. 내가 즉위한 이래로 왜적이 더욱 늘어나니 민들의 많은 어려움이 이전보다 심하였다. 경이 몸소 먼저 적에게 나아가 적을 홍산(鴻山)에서 격파하였으며 서해(西海)에서 〈적의〉 배를 불태워 적을 꺾고 위엄을 세웠으니 향하는 곳마다 상대가 없었다. 승천부(昇天府) 전투는 경읍(京邑)과 가까워 종묘사직의 안위가 경각[呼吸]에 달렸다. 경이 여러 군사들을 지휘하여 적이 비록 해안에 내렸으나 걸음을 내딛자마자 곧바로 무너뜨리니 성 안이 안정을 찾아 적이 있는지도 몰랐다. 양백연(楊伯淵)과 홍중원(洪仲元)이 몰래 파당을 맺고 모의하여 사직을 위태롭게 하려고 하였는데, 경이 의로움을 떨쳐 역적 무리들을 모두 소탕하였으니 그 공로의 중요함을 말로 다 할 수 있겠는가? 지금 장수들 가운데 전투를 많이 하고 공로가 큰 사람을 살펴보니 오직 경 한 사람뿐이다. 또 더구나 충성을 다하고 의로움을 떨쳐서 임금을 높이고 민들을 보호하였으니 재상 중에 진정한 재상이다. 전민(田民)을 상으로 하사하는 것이 통례이나 경의 청백함이 천성에서 우러나 반드시 고사하고 받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다만 철권(鐵券)을 하사하면서 옥(玉)으로 굴대를 만들어 특별이 대우하였음을 표시하였다. 아아! 공로는 크나 상이 미미하여 내가 실로 부족하게 여긴다. 경이 혹 죄를 범한 것이 비록 9번이라도 끝내 벌하지 않을 것이고, 10번이라도 역시 마땅히 〈죄를〉 감할 것이다. 자손들 역시 이와 같을 것이니 후세의 임금과 신하들도 나의 뜻을 받들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신우(辛禑)〉 7년(1381)에 〈최영(崔瑩)을〉 수시중(守侍中)으로 임명하였다. 그의 아버지에게 순충아량염검보세익찬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판문하사 영예문춘추관사 상호군 동원부원군(純忠雅亮廉儉輔世翊贊功臣 壁上三韓三重大匡 判門下事 領藝文春秋館事 上護軍 東原府院君)을 추증하고 어머니 지씨(智氏)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으로 삼았다. 신우가 〈궁궐〉 밖으로 놀러나가려고 하니 최영이 간언하기를, “지금 기근이 거듭 닥쳐서 민(民)들이 부족하나마 그대로 살지도[聊生] 못하고 농사일이 바야흐로 일어날 때인데, 절도 없이 즐겁게 놀아 민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신우가 말하기를, “선조(先祖) 충숙왕(忠肅王)도 역시 놀기를 좋아하였는데, 내가 놀러나가는 것만 유독 옳지 않다고 하는가?”라고 하니 최영이 말하기를, “선왕 때에는 민들이 편안하고 해마다 풍년이 들어 오히려 나가놀아도 괜찮았지만 오늘날은 신(臣)도 그것이 옳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신우가 용수산(龍首山)에서 놀다가 술에 취한 채 말을 타고 달리다가 떨어지니 최영이 울면서 간언하기를, “충혜왕(忠惠王)은 여색을 좋아하였으나 반드시 밤에만 하여 다른 사람들이 보지 않게 하였습니다. 충숙왕은 놀기를 좋아하였으나 반드시 때에 맞추어 민이 원망하지 않게 하였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절도 없이 노시다가 말에서 떨어져 몸을 상하였으니, 신이 재상의 자리를 지키면서 바로잡아 고치지 못하였으니 무슨 면목으로 사람들을 보겠습니까?”라고 하니, 신우가 말하기를, “지금부터는 고치도록 하겠다.”라고 하였다.
경성(京城)의 물가(物價)가 뛰어 오르니 상인들이 아주 작은[錐刀] 이익마저도 다투었다. 최영이 이를 싫어하여 무릇 저자의 물건들은 먼저 경시서(京市署)가 그 값을 정하고 세인(稅印)으로 표시해야만 비로소 매매를 허락하였다. 세인 표시가 없는 것을 매매하는 자는 장차 갈고리로 척추를 찍어 죽이겠다고 하였으며, 이에 큰 갈고리를 저자에 걸어 놓고 보여주니 저자 사람들이 벌벌 떨었으나 일이 끝내 시행되지 않았다.
당시 한양(漢陽) 천도를 의논하자 최영이 말하기를, “참서(讖書)에 실린 바는 지난 일이 모두 증험되어 믿지 않을 수 없으니 마땅히 빨리 도읍을 옮겨야 한다.”라고 하였으나 사람들이 모두 천도를 신중하게 여겼으므로 의논이 마침내 잠잠해졌다. 성문도감(城門都監)이 5부(部)의 정부(丁夫)를 징발하여 도성(都城)을 수축하였으나 얼마 안 되어 무너졌다. 최영이 노하여 말하기를, “도감의 인원이 많은데도 감독을 할 수 없어서 이와 같이 되었는가?”라고 하였으며, 마침내 윤순(尹順) 등을 탄핵하고 정부들을 놓아 보냈다.
신우가 최영에게 토지를 하사하면서 교서를 내리기를, “지난해에 왜적이 양광도(楊廣道)와 전라도(全羅道)를 깊숙이 노략질하니 경이 여러 장수들을 지휘하여 적선(賊船)을 진포(鎭浦)에서 불태울 수 있었다. 다시 운봉(雲峰)의 승리가 있었으니 공로의 크기가 산과 같아 오래도록[帶礪] 잊기 어렵다. 일찍이 여러 번 토지를 하사하였으나 경은 모두 버려두고 세(稅)를 거두지 않았으므로 이제 부친의 묘소 부근인 고양현(高陽縣)의 토지 230결(結)과 장원정(長源亭)의 토지 50여 결을 하사하겠다.”라고 하였다.
〈신우〉 8년(1382)에 어떤 자가 이인임(李仁任)의 사위 강서(姜筮)의 집에 익명서(匿名書)를 던져 말하기를, “왕의 즉위에 의심스러운 점이 없지 않고 또한 매우 무도(無道)하니 조민수(曹敏修)·임견미(林堅味)·염흥방(廉興邦)·도길부(都吉敷)·문달한(文達漢) 등이 이인임과 최영을 제거하고 정창군(定昌君) 왕요(王瑤)를 세워 왕을 삼기로 모의하였다.”라고 하였다. 전 판사(判事) 김극공(金克恭)이 소문을 듣고 다른 사람에게 말하니 그 사람이 임견미에게 알렸다. 임견미는 김극공의 소행이라고 생각하여 잡아서 그를 국문하니 김극공이 매를 견디지 못하고 거짓으로 자복하였다. 옥관(獄官)이 김극공에게 글자를 쓰게 하였는데 익명서의 필적과 달랐으므로 이인임이 자못 의심하였다. 임견미가 반드시 김극공에게 죄를 씌우고자 하니 옥관이 감히 명백하게 밝히지 못하였다. 최영이 말하기를, “김극공이 헛된 일을 만들어 나라를 놀라게 하고 미혹케 하여 대신(大臣)들을 살해하기로 꾀하였으니 죄는 처형을 시켜도 부족하다. 판사(判事) 장자충(張子忠)은 김극공의 말을 듣고도 나라에 알리지 않고 사사로이 정창군에게 알렸다. 전교부령(典校副令) 정구(鄭矩)는 김극공의 사위가 되는데 역시 알면서도 알리지 않았다. 김극공은 마땅히 처자(妻子)까지 죽여야 하고 정구와 장자충은 매를 쳐서 유배 보내야 옳다.”라고 하였다. 〈이에〉 환자(宦者) 김실(金實)을 시켜서 신우에게 아뢰기를, “지금 김극공을 멸족시키고자 하니 바라건대 주상께서는 금하지 마십시오. 정창군 역시 마땅히 조정에 있지 못하니 청컨대 함께 유배 보내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김극공을 수레로 찢어 죽여서 조리돌렸으며, 그의 가산을 적몰하고 처자는 노비로 삼았다. 정구와 장자충은 먼 지방으로 유배 보냈다.
〈당시에〉 경상도(慶尙道)·강릉도(江陵道)·전라도(全羅道)의 3도에서는 왜구로 인하여 생업을 잃고 민들이 많이 굶어 죽었다. 최영이 여러 도에 명령을 내려서 시여장(施與場)을 설치하여 자비롭고 선량한 자를 뽑아 이를 주관하게 하였으며, 관청의 쌀을 내어 죽을 만들어 진휼하고 보리가 익은 후에야 그만두었다. 최영이 전함(戰艦)을 건조하고자 여러 도의 군사를 징발하였고 또 승도(僧徒)를 모집하려고 승록(僧錄)을 불러 말하기를, “승려들 역시 적을 막고자 하는가?”라고 하니 〈승록이〉 대답하기를, “승려들이 편안한 것은 나라에 근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라에 변고가 있으면 승려인들 어찌 홀로 편안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최영이 말하기를, “내가 옛날에 6도도통사(六道都統使)가 되어 전함 800여 척을 대대적으로 만들어 해적[海寇]을 소탕하려고 하였다. 뜻밖에 이해(李海) 등이 선왕(先王)에게 적극 요청하여 그 전함들을 나누어 거느렸다가 끝내 패배하였고, 손광유(孫光裕)는 강어귀에서 전함을 거느렸다가 한차례 왜적을 만나 태반을 불태워 버렸다. 이제 다시 건조하려고 하지만 바야흐로 농사철이라 민들을 사역시킬 수 없으니 승도들을 부리고자 한다. 당(唐) 태종(太宗)이 고구려[本國]를 정벌할 때 고구려에서는 승군(僧軍) 30,000명을 징발하여 이를 격파하였다. 이제 만약 전함을 건조하여 왜구를 막으면 공로가 어찌 작다고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사재령(司宰令) 이광보(李光甫)를 시켜 전함을 건조하게 하였으나 매우 급하게 일을 독촉하여 사람들이 많이 원망하였다. 해를 넘기지 않고 큰 전함 130여 척을 건조하여 요충지에 나누어 지키게 하니, 이후로 왜구가 점점 줄어들어 민들이 오히려 기뻐하였다. 최영은 사직하였다가 곧이어 영삼사사(領三司事)가 되었다. 신우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려고 하니 최영이 말하기를, “천도는 나라를 안정시키고자 하는 것이니,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경솔히 하지 마시고 밤낮으로 걱정하시어 선대의 업적을 떨어뜨리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신우〉 10년(1384)에 〈최영이〉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가 되었다. 신우가 일찍이 토지를 하사하였으나 최영이 창고가 비었다고 사양하여 받지 않았고 곧 스스로 쌀 200석(碩)을 내어 군량을 보충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다시 곡식 80석을 내어 군량을 보충하였다. 퇴직을 간청하였으나 이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임명하니 병을 이유로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으며 도통사(都統使)의 인(印)을 올리고 병권(兵權)을 거두어 달라고 간청하였다. 신우가 지신사(知申事) 염정수(廉廷秀)를 보내어 위로하고 격려하여 일을 보게 하였다. 최영이 도당(都堂)에 나아가 여러 재상들이 〈민들의 토지를〉 침탈하고 겸병한 폐단을 힘써 말하였으며, 마침내 금약(禁約)을 만들어 함께 서명하게 하고 여러 재상들을 둘러보며 말하기를, “나중에 다시 전날과 같은 자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내가 이미 늙어서 사리(事理)에 어두우니 행동이 의리에 맞지 않는다면 청컨대 침묵하지 말고 늙은이를 일깨워 주시오.”라고 하였다.
신우가 사냥하면서 놀다가 밤늦게 돌아오니 최영이 이를 듣고 눈물이 가득 고였다. 최영은 일찍이 이성림(李成林)·이자송(李子松)·염흥방 등과 함께 조성도감판사(造成都監判事)가 되어 수창궁(壽昌宮)을 지었다. 궁궐이 완성되어 최영 등이 하례하자 신우가 환관 이광(李匡)을 시켜 말하기를, “큰 궁궐을 5년이나 걸려 완성하였으니 무엇으로 경들에게 보답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최영이 고하기를, “지금 왜구들이 〈나라를〉 잠식하고 전제(田制)가 날로 문란해져 민의 생활이 곤궁하니 언제 나라를 잃을지 알 수 없습니다. 대신(大臣)들과 함께 국정(國政)을 의논하지 않고 소인배들과 친하게 지내며 사냥에 절도가 없으니, 신은 장차 누구를 우러러보고 신하의 직분을 다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광이 입궐하여 고하니 신우가 부끄러워하며 말하기를, “삼가 가르침을 듣겠다.”라고 하였으며 다시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에 임명하였다.
〈신우(辛禑)〉 11년(1385)에 신우가 최영(崔瑩)과 함께 교외(郊外)에서 사냥하고 안장을 얹은 말[鞍馬]을 하사하였다. 또 해주(海州)에서 사냥하니 최영이 따라갔는데 경성(京城)으로부터 바닷가에 이르기까지 숙식할 물자[供頓]를 실어 나르는 것이 100리나 이어졌다. 시인(寺人)과 내수(內竪)가 〈왕의〉 총애를 믿어 횡포를 부리며 안렴사(按廉使)와 수령(守令)을 욕보이니 서해도(西海道)의 향리와 민(民)이 모두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여 흩어져 달아났고, 안렴사 이수(李須)는 말을 잃어버려 진흙탕으로 걸어가기도 하였다. 온 도(道)에서 탄식하고 원망하였으나 신우는 즐거워하여 돌아오는 것도 잊어버렸다. 최영이 면전에서 그 폐단을 극언하자 신우가 옳다고 여겨서 돌아오는데, 배주(白州)에 이르러 연안부(延安府)의 큰 못에서 물고기를 구경하려고 하였다. 최영이 말 앞에 서서 간언하기를, “신의 휘하 군사 수천여 명 중에 말이 죽은 자들이 많은데다가 하물며 숙식할 물자도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갑자기 비좁은 고을에 행차하시면 민의 피해를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신우가 이에 중지하였다. 하루는 신우가 정몽주(鄭夢周)의 집에 가니 정몽주가 마침 기로(耆老)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있었다. 최영이 잔을 받들어 올리자 신우가 말하기를, “내가 술을 마시려고 온 것이 아니라 부왕(父王) 때의 늙은 재상들이 모두 모였다는 말을 듣고 부왕을 보는 것과 같아서 왔도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나무는 먹줄을 따르면 곧게 되고 왕은 간언을 들으면 현명해진다고 하였는데, 경들은 어찌 이로움과 해로움을 말하지 않는가? 술을 마시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최영이 관을 벗고 사례하기를, “전하의 이 말씀은 나라의 복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마음에 두어 잊지 마시고, 또 신(臣)이 지난번에 올린 글에도 있으니 거행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신우가 말하기를, “꿈에 경과 함께 적을 대적하여 싸움을 이겼는데, 내가 탄 말을 보니 당나귀였다. 이는 무슨 징조인가?”라고 하였다. 윤환(尹桓)·이인임(李仁任)·홍영통(洪永通)·조민수(曹敏修)·이성림(李成林)·이색(李穡) 등이 머리를 조아리고 말하기를, “옛날에 원(元) 세조(世祖)가 당나귀 꿈을 길조라고 하여 항상 궁궐의 정원에 〈당나귀를〉 매어놓고 꿈꾸고자 하였으나 꾸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그것을 꿈꾸었으니 어찌 이처럼 길하겠습니까? 태평(太平)의 성업(盛業)을 서서 기다릴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신 등은 늙어서 미처 보지 못할까 두렵습니다.”라고 하였다. 신우가 크게 기뻐하며 취하도록 마시고 최영에게 활을 하사하면서 말하기를, “경과 함께 사방을 평정하고자 한다.”라고 하였다. 그때 최영과 우리 태조의 위엄과 명성이 상국(上國)에까지 알려졌는데, 〈명(明)〉 조정의 사신 장부(張簿)와 주탁(周倬) 등이 국경에 이르자 우리 태조와 이색에 대해 물었다. 신우가 최영을 시켜 교외로 나가 주둔하게 하고 우리 태조를 동북면도원수(東北面都元帥)로 삼아서 장부 등이 그들을 보지 못하게 하였다. 최영은 곧이어 다시 영삼사사(領三司事)가 되었다.
〈신우〉 12년(1386)에 신우가 서해도에서 사냥하니 지봉주사(知鳳州事) 유반(柳蟠)이 숙식할 물자를 빙자하여 민들의 재물을 많이 거두어들였다. 최영이 그가 민을 해롭게 하는 것을 미워하여 장형(杖刑)에 처하였다. 〈신우〉 13년(1387)에 장방평(張方平) 등이 요동(遼東)에 도착하였으나 〈명(明)으로〉 들어갈 수 없어서 돌아왔다. 좌시중(左侍中) 반익순(潘益淳)이 최영에게 말하기를, “공은 선왕(先王)께서 두터이 믿으셨고 삼한(三韓)의 희망이십니다. 지금 나라가 위태로운데 어찌 힘써 이를 도모하지 않습니까?”라고 하였다. 최영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정권을 잡은 자가 이익만 좋아하고 악행을 쌓아서 스스로 패망을 재촉하니 늙은이가 장차 무엇을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때 어떤 사람이 요동으로부터 도망쳐 와서 도당(都堂)에 보고하기를, “〈명〉 황제가 장차 처녀(處女)와 수재(秀才) 및 환자(宦者) 각 1,000명, 우마(牛馬) 각 1,000필을 요구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도당에서 이를 우려하자 최영이 말하기를, “이와 같다면 군사를 일으켜 〈명을〉 치는 것이 옳다.”라고 하였다.
〈신우〉 14년(1388)에 신우가 최영과 함께 몰래 의논하여 임견미(林堅味)와 염흥방(廉興邦)을 처형하고 최영을 다시 시중(侍中)에 임명하였다. 최영이 우리 태조와 함께 정방(政房)에 들어가 임견미와 염흥방이 등용하였던 사람들을 모두 내쫓으려고 하니 우리 태조가 말하기를, “임견미와 염흥방이 정권을 잡은 지가 오래 되었으니 무릇 사대부(士大夫)들은 모두 그들이 천거한 자들입니다. 지금은 다만 재능이 현명한지 아닌지만 물으면 될 뿐인데, 어찌 기왕의 잘못을 꾸짖으려 하십니까?”라고 하였다. 최영이 듣지 않자 태조가 다시 사람을 보내어 최영에게 말하기를, “죄를 지은 괴수는 이미 멸족되었고 흉악한 무리들도 이미 제거되었으니, 지금부터는 마땅히 형벌과 살육을 중지하고 덕과 은혜를 베풀어야 합니다.”라고 하였지만, 최영이 또 듣지 않았다. 양광도안무사(楊廣道安撫使) 최유경(崔有慶)이 임견미와 염흥방의 가노(家奴) 8명을 체포하여 처형하고 사람을 보내어 도당에 보고하였다. 최영은 재판의 판결이 명확하지 않고 또 처형이 끝나지 않아서 크게 노하여 그 사자를 참수하고자 하였으나 태조가 굳이 만류하였다. 신우가 최영의 딸을 비(妃)로 삼으려고 사람을 시켜서 그를 설득하니 최영이 불가하다고 하면서 말하기를, “신의 딸은 비루하고 또한 본처(本妻)의 소생도 아니라서 항상 측실(側室)에 두었으므로 지존의 배필이 될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반드시 딸을 비로 삼으려고 하신다면, 노신(老臣)은 머리를 깎고 산으로 들어가겠습니다.”라고 하며 울면서 굳게 거절하였다. 〈그러나〉 휘하의 정승가(鄭承可)와 안소(安沼) 등이 신우의 뜻에 맞추려고 마침내 그녀를 비로 삼도록 하였다.
이튿날 〈왕이〉 최영(崔瑩)의 집에 가서 말을 하사하니 최영이 안마(鞍馬)와 의대(衣襨)를 바쳤고, 그의 딸을 봉하여 영비(寧妃)로 삼았다. 신우(辛禑)가 일찍이 최영의 정직함을 꺼려 그의 집에 가지 않았는데, 이때부터 영비를 총애하여 여러 번 갔다. 이에 앞서 서북면도안무사(西北面都安撫使) 최원지(崔元沚)가 보고하기를, “요동도사(遼東都司)가 승차(承差) 이사경(李思敬) 등을 보내 압록강(鴨綠江)에 이르러 방(榜)을 붙이기를, ‘호부(戶部)에서 성지(聖旨)를 받들어 철령(鐵嶺)의 이북(以北)·이동(以東)·이서(以西)는 본래 개원로(開原路)에 속해있었으므로 소속된 군인(軍人)으로 한인(漢人)·여진(女眞)·달달(達達)·고려(高麗)는 〈모두〉 그대로 요동에 귀속한다.’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최영이 여러 재상들과 함께 정료위(定遼衛)를 공격하는 일과 화친을 청하는 일을 의논하니, 여러 재상들이 모두 화친을 청하자고 하였다. 조림(趙琳)이 다시 요동까지 갔다가 〈명(明)에〉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오자 최영이 백관(百官)들을 모아놓고 철령 이북을 〈명에〉 헌납하는 일의 가부(可否)를 의논하게 하니 백관들이 모두 말하기를, “불가합니다.”라고 하였다. 신우가 혼자서 최영과 몰래 요동을 공격하는 일을 의논하였는데, 최영이 권한 것이었다. 공산부원군(公山府院君) 이자송(李子松)이 최영의 집에 나아가 불가하다고 힘써 말하였지만, 최영이 임견미의 일당이라고 하여 매를 쳐서 유배시키고 곧이어 그를 죽였다. 최원지가 또 보고하기를, “요동도사가 지휘(指揮) 2명을 보내어 군사 1,000여 명으로 강계(江界)에 와서 장차 철령위(鐵嶺衛)를 세우려 하고 있으며 〈명〉 황제가 이미 관아(官衙)와 역참(驛站)을 설치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신우가 울면서 말하기를, “여러 신하들이 내가 요동을 공격하려는 계획을 듣지 않아서 이러한 지경에 이르게 하였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8도(道)의 군사를 징발하고 최영이 동교(東郊)에서 군사를 열병하였다.
얼마 후에 〈명의〉 후군도독부(後軍都督府)에서 요동백호(遼東百戶) 왕득명(王得明)을 보내와서 철령위(鐵嶺衛)를 세웠다고 알렸다. 최영이 신우에게 보고하여 방문(榜文)을 가지고 양계(兩界)에 온 요동기군(遼東旗軍) 21명을 죽이게 하였으며, 다만 이사경 등 5명은 머무르게 하고 그곳을 감시하게 하였다. 신우가 서쪽으로 사냥을 간다는 핑계를 대고 마침내 영비 및 최영과 함께 서해도로 가서 봉주(鳳州)에 행차하여 최영과 우리 태조(太祖)를 불러 말하기를, “요양(遼陽)을 공격하고자 하니 경들은 마땅히 힘을 다하라.”고 하였다. 태조가 반복해서 불가함을 힘써 아뢰어 신우가 자못 옳다고 여기자 밤에 최영이 다시 들어가 말하기를, “원컨대 다른 말은 받아들이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신우가 평양(平壤)에 머물면서 여러 도의 군사 징발을 독려하였고, 압록강에 부교(浮橋)를 만드는 일은 대호군(大護軍) 배구(裴矩)를 시켜서 감독하게 하였다. 배로 임견미와 염흥방 등의 가재(家財)를 서경(西京)으로 운반하여 군수 물자를 준비하게 하였고 또 온 나라의 승도(僧徒)를 징발하여 군사로 삼았다. 이에 최영에게 8도도통사(八道都統使)를 더하고 조민수(曹敏修)를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 태조를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 삼았다.
여러 장수들과 함께 평양을 출발하면서 최영이 말하기를, “지금 대군(大軍)이 장도에 올랐는데 만약 한 달을 끌게 되면 대사(大事)를 성공할 수 없으니 신이 가서 독려하게 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신우가 말하기를, “경이 가면 누구와 더불어 정사를 다스리겠는가?”라고 하였다. 최영이 굳게 청하자 신우가 말하기를, “경이 가면 과인 역시 가겠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니성(泥城)으로부터 와서 보고하기를, “요동의 병사들은 모두 오랑캐[胡]를 정벌하러 나갔고 성 안에는 단지 지휘(指揮) 한 사람만 있으니, 만약 대군이 이르면 싸우지 않고 함락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최영이 크게 기뻐하며 그 사람에게 후한 상을 내려주었다. 어떤 승려가 도선(道詵)의 참서(讖書)를 언급하며 말하기를, “문수회(文殊會)를 열면 적의 군사가 스스로 굴복할 것입니다.”라고 하니 최영이 그 말을 믿고 이에 혈동(穴洞)에서 문수회를 열었다. 최영이 재삼 요청하기를, “전하께서는 경성으로 돌아가십시오. 노신(老臣)이 여기에 있으면서 여러 장수들을 지휘하겠습니다.”라고 하니 신우가 말하기를, “선왕께서 시해를 당한 것은 경이 남쪽으로 정벌을 떠났기 때문이다. 내가 어찌 감히 하루라도 경과 함께 있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군사가 위화도(威化島)에 머물면서 좌·우군도통사(左·右軍都統使)가 글을 올려 회군을 요청하니 최영이 말하기를, “두 도통사가 있으니 스스로 와서 아뢰는 것이 옳다. 군사를 물리자는 말을 감히 내 입으로 하지 못하겠다.”라고 하였으며, 신우 역시 듣지 않고 진군하기를 독촉하였다. 그때 망한 원(元)의 잔당들이 사막으로 도망가서 이름뿐인 나라를 세웠는데, 최영이 배후(裴厚)를 보내어 함께 돕기로 약속하고 요동(遼東)을 협공하였다. 그 계획한 일이 간략하고 엉성하였으며 행동거지가 황망한 것이 이와 같았다. 좌·우군도통사가 다시 사람을 보내어 최영에게 나아가 속히 회군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하였으나 최영은 그럴 뜻이 없었다.
우리 태조(太祖)가 대의(大義)를 들어 여러 장수들을 설득하여 회군하니 신우(辛禑)는 최영(崔瑩)과 함께 달아나 개경으로 돌아왔다. 여러 군사들이 〈개경〉 근교(近郊)로 진격하여 주둔하고 글을 올려 최영을 제거하도록 요청하였으나 신우가 들어주지 않았으며 조민수 등의 벼슬을 삭탈하고 최영을 좌시중(左侍中)으로 삼았다. 여러 군사들이 마침내 성(城)으로 들어가니 최영이 막아 싸우면서 안소(安沼) 등을 시켜 정예 병사를 거느리고 그들을 방어하게 하였으나 모습만 보고도 곧 무너졌다. 최영은 형세가 궁지에 몰리자 화원(花園)으로 달아나면서 분노를 이기지 못하여 창으로 문을 지키는 자를 찌르고 이내 들어갔다. 여러 군사들이 화원을 수백 겹으로 포위하고 크게 소리쳐 신우에게 최영을 내놓을 것을 요청하였으나, 최영이 팔각전(八角殿)에 있으면서 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여러 군사들이 일시에 담을 무너뜨리고 정원으로 난입하였는데, 곽충보(郭忠輔) 등 서너 명이 곧바로 팔각전 안으로 들어가 최영을 찾았다. 신우가 최영의 손을 잡고 울면서 이별하니 최영이 두 번 절하고 곽충보를 따라 나왔다. 태조가 최영에게 말하기를, “이와 같은 사변은 나의 본심이 아닙니다. 그러나 요동을 공격하는 거사는 오직 대의(大義)만 거스른 것이 아니라 나라를 위태롭게 하고 민(民)을 괴롭혀 원망이 하늘에 이르렀으므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잘 가십시오. 잘 가십시오”라고 하면서 서로 마주보며 울었다. 마침내 〈최영은〉 고봉(高峯)으로 유배 되었다.
처음에 최영이 정벌을 나가는 여러 장수들의 처자(妻子)를 가두려고 하였으나 일이 급박하여 끝내 실행하지 못하였다. 찬성사(贊成事) 송광미(宋光美), 밀직부사(密直副使) 조규(趙珪)·안소(安沼)·정승가(鄭承可) 등은 도망하여 숨었는데, 안소와 정승가는 체포되어 순군(巡軍)에 갇혔다. 여러 장수들이 모여 의논하여 최영을 합포(合浦)로 옮겨서 유배하고 아울러 송광미는 원주(原州), 안소는 안변(安邊), 정승가는 영해(寧海), 판밀직(判密直) 인원보(印原寶)는 함창(咸昌), 동지밀직(同知密直) 안주(安柱)는 봉주(鳳州), 지밀직(知密直) 정희계(鄭熙啓)는 음죽(陰竹)으로 유배하였는데, 모두 최영이 가까이하고 믿었던 사람들이었다.
신창(辛昌)이 즉위하자 다시 최영을 잡아 순군에 가두고 왕안덕(王安德)·정지(鄭地)·유만수(柳曼殊)·정몽주(鄭夢周)·성석린(成石璘)·조준(趙浚)을 시켜 최영 및 내원당(內願堂) 승려 현인(玄麟) 등을 국문하였는데, 현인은 처음에 최영과 함께 모의하여 승병(僧兵)을 징발하였고 회군하였을 때에 또 최영과 함께 저항했던 사람이었다. 마침내 최영을 충주(忠州)로 유배 보내고 조규는 매를 쳐서 각산(角山)으로 유배 보냈으며, 밀직사(密直使) 조림(趙琳)은 풍주(豐州)로 유배 보내고 정승가·안소·송광미·인원보는 유배지에서 처형하였다. 나중에 다시 최영을 잡아 순군에 가두고 전법판서(典法判書) 조인옥(趙仁沃)과 이제(李濟) 등이 상소하기를, “최영이 우리 현릉(玄陵)을 섬겨 흥왕사(興王寺)의 난을 평정하고 승왕(僧王)을 북쪽 변방에서 몰아냈습니다. 이어서 상왕(上王)을 섬기며 왜구(倭寇)를 승천부(昇天府)에서 물리쳐 사직(社稷)을 보존하였고, 올 봄에는 여러 흉악한 무리들을 소탕하여 백성들을 구제하였으니 공로가 큽니다. 그러나 중요한 이치[大體]를 모르면서 여러 의논들을 돌아보지 않고 요동 공격을 결정하여 〈명(明)〉 천자에게 죄를 얻어서 거의 나라를 뒤엎을 지경에 이르게 하였으니 이른바 공로가 죄를 가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큰 나라를 섬기고 하늘을 두려워하는 뜻을 생각하여 그의 죄를 분명히 바로잡음으로써 조종(祖宗)의 신령께 고하고 〈명〉 천자의 노여움을 풀어 삼한(三韓)의 영원한 태평을 열게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문하부낭사(門下府郞舍) 허응(許應) 등이 상소하기를, “최영은 개국공신(開國功臣)의 후예로 현릉의 신임을 받아 그 충의(忠義)를 떨쳤습니다. 계묘년(癸卯年, 1363)에 덕흥군(德興君)이 장차 얼자(孽子)로서 적통[宗]을 대신하려고 하니 최영이 만 번 죽음을 무릅쓰고 나라의 정통을 바르게 하였습니다. 상왕 때에는 왜적[海寇]들이 갑자기 기전(畿甸)을 침범하자 최영이 여러 군사를 독려하여 힘써 싸워 물리치고 사직(社稷)을 안정시켰습니다. 임견미(林堅味) 등이 조정을 혼탁하게 만들고 왕실을 깎아내리니 위로는 하늘이 노하고 아래로는 민들이 원망하였습니다. 최영이 충의를 떨쳐 그들을 숙청하였으니 진실로 사직의 공신입니다. 그러나 배운 것도 없고 재주도 없으며 더욱이 늙어서 큰 나라를 섬기는 예(禮)에 어두웠으니, 주상에게 권하여 서쪽으로 행차하게 하고 위엄을 세워 군중을 협박하여 독단으로 일을 결정하였습니다. 마침내 요동을 공격할 군사를 징발하여 천자에게 죄를 짓고 민에게 해독을 끼쳤으며 사직을 거의 전복시켰으니 앞서 세운 공을 모두 버렸습니다. 최영이 공로가 있으면서도 불행하게도 이러한 반역의 죄를 지었으니 진실로 온 나라 사람들이 아까워하겠지만, 그러나 천하의 공론으로 말하자면 이른바 사람들이 처형할 수 있는 자[人得而誅之者]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대의로써 결단하여 속히 명령하여 죄를 처결하시고 천자에게 사죄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신창이 이에 따르니 마침내 최영을 처형하였는데 나이가 73세였다. 처형할 때에 말과 얼굴빛이 변하지 않았다. 죽는 날에 개경 사람들이 저자를 파하였으며 먼 곳이든 가까운 곳이든지 사람들이 이를 듣고 길거리의 아이들과 시골의 여인네들까지 모두 눈물을 흘렸다. 시체가 길가에 버려지자 길가는 사람들이 말에서 내렸고 도당(都堂)에서는 쌀·콩·베·종이를 부의(賻儀)하였다.
최영은 강직한데다가 충성스럽고 청렴하였으며 전장에서 적과 대치하면 정신과 기백이 평안하여 화살과 돌이 사방에서 날아와도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군사를 맡아서는 준엄하였고 반드시 승리할 것을 약속하였으며 군사들이 한 걸음이라도 물러나면 곧 처형하였으므로 크고 작은 모든 전투에서 공로를 세웠고 일찍이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 일찍이 최영이 16세 때에 부친이 임종하면서 훈계하기를, “너는 마땅히 황금 보기를 돌과 같이 하라.”고 하였다. 최영이 마음에 새겨서 재산을 늘리지 않았고 거처하는 집이 매우 누추해도 기쁜 마음으로 살았다. 의복과 음식이 검소하여 자주 쌀독이 텅 비었지만 살찐 말을 타고 화려한 옷을 입은 자를 보면 개나 돼지만도 여기지 않았다. 몸은 비록 장수와 재상을 겸하고 오랫동안 병권(兵權)을 맡았으나 뇌물과 청탁을 받지 않으니 세상 사람들이 그의 청렴함에 탄복하였다. 중요한 일에만 힘을 쓰고 사소한 일에는 구애받지 않았으며, 종신토록 군사를 거느렸으나 휘하 사졸들 가운데 〈그의〉 얼굴을 아는 자가 수십 명에 불과하였다. 전쟁터에 있는 동안 때때로 글을 짓고 읊는 것을 즐겼는데, 어느 날 저녁에 여러 재상들과 함께 술을 마시면서 시구(詩句)를 주고받았다. 경복흥(慶復興)이 읊기를, “하늘은 옛 하늘이되 사람은 옛 사람이 아니고”라고 하니 최영이 대구(對句)하기를, “달은 밝은데 재상은 밝지 못하구나.”라고 하였다. 다른 사람의 불의(不義)를 보면 반드시 깊이 미워하고 몹시 배척하였다. 이인임(李仁任)과 임견미(林堅味)가 정방제조(政房提調)가 되어 권세를 잡고 제멋대로 하니 변안렬(邊安烈) 등도 합심하여 권세를 부렸다. 어떤 사람이 벼슬을 구하자 최영이 말하기를, “네가 공장(工匠)이나 상업(商業)을 배우면 저절로 벼슬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대개 정권을 잡은 자들이 뇌물을 자행하는 무리들이라고 비꼰 것이었다. 정방(政房)에 들어가서는 반드시 공로와 재능이 있는 자를 가려서 뽑았고 만약 천거할 수 없는 자라면 번번이 물리치고 함께 하지 않았다. 여러 재상들 가운데 혹 재산을 늘리려고 전민(田民)을 다투거나 사사로운 감정에 끌려 기강(紀綱)을 무너뜨리는 자가 있으면 최영이 모두 바로잡고자 하였다. 일찍이 이인임에게 말하기를, “나라에 어려움이 많은데 공께서는 수상(首相)이 되어 어찌 걱정하지 않고 단지 집안의 재산만 생각합니까?”라고 하니 이인임이 잠자코 있었다. 도당(都堂)에 나갈 때마다 바른 기색으로 직언하였고 조금도 숨김이 없었으나 좌우에서 호응하는 자가 없으니 혼자 탄식할 뿐이었다. 일찍이 어떤 사람에게 말하기를, “내가 나라 일을 밤중에 생각하였다가 〈이튿날〉 아침에 동료들에게 말하지만, 여러 재상들 중에 내 마음과 같은 자가 없으니 치사(致仕)하고 한가롭게 지내는 것이 낫겠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성품이 조금 고지식하고 또 학문이 없어서 일을 모두 자기 뜻에 따라 결정하였다. 사람들을 죽여서 위엄을 세우는 것을 좋아해 죄가 사형에 이르지 않아도 역시 대부분 죽음을 면하지 못하였다.
간대부(諫大夫) 윤소종(尹紹宗)이 최영을 논하기를, “공로는 한 나라를 뒤덮지만 죄는 천하에 가득 찼다.”라고 하였는데, 세상 사람들이 명언이라고 하였다. 시호를 무민(武愍)이라 하였고, 아들은 최담(崔潭)으로 〈벼슬이〉 대호군(大護軍)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