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드 명사 특강] 이태진 교수 -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와 동양평화론 등록일 : 2014-02-13
2월 14일이 발렌타인데이라고 하는데, 우리 민족에게는 어마 어마한 역사적인 날입니다.
우리가 흔히 발렌타인데이로 알고 있는 2월14일은 안중근 의사가 사형선고를 받은 날입니다. 주로 독립운동가로서만 연구됐던 안중근 의사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은 배경과 동양평화 정신을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2014년 2월 골드명사특강은 ‘국사학계의 거목’으로 불려오는 이태진 교수님께서 강의해 주셨습니다.
이태진 교수님은 1977년 서울대학교 인문대 국사학과로 강단에 선 뒤 32년간 연구하고 후학들을 가르치면서 역사학회 회장, 한국학술단체연합회 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다양한 저서와 논문을 통해 우리 역사를 바로 알리는 일에도 앞장서고 계십니다.
<하얼빈 '의거'를 넘어 '대첩'의 의미>
1. 하얼빈 의거 상황
2. 의거 현장과 안중근 기념관
3. 안중근, 의사인가 장군인가
<대한제국과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1. 일본 정부의 배후조사
2. 안중근이 고종황제에게 남긴 유서
3. 안중근의 동양평화론과 칸트철학
하얼빈 '의거'를 넘어 '대첩'의 의미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최근 아베 총리가 안중근 기념관 설립에 대해 ‘테러리스트’라 칭하며 비난 발언을 한 일이 있는데, 하얼빈 의거는 개인이 단독으로 벌인 사건이 아니다. 안중근 의사가 스스로를 ‘대한의군 참모총장’이라 칭한 것도 향후 테러리스트로 보여질 가능성을 염두했던 것이다.
또한 안중근을 단순히 포수, 명사수로 기록한 사례가 많은데, 사실 안중근은 사서삼경과 같은 인문학 고전은 물론 그 시대에 불어를 공부하는 등 매우 앞서가는 고급 지식인이었다. 하얼빈 의거는 시대의 지식인이 대한제국의 뜻을 실행한 결과였던 것이다. ‘의사’, ‘의거’라는 단어가 틀린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인 행위의 느낌을 강하게 주고 있다. 따라서 나는 ‘의거’보다는 ‘대첩’으로 봐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1. 하얼빈 의거 상황
이토히로부미는 1909년10월26일 오전9시~9시30분경 특별열차를 타고 하얼빈 역에 도착했다. 열차 마지막 칸에서 러시아 재정대신 코코브세프와 미팅을 하고 나오다가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됐는데, 당시 이토히로부미는 이례적으로 무방비 상태였다. 하얼빈까지 일본헌병대가 경호하고자 했던 것을 하얼빈은 러시아 소관이고 러시아 대사와 만나는 중요한 자리라는 이유로 거절했고, 일본 국민들의 현장 환영인사도 허락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안중근은 민간인 환영인파와 더불어 이토히로부미 가까운 곳에 다가갈 수 있었다.
당시 저격부터 체포까지 전 과정은 현장에 있던 러시아 기자에 의해 영상 촬영이 되었고 일본에 수사기록도 자세하게 남아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 전체 영상은 찾지 못하고 일본 측이 편집한 체포 후 이송되는 부분만 확인할 수 있다. 편집 영상은 이토히로부미 추도식에서 ‘흉한’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사용되었는데, 최고의 정치가가 쓰러지는 영상은 차마 공개할 수 없었던 것 같다.
2. 의거 현장과 안중근 기념관
조선족들의 노력으로 하얼빈 역에는 안중근 의사의 저격 위치가 표시되었다. 안중근 의사가 있던 자리에는 세모 표시, 이토히로부미가 있던 자리에는 네모 표시가 되었는데, 아무런 글자 안내가 없어 아쉬운 상황이었다. 2009년 의거 100주년을 맞이하여 해당 영역 내 설명글을 추가하고자 시도했으나, 당시 중국은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그러다 2013년 6월 대통령의 중국 방문 전에 안중근 의거 저격표시를 해달라는 의견을 전달했는데, 기대했던 것보다 더욱 큰 결과로 안중근 기념관이 설립된 것이다.
3. 안중근, 의사인가 장군인가
안중근의 권총에는 7발이 장전되어 있었는데, 처음 쏜 3발이 이토히로부미 복부에 명중했다. 그가 이토히로부미가 아닐 수도 있는 상황을 고려해 옆에 있던 일본인들에게 3발을 쏘고 그대로 권총을 내려놓은 채 ‘꼬레아 우라(코리아 만세)’를 외쳤다.
현장에서 러시아 헌병에게 체포되고 3일 뒤 일본으로 넘겨졌는데, 수인복을 입은 사진에 약지가 잘린 손이 보인다. 독립운동을 함께 했던 12명의 동지가 단지동맹을 통해 나라를 되찾는데 목숨을 바치겠다는 약속의 의미이다.
안중근은 공판정에서 “대한의군 참모충장으로 적장을 저격했으니, 나에게 적용할 법은 만국공법인 포로에 관한 법이다”라고 말했다. 일본 정부는 배후조사를 해놓고도 개인적인 행동으로 결론지었지만, 대한제국 황실의 독립운동 지원 노력과 안중근의 활동은 여러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안중근은 ‘의사’보다는 ‘장군’으로 부르는 것이 맞을 것이다.
3월26일은 안중근 장군의 순국일이다. 천안함 사건 이후 해당 시기 안중근에 대한 관심도가 떨어졌는데, 역사적으로 얼마나 중대한 사건이었는지 잊지 않았으면 한다.
대한제국과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대한제국의 군대가 형편없었고, 근대화의 노력을 전혀 하지 않은 채 몰락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대한제국은 동경보다 3년 앞서 전차가 개통되었고, 프랑스/벨기에의 자본과 기술을 통해 러일전쟁 전 서북철도 건설도 시작했다.
1907년 고종이 강제로 퇴위되고 이토히로부미에 의해 군대가 해산되면서 고종은 30만엔(쌀10만석)을 군자금으로 보냈고, 1908년 대한의군이 창설되며 안중근이 우장군으로 임명된다. 하얼빈 의거가 단순한 개인의 소행이 아니었다는 배경은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고, 안중근의 단지와 혈서는 이후 독립운동사에 크나큰 정신으로 전해졌다.
1. 일본 정부의 배후조사
안중근이 체포된 후 일본 정부는 수사와 함께 배후 조사를 철저히 진행했다. 정탐과 재판은 분리되어 수사 초기부터 안중근에 대한 극형은 결정되어 있었지만, 일본 정부는 당시의 배후 조사를 통해 새로운 사실을 많이 알게 되었고, 그것은 후에 한일독립운동 탄압의 기본 장비가 되었다.
하얼빈 의거 의미를 축소하기 위해 ‘배후관계가 없고 잘못된 애국심으로 저지른 살인행위’로 결론지었으나, 고종황제에 대해 ‘排日本元’으로 기록한 사례 등을 볼 때 대한제국 황실의 독립운동에 대한 지원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2. 안중근이 고종황제에게 남긴 유서
안중근은 옥중에서 40일 동안 붓글씨로 자신의 뜻을 남겼다. 그 중 받는 사람이 표기된 글에는 ‘安重根 謹拜’라는 유묵을 남기고, 받는 사람이 없는 글에는 ‘安重根 書’라는 유묵을 남겼는데, 유독 받는 사람이 없으면서 ‘安重根 謹拜’라고 표기된 3편의 글이 있다. 그 중 한 편의 글을 통해 이것이 고종황제에게 전하는 메시지임을 알 수 있다.
思君千里 望眠欲穿 천리 밖 임금 걱정하니 바라보는 눈 허공 뚫으려 하네 以表寸誠 幸勿負情 작은 충성 표하였으니 저의 충정 잊지 마소서
3. 안중근의 동양평화론과 칸트철학
사형 선고 후 안중근과 법원장의 면담에 대한 기록이 있다. “나는 상고를 하지 않는다. 상고는 보호조약체제를 인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동양평화론을 제시했는데, 안중근이 말한 진정한 동양평화 구상안은 다음과 같다.
- 여순/대련 반환과 평화회의기구 설치 - 공동 군단 창설, 참가 청년의 타국어 공부 - 한중일 3국 공용화폐 발행 - 수억명의 동양인이 1엔씩 모금해 자금 마련 - 성공할 경우 태국, 인도 등으로 확대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칸트철학의 영구평화론과 매우 닮아 있다. 칸트철학의 기본은 인간 존엄성의 보장이고, 인간 존엄성을 보호하는 것은 국가의 역할이다. 국가의 사명을 침해하는 다른 나라가 있어서는 안되며, 다른 나라의 주권을 침해하는 일은 있어서는 안된다. 칸트의 영구평화론은 1920년 국제연맹의 탄생을 가져왔는데, 그보다 훨씬 앞서 안중근은 동양평화론을 제시했던 것이다. 그리고 동양평화론은 1919년 기미독립선언서에서도 언급된 바 있다.
하얼빈 의거와 안중근의 정신은 이후 독립운동사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광복군이 탄생하고 해방되기까지 사실상 하얼빈 의거가 이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시대를 앞서 갔던 지식인 안중근에 대해 바르게 인지하고, 하얼빈 의거의 역사적 의미가 제대로 인정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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