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난… 나에게 넌… 사랑이다
지각티스 강가에 앉아 나는 필리피 교우들을 생각한다. 유럽에서 처음 세례를 받은 리디아 부인과 바오로 사도의 든든한 지원자들을 말이다. 사부와 필리피 교회 사이의 상호 신뢰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쉽게 허용하지 않던 ‘경제적 도움’을 이곳 필리피로부터는 당당히 받아들인다. 서로에 대한 믿음과 애정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필리피 교회에 대한 사부의 사랑은 글로써도 자주 나타난다. 기뻐하라고, 그것도 자신과 함께 기뻐하라고 말이다. 사도 바오로의 끊임없는 신뢰에 이곳 공동체 또한 헌신적 봉사로 보답한다.
이 중에서도 나는 가장 헌신적으로 봉사했던 ‘리디아 부인’의 존재를 곰곰이 생각한다. 누구보다도 솔선수범했던, 티아티라 출신의 자색 옷감 장수 리디아 부인. 엉뚱하게도 사도 바오로와 리디아 부인의 첫 만남이 궁금해졌다.
수사인 나는 그동안 별다른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항상 어딘가가 비어있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아마도 7살 때 돌아가신 엄마의 부재가 내게는 큰 빈자리였나 보다.
어느 깜깜한 밤, 동네 사람들이 부잣집 흑백 텔레비전 앞에 모여 앉아 있었다. 물론 나도 그 자리에 혼자 끼어 앉았다. 어린 나이라 자세히는 알지 못했지만 안타까운 일이 있었는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발을 동동 구르는 아줌마들, 엉엉 우는 아이들, 걱정스레 담배를 피며 TV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아저씨들. 1971년, 내게는 가장 춥게 느껴졌던 크리스마스 날의 ‘서울 대연각 대화재’였다. 한 동네사람이 ‘우리 어머니가 거기서 일하다 빠져나오지 못하고 갇혀있다’고 일러 주었다.
어머니는 그렇게 빨리 하늘나라로 가셨지만 지금까지도 내 곁을 지켜주고 가장 든든한 지원자가 되어주신다. 나의 든든한 지원자인 ‘리디아’는 바로 어머니인 것이다. 우리 삼형제를 위해 진정한 희생이 무엇인지, 사람이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몸으로 보여주신 분. 위대한 사랑의 의미를 삶으로 직접 보여준 나의 사랑, 나의 지원자.
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는 자신만의 ‘리디아’가 있을 수 있고, 반대로 내가 상대방의 ‘리디아’가 될 수도 있다. 서로 사랑하고 신뢰하며 서로를 위해 희생할 수 있는 관계라면 우리는 ‘리디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성 바오로회의 협력자들도, 더 나아가서는 한국교회의 자랑스러운 평신도들도 내게는 든든한 ‘리디아 부인’이다.
그렇다면 수사인 나는 누구의 리디아가 될 수 있을까. 누구의 필리피 교우가 될 수 있을까. 내 주위의 아픔을 가지고 있는 형제들을, 나의 도움이 필요한 형제들을 위해 나도 좋은 리디아가 되어보련다.
바오로 사도가 필리피 교우들에게 보내는 서간 중 한 구절이 떠오른다.
“내가 여러분 모두를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나로서는 당연합니다. 여러분이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필리 1, 7)
누군가의 ‘리디아’를 꿈꾸며 김동주 도마 수사(성 바오로수도회)
오혜민 기자의 동행 tip / 필리피의 ‘리디아 경당’ ◎유럽 첫 그리스도인을 기념
필리피에는 유럽의 첫 신자, 리디아 부인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그리스 정교회 ‘리디아 경당’이 있다. 필리피 폐허 북쪽 2km 지점의 지각티스 강변에 세워진 이 교회는 1972년에 세워진 건축물로서 자연석으로 만들어졌다. 이 경당은 신자들의 봉헌금을 모아 건립 중이지만 아직 미완성이라고 한다.
바오로 시대를 전후해 자색 옷감은 무척 비쌌기 때문에 리디아 부인은 고향인 티아티라에서 고급 자색 옷감을 수입해 필리피 일대에 팔았다.
성경은 리디아를 ‘하느님을 공경하는 부인’이라고 전한다. 핏줄로는 이방인이지만 유다교에 동조했었고 유다인의 집회에 참석했다. 바오로의 설교를 듣고 유럽 땅에서 첫 그리스도인이 됐고, 필리피 교우들이 바오로를 돕는데 앞장섰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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