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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혜와 축복을 오래 기억하면서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기 위한 12가지 영적훈련 오늘은 여덟 번째 용서선언에 대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주일예배 때 마다 목사는 섬기는 교회에서 설교하는데 설교 중에 “용서” 에 대한 설교가 많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를 아직도 용서하지 못하고 그 상처를 품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인터넷에서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하기 어려운 것 두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죄를 짓지 않는 것과 내게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이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얼마나 어렸습니까?.... 그러나 인간은 흙으로 빚어 졌기에 연약하여 쉽게 부서지는 존재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학자 R.C 스프라울은 죄에 대해 말하기를...... ‘우리는 죄를 짓기 때문에 죄인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 그런데 죄를 안 짓는 것만큼 어려운 것이 상처에 대한 용서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유리판과 같아서 어느 한 부분만 충격을 받으면 전체가 금이 가거나 깨지기가 쉽습니다. 우리는 누구로 부터 상처 받으면 아무리 용서한다하여도 상처의 흔적이 이곳 저곳 오래 남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래전 이창동 감독 영화 “밀양”을 많은 기독교인들이 봤습니다. (2007년 개봉)이 영화는 우리사회를 날카롭게 꼬집고 우리 인간의 모습을 재조명해 줍니다. 줄거리를 정리하면 자신의 아이를 납치해 살해한 유괴범을 아이의 엄마는 용서 할 수 없었습니다. 고통속에 살아가는데 전도를 받고 교회에 나가 예수님의 사랑 정신으로 유괴범을 용서하리라 다짐하고 면회를 갔습니다.
그런데 면회장에 나온 가해자는 너무도 평온한 얼굴로 자기 역시 감옥 안에서 예수를 믿게 되었고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죄를 용서 받았다고 말합니다. 아이의 엄마는 절망하고 절규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값싼 용서를 베푼 하나님께 저항하는 한 여인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시인 ‘폴 마이어’ 이런 글이 있습니다. 바람을 멈출 수 있는가? 없다. 하지만 풍차를 만들 수는 있다. 파도를 멈출 수 있는가? 없다. 하지만 배의 돛을 조종할 수는 있다. 상처를 받지 않을 수 있는가? 없다. 하지만 용서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고 했습니다.
기독교는 무엇보다 용서의 종교입니다....... 하나님 사랑이 용서로부터 시작됐다면 예수님이 인류를 위해 지신 십자가로 용서가 완성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용서로 시작해서 용서로 완성되고 끝나는 종교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용서에 대한 말씀 입니다...... 21절 시작을 보세요 “그때에 베드로가 이르되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여기 접속사 그때에 “그때” 란 베드로가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난 후 매우 궁금하게 여겨 질문한 시작 그때를 말합니다. 베드로의 질문은 예수님께서 15절-20절 말씀을 하신 후 베드로가 용서에 대해 궁금하여 질문한 것입니다. 15-20절 함께 읽습니다.
풀어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실제로 교회 안에 이런 일들이 일어났고 지금도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우리 예수님 교회 안에 죄를 범하는 형제를 어떻게 용서하고 치유 할 것인가 4단계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첫째.......죄를 지은 형제에게 찾아가 한사람이 조용히 찾아가 권고하라고 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권고를 받지 않으면 한 두 사람 증인을 데리고 가서 설득하라고 하십니다. 그래도 회개하지 않으면 세 번째..... 교회 전체가 나서서 권하고 끝까지 뉘우치지 않으면 마지막 네 번째로 이방인과 세리 같이 여기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당시 이방인과 세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는 자로 간주해 유대사회에서 격리시켰습니다. 이처럼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 형제를 교회에서 출교시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어떻게 보면 죄지은 형제를 순서를 밟아서 냉정하고도 합법적으로 처리하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18절 이하에 말씀을 묵상하면 “아멘”으로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죄지은 형제가 세 번이나 권고해도 듣지 않아 이방인과 세리로 취급될 수 있지만 그 전에 교회 성도들의 합심 기도를 통해 죄를 범한 한 형제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은 어찌 죄인을 하나님이 버리시겠느냐 입니다. 하나님이 버리시지 않기에 나도 너희 중에 함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합심기도 속에는 한 형제를 끝까지 용서 할 것에 대한 우리 하나님의 깊고 오묘한 용서의 깊이를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베드로를 보십시오.... 말씀을 잘 듣고 있다가 예수님 합심기도에 대한 말씀을 하실 때 졸았을까요? 아니면 딴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사실 그런 말씀은 없지만 그러나 성질 급한 대로 베드로는 황급히 질문합니다.
21절.......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베드로의 질문 속에는 다분히 유대인들이 잘 알고 있는 구약 율법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레위기19:5-7...... 너희는 화목제물을 여호와께 드릴 때에 기쁘게 받으시도록 드리고 그 제물은 드리는 날과 이튿날에 먹고 셋째 날까지 남았거든 불사르라 셋째 날에 조금이라도 먹으면 가증한 것이 되어 기쁘게 받으심이 되지 못하고
민수기31:19....... 너희는 이레 동안 진영 밖에 주둔하라 누구든지 살인자나 죽임을 당한 사체를 만진 자는 셋째 날과 일곱째 날에 몸을 깨끗하게 하고 너희의 포로도 깨끗하게 할 것이며
암1:3.....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다메섹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철 타작기로 타작하듯 길르앗을 압박하였음이라
읽은 말씀처럼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숫자 3과 7에 큰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생활 규범을 담고 있는 탈무드에도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하여 세 번까지 용서하라는 규정이 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율법을 매우 관대한 하나님의 자비한 법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질문은 이러한 전통에 영향을 받아 세 번만 용서하면 너그럽게 관용을 베푼 것으로 이해하여 용서 해 줄 만큼 해 주었다고 생각 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죄지은 형제에 대해 해결 방법을 4가지를 제시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질문하기를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까?”
하지만 베드로는 주님의 뜻을 깨달고 질문한 것은 좋은데 한 번 더 완전 수인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되겠지라는 자기 생각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동안 살아오면서 누구에게든 용서할 때 베드로처럼 세 번이 아닌 일곱번까지 한계치를 정해놓고 용서하겠다고 한 적 있으십니까? 저도 그랬지만 “웟 어른들이 그렇게했지요 저도 어렸을 때 잘못하여 어머님이 한번 만 더 하면 용서 안한다 어머님 꾸중을 듣고 매를 맺았던 적이 생각이 납니다. 저도 인생을 여기까지 살아오면서 도저히 용서 할 수 없는 일들이 있고 나 자신도 용서 받을 수 없을 것이다, 라고 생각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밀양 영화 한 여인의 마음처럼 정말 내가 누구를 용서하고 용서받았는가? 이 깊은 고민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용서에 대해 고민한 베드로의 질문에 예수님의 답변은 전혀 예기치 못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할지니라" 이를 곱셈으로 환산하면 490번이 됩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계산하며 용서를 실행하느라 시간을 허비하는 경우가 있지만 곱셈을 통하여 답을 구하는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490번이 아니라 4,900번 아니 그 이상이 된다할지라도’ 이 말씀의 뜻은 얼마든지, 끝까지, 거듭거듭,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를 다른 어떤 피조물보다도 보배롭고 존귀한 자로 여기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첫 인간 아담이 하나님의 법을 어긴 이후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지금까지 죄 지은 인간들을 보세요 창세기에 인간이 지은 죄 값을 공식으로 계산합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자를 일곱 배...라멕을 위해서는 죄에 대해 칠십칠 배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죄가 그만큼 눈 덩이처럼 불어난 것입니다.(창4:15절, 24절)
그러면 죄가 늘어나는 것을 볼 때마다 제일 마음아파 하신 분이 누구실까요? 하나님이십니다. 왜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피조물이 왜! 저러는가? 하나님께서 눈덩어처럼 불어난 죄 지은 인간을 보시고 너무 괴로워하셨습니다.
육신의 자녀가 무엇을 잘못할 때 마음이 아프다가 다시 자녀를 보라보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잖아요
우리 하나님께서도 그렇습니다...... 인간의 행동을 보시고 괴로워하시고 마음 아파하시다가 당신의 형상을 닮을 인간을 불쌍히 여겨 용서의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그래서 첫 인간 아담이 죄를 지었기에 하나님이 저주했지만 용서의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어요(창3:21)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생각해야 할 것은 내 편에서 무엇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용서는 오직 하나님 편에서 만 이루어집니다. 저는 너무나 큰 죄를 졌으니까 저를 용서하지 마십시오 거절해도 그러나 하나님은 상관하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예수님 비유의 말씀으로 진정한 용서가 무엇인가를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비유를 기억하십니까?
어떤 종이 1만 달란트 빚을 졌습니다. 1만 달란트는 6천만 데나리온이라고 합니다. 당시 노동자 하루 품삯을 1데나리온이니까 적어도 20만년 동안 일을 해서 벌 수 있는 돈이 1만 달란트입니다. 천문학적인 돈이지요 그런데 이런 엄청난 돈을 종이 갚아야 할 빚입니다.
한마디로 종이 사는 동안 갚을 수 없는 돈입니다. 그런데 주인이 결산 할 때가 됐어요 그래서 빚을 진 종을 불러 결산하자 “돈을 내놔라” 했습니다. 종은 “돈이 없다고 하니까 “너, 아들, 딸, 부인 다 팔아가지고 돈을 갚으라고 하는 겁니다. 당시 종은 빚을 갚지 못하면 노예로 팔려가게 되고 감옥에도 가게 되어 있어요 어떻게 할 수 없는 종은 무조건 주인에게 엎드려 절하며 조금 참아주십시오 다 갚겠습니다” 주인이 보았을 때 너무 안타깝고 불쌍히 여겨 주인이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1만 달란트 탕감 받은 종을 보세요 빚을 탕감 받더니 휘 바람 불며 주인 집에서 나와 거리를 지나가는데 자기에게 100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나게 된것입니다.
29절을 보면..... 1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동료라고 한 것을 보면 친구지요 어찌 보면 그냥이라도 줄 수 있는 돈이예요 그런데 100데나리온 안 갚는다고 “ 너 잘 만났다. 친구 목덜미를 붙잡고 내 돈 갚으라고 날리 법석입니다. 빚을 진 친구는 일만달란트 빚진자처럼 똑같이 엎드려 절하며 조금 참아주십시오 다 갚겠습니다” 엎드려 말합니다. 그러나 100데나리온 빚진 자를 옥에 가두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배은망덕한 일을 누가 알고 있었습니까?...... 함께 지내던 친구들이 보고 너무 딱하여 주인에게 고발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은 화가 났어요 “ 일만 달란트 빚을 갚아주었더니 은혜도 몰라 저 놈! 원금까지 다 가져오게 하고, 감옥에 집어넣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일만 달라트 탕감 비유를 이야기한 결론을 맺으시기를 35절..... "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같이 하시리라 용서치 않으시리라."
성도여러분!! 우리가 받은 무한한 은혜 중에 무엇보다도 용서 받은 은혜를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용서받은 만큼 나도 남을 용서하되 마음 깊은 곳에서 시작된 진실된 용서를 주님이 가르쳐주셨습니다.
베드로와 가롯유다 의 차이점을 아십니까?...... 두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자신에 대한 용서입니다. 베드로는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한 후에 통곡하고 회개하고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용서했습니다. 그리고 그 용서를 바탕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새 삶을 살았습니다. 가혹한 박해 속에서도 끝까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다 십자가에 달릴 때 자신을 스승과 똑같이 십자가에 달릴 자격이 없다며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 순교했습니다.
하지만 가롯유다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유다는 스승을 판 돈을 자신이 갖지는 않았습니다. 은전 30량을 제사장들에게 집어 던지고 나왔습니다. 그러나 끝내 자신을 용서하지는 않았습니다. 베드로와 똑같이 유다도 잘못을 뉘우치고 통곡했지만 끝내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렇게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유다와 베드로의 차이점은 오늘 우리에게 '나 자신을 용서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깊이 가르쳐줍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합니다. 마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주기도문 중에 용서의 기도 부분을 어떤 성도는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아직도 어떤 사람을 용서할 수 없기에 용서의 기도가 마음에 걸려서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주기도문을 드릴 수 없는 사람이라면 그 분은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음을 알아야합니다.
마음을 다한 용서, 완전한 용서, 그것은 상대방의 잘못에 있는 것이 먼저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우선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마음을 다한 용서 우리 예수님 실천 하셨던 그 현장 십자가상에서 일곱 마디의 말씀 중에 제일 먼저 하신 기도가 “용서” 였습니다.
눅23: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일회적 사건 물과 피를 다 쏟으실 때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십자가 밑에 있는 무리 뿐 아니라 우리 죄를 다 사하여 주셨기에 용서를 완성하셨기에 “다 이루었다” 말씀 하신 것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이루실 수 있는 완전한 용서를 실천하신 예수님을 본받고 예수님의 용서를 따라가는 성도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제 소책자에 나와 있는 용서선언 12가지 말씀을 낭독함으로 받은 은혜와 축복을 오래 기억하며 용서를 선언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