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편지는 모두 잘라 끈으로 만들거나 불태워라
내 필적을 남에게 보이지 마라”
동전 한 푼 없는 생활, 패악 부리는 자식, 신경성 설사…
붓끝에 눌러 담은 어느 몰락한 양반의 속사정
편지는 일기만큼 내밀한 글이다. 체면과 명분 빼면 시체라 할 수 있는 그 옛날 조선시대 양반 역시 편지를 쓰며 민낯을 드러냈다. 이 책 『양반의 초상』은 19세기 조선 후기의 유학자 조병덕이 가족에게 남긴 편지 모음집으로, 『양반의 사생활』(푸른역사, 2008)의 개정판이다. 그동안 복간을 바라는 여러 기다림이 있었고, 16년 만에 궁리에서 도판, 원문 탈초, 해석 등 본문 체제를 대폭 달리하여 새롭게 독자를 찾아왔다.
시문집 『숙재집』으로 잘 알려진 조병덕은 본래 권세를 누리던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조부 대부터 쭉 과거에 급제하지 못해 몰락한 처지였다. 그의 편지는 지금까지 발견된 조선시대 개인의 서간문으로는 최대 분량으로, 1,700여 통에 달한다. 주요 수신자는 사고를 치고 다니는 둘째 아들 조장희로, 양을 계산했을 때 6일에 한 번꼴로 보냈다.
조병덕의 문집에는 집안의 갈등이나 빚에 쪼들리는 이야기는 없다. 편집과정에서 사적인 부분은 모두 삭제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조병덕의 편지가 남아 있지 않았다면, 19세기 조선의 대표적인 유학자가 밤낮 빚 걱정에 시달리는 모습을 어찌 상상이라도 할 수 있었겠는가?_본문에서
편지 속에는 고매하고 점잖은 양반의 모습 대신, 민초와 똑같은 고민을 하는 한 인간이 담겨 있다. 막막한 생계와 빚 걱정, 속 썩이는 아들에 대한 꾸지람, 만성 신경성 설사로 고생하는 처지, 위계질서가 무너진 사회에 대한 한탄 등 조병덕은 붓끝에 개인사와 시대사를 허심탄회하게 쏟는다. 그래서인지 조병덕은 종종 편지 끝에 “절대 남에게 보이지 말고 불태우거나 꼬아서 끈으로 만들라”고 당부하지만, 조장희는 아버지의 편지를 고이 간직했다. 그 결과 오늘날 우리는 누구보다 인간적이고 현실적인 양반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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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근자에 독서종자가 완전히 말라버려
나라의 근본이 폐해를 입으니…”
격변하는 시대를 버티는 유학자의 삶
조병덕은 편지에서 세변(世變, 세상의 변괴)이라는 단어를 거듭 언급한다. 정조가 사망하고 순조가 즉위하던 해(1800년)에 태어난 그는 세도정치기와 맞물려 부패와 민란으로 들끓는 사회를 살아가야 했다. 안으로는 크게 홍경래의 난과 진주민란이 일어나고 밖에서는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입한 병인양요가 발발하면서, 19세기 조선은 뒤흔들렸다.
이 세태를 잘 반영하는 대목으로 “독서종자가 말랐다”라는 표현이 있다. 조병덕은 “나라와 사람이 제구실을 못 하는 것은 모두 삼강오상의 도가 쇠퇴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양반들이 벼슬과 과거공부에만 몰두하면서 학문과 독서종자가 끊어진 것이다. 그는 과거공부와 학문을 닦는 것을 구분하는데, 전자가 양반이 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유자(유학을 공부하는 선비)가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충남 보령시에 해당하는 ‘삼계리’에 은거하며 농사지으며 먹고사는 걸 고민하면서도, 학문을 놓지 않은 유학자의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고문서 연구의 권위자가 발견한 ‘가서’
권력의 이해관계로 저술ㆍ편집된 실록, 문집과 달라
편지 해석은 물론 서체 연구까지 가능하도록 구성
저자 하영휘는 고문서를 통해 조선시대를 연구하는 인문학자로, 국내 고문서 및 초서(草書, 흘려 쓴 서체) 연구의 대가다. 서강대학교 사학과에서 학사와 석사,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한국 근현대서적과 고문서를 소장한 재단법인인 아단문고(현 현담문고)에서 처음 이 편지들을 만났다. 박스 안에 뒤섞인 채로 잠들어 있는 문서의 글씨며 먹색, 종이 등의 수준이 예사롭지 않다고 판단한 그가 편지의 주인이 조병덕임을 발견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예전에 조선시대의 편지는 대개 쓴 사람의 명성에 따라 평가되었다. 내용이야 어떻든 명사나 명필의 편지를 귀하게 대접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편지에서는 당시의 시대상을 찾아보기 어렵다. (중략) 가서는 그 내용이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의 내밀한 일이라는 점에서, 예의와 형식에 매인 그 밖의 편지들과는 확연히 구별된다._본문에서
저자는 조병덕의 편지를 통해 가족 간에 주고받은 편지인 가서(家書)라는 개념을 발견하고 연구하기 시작했다. 가서는 권력의 이해관계에 따라 저술 및 편집된 『조선왕조실록』이나 여느 문집과 차별화된다. 또 후대 역사학자의 주관적인 사관(史觀)으로 쓴 글과도 구분된다.
이 책에서는 초판에서 부록으로 작게 실은 편지 전문을 본문에 나눠 싣고, 이 중 중요한 편지를 추려 원본 사진과 석문(탈초), 번역 순으로 실었다. 본문에서 다루지 못한 것은 후반부 ‘편지선’으로 돌렸다. 특히 간찰 사진의 크기를 글씨를 알아볼 수 있을 만큼 키워, 서체 연구에도 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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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개정판 서문
· 초판 서문
· 조병덕은 누구인가?
· 들어가며 -아버지가 보낸 편지
1장. 조병덕의 가계와 학맥 그리고 생애
노론의 숙명을 타고나다 -조병덕의 가계와 학맥
슬프고 처량한 유학자 -조병덕의 생애
2장. 일상공간으로서의 삼계리와 청석교
호리병 속 아버지 -삼계리와 조병덕
저잣거리의 아들 -청석교와 조장희
십리, 아버지와 아들의 거리 -삼계리와 청석교
3장. 생계로서의 도덕경제
가난한 유학자의 점잖은 사치 -조병덕가의 지출
밭 가는 유학자 -조병덕가의 수입
조경모독, 하나의 이상 -조병덕의 생존철학
4장. 19세기 조선의 정치 그리고 사건들
천만 뜻밖의 변괴 -교졸돌입사건
투장 사건 -화산사
아들의 토호질 -조장희정배
5장. 왕래망 사회
바깥 세상 소식 -조병덕의 정보
편지 심부름꾼 -전인
더불어 도를 추구하다 -조병덕의 왕래망
6장. 변괴 가득한 세상
· 편지선
· 조병덕의 연보
·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