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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에 계족산(鷄足山)은 여럿있다.
영월 계족산을 비롯하여 대전 보만식계의 계족산, 가까이 구례 계족산까지...
그 이름은 산의 형세가 닭의 발모양처럼 능선이 갈래져 뻗어 내렸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알기쉽게 말한다면 닭발산쯤 되겠다.
순천 계족산(725m)은 여수지맥(麗水枝脈)에 자리하고 있다.
여수지맥은 순천시 서면과 광양시 봉강면의 경계를 이루며 안치를 지나 계족산을 일으키고, 여수지맥분기봉(714m)에서 용계산~봉화산~웅방산으로 흘러가
여수반도의 끝단 힛도마을까지 이어지는 81km의 산줄기.
비봉산또한 전국에 같은 이름이 많다.
광양 비봉산(飛鳳山 595.5m) 역시 ‘봉황이 나래를 펴고 알을 품는 자리’로 알려져 있다.
「전라남도,명소지명유래지」에 의하면 ‘비봉산 명당과 기황후’의 전설이 서려 있는 곳'이다.
당대(當代)에 화를 당하지만 후대(後代)에는 발복한다는 명당이 과연 명당인가는 의문이지만...
일자봉(一字峰 408m)은 산 아래에서 보았을 때 정상부가 우뚝하지 않고 한 일(一)자 모양으로 길다랗게 생겼대서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문성봉(文星峰)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에서 이은상 작시의 '옛 동산에 올라'와 느낌이 비슷한 근재(謹齋) 이돈모(李敦模 1888~1951)의 시가 전한다.
그는 이곳 광양시 봉강면 당저리(堂底里) 출신으로 봉강면 봉당리 서산촌 뒤 검덕원(儉德園) 서산정(西山亭)에서 유유자적하였다고 한다.
조심하면서 우뚝 솟은 산에 올라/ 휘파람하면서 머뭇거리니 한(恨)이 새롭네
흰머리 되었으니 전에 놀았던 곳 가엾고/ 푸른산은 옛날에 왔던 사람 기억할는지
샘 찾는 길에는 등(藤)나무 넝쿨 얽혀 있고/ 먹물 뿌린 듯 검은 바위엔 이끼가 늙어 있네
옛날 내 따라 읊으며 놀던 친구들/ 몇 년 사이에 풍진(風塵) 따라 세상을 떠났네
계족산 중턱에는 정혜사(定慧寺)가 자리하고 있다.
정혜사로 들어가는 길(약1.8km)은 포장된 임도급으로 대형버스가 들어가기에는 적절치 않아 보이지만 우리 버스는 조심스레 정혜사 주차장까지 올라갔다.
이로서 산행 단축은 물론,여름날 포장도로를 걷지 않아도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개척산행을 감행 날머리를 '매천역사공원'으로 잡은 건 다소 무리해 보이지만 그만큼 매천 황현선생의 유적지를 돌아보고 싶은 간절한 욕구 때문이였다.
광양시에서 매천선생을 기리며 공원을 조성하였지만 찾는 이가 거의 없고 시설이 노후되고 있어 나그네의 마음은 황량하기 이를 데 없다.
일자봉에서 매천역사공원으로 내려서는 시계(市界)능선을 따라 광양시에서 등산로를 조성해 준다면 매천선생의 유적지와 연계하여 아주 인기만점의
등산코스가 되리라 확신한다.
A) 정혜사-계족산-여수지맥 갈림길(714)-557봉-비봉산(596)-상봉리 갈림길-422.5봉-일자봉-시계(市界)능선-매천역사공원 (약 12km.6시간 10분)
B) 상 동 상봉리 갈림길-상봉리(봉계교) (약 9.2km, 5시간 30분) * 일자봉→지곡으로 내려간 사람도 있었음.
※ 장맛비가 잠시 멈추더니 폭염주의보가 발령되고, 국민안전처에서 야외활동을 자제하라는 문자를 받았음.
GPX
12.18km(6시간 10분)
고도표
순천IC에서 내려 840번 도로를 타고가다 정혜사 1.5km안내판 앞에서 우회전. 잠시 내려 진입여부를 타진해 본다.
낮은 나뭇가지를 피하여 조심스레 진행...
'순천완주고속도로' 아래도 무탈하게 통과. (우리 버스가 높은 편이지만...)
도로공사 중인 지점에선 제빨리 길을 터주었고...
우측 계족산 들머리인 철교를 지나... (정혜사 400여m 앞)
정혜사에 닿는다. 후유~~
잘 쌓은 석축.
A,B팀 모두 하차.
계족산 들머리를 우측 철교로 확인을 하고...
철다리에 달린 '등산로 입구' 녹슨 푯말.
정혜사 경내로 돌계단을 올라섰더니 산뜻한 팔작지붕의 '순천정혜사대웅전(順天定慧寺大雄殿, 보물 제804호)엔 마침 스님이 독경을 하고 있다.
정혜사는 신라 경덕왕 때 보조국사(普照國師)가 건립하였다는 설과 중국 당(唐)나라 천봉(天奉) 원년에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당나라에는 천봉이란 연호는 없고 천보(天寶)라는 연호의 원년(742)이 경덕왕 원년에 해당하므로 이때가 초창(初創)임이 분명하다.
그 때문인지 이 사찰을 오래된 절이라는 뜻에서 고사(古寺)라 불러왔다.
대웅전은 장대석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배흘림 두리기둥을 세워 공포를 얹었다.
바닥은 우물마루이고 천장은 빗천장과 우물천장으로 되어 있고, 벽체는 판장벽(板帳壁)으로 되어 있다.
처마는 부연을 단 겹처마로서 네 추녀 끝은 활주로서 떠받치고 있다.
바깥쪽 건물의 세부 처리 기법 역시 조선 전기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안쪽은 천장 속을 가리기 위해 우물 정(井)자 모양의 우물천장으로 꾸몄으며 건물에 입힌 단청이 퇴색되었지만 조선 전기의 문양과 색채를 간직하고 있다.
대웅전 안의 불단(佛壇)은 예스러운 품격을 지니고 있다.
바랜 단청.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식(多包式) 팔작지붕 건물이다.
대웅전 돌계단에 시선이 머문다.
돌계단 위엔 용머리인 듯 풍화된 모습이고,
그 계단 맨 아랫부분 좌측의 돌비(碑)엔 '고사(古寺)'라는 글자가 선명하다.
돌비와 한눈에 보아도 오래돼 보이는 돌계단의 낡은 문양.
안내문.
스님의 청아한 독경소리는 한층 톤이 높아지지만 갈 길 바쁜 산꾼들의 마음까진 붙들 순 없었다.
가엽당(迦葉堂)은 종무소 또는 요사체로도 사용되는 다목적 공간인 듯.
명부전엔 한 신도가 기도 중이다.
다시 돌아본 대웅전엔 여전히 스님의 독경소리가 울리고 있다. 오형님은 꼼꼼한 살핌 탓으로 내가 기다리지 않았으면 아래 들머리로 갈 뻔했다.
대웅전 편액은 김조순(金祖淳 1765~1832)이 썼다.
본관은 안동. 초명은 낙순. 자는 사원, 호는 풍고. 영의정 창집(昌集)의 4대손으로, 부사 이중의 아들이고, 순조의 장인이다.
1789년 동지 겸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청에 다녀와서, 이조참의·이조판서·선혜청제조 등을 거쳤다.
문장이 뛰어나 초계문신이 되었고, 죽화도 잘 그렸으며 저서에〈풍고집〉이 있다. 시호는 충문이다.
철다리를 이용 작은 계류를 건너 오르다 맵을 열지않아 다시 되내려온 바람에 오형님을 만났다.
그렇지 않았다면 정혜사 탐방에 잠차져 있다가 낙오 될 뻔했지 않은가?
사찰 우측 뒤로 살짝 올라 산사면을 잠깐 에돌면 밑에서 올라오는 또다른 길을 만난다.
정혜사 방향으론 나무에 정혜사 푯말이 걸려있다.
이후 가파른 오름길이 지속되면서 습도 높은 날씨에 바람마저 탁 막히니 에구 죽을 지경이라~
그러다가 꺾고 꺾인 요상하게 생긴 의자나무에 걸터 앉았다.
고롷게 생긴 나무가 또 있네.헥 훽~
작은 능선에 올라섰다. 한동안 숨도 고르고, 물도 마시고...
그러다가 맞은 전망대에선 헌걸찬 호남정맥의 꿈틀거림을 바라본다.
호남정맥 갓거리봉 우측 미사치 너머 멀리 보이는 건 지리산인 듯.
첩첩(疊疊)의 산.
눈앞엔 군락을 이루고 있는 산목련.
그때 여성회원들이 올라와서 기념 사진을 남긴다. 준수한 용모의 청일점은 옥분 총무의 아드님.
계족산 정상에 섰다. 계족산 정상은 이렇다할 전망은 트이지 않았고...
각 방향으로 이정표가 설치되어 있다. 뭐가 좀 이상한지 오형님이 자세히 쳐다보고 있다. 맞죠? 해발 682m는 잘못된 거 맞죠?
정혜사에서 1.55km의 거리를 딱 한 시간이 걸려 올라왔네.
그새 또 우리 꽃님들이 올라왔고, 등네미님도 얼굴을 내밀었다.
이후 산길은 업다운이 거의 없고 시원한 바람 살랑거리는 수더분한 숲길로 이어지더니...
여수지맥 갈림길봉(714m)에 닿았다.
이 갈림길(714봉)에서 점심보따리를 풀었다. 생탁도 한 잔하였으니 갈증도 얼추 가셨고, 다시 배낭을 댕겨 메고 출발이다....
그새 일행들의 손에는 제법 큼지막한 영지가 들려 있었고...
철탑을 지나는 곳에 여수지맥이 지나간다.
또다시 만나는 바위 전망대.
포즈를 잡으랬더니 조자룡이 헌 칼 휘두르는 모습이라니...ㅋ
멀리 아슴하게 교각이 보이는 건...
이순신대교인 듯한데...
아래엔 광양 서천이 구불구불 흐르고 있다.
계족산 5.7km이정표를 지나면...
비봉산으로 오르는 능선엔 눈만 돌리면 사방이 온통 조망처.
파란 하늘에 흰구름 두둥실 떠가는 한낮, 국민안전처에서 야외활동을 자제하라는 문자가 전달된다.
그 사이 일행들은 조금씩 지쳐가지만...
좌우로 트이는 조망에 그저 넋을 놓을 수밖에,
종주 의욕을 보이던 '봄처녀'님이 B코스로(봉계교) 탈출을 감행했던 건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 멀리 백운산과 억불봉은 검은 구름에 덮혀있고...
더 좌측 도솔봉을 지나 호남정맥은 이어 달리고 있다.
비봉산 암릉길은 사방이 전망대.
이글거리는 태양에 맞서...
예까지 왔으니...
정상에서 영역표시라도 해야겠지.
비봉산 정상엔 높이가 잘못 기재된 정상목이 있다. 이 지점은 595.5m이고,조금 더 진행하다 만나는 '상봉마을(봉계교)' 갈림길이 있는 봉우리가 555m.
'전라남도명소지명 유래지'에 이러한 기록이 있다.
백운산 서남쪽 중봉 중의 하나로 비봉산이 있다. 승주 서면과 광양 봉강면과의 경계를 이루는 해발 555m의 산이다.
백운산은 옛부터 명당이 많기로 이름난 산이라 풍수들이 많이 몰려 살았다.
비봉산 아래 슬하에 3형제를 둔 지관이 있었다.
아버지가 70세가 넘자 자식들은 아버지에게 묘자리를 미리 정해 줄 것을 간청했으나 말해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몇 년 뒤 이 지관은 죽음을 예견하여 아들들을 불러놓고 유언을 남겼다.
“내가 평소에 가까이 지내던 ㅂ영감에게 내가 누울 자리를 일러두었으니 그 자리에 나를 묻어라.”라고 하였다.
자식들이 ㅂ영감을 찾아가 아버지의 말씀을 전하자 “자리는 정해 두었지만 큰 변을 당해야 발복할 자리라 자네 형제들이 그 자리를 지킬지 의문일세.”
ㅂ영감은 그들 형제들을 번갈아 보면서 그 이유를 설명했다.
“그 자리는 시신이 들어간 이튿날 장손이 죽고, 1백일 뒤에 차남이 죽고, 1년 뒤에는 막내가 죽되 그 후손 중에 3형제가 재상이 날 자리니 이러한 변을
당해서라도 후손이 발복할 것을 원하거든 내 자리를 일러 주겠네. 어떻게 하겠는가?”
ㅂ영감의 얘기를 듣고 난 3형제는 끔찍하기는 하였지만 아버지의 뜻대로 그 자리에 장례를 치르기로 하였다.
ㅂ영감이 일러주는 자리에 굴을 파고 석실(石實)을 만들어 장사를 지낸 그 이튿날 영감의 말대로 장남이 급사했다.
남편과 맏아들을 잃은 어머니는 아무리 후손이 좋기로서니 묘자리가 사람죽일 자리고서야 어디 명당일 수 있겠느냐며 이장할 것을 강요했다.
그러나 두 형제는 이미 결정한 터라 자리를 지키기로 했다.
백일만에 또다시 둘째가 죽었다.
막내는 이미 두 형의 죽음을 겪었으나 뜻까지 굽힐 마음은 없었다.
그러나 초조히 죽을 날만 기다릴 수 없어 9개월을 유람하기로 하고 집을 나섰다.
날짜가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고 떠돌던 그는 낯선 산길을 걷다가 늙은 할머니 혼자 사는 집에 머물게 되었다.
저녁상을 물리고 할머니는 산아래 마실을 나가고 막내는 홀로 피곤한 몸을 뉘어 잠을 청했다.
산아래 마을에는 할머니를 어머니처럼 따르던 마을처녀가 있었다.
2,3일 뒤로 시집갈 날이 닥쳐오자 마을처녀는 하직인사를 드릴려고 할머니를 찾았다.
할머니집 방문을 열자 이불을 덮어쓰고 자는 숨소리가 들려오자 마을처녀는 장난스럽게 할머니의 품속을 파고 들었다.
잠에 빠져있던 총각은 품에 파고들어 더듬거리는 기척에 놀라 화들짝 깨어났다.
마을처녀도 어찌할 바를 몰랐다.
막내와 처녀는 서로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그날 밤을 같이 지냈다.
그런데 처녀가 아침이 되어 눈을 뜨자 총각은 죽어 있었다.
처녀는 운명이다 싶어 부모에게 자신의 부정을 고백하고 시신을 거두어 총각의 집에 찾아가 홀로 남은 총각의 어머니를 섬겼다.
처녀는 세 쌍둥이를 낳았으며 그들이 자라서 재상벼슬에 올랐다 한다.
전설은 여기까지다.
비봉산 중턱에 20여 명의 사람이 들어가 앉을 수 있는 석굴이 있는데, 이 굴이 세 쌍둥이 재상의 할아버지 묘자리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런 흔적도 없이 그 안에 샘이 있을 뿐이다.
암봉을 우로 우회하면 너덜과 밧줄구간을 통과하여...
봉계교(상봉마을) 갈림길을 만난다.
오늘 우리 B팀들이 하산할 코스다. 고온다습한 날씨에 지쳐버린 일행들은 거의 이 코스로 탈출을 하였고...
한덤님과 등네미님 그리고 나는 죽어라 계획된 코스를 고수하여 내리막으로 미끄러지듯 내려서지만 광양실고 농장이 있는 안부에선 탈출로를 찾을 수 없다.
가까이 보이는 뽕긋한 두개의 봉우리(422.5m)가 일자봉인 줄 알았지만 아니였고, 그 뒤 나무 이파리에 가려진 봉우리가 일자봉.
우리는 300m이하로 뚝 떨어진 안부(광양실고 제2농장)에서 안간힘을 다하여 422.5봉에 올랐다. 등네미님도 차츰 지쳐만 가는 듯.
422봉에서 또다시 안부에 내려서면 좌측으로...
상봉마을 갈림길(탈출로)이 있다.
이제부터 일자봉을 오르는 마지막 중력과의 한 판 싸움이 벌어진다.
속도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要는 지구전이다. 한 발 한 발...
끝내 마지막 한 발이 일자봉을 밟았다.
한덤님은 일자(一字)봉에서 '한 일자(一字)'로 드러누워 버렸다. 마지막 남은 식수마저 나눠 마신지 이미 오래.
갈 길을 더듬어 본다. 올라온 방향의 반대 방향, 그러니까 비봉산 반대 방향 잡목을 헤치고 능선을 찾아들어야...
희미한 묵은 길을 찾아가노라니...
제법 반듯한 등로를 만난다. 얼쑤~ 이렇게 반듯한 산길이... 그런데 그 산길은 산사면을 휘감으며 우측으로 비켜 내려선다. 알바다.
50여 미터를 되올라와 능선을 갈아탄 뒤 일단 안도. 능선을 따라 묵은 옛길을 더듬으며...
내려서지만 여차하면 다른 능선으로 빠지기 일쑤. (내림길은 계곡이 수월하고, 오름길은 능선이 수월하다는 보편적 진실.)
멧돼지가 목욕을 한 무덤 한 기를 지나면서 진로는 시계능선을 조금 벗어나 있었지만 그나마 그 길이 옛길의 흔적.
이미 고도가 쭈욱 빠져 마을이 보이고...
물이 콸콸 흐르는 수로에 내려섰다. 이후 수로를 따라 물흐르는 곳으로 내려만 가면 '매천역사공원'이 나올 것.
수로를 따라 풀숲을 헤치고...
무덤이 있는 곳으로 내려섰지만 다시 수로를 따라...
포장임도가 지나는 곳에서 (X)표시의 방향으로 내려설려고 길을 찾았지만 길이 없다. 선택은 역시 수로를 따르는 방법.
수로를 따라 조그만 모퉁이를 돌자 먼저온 일행들이 기다리는 '매천역사공원'이 보인다.
'매천역사공원'주차장에서 100여 미터 떨어진 우리가 내려온 길.
우선 '매천 황현선생사당'과 묘지, 그리고 창의정(彰義亭)등 공원 일원을 다녀오기로 하였다.
잘 구비된 주차장 앞으로...
풀숲에 방치된 솟을 삼문의 사당이 보인다.
잠긴 문엔 2016년 개보수할 계획임을 밝히고 있다.
까치발을 하고 담넘어 카메라를 들이민다.
광양시는 그동안 봉강면 석사리에 위치한 선생의 생가를 정비하고 동상 건립, 진입로 확.포장 사업 등을 추진하였으며, 올해는 묘역 정비 및 사당 주변을
유적공원으로 조성하여 현세와 후세에 매천 황현 선생의 애국정신과 역사적 의미를 새롭게 조명하고 되새기는 기회가 되도록 했다고 하였지만 아무래도
관리가 중요해 뵌다.
살짝 당겨 영모재(永慕齋) 편액을 읽는다.
매천의 무덤 앞. 땅을 잃은 무토(無土)의 지사(志士)가 울분(鬱憤)을 토해내기 좋은 곳, '의로움(義)이 밝다(彰)'라는 의미의 창의정(彰義亭)이 자리하고 있다.
'천성산'님이 일찍 산행을 마무리하고 창의정에서 나른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창의정 앞의 잘 꾸며진 연지(蓮池)
매천 황현의 ‘절명시(絶命詩)’
亂離袞到白頭年 (난리곤도백두년) 난리속에 살다보니 백발이 성성하구나
幾合捐生却未然 (기합연생각미연) 몇 번이나 죽으려 했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했도다
今日眞成無可奈 (금일진성무가내) 오늘은 참으로 어찌할 수 없게 되었으니
輝輝風燭照蒼天 (휘휘풍촉조창천) 가물거리는 촛불은 창천을 비추네
妖氣掩翳帝星移 (요기엄예제성이) 요망한 기운에 가려 임금자리 옮겨지더니
九闕沉沉晝漏遲 (구궐침침주루지) 구중궁궐은 침침하여 햇살도 더디 드는도나.
詔勅從今無復有 (조칙종금무복유) 이제부터 조칙을 받을 길이 없으니
琳琅一紙淚千絲 (임랑일지루천사) 구슬 같은 눈물이 종이 올을 모두 적시도다
鳥獸哀鳴海岳嚬 (조수애명해악빈) 짐승도 슬피울고 강산도 시름하는구나
槿花世界已沈淪 (근화세계이침륜) 무궁화 이 강산은 이미 사라졌도다.
秋燈掩卷懷千古 (추등엄권회천고)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 날 생각하니
難作人間識字人 (난작인간식자인) 참으로 지식인이 되어 한평생 굳게 살기 어렵구나
曾無支厦半椽功 (증무지하반연공) 일찍이 나라를 지탱할 조그마한 공도 없었으니
只是成仁不是忠 (지시성인불시충) 이 죽음은 인(仁)이지 충(忠)은 되지 못하리
止竟僅能追尹穀 (지경근능추윤곡) 겨우 송나라의 윤곡(尹穀)처럼 자결할 뿐이지
當時愧不躡陳東 (당시괴불섭진동) 송나라 진동(陳東)처럼 의병을 일으키지 못한 것이 부끄럽도다
* 윤곡(尹穀) : 중국 송(宋)나라의 문신으로 몽고병이 쳐들어오자 온 가족이 절개를 지켜 죽었다.
* 진동(陳東) : 송나라의 문신으로 간신들을 물리치라고 몇 차례 상소하다가 저자거리에서 참수를 당했다.
사당 위에 있는 묘지를 오르기 전,
문병란 님의 매천송(梅泉頌) 비석.
----상 략---
님이여, 어디다
기념비를 세우리까
무릎 꿇고 빌고 비는 마음
잠들지 말라 절절히 꾸짖는
絶命詩 사무친 그 말씀 귀 기울여
梅泉 위대한 두 글자 어디다 새기리까.
묘지로 오르기 전,
문(文),사(史), 절(節)을 한 몸에 갖춘 애국지사 매천 황현. 백운산 자락에서 의기를 벼리다.
시문을 쓰고 역사를 기록하고, 선비의 학행일치 순국으로 빛나다.
'애국지사장수황공 진사매천선생현지묘'
묘지 맨 위로 오르면 '학생장수황공직지묘' 비석. 매천 황현의 조부 무덤이다.
묘소에서 내려다 보는 매천역사공원.
수로를 따라 콸콸 흐르는 물속에 들어누워 온몸을 침잠시키니 수심이 깊어지고 꼭 관속에 들어간 모습이라~
버스는 봉계교(상봉마을)로 내려간 팀들을 태우고 이곳으로 왔고, 지친 나는 매천생가 답사를 다음 기회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이미 산그늘을 드리우고 대지의 열기를 식힌 주차장 한 켠에서 뒷풀이를 진행한다.
이미 돈을 들여 공원을 조성했다면 많은 탐방객이 찾아올 수 있도록 등산로 개설 등 기본 인프라가 필요하다.
등산로는 위험한 구간이 없기 대문에 잡목을 정리하여 옛길을 복원하면 될 것이고,이정표 몇 개만 세우면 될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광양시가 자랑하는 문화관광지로 한층 새로워 질 것이라 확신한다.
안내도와...
역사공원의 시설 배치도.
사진은 지난 동악산 산행때 청류동구곡을 거슬러 오르면서 바위에 각자된 황매천 선생의 흔적을 찾았다.
제일 왼쪽 끄트머리에 황매천 진사 장구처(黃梅泉 進士 杖履處)라고 새겨져 있다.
* 산행기 ☞ http://blog.daum.net/bok-hyun/618 그때의 산행 자료를 여기 그대로 옮겨 놓는다.
구한말 매천야록(梅泉野錄)을 쓴 매천 황현(梅泉 黃玹 1855~1910)선생은 광양시 봉강면에서 출생, 자는 운경, 본관은 장수, 무민공 황진의 후손이다.
매천야록’은 1864년부터 1910년까지 47년간 역사를 사실 그대로 기록해 유명하다.
“거문고 타고 피리부는 술집 골목은 흥청대고
말 발굽에 나는 흙먼지는 온 장안에 자욱하여라/
모르리로다 벼슬 길에 오른 이들 가운데
백성을 구하겠다고 나설 사람이 몇인가”
매천 선생이 과거를 보기 위해 상경했다가 목도한 광경은 이토록 비참하였고, 조정 지배층을 `귀국광인(鬼國狂人)이라고 비판하며 미련없이 낙향하였다.
“충무공 가신지 2백년 만에 나라가 열리더니
화륜선이 오락가락 불 꽃이 해를 가리네
…거북선이 가는 곳마다 적을 무찌르면
왜놈들이 살려 달라 하고 양놈들은 물러가겠지”
l910년 8월22일 나라가 일본에 강제로 합병됐다는 소식을 접하고 매천은 유서와 절명시(絶命詩)를 남긴 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씨 조정에 벼슬하지 않았으므로 이씨 사직을 위해 죽어야 할 명분은 없다.
다만 500년 동안 선비를 양성했던 나라에 목숨을 바친 선비가 없어서야 되겠는가.
스스로 떳떳한 양심과 평소 독서한 바를 저버리지 않으려면 죽음을 택하는 편이 옳다.
너희들은 지나치게 애통해 하지 마라."
첫댓글 대장님요~더운 날씨에 수고햇심더~즐감하고 갑니데~~이
요즘 얼굴보기 힘드네요. 무릅은 좀 괜찮나요? 요번 부전계곡에서 생오리구이 구워놓고 봅시다. ^^
광양시와 봉강면에서도 일자봉에서 매천역사공원으로 이어지는 등산로가 개설되지 않았다고 하던데...
산꾼들이 잘 찾지도 않고, 대수롭지도 않게 생각하는 산일지도 모르는 계족산, 비봉산, 일자봉 코스를 만들어
역사 속의 인물 매천의 흔적을 찾아 나선 길, 더위와 싸우며, 탈수로 나중에는 수로의 물까지도 약수로 받아들이며
수고 많았습니다.
알뜰한 정보들 감사합니다.
댓글로, 또 문자로 지적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렇게 일일이 꼼꼼히 다 살폈네요.
덕분에 지적해주신 오류를 수정 보완하였습니다. 또 좋은 산에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