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준호
LPG 외
고무호스를 탯줄같이 물고 있는 가스통
하필 구정 새벽에 가스가 떨어졌다
외진 곳에 독채로 얻은 노가다 숙소
시린 눈빛을 빨갛게 지지는 담뱃불
돌아갈 집 없는,
클린룸 잡부 삼십 년 짬밥 L과 P가
빈 가스통처럼 오도카니 거실에 나앉았다
번뇌하는 베란다, 빨래의 굳은 어깨
해피트리 화분은 불안을 야금야금 훔치고
뻐꾸기시계는 정각마다 두 번 더 울었다
폭발하듯 아침은 열리고
탈선하듯 숙소를 빠져나오는
L,
빚이 칠천이나 팔천이나, 입에 달고 살았다 파산 신청하고 회생해 통장으로 일당은 받는다 섬에서 김양식장 일하다 몇 번을 도망쳤다 멍텅구리 배 선불 땡겨 탔다가 손가락 두 마디 잃고 파주로 왔다 지독한 천식에도 담배는 못 끊었다 조출 잔업은 닥치는 대로 하는데 방진복 입을 때가 힘들다 바다처럼 얼지 않는 마음이면 좋겠는데, 자꾸 곁이 차다 이 짓도 몇 년이나 더 해 먹을지
P,
야간 근무가 좋다 영혼을 숨기기 좋은 어둠, 스무 살 때 원양어선 탔다 자주 인생으로 진입을 실패했다 현풍에서 두 달 치 일당 떼여 가스통 들고 들입다 현장사무실 쳐들어갔지 그 뒤로 철근공 때려치고 반도체현장으로 올라왔지, 얼마나 추운지 신호 받고 있는데 구형 LPG 7인승 시동이 다 꺼지더라고, 이혼하고 엉망진창 하루 벌어 하루 살았다 가진 게 몸뚱이밖에 없는데 국가가 책임질 것도 아니고, 몸 아플 땐 처량해서 다음 생엔 쇠망치로 태어나고 싶단 생각
안전화 끈을 조이고
국민체조 2절까지 반복하면
죽은 이의 이름을 다리미로 빳빳이 다려서
집게손가락으로 꾹꾹 허공에 새겨넣고 싶은 날
오늘 일하면 세 대가리야,
L이 지나가며 P의 안전모를 툭 치고
허연 입김이 거푸거푸 쏟아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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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보트 태권브이에게 전화를 날렸지만
계속 통화 중인 어느 가을날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시내전화 한 통에 70원
고전이 아니다 휴대폰을 죽이고
엉겁결에 공중전화 유리문 열어젖히면
로보트 태권브이에게 안부를 전하고 싶다는
구름 같은 생각이 홍시처럼 붉어지면
찰카닥 수화기 가벼웁게 집어 들고
띡띠띡 띠디딕 띡디디딕 귓바퀴 너머
그러나 띠띠띠 돌아오는 더 라인 이즈 비지
지구를 살리려면 그래, 얼마나 바쁘겠어
어디 아픈 구석이 한두 곳이라야 말이지
조종사 훈이는 환갑이 지났으려나
말을 높여야 쓰나 있잖아요 저기 저… 환하게
흘러가는 새가을 창공으로 가을새 줄지어 날면
그냥저냥 생각 없이 깡통 로봇이나 되어서
조종하는 대로 이저리 팔다릴 움직이고픈
나는 막고 차고 돌려차는 태권도 단증이 없고
태권브이 가슴팍엔 브이가 있고
광자력 빔이 발사되는 브이가 있고
하나 둘 웃어요, 나는 소극적인 브이
손가락 하트 날리며 담배 일발 장전
태권브이는 담배를 배운 적 없고
티브이엔 로보트 태권브이
구슬치기도 딱지치기도 멈추고
새까만 발바닥으로 물코 훌쩍거리면서
오늘은 어느 악당 물리치나, 맨주먹 뽈끈
결사적으로 태권브이와 한편이 되어서
머루 눈을 딱따그르르 흑백 브라운관에 박아 넣던,
나도 어지간히 머얼리 날아온 것 같은데
오늘의 숙제는 필사적으로 어른 하지 않기
과자 한 봉지 쥐고 무작정 공중전화 걸기
혼내는 삶도 없어 개구진 표정으로
여보세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여보세……
손준호|2021년 《시산맥》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했다. ‘다락헌’ 동인이며 시집으로 『어쩌자고 나는 자꾸자꾸』, 『당신의 눈물도 강수량이 되겠습니까』가 있다.